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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일보
길을 짜다 - 황영기
몸살 난 집을 데리고 경주로 가자
빈 노트가 스케치하기 전 살며시 문을 열어
비에 젖어도 바람에 옷이 날려도 좋아, 아무렴 어때
나갈 때 잊지 말고 우산을 챙겨줘
돌아온다는 생각은 깊은 장롱 속에 넣어두고
먹다 만 밥은 냉동실에 혼자 두고
머리는 세탁기에, TV는 버리고 발가락이 듣고 싶은 곳으로
실선으로 그려진 옷소매에 손을 넣고 버스에 올라
별이 기웃거리기 전에 도착해야 해
능소화 꽃잎 같은 사연을
페달에 담아 바람에 날리자
친구가 필요할 거야 그럴 때는 친구를 잊어
무덤 속 주인이 말했다
지퍼처럼 잎을 내렸다 올리고
꽃은 단추처럼 피었다 떨궈줘
발자국이 세든 골목에 비릿한 바닥을 핥을 때
날실 머리는 잡고 씨실의 허리를 감으며 하나, 둘 잘라줘
촉촉한 파스타에 울던 사람, 발을 만져봐 배가 고플 거야
바늘로 빵을 찌르는 제빵사의 손길
먹줄 실 뽑아 바닥을 튕기는 거미의 솜씨
어긋난 선을 바늘이 엮어주면
옷이 한눈에 주인을 찾아, 보란 듯이 걸쳐 줄래, 그거면 충분할 거야
버스는 늘 먼저 떠나
박물관 뒷길은 혼자된 연인만 걸어가지
거기 길이 끝난 곳에 당도하면
길과 길을 잇는 재봉틀이 떠오를 거야
한 벌의 옷을 짓고 거기에다 누군가 몸을 넣는다 생각하면
상상만 해도 머리끝에 꽃이 달리잖아
△황영기(52)△태백 生경상북도개발공사 근무
머리에서 나오는 날것들을 적었다. 시라기보다는 시래기를 엮듯 줄에 묶어 매달아 놓았다. 계속 매달려 있어야 했다. 먹지 못하는 벽을 채웠다. 바람벽 뚫린 구멍으로 엿보기만 했을 뿐이었다. 시에 대해 고민하는 분들과 일주일에 한 편의 시를 적었다. ㅡㅡ
시를 쓰는 길로 이끌어주신 안도현 선생님 감사합니다. 제가
심사평
심사위원. 이홍섭, 장석남 시인.
‘길을 짜다’는 길을 짜가는 ‘열린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 읽는 이에게 감상의 즐거움과 동시에 자유로움을 선사하는 매력이 있다.
ㅡㅡ
ㄱ. 여행 상황 기행문 따라 쓰듯 써나갔다.
ㄴ 추상어가 하나도 없다.
문장 구절마다 이미지로 이루어져 여러 상상을 하게 한다.
ㄷ 비유와 생략으로 끝까지 긴장감을 유지했다.
ㄹ. 간간이 생활 속 사유나 깨달음을 품은 진술을 넣어 깊이를 더하였다.
ㅡㅡㅡㅡㅡ
경상일보
솟아오른 지하 - 황주현
몇 겹 속에 갇히면
그곳이 지하가 된다
4시 25분의 지상이 감쪽같이 4시 26분의 지하에 세상의 빛을 넘겨주는 일, 언제부터 서서히 시작되었을까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아주 천천히 지상의 지하화가 도모되었을까 땅을 판 적도 없는데 다급한 말소리들은 지표면 위쪽에들 있다 조금 전의 당신의 양손과 두 볼이, 주름의 표정과 웃음이, 켜켜이 쌓인 말들이 들춰지고 있다 기억과 어둠이 뒤섞인 지상은 점점 잠의 늪으로 빠져드는데 누구도 이 어둠의 깊이를 짐작할 수 없다
몸이 몸을 옥죄고 있다 칠 층이 무너지고 십오 층이 무너졌다 그 사이 부서진 시멘트는 더 단단해지고 켜켜이 쌓인 흙은 견고하게 다져졌다 빠져나가지 못한 시간이 꽁꽁 얼어붙는 사이 아침과 몇 날의 밤이 또 덮쳤다 이 깊이 솟아오른 지하엔 창문들과 쏟아진 화분과 가느다랗게 들리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뒤섞여 있다 뿔뿔이 서 있던 것들이 무너지며 모두 하나로 엉킨다
이 한 덩어리의 잔해들은 견고한 주택일까 무너진 태양은 나보다 위쪽에 있을까 부서진 낮달은 나보다 아래쪽에 있을지 몰라 공전과 자전의 약속은 과연 지금도 유효할까? 왁자지껄한 말소리들이 하나둘 치워지고 엉킨 시간을 걷어내고 고요 밖으로 걸어 나가고 싶은데
백날의 잔해가 있고 몸이 몸을 돌아눕지 못한다
검은 지구 한 귀퉁이를 견디는 맨몸들,
층층이 솟아오르고 있다
심사평 /▲ 장석남
재난 현장을 과격하지 않고 따뜻하게 파헤쳐
선택 기준 ㅡ쓴 분의 마음이 읽을수록 점점 더 명징하게 드러나는 시.
그 글 속 ‘마음’이 우리네 삶의 ‘맨살결’이라고 불릴 만한 실감으로 다가오게 되면 끝까지 내려놓을 수 없다.
당선작은 ‘솟아오른 지하’. 재난의 현장을 차분한 시선으로 파헤친다. 그러나 과격하지 않다. 견고하게 질서 짓는 문장은 문학적 수련의 깊이를 짐작케 하고 그 시선의 따뜻함은 문학의 역할에 대해서도 깊이 사유한 흔적이다. ‘솟아 오르고 있’는 감염된 권력과 성장의 이면에 도사린 검은 재난(지하)의 그림자는 지금 우리의 내외면의 강렬한 ‘은유’로 읽힌다.
ㅡㅡㅡㅡㅡ
경남도민신문
화살표의 속도는 / 황주현
걷고 달리고 날아가는 속도다 화살표는 정지해 있으면서도 계속 이동 중이지만 뒷걸음질 치는 기능이 없다
화살표에서는 왜 짐승의 울음소리가 날까
궤적에서 공격성이 자란다 사활을 건 뾰족한 모양이 머리인지 입인지 코인지 궁금해 한 적 없지만 그것이 가끔 말을 하거나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기도 한다
화살표는 계속 어디론가로 날아가고 도망가고 사라지려 한다 몇몇 동물들은 그런 화살표와 비슷한 외모를 노력 끝에
얻었지만 지금은 멸종의 위기에 처해 있다
화살표를 발명한 사람들
혹은 진자운동처럼 0과 0 사이에서 태어나고
그 사이를 무한 반복한다
꼬리에 두느냐 머리에 두느냐를 고민하는 동안은 이미 한참이나 날아 온 거리다 어떤 사람에게선 이미 녹이 슬거나 그 끝이
뭉툭해진 화살표가 무더기로 발견되고 또 어떤 사람에겐 마치 새싹처럼 이제 막 돋는 일도 있다
빗나가는 과녁을 가진 것들도 많겠지만
명중이라는 끝을 두고 있다
공중에 초록을 박아 넣고 이리저리 여진을 앓고 있는
저것들, 혹은 그것들
지금도 화살표를 가로 막거나 되돌려 놓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는 단체가 있을지도 모른다 화살표를 조종하는 또 다른 화살표를 개발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지만
여전히 화살처럼 관통하는 날이다
■ 심사평
-심사위원장 강희근
-심사위원 복효근(심사평), 박우담, 김성진, 채수옥
일상적 언어로 깊은 울림의 사유 이끌어내
최종 후보작은 세 편이었다. 황주현의 ‘화살표의 속도’, 강00의 ‘밑줄의 강도’, 금00의 ‘국수광합성’이다.
‘밑줄의 강도’에서는, 강조하기 위해 그어놓은 밑줄이 가지는 힘을 얘기하고자 했다. 유의미한 밑줄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부정이거나 함정일 수도 있다. 그것을 피하려다가 낭패하거나 좌절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 사회가 강제하는 규범이나 프로파간다가 그 밑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다. 밑줄의 순작용과 함께 그 모순과 부작용을 그려내려고 한 작품이다. 자유연상에 기초하여 이질적인 소재와 관념을 유연하게 넘나드는 언어사용이 돋보인다. 구어체의 자연스러운 사용도 화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시적 진술들이 하나의 유의미한 질문으로 완성되거나 어떤 유기적 의미망으로 입체화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직소퍼즐 ‘윌리를 찾아라’에서 너무 많은 윌리가 아닌 것을 소거해야만 윌리에 이를 수 있는 것처럼, 시의 중심에 닿기 전에 너무 많은 허들을 지나야 한다. 개인적 언어사용이 독자와의 소통에 장애가 되지 않는 지점을 잘 찾아내면 충분한 성장의 가능성이 보인다.
‘국수광합성’도 심사위원들의 좋은 평가를 받은 작품이다. 광합성은 식물이 그 생명을 에너지를 얻기 위해 햇빛을 매개로 한 화학반응이다. 마찬가지로 화자는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에너지를 얻는데 여기서는 국수가 그 매개로 등장한다. 분열된 자아를 하나로 화해시키는 작용을 한다. 국수는 일종의 치유를 위한 레시피이다. 전체적으로 매끄러운 흐름을 유지하면서 화해라는 메시지가 성공적으로 드러나지만, 한편 그 점이 이 작품의 한계로 작용하기도 한다. 비격식체인 ‘해요체’ 종결어미라든지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순조롭게 화해에 이르게 하는 방식이 긴장감을 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함께 제출한 ‘무지개 고래’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시가 품고 있는 따뜻함이나 안온한 정서가 매우 잘 드러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제적이지 않다는 점은 신인에겐 흠결일 수도 있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황주현의 ‘화살표의 속도’에 심사위원들의 집중적인 관심이 모였다. 도로 위나 공사장 벽 지하철 계단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는 화살표에서 간단하지 않은 사유를 이끌어내는 힘이 만만치 않다. 화살표 그 자체는 움직이지 않지만 움직이게 한다. 걷거나 뛰거나 날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문명을 가리킬 때는 공격성을 가진 짐승이 된다. 그 속성으로 보아 욕망이라 이름해도 좋을 것이다. 인간과 인간의 문명, 혹은 욕망의 기표라 해도 무방하다. 계속 움직여야 하는 생래적 운명 때문에 사라지거나 멸종하기도 한다. 그러나 없음0과 없음0 사이에서 무한 재생산된다. 뒷걸음질 치는 기능이 애초부터 제거되어 있는 이 화살표로부터 반성 없는 문명의 운명을 생각하게 된다. 여전히 화살처럼 관통하는 날이다. 정작 아픔에 대해서 말한 바 없지만 치명적인 관통상으로 우리는 앓고 있다.
작위적 언어 조합으로 생경한 이미지를 창출하는 대신 관절이 유연한 일상적 언어로 깊은 울림의 사유를 이끌어낸다. 한 줄기로 꿰어지는 서사가 없어도 느낌과 의미의 입체적 재구성에 문제가 없다. 통찰의 힘이 느껴지는 시다.
함께 응모한 다른 작품도 고른 질을 유지하고 있다. ‘우산이라는 계절’은, 가령 우산이라는 발명된 문명의 도구가 거꾸로 본래 있었던 계절을 환기하고 인간의 의식과 언어를 규정하기 이르게 된다는 내용이다. 본말이 전도된 모순적인 현상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황주현의 작품은 실험적인 시들이 가지고 있는 소통을 소홀히 여기지 않으면서 깊은 의미의 울림을 가진 시를 쓸 역량으로 평가된다. 이에 심사위원 전원은 ‘화살표의 속도’를 당선작으로 선정하기로 하였다.
황주현
경기도 수원에서 자영업(생활용품 전문할인점 ‘다팜 아울렛’ 대표). 화성문인협회 회원, ‘덤’ 동인.
