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용
‘한국의 지붕’이라고 불린다.
서쪽은 낭림산맥, 동쪽은 마천령산맥, 남쪽은 함경산맥과 경계를 이룬다.
동해 사면(斜面)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으나, 북쪽으로는 완만한 경사지이므로 허천강·장진강·부전강 등 여러 하천이 북으로 흘러 압록강에 흘러든다.
백산(白山)·연화산(蓮花山)·북수백산(北水白山)·대암산(大巖山)·두운봉(頭雲峰)·차일봉(遮日峰)·대덕산(大德山) 등 2,000m 이상의 높은 산이 많다.
그러한 봉우리도 고원에서 바라보면 과히 높지 않고 경사가 완만한 구릉으로 보인다. 전체가 마치 넓은 평야와 같은 개마고원은 구리·철·마그네사이트·금·인회석 등의 광물도 매장되어 있다.
해발고도가 일반적으로 1,200∼1,300m로 높기 때문에 여름은 서늘하고 겨울은 매우 춥다. 대체로 1월 평균기온은 -15℃ 내외이고 최저 -40℃까지 내려간다. 8월 평균기온은 18∼20℃로서 우리나라 최저온 지대를 이룬다.
게다가 서리가 9월 중순부터 이듬해 5월 초순까지 내린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경성(鏡城) 서쪽의 백산은 산세가 매우 험하여 음력 5월이 되어야 잔설이 녹으며 음력 7월이면 다시 눈이 내린다고 기록되어 있다.
강수량도 매우 적은데 함경산맥이 동해로부터의 습기를 차단하여 연강수량이 600