▲당선작 ‘화살표의 속도’는 주위에 숱하게 있는 화살표 얘기입니다. 화살표를 통해서 무의식의 세계가 늘 습관과 통념으로 길들여진 의식의 세계를 지배하는 일상의 한 단면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제가 운영하는 매장에는 수많은 크고 작은 화살표가 어떤 장소와 위치와 경로를 통제하고 안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고객분은 화살표를 본능적으로 믿고 따르고 있지만 이면에 화살표를 부정하고 의심하고 거슬러 가는 특이한 현상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 현상들을 발견하면서 화살표가 우리들의 일상에 투철한 기능과 역할이 분명 있지만, 역으로 화살표에 철저히 구속된 나약한 인간의 한 단면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작품을 통해 어떤 메시지
▲세상의 모든 기호나 문자는 인간의 편리성을 위해 만들어진 도구입니다. 그러나 그 도구들은 단순히 그들만의 보편적인 역할에 그치질 않습니다. 그들 나름대로 진화하고 발전합니다. 그 진화와 발전의 속도만큼 그것을 활용하는 인간의 기능과 판단과 인지는 좁아지고 상실되어 가고 있다는 현실을 자각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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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신문
머그잔 - 박태인
물이 되려는 순간이 있어요 얼굴을 뭉개고
입술 꾹 다물고
자꾸 그러면 안 돼
차를 마시기 위해 물을 끓여요 나는
물보다 더 높은 곳에 올라가 떨어지고 싶어요
창틀에 놓여있던 모과의 쪼그라든 목소리가 살금살금 걷는 듯한 아침
어김없이 당신의 그림자는 식탁에 앉아 있어요
뜨거운 것으로 입을 불리면 조금 더 따뜻한 사람이 될 것 같은 생각을 해요, 조금 더 따뜻한
우리는 언제쯤 깨질 것 같나요? 이런 말은 슬프니까
숨을 멈추고 속을 들여다보면 싱크홀 같거나 시계의 입구 같거나 울고 있는 이모티콘 같아요 두 손에 매달려 쓸데없이 계속 자라는 손톱처럼 똑똑 자르면 될 것 같은 시간을 말아 쥐고 있는 기분
나는 내 손을 스스로 잘라 버릴지도 몰라요
언젠가
바깥이 나를 꺼내다 마는 것처럼 어둠으로 찬장 문을 닫아버리거나
빛으로 나가지도 못 하게 해요 그럴 때마다
나는 조금씩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요
햇살이 손바닥을 통과해 더 깊이 가라앉는 동안
내 손은 가끔 바깥에서 들어와요
집을 통째로 들어 물처럼 몸이 출렁일 수 있도록
흔들어 보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런 날이면 매일 보고 만지는 머그잔이 어째 좀 수상해요
나는 또 물로 그린 그림이 되죠
오늘은 당신의 그림자를 좀 젖혀봐도 될 것 같아요
ㅡㅡ
심사평
심사위원 성윤석·조말선
현대인의 정체성 혼돈, 출렁이는 물로 잘 비유
오늘 열심히 걸어서 자정에 당도하면 다시 오늘이 시작되듯이 시를 열심히 써서 어떤 지점에 도착하면 거기가 다시 시작해야 하는 곳이라고 한다. 많은 시들이 거기서 다시 시작해야 할 때마다 얼마나 힘에 부치는지를 이해한다고 하면 시는 이해받는 것이 아니고 실패하면서 또 어딘가로 가는 것이라고 한다.
시적 인식을 효과적으로 담아내기 위해 서술어의 처리를 조금 더 고민해보면 아주 단단한 시가 될 것 같았다.
이쪽과 저쪽 사이에 놓인 저녁을 조금 더 들어가 보았다면 말 할 수 없는 깊이에 누구라도 빠져들고 말았을 것이다.
머그잔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대에도 너무 많은 주체의 역할을 요구당하는 현대인의 정체성 혼돈을 출렁이는 물로 비유하고 있는 점에 마음이 갔다. 높이 치솟아오르거나 좀 더 따뜻해져야 하거나 과감하게 잘라버려야 하는 세계의 요구를 한 컵에 담아 흔들어버리고 싶은 반항이 감각적 성과를 높이고 있다.
당선소감
작은 틈 속으로 묵묵히 내 이야기 담아낼 것
시에 대해 질문을 이어갈 수 있도록 격려해주신 김륭, 안도현 교수님께 감사.
박태인 △1977년생 △김해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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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일보
달로 가는 나무 ㅡ 김문자
달의 범람으로 하늘의 문이 열리면서 땅은
다섯 개의 줄기로 자라는 은행나무의 품이 되었다
보름달 상현달 하현달 초승달 그믐달을 키우는
인천 장수동 사적 562*번 800년 된 은행나무
처음부터 약성이 쓴 뿌리에서 시작되었다
오래된 나무는 달에서 왔다
달이 몸을 바꿀 때마다 은행나무의 수화는 빠르다
전하지 못한 말들은 툭 떨어지거나 노랗게 익어갔다
은행나무는 자라면서 달의 말을 하고
은행나무 이야기를 듣고 자란 아이들은
바닷물이 해안까지 차오르는 슈퍼 문일 때
남자는 눈을 감고 여자는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고 한다
오래된 나무의 우듬지는 800년 동안 달로 가고 있다
소래산 성주산 관모산 거마산을 거느린 장수동 은행나무
달빛이 은행나무 꼭짓점을 더듬는 농도 짙은 포즈
은행나무는 품을 여며 폭풍과 폭설을 견디는 새집이 되었다
큰 나무의 덕을 보아도 큰 사람의 덕을 못 본다는
무서운 격언을 새가 쪼아 먹을 때
뒷산까지 뿌리가 뻗은 은행나무를 뽑으면 산이 무너질까 봐
사람들은 새가 세 들어 사는 나무에게 빌었다
빙하기에도 살아남아 풍년과 무사태평을 기원하는
7월과 10월의 보름이면
은행나무의 가장 높은 곳에 지아비 달이 걸린다
그때, 꿈이 많은 아이가 은행나무를 오르고 있다
ㅡㅡ
심사평]
김명인 시인·김윤배 시인
"활달한 어법·거침없는 상상력… 읽고나면 가슴이 두근"
아쉬운 것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려는 시각이 좀 더 깊었으면 하는 것
시인은 사물의 보이지 않는, 숨겨진 특성을 살필 줄 알아야 감동이 살아 있는 시를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작품들이 독자에게 감동과 전율을 준다.
새로운 어법인지, 표절은 없는지, 시어들은 울림이 있는지, 본질에 닿으려는 노력이 보이는지 등을 검토.
'달로 가는 나무'
어법은 활달하고 상상력은 거침이 없으며 희망을 준다. 희망을 준다는 것이 중요하다.
첫 행은 '달의 범람으로 하늘의 문이 열리면서/다섯 개의 줄기로 자라는 은행나무의 품이 되었다'로 시작된다.
마지막 행은 '그때, 꿈이 많은 아이가 은행나무를 오르고 있다'로 되어 있다. 읽고 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당선자의 문학의 꿈이 까마득한 은행나무를 기어코 오를 것을 믿는다.
소감
이담하 선생님을 만나면서 시는 온 천지에 있는 걸 느꼈습니다.
선생님의 격려와 신랄한 시평으로 시의 확장과 사물을 다르게 보는 힘을 길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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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여기 있다 ㅡ 맹재범
접시와 접시 사이에 있다
식사와 잔반 사이에 있다
뒤꿈치와 바닥 사이에도 있는
나는 투명인간이다
앞치마와 고무장갑이 허공에서 움직이고
접시가 차곡차곡 쌓인다
물기를 털고 앞치마를 벗어두면 나는 사라진다
앞치마만 의자에 기대앉는다
나는 팔도 다리도 사라지고 빗방울처럼 볼록해진다
빗방울이 교회 첨탑을 지나는 순간 십자가가 커다랗게 부풀어 올랐다 쪼그라든다
오늘 당신의 잔고가 두둑해 보인다면 그 사이에 내가 있었다는 것, 착각이다
착각이 나를 지운다
빗방울이 바닥에 부딪혀 거리의 색을 바꿔놓을 때까지 사람들은 비가 오는지도 모른다
사무실 창문 밖 거리는 푸르고 흰 얼굴의 사람들은 푸르름과 잘 어울린다 불을 끄면 사라질지도 모르면서
오늘 유난히 창밖이 투명한 것 같아
커다란 고층빌딩 유리창에 맺혀 있다가 흘러내리는 물방울이 있었다
나는 도마였고 지게차였고 택배상자였다
투명해서 무엇이든 될 수 있지만 무엇이 없다면 아무것도 될 수 없다
밖으로 내몰린 투명인간들이
어디에나 있다 사람들은 분주히 주변을 지나친다
나를 통과하다 넘어져 뒤를 돌아보곤 다시 일어서는 사람도 있었다
너무 투명해서 당신의 눈빛을 되돌려줄 수 없지만
덜컥 적시며 쏟아지는 것이 있다
간판과 자동차와 책상과 당신의 어깨까지
모든 것을 적실 만큼
나는 여전히 여기에 있다
ㅡㅡㅡ
심사평
심사위원 송경동·이경수·진은영·황인숙
밖으로 내몰린 존재가 여전히 있다는 믿음이 ‘여기 있다’
응모작들의 결이 유사한 점
긴장을 느슨하게 만드는 연
여기 있다’는
투명인간이라는 익숙한 소재를 생활의 감각으로 어떻게 변용해 시적인 순간을 발명할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수작이다.
사라짐을 노래한 시는 많았지만, 당선작은 “도마였고 지게차였고 택배상자였”던 “나는 투명인간”이라는 선언을 통해 “밖으로 내몰린 투명인간들이/ 어디에나 있”고 “나는 여전히 여기에 있”음을 담담히 보여주었다. 이 시의 고요한 단단함을 심사위원들은 믿어보기로 했다. “덜컥 적시며 쏟아지는 것”처럼 시도 그렇게 “여기에 있”음을 믿어보고 싶게 하는 시였다. 함께 보내온 응모작들 중 ‘물사람’과 ‘일요일’도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응모작들 고른 완성도 굿
맹재범
△ 1978년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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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남일보
감정 일기 ㅡ 송상목
매일 아침 여덟 시면 슬픔을 마주친다
그와 인사하고 같은 전철을 타고
버스에 올랐다 내리고
빌딩을 오르고 나면
정오가 된다
정오는 기쁨을 만날 시간
나는 잠시 슬픔과 작별하고
수저를 든다 기쁨이
키스해온다
지저분한 기쁨이 기분 나쁘지 않다
키스는 짧고
오후는 길다 나는 다시 슬픔을 본다
슬픔은 지치고 피곤한 기색이다 매일 같이 다니기 힘든 듯이
나는 빌딩을 쌓으며 슬픔의 눈치를 살핀다
슬픔은 슬퍼하면서도 빌딩 쌓기를 멈추지 않는다
아무래도 슬픔이 쌓아가는 것은 빌딩만이 아닌 것 같다
밤은 빌딩을 내려오는 때
슬픔이 가장 먼저 달아난다
나는 기쁨을 볼 생각으로 가득해진다
기쁨은 집에 있다
마구 꼬리를 흔들며 내게 달려든다
기쁨은 꽤 나이 들어있고
눈을 끔뻑거린다 느린 속도로
슬픔이 슬쩍슬쩍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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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ㅡ나희덕(시인·
묵직한 여운…삶의 음영 새긴 조형력 돋보여
감상적이고 상투적인 서정시들이나 추상적 사변을 직설적으로 나열한 시들이 가장 먼저 걸러졌다.
자연을 통해 얻은 깨달음이나 가족사를 둘러싼 시편들도 절실하기는 하지만 익숙하다는 인상을 떨쳐내기는 어려웠다. 소재와 주제의 독창성, 개성적 화법과 표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서 좁혀나갔다.
발상을 풀어내는 방식과 길이가 비슷 일정한 틀에 갇혀 있다 설명적이다.
서사적 구성과 산문적 호흡을 취하고 있지만, 시적 긴장감을 잃지 않고 리드미컬한 언어로 은유적 아우라를 만들어내는 시. 특히, 세계의 질서나 사회적 시스템에서 배제된 인물들이 되새김질하는 고통의 감각이 인상적. 그런데 비약이나 어색한 표현, 불명료한 부분들이 있어서 전달력이 다소 떨어졌다.
감정 일기’ 외 4편은 간결하고 투명한 언어로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탐구하고 펼쳐 보여주는 시편들입니다.
소품에 가까운 시들이 섞여 있지만, 다섯 편 모두 군더더기 없이 인상적인 내면풍경을 완성해내는 솜씨나 감각을 지니고 있어서 기본기가 충실하다는 믿음을 갖게 했습니다. 당선작으로 뽑은 ‘감정 일기’ 역시 천진하고 해맑은 표정 속에 삶의 음영을 풍부하게 새겨넣는 조형력이 돋보입니다. 감정을 인간의 심리적 부산물이 아니라 독립된 행위의 주체로 다루는 태도가 신선했고, 무심한 듯 건네는 말들에 묵직한 여운이 남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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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경희대 국문과 재학생
올해만 이십여 곳은 되는 신문사에 신춘문예 작품 투고를 했다. 쉬려 했다가 여전히 시가 쓰고 싶어서 계속 썼다. 새로이 다섯 편이 모였는데,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투고를 또 한 것이었다. 그게 당선되었다.
백여 일간 쓴 시들을 돌아보았다. 일상에 뿌리 박은 것이 많았다. -현실 논리에 치여 자신을 마모시켜 가며 살아가는 사람들, 내 눈은 그런 이들의 삶과 감정에 향해 있었다.
ㅡ그들과 같이 아파하고, 슬퍼하고, 웃다가 절망하고, 절망에서 끝마치지 않는 시를 쓰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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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일보
파랑 - 엄지인
잔디를 깎습니다
마당은 풀 냄새로 비릿합니다
잔디가 흘린 피와 눈물이라는 생각
우린 서로 피의 색깔이 달라
참 다행이지 혈통이 아주 먼 사이라서
머리카락을 자르고 잘린 끝을 만져보는데 아프지 않습니다
심장과는 아주 먼 거리일까요
손 뼘으로 잴 수 있지만
누군가는 머리에서 심장까지 전력을 다해 뜁니다
머리카락 입장에선 불행일지 모른다는 생각
골목 밖에선 길냥이의 울음소리가 날카롭습니다
고양이는 사람에게만 소리 내 운다고 하는데
축축한 여기 그냥 좀 내버려두라고
배가 헐렁한 동물에게 보내는 우호적인 경고라는 생각
다치지 않게 손톱 칼로 조심히 군살을 깎지만
소스라칩니다
가장자리에서 바깥으로 밀리지 않으려는 비명
TV에서는 기상 캐스터의 주의보가 쾌속으로 지나갑니다
암거북들이 짝을 잃고
더운 바다를 피해 육지로 돌진합니다
거울에 목을 비춰보니
빗물이 빗장뼈 안으로 고여 흘러넘칩니다
쇄빙선이 얼음을 부수고 지나간 듯
물살이 온통 파랗습니다
ㅡㅡㅡ
심사평]
손택수 시인
“기후변화시대의 명상 감각적으로 보여줘”
시를 이해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오랫동안 뜻과 주제와 내용 파악으로 시를 수용한 결과다. 시는 이해 너머 사랑의 영토다.
소리와 이미지, 독특한 어조, 명명할 수 없는 고유한 분위기들이 시의 건축학적 자재에 스며드는 사랑의 요소다. 풍화마저 건축의 일부이듯이 시의 건축에 있어 건축 너머의 천변만화하는 흐름을 놓치지 않을 때 이미 굳어진 기존의 이해는 새롭게 구축되고 우리의 일상 또한 새뜻해진다.
이해할 것인가, 사랑할 것인가. 너무 반듯하고 투명하게 닦인 창을 통해 바라본 풍경이 쉬 잊히듯이 빠른 이해는 빠른 망각을 부르고 사유의 자동화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해의 소비 시스템을 벗어난 시들은 대체로 창에 낀 먼지와 빗물이 흘러내린 자국 같은 불투명을 거절하지 않는다. 물론 이 불투명은 방법적인 것으로서 ‘쉬운 시’나 ‘난해시’의 이분법을 훌쩍 뛰어넘는 명징한 의식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이 같은 관점에서 예심을 통과한 작품들 가운데 ‘꼼꼼 수선집’과 ‘지구의 밤’, ‘파랑’이 최종 심사작이 되었다.
파랑’의 경우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활달하게 가로지르며 기후변화시대의 명상을 ‘손톱 칼로 조심히 군살을 깎는’ 감각적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미더웠다. 동봉한 작품들의 여일한 수준 또한 기대를 갖게 하였다.
세계의 그늘과 존재의 그늘이 예각화된 언어의 그늘과 만날 때 단순한 구별짓기로서의 개성이 아니라 기존 질서의 소비를 성찰하는 사랑의 참신한 사태가 될 수 있음을 앞으로 꾸준히 증명해주기 바란다. 당선을 축하한다.
▲▲전남대 교육학과 졸업 ▲생오지 문예창작대학 수료
ㅡㅡㅡㅡㅡㅡㅡ
국제신문
해변에서 /박유빈
눈이 간지러워서
해변으로 갔다
화창한 날씨
눈부신 바다
환한
사람들
수평선만큼 기복 없는 해변의 감정
너무 밝다
해변을 산책하던 나는
반짝이는 모래알 사이에서 보았다
그것은 눈알
실금 없이 깨끗한 눈알
바다에서 떠밀려온 유리병도 아니었고
피서객이 흘리고 간 유리구슬도 아니었다
파도가 칠 때마다 움찔거리는 그것은
오점 없이 깨끗한 눈알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햇살에 인상을 찌푸리지 않아도 괜찮았다
이제 화창하지 않다
내가 만든 그늘서 눈알은
부릅뜨기 좋은 상태
그러나 내 뒤로 사람들이 지나갈 때
눈알은 움찔거렸다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을까
해초처럼 누워서 왔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유언일지도 모르고
그때 배운 것 같다
사랑하지 않고도 빠져 죽는 마음
떠오른다
어떤 이의 어리숙한 얼굴
꼭 죽을 것만 같았던 사람
아니 그것은 죽은 것
혹은 벗어놓은 것
떠밀려온 것
유유자적
흘러온 것
눈알은 하나뿐이어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누구를 위한 눈물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걱정될 뿐이다
메마를 것 같다
언젠가
미끈한 눈웃음 짓던
사람을 사랑한 고래가 그랬듯이
모래사장을 맨발로 걷다 보면
무언가 밟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다
세상에 막 내던져진
작은 눈빛
오늘은
어느 때보다 화창한 날
어디에도 흐린 곳 하나 없다
너무 밝다
최선을 다해
기지개 켜는
눈알의 의지
ㅡㅡㅡ
심사평
김언 박상수 최정란 시인
낯선 상상력… 읽으면 읽을수록 빠져들어
해변에서’ 외 2편은 독특한 작품. 바닷가에 떠밀려온 ‘눈알’이라니! 비유나 상징이 아니다. 정말 ‘눈알’이다. 이 낯선 설정을 끝까지 기이하면서도 설득력있게 풀어나가는, 차라리 힘을 뺀 화자의 태도가 더 신뢰감을 주었다. 거기에 상처와 고독, 사랑의 슬픔이 자연스럽게 겹치도록 풀어내는 과정은 읽으면 읽을수록 흡입력이 있었다.
심사위원들은 이 낯선 상상력에 점수를 주기로 흔쾌히 합의했다.
ㅡㅡ
소감
산책이 좋은 이유는 무겁지 않아서다. 가끔 나는 시가 산책 같다고 느끼는데, 무겁지 않은 느낌이 시와 산책의 공통점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를 쓸 때는 조금 가벼워지려고 노력했다. 남들이 보기에는 힘이 많이 들어갔네, 어쩌네, 그럴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내게 시란… 나다울 수 있는 가벼운 산책이어야 했다. 시는 ‘언젠가는 제대로 해낼 산책’ 같다. 정말로, 반드시, 언젠가는 시간을 내서 끝내주는 산책을 할 수 있을 것만 같고 나는 그게 시였으면 좋겠다.
2000년생 중대 문창과
ㅡㅡㅡ
농민일보
상현달을 정독해 주세요
-박동주(본명 : 박현숙)
햅쌀을 대야에 가득 담아요
차고 푸른 물을 넘치도록 부으면
햅쌀은 물에서 부족한 잠을 채워요
쌀눈까지 하얗게 불었을 때
당신을 향한 마음이 몸을 풀어요
상현달처럼 차오르는
마음을 알아차렸다면 속삭여 주세요
도톰한 떡살에 소를 넣어요
당신을 향한 비문은 골라내고
꽃물결 이는 구절만 버무려 소를 만들어요
당신 생각으로 먹먹해지는 마음이
색색의 반달로 차오르도록
한밤중이 되었을 때
서쪽하늘을 골똘히 보아 주세요
반죽을 작게 떼어 양 손바닥 사이에 넣고
가을볕이 등을 쓰다듬듯 잔잔히 궁글려요
이야기를 담은 소를 가운데 넣어
가을 한나절을 빚은 색색의 상현달들
떡살에 별자리가 뜨기도 해요.
비껴간 당신을 향해
밤하늘 높이 상현달을 띄워요
이야기가 스며든 여러 빛깔의 편지지
하얀 송편에는 첫 마음을 써요
어떤 송편에는 첫 눈이 내리고
첫 발자국 첫 속삭임이 들어 있어요
[심사평]
장석주 안도현 시인
서정시 기본형에 매우 충실한 작품…미적 완결성 갖춰
전통 서정시가 많았다.
화자가 어떤 대상을 만나 세계와의 내밀한 동일성을 꿈꾸는 시, 뿌듯하고 긍정적인 메시지로 마무리되는 결말….
은유에 기대어 잘 빚은 항아리처럼 고만고만한 체형을 갖는 시들이다.
채 정리가 되지 못했고,
소품이었고,
자기 갱신의 의지가 약해 보였다.
일상을 화사하게 형상화하는 솜씨가 뛰어나지만 매번 적당한 선에서 타협점을 찾아 멈춘다. 더 자신 있게 세상과 ‘맞짱’을 떠도 좋을 것이다.
자신이 발견한 시적인 것의 절정에 다다르지 못하고, 응모한 시의 길이와 연의 형태가 모두 비슷한데, 고정 틀을 부숴야 한다.
‘상현달을 정독해 주세요’는 서정시의 기본형에 매우 충실한 시인데, 당신이라는 대상과의 거리 조정으로 미적 완결성을 갖췄다. 함께 응모한 시편도 수작이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당선 소감
맹문재 하재연 선생님, 시클 창작반의 하린 선생님 고맙습니다.
박동주 ▲1962년생 ▲연세대 불문과 졸 ▲서울 서초반포구립도서관 시 창작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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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왼편 / 한백양
집의 왼편에는 오래된 빌라가 있다
오랫동안 빌라를 떠나지 못한
가족들이 한 번씩 크게 싸우곤 한다
너는 왜 그래. 나는 그래. 오가는
말의 흔들림이 현관에 쌓일 때마다
나는 불면증을 지형적인 질병으로
그 가족들을 왼손처럼 서투른 것으로
그러나 아직 희망은 있다
집의 왼편에 있는 모든 빌라가
늙은 새처럼 지지배배 떠들면서도
일제히 내 왼쪽 빌라의 편이 되는
어떤 날과 어떤 밤이 많다는 것
내 편은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아직 잠들어 있을 내 편을 생각한다
같은 무게의 불면증을 짊어진 그가
내 가족이고 가끔 소고기를 사준다면
나는 그가 보여준 노력의 편이 되겠지
그러나 왼편에는 오래된 빌라가 있고
오른편에는 오래된 미래가 있으므로
나는 한 번씩 그렇지, 하면서 끄덕인다
부서진 화분에 테이프를 발라두었다고
다시 한 번 싸우는 사람들로부터
따뜻하고 뭉그러진 바람이 밀려든다
밥을 종종 주었던 길고양이가 가끔
빌라에서 밥을 얻어먹는 건 다행이다
고양이도 알고 있는 것이다
제 편이 되어줄 사람들은 싸운 후에도
편이 되어주는 걸 멈추지 않는다
심사평
심사- 정호승 시인·조강석 문학평론가(연대 국문과 교수)
일상적인 장면을 사유와 이미지로 벼리는 솜씨 탁월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의 밀도가 고르지 않다.
대표적으로 세 가지 부족한 현상.
1 소소한 일상을 담담한 어조로 스케치하는 경쾌함은 있지만 부박함과 구분되지 않는 경우,
2 그럴듯한 분위기는 조성하고 있지만 알맹이가 없고 장황한 경우,
3 문장을 만들고 행과 연을 꾸미는 기술은 있지만 단 한 줄에도 시적 진술의 맛과 힘이 담기지 않은 경우들이다.
문장들은 흥미롭게 읽히지만 전체적으로 시가 유기적으로 구성됐다고 판단하기 어려웠다.
‘컨베이어 벨트와 개’는 일상의 고단함 속에서 언뜻 발견하는 휴지와 파국을 실감 있게 그려냈지만 전체적으로 묘사에 치중한 소품.
수몰’은 삶과 죽음, 시와 현실을 얽는 솜씨가 돋보였고 이미지 구사도 견실했지만 주제를 장악하는 사유의 힘이 아쉬웠다.
왼편은 지극히 일상적인 장면을 사유와 이미지의 적절한 결합을 통해 문제적 현장으로 벼리어 내미는 솜씨 때문이었다. 이미지를 통해 핍진하게 전개되는 사려 깊은 성찰이 마지막 대목에서 자연스럽게 공감을 이끌어내고 있는 것도 인상적이다.
투고된 다른 시편들도 편차가 적어 신뢰를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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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
시운전 ㅡ 강지수
날 때부터 앞니를 두 개 달고 태어난 아이치고 천성이 소심하다 했습니다
가장 부끄러운 기억이 뭐예요?
종합병원 의사들이 한자리에 모여 발가벗고 있는 나를 내려다보았을 때요
그게 기억나요?
최초의 관심과 수치의 흔적이 앞니에 누렇게 기록되었지요 나와 함께 태어난 앞니들은 백일을 버티지 못하고 삭은 바람에 뽑혀야 했지만, 어쩐지 그놈들의 신경은 잇몸 아래에 잠재해 있다가 언제고 튀어 올라 너 나를 뽑았지, 우리 때문에 너는 신문에도 났는데, 하고 윽박을 지를 것 같더란 말입니다
횡단보도를 건너다 대大자로 뻗었을 때 혹은 동명의 시체를 발견했을 때
그럴 때에는 앞니를 떠올려보곤 하는 겁니다 천성이란 무엇인지, 왜 어떤 흔적은 흉터로서 역할하지 못하고 삭아져버리는지
당신, 당신은 한 번 죽은 적 있지요
아뇨 아뇨 하고 뒤돌아 도망치다 보면
잔뜩 눌어붙은 마음에 칼질을 해대는 것
한 가지 알려줄까요
무 이파리가 시들해서 죽은 줄 알고 뽑아보면
막상 썩지는 않은 경우가 많답니다
싱싱하지 않을 뿐
살아는 있어요
매운 향을 뿜으며
가끔 손등을 깨물어요 그러면 삐죽 튀어나온 앞니 두 개가 찍힙니다 나는 그것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어요
내가 어딘가에 남길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자국이거든요 벌겋게 부풀어 오르는 피부까지도
저 멀리 보이는 친구를 피해 길을 돌아갈 때 혹은
다시 태어나서도 나의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할 때
그럴 때에는 앞니를 떠올려보곤 하는 겁니다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천성
나와 분리된 조각들에 대하여
그리고 그리워하는 겁니다
발가벗고도 이를 내보이며 웃었던 날
ㅡ
심사평
(심사위원 : 엄원태 안도현 안상학 나희덕)
이미지를 일관성 있게 밀어붙이는 힘이 거침없는 시운전
아쉬운 점
서사의 모호성과
현실 이후의 세계에 대한 전망(꿈) 부재가 시를 가볍게 한다는 점.
서정시의 퇴보와 상반된 인공지능 시대의 언어와 정서의 약진이 두드러지나 새로운 시의 전형을 창출하기까지는 도전과 시간이 얼마간 더 필요한 것.
동원된 이미지들의 분열감이 시의 응집을 방해
비/눈, 사막/비옥한 땅, 삶/죽음의 거리 사이에 생명력을 불어넣으려는 의지를 다소 무리한 진술들이 가로막고 있다
시운전
날 때부터 앞니를 두 개 달고 태어난" 몇 천 분의 일의 선천치(natal teeth) 경험을 바탕으로 삶의 여정을 톺아내는 마음이 곡진하고 는 점을 높이 샀다. 사소한 사물일지라도 섬세한 시선으로 어루만지며 존재에 대한 깊은 사유로 통합해가는 시적 완성도 또한 믿음이 갔다.
〈약력〉
1994년 서울 출생
전 출판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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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일보
젠가 -홍다미
우리는 즐거움을 쌓기 시작했죠
딱딱한 어깨를 내어주며 무너지지 않게 한 계단 한 계단 다짐을 쌓았죠 대나무가 마디를 쌓듯 빌딩이 올라가고 집값이 올라도 내일 모레 글피 그글피를
오지 않는 내일을 오늘처럼 지금처럼
바람 무게를 견디려면 마스크
쓴 계절도 빙하 녹는 북극도 쌓아야 하는데
밤하늘이 별빛을 빼내고 있었죠
쌓기만 하는 뉴스는
싫증나고요
거꾸로 가는 놀이를 해볼까요
쌓아놓은 블록을 하나씩 빼내는 놀이
장난감을 빼버리면 아이는 자라서 부모 눈물을 쏙 빼버리고 최저임금을 빼내면 알바는 끼니를 빼먹고 잠을 빼내면 기사님은 안전이란 블록을 빼내고야 말겠죠
언젠가 도심 백화점도 한강 다리도 이 놀이를 즐기다 쏟아졌고
모닝 키스도 굿나잇 인사도 기념일도 블록으로 빼내면 연애도 와장창 무너지겠죠
한순간 한 방이면 끝나는 게임
손끝의 감각을 믿기로 해요
쌓아 올린 우리가 와르르 무너질까봐
우린 서로의 빈틈을 살짝 비껴가는 중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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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쓸쓸한 삶의 깊이 자신만의 시선으로 해석
곽재구 시인
'젠가'를 뽑은 이유
우리 시대 쓸쓸한 삶의 깊이를 자신만의 시선으로 해석해 놓았다
ㅡㅡㅡ
홍다미
▲ 춘천교대 미술교육과, 강원대 교육대학원 심리학 전공.
▲ 중앙대 문예창작 전문가과정 2년 수료.
마경덕 중앙대 문예 창작 전문가 과정 김근, 황인찬, 이병일, 임정민, 이지아, 류근 교수님 감사합니다. 시동인<자몽> 오래 함께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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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면접 스터디 - 강지수
허리를 반으로 접고 아 소리를 내면
그게 진짜 목소리라고 한다
진짜 목소리로 말하면 신뢰와 호감을 얻을 수 있다고
그러자 방에 있던 열댓 명의 사람들이 제각기 허리를 숙인 채
아 아 아 소리를 낸다
복부에서 흘러나오는 진짜 목소리가 방 안을 채운다
이제 그 음역대로 말하는 겁니다
억지로 꾸며낸 목소리가 아닌 진짜 당신의 목소리로요
엉거주춤 허리를 편 사람들이 첫인사를 나눈다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저는 대전에서 왔고……
멋쩍은 미소를 짓고 몇 번 더듬기도 하면서
말을 하다가 불쑥 허리를 접고 다시 아 아 거리는 이도 있다
나는 구석에 앉아 이 광경을 바라본다
선생님이 손짓한다
이리 와서 진짜 목소리를 찾아보세요
쭈뼛거리며 무리의 가장자리에 선다
허리를 숙인다 정강이가 보이고 뒤통수가 시원하다
아 아 아
낮지도 높지도 않은 미지근적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옆집 아이와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쳐 어색하게 안부를 물을 때
보다는 낮고
지저분한 소문을 전할 때
보다는 높다
언뜻 저 사람과 그 옆 사람의 목소리하고 똑같다
우리 셋이 동시에 얘기하면 참 재미있겠죠
진지한 모임에서 그런 말은 할 수 없어서
그저 소리만 낸다
아 아
교실은 소리를 머금은 상자가 되고
이가 나간 머그잔에 물을 담아 마시다가 바닥에 흘렸다
닦아내려고 허리를 숙인 찰나
물 위로 번지는 그림자가 보였다
진짜 같았다
고개를 들었다
진짜사람들이 진짜미소를 지으며 진짜 멋진 진짜옷을 입은 게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다 합격할 수 있을 거예요
진짜행복이 밀려왔다
ㅡㅡㅡㅡㅡ
심사평
나희덕·문태준·박형준 시인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미래 지향적인 목소리가 부족
지금 우리 시대의 현실과 문제를 관조하는 서정적이고 성찰적인 목소리가 감지되었다.
자연과학이나 설화 등의 인유를 통해 오늘의 이야기를 담아낸 긴 산문형의 시가 주
‘손금’과 ‘밀렵’을 결합한 참신성이 돋보였지만 시적 확장성이 부족
청년 세대의 주거문제를 떠올리게 하는 좋은 작품이었지만 시적 구조가 평이하고 시행이 투박.
내면에서 맴도는 불투명한 시적 전개가 약점. 시의 앞부분에서 제시되는 다채로운 내면의 이미지들과 어우러지는 외연의 목소리가 보이지 않았다.
당선작 ‘면접 스터디’
시적 사건을 다루는 솜씨나 인식이 뚜렷하고 선명하게 드러난 수작.
취업 준비를 위해 면접 스터디를 한다는 시적으로 풀어내기 힘든 소재를 통해 진짜와 가짜, 진심과 위선의 문제를 유쾌하고 활달하게 풀어내어 힘 있게 읽힌다. 특히 진짜인 척 행사되는 현실의 거짓을 시작부터 끝까지 아이러니 형식으로 건드리는 자기식의 어법이 안착된 유니크한 솜씨가 발군이었다.
정확한 문장과 개성, 그리고 안정감이 느껴졌다.
말 안에 깃든 폭력성 ‘참을 수 없어서’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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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수. 1994년 서울 출생. 경희대 국제통상·금융투자학과. 출판 편집자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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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
펜치가 필요한 시점 / 김해인
짜장면과 짬봉 앞에서 고민하는
나를 절단해 줘요
불가마에 단련된 최초의 연장이 되느냐
컨베이어벨트를 타고 나오는 레디메이드 툴이 되느냐
이것도 중요하지만
선택 후의 방향은 어디인지 알 수 없어요
차라리 한 끼 굶을 일을
어느 시궁창에 빠질지 모를 일입니다
오른쪽 손과 왼쪽 손이 친척이라고 생각하나요
나를 꾹 눌러서 이쪽저쪽으로 갈라줘요
이쪽으로 가면 강의 상류 끝에 서 있는 물푸레나무를 만나고 싶죠
저쪽으로 가면 바다의 시작,
흰 치마를 펼쳐서라도 항해하는 게 로망인 걸요
밸런스게임은 사양할게요
이쪽으로 가면 파란 대문이 열려 있고
저쪽으로 가면 녹슨 대문이 부서져 있다거나
이쪽으로 가면 왕이 되고
저쪽으로 가면 거지가 된다는 동화 같은 거 믿으라고요?
차라리 사지선다형으로 바꿔주세요
검은 셔츠와 흰 셔츠 중 뭐가 필요하냐고요
지금은 펜치가 필요한 시점이에요
[당선 소감]
용접공과 커피나누며 시 찾아낼 것
약력: 1961년 부산 출생, 본명 김인래, 계명대 사학과 졸업, 현대상사 대표, ㈔국제PEN 부산지회 회원
심사평]
심사 구모룡 평론가, 성선경 시인
노동하는 육체 가져와 비유 리듬 증폭시켜
노동하는 삶을 통하여 자기를 성찰하는 발화가 진지하였다. 경험의 구체성을 담보하는 언어의 명징함을 지닌 게 우리를 사로잡았다.
이미지의 미학보다 구체적 삶의 언어로 기울었다. 김해인의 ‘펜치가 필요한 시점’을 당선작으로 선정한다. 공구와 더불어 노동하는 육체를 말하면서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노래하였는데, 처음에서 중간을 지나 끝에 이르기까지 시적 긴장을 잃지 않으면서 의미를 증폭하는 비유와 리듬을 잘 형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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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신문
운주사 천불천탑
김준경
그 누구도 시키지 않았고 그 누구도 떠밀지 않았다
저마다 한손에 정을, 다른 손에 망치를 들고 찾아왔다
뒤로멈춤앞으로
운주계곡 조용한 골짜기를 따라 돌을 쪼는 소리가 이어진다
하나의 고통을 담아 한번의 망치질, 하나의 괴로움을 담아 쌓은 한층
사바세계로부터 깎여나간 마음 부여잡고 눈앞의 돌을 깎아 나간다
참아낼 수 없는 아픔을 돌위에 올려 깎아서 내버리면 눈이 나오고
주체할 수 없는 분노를 돌위에 올려 깎아서 내버리면 귀가 나오고
벗어날 수 없는 원망을 돌위에 올려 깎아서 내버리면 입이 나온다
고해의 파도 속에서 멈추지 않고 들리는 돌 쪼는 소리
고통이 모여 돌을 가루로 만들고 괴로움이 쌓여 탑을 이룰 무렵,
돌속에서 웅크려 있던 부처님이 들꽃같이 환하게 피어난다
풀내음을 품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 앞의 민초를 맞이한다
투박하고 하찮아 보이지만 그렇기에 누구보다 가까운 그 모습
그 거친 어깨 끌어안고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게 조용히 울고 싶다
고해의 파도에 깎여나간 마음 쥐어짜내 입술 깨물고 울고 싶다
마음의 부스러기가 섞여 나온 눈물을 부처님께서 가사자락으로 닦아주면
뒤로멈춤앞으로
지나간 괴로움을 땅에 내려놓고 다가올 염원을 부처님께 올린다
염원이 모여 천개의 석탑이 되었고, 천분의 석불이 되었다
천가지 괴로움과 천가지 염원으로 세워진 민초들의 작은 불국토
같은 모양없이 저마다의 모습으로 저마다의 위치에 서서 정토세계를 꿈꾼다
■당선소감
다른 사람들에게도 쉼표로 다가오는 시 쓰겠다
사실 당선이 될 것이라는 확신은 없었습니다. 시를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은 일천한 제가 당선이 될 수 있을까
■ 시‧시조 심사평 / 유자효 시인· (사)한국시인협회장
마지막으로 남은 작품은 시조 ‘석등’과 시 ‘운주사 천불천탑’
시조 ‘석등’은 정형을 잘 지키고 있고, 오랜 습작의 공력이 느껴졌다. 그런데 ‘탯줄의 행렬’, ‘고샅길 펼쳐들고’ 같은 표현이 작품의 신선미를 떨어뜨리었다.
현대시조의 어려움ㅡ 정형율을 지키다 자칫하면 표현이 진부해질 수 있다는 점. 현대시조는 현대인의 정서를 담아야 한다.
시 ‘운주사 천불천탑’은 완성도가 높다. ‘아픔’과 ‘분노’, ‘원망’을 ‘깎아서 내버리면 눈’과 ‘귀’ ‘입이 나온다’는 표현, ‘고통이 모여 돌을 가루로 만들고 괴로움이 쌓여 탑을 이룰 무렵,/돌속에서 웅크려 있던 부처님이 들꽃같이 환하게 피어난다’는 표현은 크게 새롭지는 않아도 적확하다. ‘운주사 천불천탑’을 ‘천가지 괴로움과 천가지 염원으로 세워진 민초들의 작은 불국토’라고 본 끝부분의 표현은 이 작품의 완결성을 높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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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
심사평
김소연·박연준·황인찬
능숙하고 절묘한 이미지 배치와 전개가 압도적 작품
신춘문예 작품을 검토하는 일은 새로운 시의 경향을 감지하는 일이다.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고백이 많았다. 팬데믹에 전쟁과 기후위기 등 불안이 가시화되는 한 해 불안한 오늘의 삶과 온몸으로 맞설 수 있는 작품을 만나기를 기대
유려하게 운용되는 시의 맛이 시인만의 개성적인 시선과 태도를 가려 아쉽다.
숙련도에 부족함이 없고 시의 구조와 전개 모두 능숙했지만 결국 그 모든 이야기가 혼자만의 이야기로 귀결. 조금 더 크고 넓은 운동이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개성적인 시선과 발화가 만들어 내는 흥미로운 세계가 눈길을 끌었지만 단조롭거나 무리한 전개를 보였다.
당선작 서울늑대’와 ‘조명실’ 선정. 능숙하고 절묘한 이미지 배치와 전개가 압도적인 작품.
무엇보다 시란 세계를 재구성하는 일임을 이해하고 있었다. ‘서울늑대’는 늑대가 되어 서울을 달리는 “두 덩이의 하얀 빛”을 통해 가장 내밀한 공간에서부터 드넓은 도시의 이미지까지 아우르며 그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어 냈으며, 식당에서의 대화가 극장 조명실의 독백으로 전환되는 ‘조명실’은 죽음과 사랑, 불안과 고독 등을 극장 뒤편의 그림자 이미지로 모아 그것을 묵시하는 우리 시대의 초상을 추출하는 데 성공해냈다.
시인은 내밀한 고백을 통해 세계를 새롭게 정의하는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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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신춘 시 당선작
벽 / 추성은
죽은 새
그 옆에 떨어진 것이 깃털인 줄 알고 잡아본다
알고 보면 컵이지
깨진 컵
이런 일은 종종 있다
새를 파는 이들은 새의 발목을 묶어둔다
날지 않으면 새라고 할 수 없지만 사람들은 모르는 척 새를 산다고, 연인은 말한다
나는 그냥 대답하는 대신 옥수수를 알알로 떼어내서 길에 던져두었다
뼈를 던지는 것처럼
새가 옥수수를 쪼아 먹는다
몽골이나 오스만 위구르족 어디에서는 시체를 절벽에 던져둔다고 한다
바람으로 영원으로 깃털로
돌아가라고
애완 새는
컵 아니면 격자 창문과 백지 청진기 천장
차라리 그런 것들에 가깝다
카페에서는 모르는 나라의 음악이 나오고 있다 언뜻 한국어와 비슷한 것 같지만 아마 표기는 튀르크어와 가까운 음악이고
아마 컵 아니면 격자 창문과 백지 청진기 천장이라는 제목일 것이고
새장으로 돌아가라고……
아마 그런 의미겠지
연인은 나 죽으면 새 모이로 던져주라고 한다
나는 알이 다 벗겨진 옥수수를 손으로 쥔다
쥐다 보면 알게 될 것이다 컵은 옥수수가 아니라는 것
노래도 아니고
격자 창문과 백지 청진기도 아니고
진화한 새라는 것
위구르족의 시체라는 사실도
새의 진화는 컵의 형태와 비슷할 것이다
그리고 끝에는 사람이 잡기 쉬운 모습이 되겠지
손잡이도 달리고 언제든 팔 수 있고 쥘 수도 있게
새는 토마토도 아니고 돌도 아니기 때문에 조용히 죽어갈 것이다*
카페에서 노래가 흘러나온다
그건 어디서 들어본 노래 같고 나는 창가에 기대서 바깥을 본다
곧 창문에 새가 부딪칠 것이다
깨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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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 소감】
추성은/1999년 출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심사평】 감각•사유•언어를 오가며 빚어낸 ‘미래의 시인’
시는 긴장이고 충돌이다. 도전이고 모험이다. 새로운 시는 안전이나 완전과는 멀리 있다. 뛰어난 시는 지금-여기에서 저기-너머를 꿈꾸게 한다. 신인에게 기대하는 시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본심에 오른 열두 분의 작품 중 세 분의 작품을 대상으로 논의가 집중되었다. ‘졸업’ 외 2편은 거침없이 활달하다. 젊은 세대의 구어적 말맛과 비약적 대화를 극대화하여 시적 긴장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고 있다. 그러나 그 경쾌함이 겨냥하는 것이 불분명할 때가 잦아 맥이 풀리기도 한다.
‘무인 가게’ 외 5편은 절제된 안정감이 돋보였다. 농(濃)과 담(淡)을, 완(婉)과 곡(曲)을 살려 시를 의미화하고 전경화하는 재능은 시인으로서 큰 자산이다. 시대적 징후를 잘 포착한 「무인 가게」는 당선작으로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단지 다른 시편들에서 보여준 설명적 부분을 덜어내고 특유의 응집력으로 시적 개성을 확보하기를 권한다.
추성은 씨를 새로운 시인으로 추천한다. 감각, 사유, 언어라는 시의 세 꼭짓점을 오가며 빚어낸 그의 시편들은 읽는 사람을 충분히 매료시키며 시의 안쪽에 오래 머물게 한다. 당선작 ‘벽’은 녹록하지 않은 신예의 탄생을 예고하는 수일(秀逸)한 작품이다. 버드 스트라이크 혹은 조류 충돌의 새에게 사람 사는 곳이란 온통 부딪힐 수밖에 없는, 차단된, 차가운 벽이다. 그러니 ‘새’의 선택지는 진화하거나 깨져 죽거나, ‘창’ 안에서 ‘옥수수’를 받아먹으며 길들거나 창의 ‘바깥’으로 넘어서거나, 숱한 ‘새 아닌 새’가 되거나 ‘진짜 새’가 되거나일 것이다. 비단 새뿐이겠는가. 이 시가 반문명과 비인간을 지향하는 시로 읽히는 대목이다. 미래의 시인으로서 우리 시의 지평을 새롭게 열어가길 기대한다.
심사위원 : 정끝별(시인) 문태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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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take / 김유수
쓰레기를 줍는다
나는 쓰레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나가는 그것이 나를 쓰레기라 불렀다
쓰레기를 입고 거리를 활보했다
추운 거리를 그것이 배회하고 있었다 지나가는 그것의 입 속은 차갑다 지나가는 그것의 입술은 아름다웠다 지나가는 그것의 코트가 차갑다
쓰레기와의 동일시는 어떻게 줍는 것일까
너는 왜 나처럼 쓰레기를 줍지 않을까
어떤 부부가 예쁜 쓰레기를 주워 간다 어떤 직장인이 따분한 쓰레기를 주워 간다 어떤 시인이 터무니없는 쓰레기를 주워 간다 그러한 쓰레기의 용도는 내가 입을 수 없는 옷이었다
지나가는 그것이 코를 틀어막고 간다 지나가는 그것이 눈을 질끈 감고 간다 지나가는 그것이 옷을 건네주고 간다 지나가는 그것을 코트로 덮어버렸다
지나가는 그것이 무덤, 이라고 말한다 지나가는 그것이 나의 자리를 탐내고 있다 나는 자리나 잡자고 이 거리의 쏟아짐을 목격하는 자가 아니다 이 거리의 행려는 더더욱 아니었다
행려는 서울역 앞에서 담배꽁초를 줍고 있다
담배꽁초에 나의 시간을 투영하고 있다
그것이 서울역으로 타들어 가고 있었다
서울역의 시계가 서울역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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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세대의 물음, 시대의 울림으로 다가와"
전부 그런 것은 아니나 많은 신춘문예 당선 시에 적용 가능한 불문율이 있다. 지나치게 길지 않아야 한다는 것, 욕이나 비속어를 쓰지 말아야 한다는 것, 불량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등이다. 우리가 김유수의 'take' 외 4편에 주목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불문율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김유수의 시들은 길고, 욕이 나오고, 삐딱했다. 이른바 '신춘문예용' 시와는 거리가 있었다. 원고를 옆으로 미뤄 뒀다가 앞으로 당겨와 읽기를 반복했다. 정공법으로 튼튼히 지어 올렸으나 창문 하나 열어놓지 않은 콘크리트 건물처럼 갑갑한 시들 사이에서 김유수의 시는 시원했다. 펄럭였다. 종횡무진으로 움직였다. 궁금하게 했다.
마음과 생활이 바닥나서 남의 집 담장이 누울 자리로 보이는 일상의 일대를, 죽음이라는 막연한 일엔 쏟을 힘조차 없으면서도 친구가 필요하다고 중얼거리는 장례의 한복판을, 시간의 타들어 감을, 실험용 쥐가 머물던 투명한 상자와 같은 기억을 통과해 마침내 한 번도 이겨본 적 없는 결론의 발단에 도달하도록 짜인 김유수의 ‘몽타주’는 힘 있고 개성적이었다.
당선작인 'take'는 '그것'이라는 대명사의 활용만으로도 한 편의 시를 넓게 확장하고 있었다. 그것의 자리에 대신 삽입할 수 있는 '그것들'을 생각할수록 "너는 왜 나처럼 쓰레기를 줍지 않는 걸까"라는 세대의 물음이 시대의 울림으로 다가왔다.
김유수의 시와 함께 마지막까지 거론된 이영서, 최기현의 시들에 관해서도 덧붙인다. 두 분의 시 역시 각자의 개성으로 고유했다. 올해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아니었더라면, 어떤 지면에서든 곧 만날 수 있으리라 믿음을 주는 시들이었다. 이영서의 시는 담담했다. 진술과 묘사를 차곡차곡 쌓아 올리며 인상적인 서사를 구축할 줄 알았다. 여름-새-활주로-아스팔트-옥수수-아이들로 스멀스멀 전개되는 최기현의 표제작은 팽팽한 긴장감이 매력적이었다. 시가 뉘앙스만으로도 사건의 전모를 드러낸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점이 믿음직했다. 보통 마지막까지 경합하다 낙선하게 된 작품들에는 아쉬운 소리가 따라붙기 마련이지만 적지 않았다. 다만 이번에 우리는 '시의 홀가분함'에 한 발짝 더 다가서기로 했다는 것을 밝힌다.
더 많은 독자가 김유수의 시들을 만날 수 있게 되리라는 기대에 기쁨을 느낀다. 어느 지면에선가 김유수의 '담장과 바닥'을, '친구 없는 삶'을, '쥐 소탕 작전'을, '결론이 구려서'를 만나게 된다면 우정 어린 마음으로 읽어주시길 바란다. 신춘문예의 불문율로 시작했으니, 다시 그것과 관련된 말로 끝맺으려 한다. 시인은 "자리나 잡자고 이 거리의 쏟아짐을 목격하는 자가 아니다."
심사위원 김현(대표 집필) 박상수 이수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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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덫이 날 빠뜨리는 중이라 해도 기쁜 마음으로 입장하겠다"
김유수
벽 앞에 서 있을 때가 많다. 뻔한 비유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겠다. 벽 앞에 앉아 있을 때가 많다. 시를 쓸 때 그랬고 아닐 때도 그랬다. 약력에 쓸 것을 남기지 못한 나의 20대는 막다른 길을 거듭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길을 가로막는 벽 앞에 설 때마다 나의 힘은 항상 부족했더랬다. 이를테면 등단과 미등단 사이의 벽이 그랬다. 그럼 나는 지금 힘을 키워 벽 하나를 뛰어넘은 걸까? 정말 기쁘지만 그렇지 않다. 죄송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감사해도 모자랄 판에 무슨 말을 하나 싶다. 배부른 소리 말라고 혼내실 것만 같다. 하지만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 여전히 벽이 있겠다. 오늘 밤도 벽 앞에 앉아 있겠다.
무너뜨릴 수 없는 벽을 가만히 응시하는 것. 어쩌면 시를 쓸 때마다 그러한 실패의 확인과 응시를 반복할 뿐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 무력감을 앞으로도 이겨내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괜찮을까? 스스로 질문한다. 그리고 변변찮은 대답을 내놓는다. 오늘 밤도 벽 앞에 앉아 있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겠다.
백석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를 꺼내 읽겠다. 거기에 나의 길이 적혀 있겠다. 벽 너머에는 네가 있겠다. 그런 믿음으로 벽을 응시하겠다.
네가 있어 감사하다는 말이 영원히 부족하겠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 너라고 불러본다. 금은돌 시인과 김승일 시인. 너라고 불러본다. 심사위원 선생님들을 너라고 불러본다. 네가 있어 내가 있다는 것을 자주 상기하는 내가 되겠다. 하지만 내가 없는 곳에 네가 있음을 볼 줄 아는 내가 되겠다.
너는 지금 나를 좋은 곳으로 데려가는 중이겠지? 하지만 때로는 너를 덫이라 부르고 싶기도 하겠다. 혹여나 덫이 나를 빠트리는 중이라 해도, 기쁜 마음으로 입장하겠다.
△1998년 경기 안성 출생 △양업고등학교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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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문화일보 신춘 시 당선작
면접 스터디 / 강지수
허리를 반으로 접고 아 소리를 내면
그게 진짜 목소리라고 한다
진짜 목소리로 말하면 신뢰와 호감을 얻을 수 있다고
그러자 방에 있던 열댓 명의 사람들이 제각기 허리를 숙인 채
아 아 아 소리를 낸다
복부에서 흘러나오는 진짜 목소리가 방 안을 채운다
이제 그 음역대로 말하는 겁니다
억지로 꾸며낸 목소리가 아닌 진짜 당신의 목소리로요
엉거주춤 허리를 편 사람들이 첫인사를 나눈다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저는 대전에서 왔고……
멋쩍은 미소를 짓고 몇 번 더듬기도 하면서
말을 하다가 불쑥 허리를 접고 다시 아 아 거리는 이도 있다
나는 구석에 앉아 이 광경을 바라본다
선생님이 손짓한다
이리 와서 진짜 목소리를 찾아보세요
쭈뼛거리며 무리의 가장자리에 선다
허리를 숙인다 정강이가 보이고 뒤통수가 시원하다
아 아 아
낮지도 높지도 않은 미지근적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옆집 아이와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쳐 어색하게 안부를 물을 때
보다는 낮고
지저분한 소문을 전할 때
보다는 높다
언뜻 저 사람과 그 옆 사람의 목소리하고 똑같다
우리 셋이 동시에 얘기하면 참 재미있겠죠
진지한 모임에서 그런 말은 할 수 없어서
그저 소리만 낸다
아 아
교실은 소리를 머금은 상자가 되고
이가 나간 머그잔에 물을 담아 마시다가 바닥에 흘렸다
닦아내려고 허리를 숙인 찰나
물 위로 번지는 그림자가 보였다
진짜 같았다
고개를 들었다
진짜사람들이 진짜미소를 지으며 진짜 멋진 진짜옷을 입은 게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다 합격할 수 있을 거예요
진짜행복이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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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진심·위선의 문제 유쾌하게 풀어내… 한국詩 밝힐 신예 출현
응모작들에서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미래 지향적인 목소리가 부족한 대신 지금 우리 시대의 현실과 문제를 조용하지만 차분하게 관조하는 서정적이고 성찰적인 목소리가 감지되었다. 종교적 의미로서보다는 자기 존재 탐구의 수단으로서 신이나 천사 등 초월적 존재를 모티프로 한 시와 그 반대로 가까운 친척이나 동료들이 등장하여 익숙한 삶을 뒤집어보는 일상형의 시가 함께 나타나는 현상이 그 예라고 할 수 있었다. 일상형의 시에서는 청년취업 문제나 주택 문제, 부채 문제 등과 관계된 시어들이 자주 등장했다.
심사는 예·본심을 통합해 진행되었다. 이 과정을 거쳐 열한 분의 작품이 본심에 올랐다. 자연과학이나 설화 등의 인유를 통해 오늘의 이야기를 담아낸 긴 산문형의 시가 주를 이루고 있었지만 시적 짜임새와 수준이 만만치 않아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웠다.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인 작품들은 ‘시창작기초’ ‘모델하우스’ ‘빛을 긁어낸다면’ ‘면접 스터디’였다.
‘시창작기초’는 알레고리 기법을 이용하여 손금의 운명선에서 거대한 사파리를 발견하고 동물들의 운명을 시 쓰기와 결합한 작품이었다. ‘손금’과 ‘밀렵’을 결합한 참신성이 돋보였지만 시적 확장성이 부족한 점이 아쉬웠다.
‘모델하우스’는 현실감이 묵직하게 와 닿는 작품이었다.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믿지만 제자리일 수밖에 없는 형제의 이야기가 형이 만든 축소된 아파트 모형 속 축소된 사람들과 분양대행사 직원이 소개하는 모델하우스의 대비로 실감 나게 전개되어 있었다. 청년 세대의 주거문제를 떠올리게 하는 좋은 작품이었지만 다소 시적 구조가 평이하고 시행이 투박하다고 생각되었다.
‘빛을 긁어낸다면’은 여러 사물을 이질적으로 배치하고 혼합하는 시적 능력이 돋보였다. 하지만 내면에서 맴도는 불투명한 시적 전개가 약점으로 지적되었다. 시의 앞부분에서 제시되는 다채로운 내면의 이미지들과 어우러지는 외연의 목소리를 기대했지만 그 점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귤’ 하나로 시작하여 ‘아이’의 심리를 ‘일기장’과 ‘쿠키’ 등의 다양한 사물을 활용하여 입체화하는 시적 감각이 인상적이었다.
당선작으로 선정된 ‘면접 스터디’는 시적 사건을 다루는 솜씨나 인식이 뚜렷하고 선명하게 드러난 수작이다. 취업 준비를 위해 면접 스터디를 한다는 시적으로 풀어내기 힘든 소재를 통해 진짜와 가짜, 진심과 위선의 문제를 유쾌하고 활달하게 풀어내어 힘 있게 읽힌다. 특히 진짜인 척 행사되는 현실의 거짓을 시작부터 끝까지 아이러니 형식으로 건드리는 자기식의 어법이 안착된 유니크한 솜씨가 발군이었다. 당선작과 함께 투고한 다른 작품들에서도 오랜 습작기를 거쳤을 것이라고 믿어질 만큼의 정확한 문장과 개성, 그리고 안정감이 느껴졌다. 이에 심사위원들은 한국시의 미래에 풍요로움을 더할 탁월한 신예가 출현했다는 것에 흔쾌하게 동의할 수 있었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나희덕·문태준·박형준 시인
【당선소감】
말 안에 깃든 폭력성 ‘참을 수 없어서’쓴다
△강지수. 1994년 서울 출생. 경희대 국제 통상·금융 투자학과. 출판 편집자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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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서울늑대 / 이실비
사랑을 믿는 개의 눈을 볼 때
내가 느끼는 건 공포야
이렇게 커다란 나를 어떻게 사랑할래?
침대를 집어 삼키는 몸으로 묻던 하얀 늑대
천사를 이겨 먹는 하얀 늑대
흰 늑대 백 늑대 북극늑대
시베리아 알래스카 캐나다 그린란드
매일 찾아가도 없잖아
서울에서 만나 서울에서 헤어진 하얀 늑대 이제 없잖아
우린 개가 아니니까 웃지 말자
대신에 달리자 아주 빠르게
두 덩이의 하얀 빛
우리는 우리만 아는 도로를 잔뜩 만들었다 한강 대교에서 대교까지 발 딛고 내려다보기도 했다 미워하기도 했다
도시를 강을 투명하지 않은 물속을
밤마다 내리는 눈
까만 담요에 쏟은 우유
천사를 부려먹던 하얀 늑대의 등
네 등이 보고 싶어 자고 있을 것 같아 숨 고르며 털 뿜으며
이불 바깥으로 새어나가는 영원
목만 빼꼼 내놓고 숨어 다니는 작은 동물들
나는 그런 걸 가져보려 한 적 없는데 하필 너를 데리고 집에 왔을까 내 몸도 감당 못하면서
우리는 같은 멸종을 소원하던 사이
꿇린 무릎부터 터진 입까지
하얀 늑대가 맛있게 먹어치우던
죄를 짓고 죄를 모르는 사람
혼자 먹어야 하는 일 앞에서
천사는
입을 벌려 개처럼 웃어본다
조명실 / 이실비
그 사람 죽은 거 알아?
또보겠지 떡볶이 집에서
묻는 네 얼굴이 너무 아름다운 거야
이상하지 충분히 안타까워하면서 떡볶이를 계속 먹고 있는 게 너를 계속 사랑하고 있다는 게
괜찮니?
그런 물음들에 어떻게 답장해야할지 모르겠고
겨울이 끝나면 같이 힘껏 코를 풀자
그런 다짐을 주고받았던 사람들이
아직도 코를 흘리고 있다
손톱이 자라는 속도가 손톱을 벗겨내는 속도를 이기길 바랐다
다정 걱정 동정
무작정
틀지 않고
어두운 조명실에 오래 앉아 있었다
초록색 비상구 등만
선명히 극장 내부를 비추고 있었다
이것이 지옥이라면
관객들의 나란한 뒤통수
그들에겐 내가 안 보이겠지
그래도 나는 보고 있다
잊지 않고 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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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능숙하고 절묘한 이미지 배치와 전개가 압도적 작품
신춘문예 작품을 검토하는 일은 새로운 시의 경향을 감지하는 일이기도 하다. 2651편의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졌던 것은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고백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팬데믹에 이어 전쟁과 기후위기 등 우리 삶의 불안이 참담한 형태로 가시화되는 한 해였던 만큼 그런 경향이 작품에도 반영됐다. 불안한 오늘날의 삶과 온몸으로 맞설 수 있는 작품을 만나기를 기대하며 심사를 진행했다.
본심에서는 네 명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논의했다. 김보미의 ‘제 자리’ 외 4편은 유려하게 운용되는 시의 맛이 뛰어났다. 그러나 오히려 그 유려함이 시인만의 개성적인 시선과 태도를 가려 아쉽다는 의견이 있었다. 백민영의 ‘피에타’ 외 2편은 숙련도에 부족함이 없었다. 시의 구조와 전개 모두 능숙했지만 결국 그 모든 이야기가 혼자만의 이야기로 귀결되고야 말았다. 조금 더 크고 넓은 운동이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끝까지 고민한 작품은 이영서의 ‘멀어지는 기분’ 외 2편이었다. 개성적인 시선과 발화가 만들어 내는 흥미로운 세계가 눈길을 끌었지만 단조롭거나 무리한 전개를 보이는 대목이 있었다.
당선작으로 이실비의 ‘서울늑대’와 ‘조명실’을 선정했다. 능숙하고 절묘한 이미지 배치와 전개가 압도적인 작품이었다. 무엇보다 시란 세계를 재구성하는 일임을 이해하고 있었다. ‘서울늑대’는 늑대가 되어 서울을 달리는 “두 덩이의 하얀 빛”을 통해 가장 내밀한 공간에서부터 드넓은 도시의 이미지까지 아우르며 그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어 냈으며, 식당에서의 대화가 극장 조명실의 독백으로 전환되는 ‘조명실’은 죽음과 사랑, 불안과 고독 등을 극장 뒤편의 그림자 이미지로 모아 그것을 묵시하는 우리 시대의 초상을 추출하는 데 성공해 냈다.
시인은 내밀한 고백을 통해 세계를 새롭게 정의하는 자다. 당선자는 그 일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앞으로도 자유롭게 이 세계를 유영하기를 바란다. 본심작을 포함해 뛰어난 투고작이 많았다. 머지않아 다른 지면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작품을 투고한 모든 분께 깊은 감사를 전한다. 시에 대한 우리의 열의가 있는 한 시는 끊임없이 우리 삶과 더불어 이 세계와 대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김소연·박연준·황인찬 시인
【당선소감】겁에 질려도 눈 피하지 않는 시 쓰고 싶어요
▲이실비 / 1995년 강원 속초 출생. 동덕여대 문예창작과 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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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웰빙 / 한백양
힘들다는 걸 들켰을 때
고추를 찧는 방망이처럼
눈가의 벌건 자국을 휘두르는 편이다
너무 좋은 옷은 사지 말 것
부모의 당부가 이해될 무렵임에도
나는 부모가 되질 못하고
점집이 된 동네 카페에선
어깨를 굽히고 다니란 말을 듣는다
네 어깨에 누가 앉게 하지 말고
그러나 이미 앉은 사람을
박대할 수 없으니까
한동안 복숭아는 포기할 것
원래 복숭아를 좋아하지 않는다
원래 누구에게 잘하진 못한다
나는 요즘 희망을 앓는다
내일은 국물 요리를 먹을 거고
배가 출렁일 때마다
생각해야 한다는 걸 잊을 거고
옷을 사러 갔다가
옷도 나도
서로에게 어울리지 않는 곳에서
잔뜩 칭찬을 듣는 것
가끔은 진짜로
진짜 칭찬을 듣고 싶다
횡단보도 앞 노인의 짐을 들어주고
쉴 새 없이 말을 속삭일 때마다
내 어깨는 더욱 비좁아져서
부모가 종종 전화를 한다 밥 먹었냐고
밥 먹은 나를 재촉하는 부모에게
부모 없이도 행복하다는 걸 설명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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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일상과 불화·화해하는 아이러니 잘 담아내”
시 부문 예심을 거쳐 올라온 작품들 가운데 잘 조직된 언어적 매무새에 정성을 쏟은 시편들이 호의적으로 다가왔다. 그 과정에서 최종 논의 대상이 된 작품은 김은유씨의 ‘바깥공상’과 한백양씨의 ‘웰빙’이었다. 결과적으로 시상의 완결성과 시인으로서의 가능성을 참작하여 ‘웰빙’을 당선작으로 선정하게 되었다.
‘바깥공상’은 방 안에서 상상해 보는 바깥의 세상을 얼룩과 이불이라는 소재로써 개성적으로 풀어낸 가편이었다. 민활한 심리적 움직임을 단정한 흐름 속에서 명민하게 포착하고 서술한 면이 돋보였다. 선정하지 못해 끝내 아쉬웠다. ‘웰빙’은 스스로의 일상과 때로 불화하고 때로 화해하는 심리적 교차점을 잘 그려냈다. 존재론적 확장을 희망하는 마음이 선연하게 형상화되었으며, 그러한 희망을 때로 억압하고 때로 포기하지 못하게 하는 현실을 반어적으로 잘 담아냈다. 삶의 아이러니를 긴 호흡으로 구성해 가는 만만찮은 능력을 보여주었다고 생각된다. 웰빙 아닌 웰빙의 조건 속에서 스스로를 성찰하고 좀 더 누군가에게 잘하고 누군가의 짐을 들어주면서 진짜 칭찬을 듣고 싶어하는 희망앓이를 하는 마음이 잘 나타났다. 앞으로도 서정성과 일상성을 잘 결속하여 구체성 있는 삶의 서사를 잘 온축해 갈 것으로 기대된다.
이 밖에도 구체성 있는 필치와 시상을 통해 자신만의 언어를 드러낸 시편들이 많았다. 당선작은 언어 구사의 참신함과 완성도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당선자에게 크나큰 축하의 말씀을 드리고 응모자 여러분께 힘찬 정진을 당부드린다
안도현 시인, 유성호 문학평론가
당선소감
나는 될 줄 알았다. 그러니 여러분들 또한 될 것이다.
▲한백양/ 1986년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 개인 교습.
2024 조선일보 신춘 시 당선작
벽 / 추성은
죽은 새
그 옆에 떨어진 것이 깃털인 줄 알고 잡아본다
알고 보면 컵이지
깨진 컵
이런 일은 종종 있다
새를 파는 이들은 새의 발목을 묶어둔다
날지 않으면 새라고 할 수 없지만 사람들은 모르는 척 새를 산다고, 연인은 말한다
나는 그냥 대답하는 대신 옥수수를 알알로 떼어내서 길에 던져두었다
뼈를 던지는 것처럼
새가 옥수수를 쪼아 먹는다
몽골이나 오스만 위구르족 어디에서는 시체를 절벽에 던져둔다고 한다
바람으로 영원으로 깃털로
돌아가라고
애완 새는
컵 아니면 격자 창문과 백지 청진기 천장
차라리 그런 것들에 가깝다
카페에서는 모르는 나라의 음악이 나오고 있다 언뜻 한국어와 비슷한 것 같지만 아마 표기는 튀르크어와 가까운 음악이고
아마 컵 아니면 격자 창문과 백지 청진기 천장이라는 제목일 것이고
새장으로 돌아가라고……
아마 그런 의미겠지
연인은 나 죽으면 새 모이로 던져주라고 한다
나는 알이 다 벗겨진 옥수수를 손으로 쥔다
쥐다 보면 알게 될 것이다 컵은 옥수수가 아니라는 것
노래도 아니고
격자 창문과 백지 청진기도 아니고
진화한 새라는 것
위구르족의 시체라는 사실도
새의 진화는 컵의 형태와 비슷할 것이다
그리고 끝에는 사람이 잡기 쉬운 모습이 되겠지
손잡이도 달리고 언제든 팔 수 있고 쥘 수도 있게
새는 토마토도 아니고 돌도 아니기 때문에 조용히 죽어갈 것이다*
카페에서 노래가 흘러나온다
그건 어디서 들어본 노래 같고 나는 창가에 기대서 바깥을 본다
곧 창문에 새가 부딪칠 것이다
깨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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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 소감】
추성은/1999년 출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심사평】 감각•사유•언어를 오가며 빚어낸 ‘미래의 시인’
시는 긴장이고 충돌이다. 도전이고 모험이다. 새로운 시는 안전이나 완전과는 멀리 있다. 뛰어난 시는 지금-여기에서 저기-너머를 꿈꾸게 한다. 신인에게 기대하는 시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본심에 오른 열두 분의 작품 중 세 분의 작품을 대상으로 논의가 집중되었다. ‘졸업’ 외 2편은 거침없이 활달하다. 젊은 세대의 구어적 말맛과 비약적 대화를 극대화하여 시적 긴장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고 있다. 그러나 그 경쾌함이 겨냥하는 것이 불분명할 때가 잦아 맥이 풀리기도 한다.
‘무인 가게’ 외 5편은 절제된 안정감이 돋보였다. 농(濃)과 담(淡)을, 완(婉)과 곡(曲)을 살려 시를 의미화하고 전경화하는 재능은 시인으로서 큰 자산이다. 시대적 징후를 잘 포착한 「무인 가게」는 당선작으로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단지 다른 시편들에서 보여준 설명적 부분을 덜어내고 특유의 응집력으로 시적 개성을 확보하기를 권한다.
추성은 씨를 새로운 시인으로 추천한다. 감각, 사유, 언어라는 시의 세 꼭짓점을 오가며 빚어낸 그의 시편들은 읽는 사람을 충분히 매료시키며 시의 안쪽에 오래 머물게 한다. 당선작 ‘벽’은 녹록하지 않은 신예의 탄생을 예고하는 수일(秀逸)한 작품이다. 버드 스트라이크 혹은 조류 충돌의 새에게 사람 사는 곳이란 온통 부딪힐 수밖에 없는, 차단된, 차가운 벽이다. 그러니 ‘새’의 선택지는 진화하거나 깨져 죽거나, ‘창’ 안에서 ‘옥수수’를 받아먹으며 길들거나 창의 ‘바깥’으로 넘어서거나, 숱한 ‘새 아닌 새’가 되거나 ‘진짜 새’가 되거나일 것이다. 비단 새뿐이겠는가. 이 시가 반문명과 비인간을 지향하는 시로 읽히는 대목이다. 미래의 시인으로서 우리 시의 지평을 새롭게 열어가길 기대한다.
심사위원 : 정끝별(시인) 문태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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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take / 김유수
쓰레기를 줍는다
나는 쓰레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나가는 그것이 나를 쓰레기라 불렀다
쓰레기를 입고 거리를 활보했다
추운 거리를 그것이 배회하고 있었다 지나가는 그것의 입 속은 차갑다 지나가는 그것의 입술은 아름다웠다 지나가는 그것의 코트가 차갑다
쓰레기와의 동일시는 어떻게 줍는 것일까
너는 왜 나처럼 쓰레기를 줍지 않을까
어떤 부부가 예쁜 쓰레기를 주워 간다 어떤 직장인이 따분한 쓰레기를 주워 간다 어떤 시인이 터무니없는 쓰레기를 주워 간다 그러한 쓰레기의 용도는 내가 입을 수 없는 옷이었다
지나가는 그것이 코를 틀어막고 간다 지나가는 그것이 눈을 질끈 감고 간다 지나가는 그것이 옷을 건네주고 간다 지나가는 그것을 코트로 덮어버렸다
지나가는 그것이 무덤, 이라고 말한다 지나가는 그것이 나의 자리를 탐내고 있다 나는 자리나 잡자고 이 거리의 쏟아짐을 목격하는 자가 아니다 이 거리의 행려는 더더욱 아니었다
행려는 서울역 앞에서 담배꽁초를 줍고 있다
담배꽁초에 나의 시간을 투영하고 있다
그것이 서울역으로 타들어 가고 있었다
서울역의 시계가 서울역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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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세대의 물음, 시대의 울림으로 다가와"
전부 그런 것은 아니나 많은 신춘문예 당선 시에 적용 가능한 불문율이 있다. 지나치게 길지 않아야 한다는 것, 욕이나 비속어를 쓰지 말아야 한다는 것, 불량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등이다. 우리가 김유수의 'take' 외 4편에 주목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불문율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김유수의 시들은 길고, 욕이 나오고, 삐딱했다. 이른바 '신춘문예용' 시와는 거리가 있었다. 원고를 옆으로 미뤄 뒀다가 앞으로 당겨와 읽기를 반복했다. 정공법으로 튼튼히 지어 올렸으나 창문 하나 열어놓지 않은 콘크리트 건물처럼 갑갑한 시들 사이에서 김유수의 시는 시원했다. 펄럭였다. 종횡무진으로 움직였다. 궁금하게 했다.
마음과 생활이 바닥나서 남의 집 담장이 누울 자리로 보이는 일상의 일대를, 죽음이라는 막연한 일엔 쏟을 힘조차 없으면서도 친구가 필요하다고 중얼거리는 장례의 한복판을, 시간의 타들어 감을, 실험용 쥐가 머물던 투명한 상자와 같은 기억을 통과해 마침내 한 번도 이겨본 적 없는 결론의 발단에 도달하도록 짜인 김유수의 ‘몽타주’는 힘 있고 개성적이었다.
당선작인 'take'는 '그것'이라는 대명사의 활용만으로도 한 편의 시를 넓게 확장하고 있었다. 그것의 자리에 대신 삽입할 수 있는 '그것들'을 생각할수록 "너는 왜 나처럼 쓰레기를 줍지 않는 걸까"라는 세대의 물음이 시대의 울림으로 다가왔다.
김유수의 시와 함께 마지막까지 거론된 이영서, 최기현의 시들에 관해서도 덧붙인다. 두 분의 시 역시 각자의 개성으로 고유했다. 올해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아니었더라면, 어떤 지면에서든 곧 만날 수 있으리라 믿음을 주는 시들이었다. 이영서의 시는 담담했다. 진술과 묘사를 차곡차곡 쌓아 올리며 인상적인 서사를 구축할 줄 알았다. 여름-새-활주로-아스팔트-옥수수-아이들로 스멀스멀 전개되는 최기현의 표제작은 팽팽한 긴장감이 매력적이었다. 시가 뉘앙스만으로도 사건의 전모를 드러낸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점이 믿음직했다. 보통 마지막까지 경합하다 낙선하게 된 작품들에는 아쉬운 소리가 따라붙기 마련이지만 적지 않았다. 다만 이번에 우리는 '시의 홀가분함'에 한 발짝 더 다가서기로 했다는 것을 밝힌다.
더 많은 독자가 김유수의 시들을 만날 수 있게 되리라는 기대에 기쁨을 느낀다. 어느 지면에선가 김유수의 '담장과 바닥'을, '친구 없는 삶'을, '쥐 소탕 작전'을, '결론이 구려서'를 만나게 된다면 우정 어린 마음으로 읽어주시길 바란다. 신춘문예의 불문율로 시작했으니, 다시 그것과 관련된 말로 끝맺으려 한다. 시인은 "자리나 잡자고 이 거리의 쏟아짐을 목격하는 자가 아니다."
심사위원 김현(대표 집필) 박상수 이수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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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덫이 날 빠뜨리는 중이라 해도 기쁜 마음으로 입장하겠다"
김유수
벽 앞에 서 있을 때가 많다. 뻔한 비유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겠다. 벽 앞에 앉아 있을 때가 많다. 시를 쓸 때 그랬고 아닐 때도 그랬다. 약력에 쓸 것을 남기지 못한 나의 20대는 막다른 길을 거듭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길을 가로막는 벽 앞에 설 때마다 나의 힘은 항상 부족했더랬다. 이를테면 등단과 미등단 사이의 벽이 그랬다. 그럼 나는 지금 힘을 키워 벽 하나를 뛰어넘은 걸까? 정말 기쁘지만 그렇지 않다. 죄송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감사해도 모자랄 판에 무슨 말을 하나 싶다. 배부른 소리 말라고 혼내실 것만 같다. 하지만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 여전히 벽이 있겠다. 오늘 밤도 벽 앞에 앉아 있겠다.
무너뜨릴 수 없는 벽을 가만히 응시하는 것. 어쩌면 시를 쓸 때마다 그러한 실패의 확인과 응시를 반복할 뿐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 무력감을 앞으로도 이겨내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괜찮을까? 스스로 질문한다. 그리고 변변찮은 대답을 내놓는다. 오늘 밤도 벽 앞에 앉아 있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겠다.
백석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를 꺼내 읽겠다. 거기에 나의 길이 적혀 있겠다. 벽 너머에는 네가 있겠다. 그런 믿음으로 벽을 응시하겠다.
네가 있어 감사하다는 말이 영원히 부족하겠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 너라고 불러본다. 금은돌 시인과 김승일 시인. 너라고 불러본다. 심사위원 선생님들을 너라고 불러본다. 네가 있어 내가 있다는 것을 자주 상기하는 내가 되겠다. 하지만 내가 없는 곳에 네가 있음을 볼 줄 아는 내가 되겠다.
너는 지금 나를 좋은 곳으로 데려가는 중이겠지? 하지만 때로는 너를 덫이라 부르고 싶기도 하겠다. 혹여나 덫이 나를 빠트리는 중이라 해도, 기쁜 마음으로 입장하겠다.
△1998년 경기 안성 출생
△양업고등학교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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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영남일보 신춘문예] 詩
미싱 / 성욱현
몸에 맞추어 옷을 만들던 시절은 지났다
우리는 만들어진 옷속에 몸을 끼워넣는다
입지도 않는 옷을 산 걸 후회했고
세상에 이렇게나 많은 옷이 쏟아지다니, 이게 뭐니
창고에 갇힌 미싱은 소리 없이 울면서 혼자 돌아갔겠다
할머니가 늙어가는 소리처럼
소리 없이 할머니를 입는다
미싱을 배울 때가 좋았어
할머니는 사라질 것만 같은 쵸크 선을 따라서
엉킨 실을 풀며 매듭을 새기며 몸에 맞는 옷을 만들었겠다
미끈하고 곧게 선 재봉틀 위를 걸어가던 할머니는
두 발을 가지런히 하고 누워 계신다
열여덟 살 소녀가 누운 나무 관, 삐걱거린다
새 옷에서는 차가운 냄새가 난다
몸은 언제나 헌것이라 옷보다 따뜻한 것일까
치수를 재어
나를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재우며
할머니는 오래된 치마처럼 낡아가며, 얇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할머니의 손이 내 허리를 감싸
나를 한 벌의 옷으로 만들었다는 걸
도무지 알 수가 없었고
거실 한쪽으로 미싱을 옮긴다
미싱 가마에 기름칠을 하던 할머니도
오래도록 팔꿈치가 접혀 있었다
여기 앉아보세요
눈발이 창에 드문드문 박음질을 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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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엉킨 실 풀고 매듭 새기는 것…인생이라는 서사시의 숭고한 첫 장"
시의 언어는 전달 가능성과 전달 불가능성 사이를 오간다. 이상하게 들리지만, 그것은 언어의 운명이기도 하다. 시는 '정보'의 도구로 전락한 언어를 '선언'의 자리로 되돌려놓는다. 선언이라면, 시는 교환되기보다는 제출되는 것이며 그로써 한 사람의 생을 증언하는 유일한 목소리가 된다. 인생은 정보의 틈 사이로 희미하게 멀어지거나 그 틈 사이에서 반짝이는 신비를 통해서만 인간의 시간을 보여주는 것이다. 단언컨대, 시 말고 다른 언어로 쓰여진 삶이 인생일 리 없다. 그렇다면, 모든 인생은 인간의 육체로 쓰는 시인 셈이다.
그것이 심사자들이 '미싱'을 젤 위에 놓을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사라질 것만 같은 쵸크 선을 따라" 엉킨 실을 풀기도 하고 매듭을 새기기도 하며 "몸에 맞는 옷"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한 사람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몸은 언제나 헌것이라 옷보다 따뜻한 것일까"라는 놀라운 질문은 "눈발이 창에 드문드문 박음질"하는 풍경과 맞물려 인간이 쓸 수 있는 서사시의 숭고한 첫 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를 물었던 개가 죽었다/ 내가 더 강해지기도 전에"로 시작하는 당선자의 또 다른 시 '이사'도 그렇거니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문장에 밴 섬세한 시선 덕분에 심사자들은 일찌감치 당선자를 결정한 뒤 당선작을 고르는 기쁜 고심을 누릴 수 있었다. 당선자의 미래를 의심하지 않는다.
'건강함' 시들
무거운 시어를 통해 세계의 원리를 포착하려는 과욕을 쉽게 노출
평이 진솔 언어로 아픈 어머니를 씻는 아버지의 지극한 일상을 깊이 감내한다 깊은 감명을 주었다.
낯선 매혹에 사로잡힌 언어들이 자칫 그 매력의 배후를 놓쳐버리고 부유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데 대한 반성처럼, 훌륭한 이미지를 구사하면서도 특별한 순간을 가능케 하는 근원에 접근하려는 고투를 멈추지 않아서 반가웠고,
시가 의미 용량으로 해석되는 관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문맥 이면에 도사린 예감을 통해 그 의미를 부드럽게 전복시키고 있다 는 점에서 서정시의 아름다움을 지켜내는 뛰어난 작품이었다.
△1994년 밀양생
△2021 한국일보 신춘 동화 당선
△2022 대산창작기금 동화 수혜
△천안역 인근 책방 악어새 운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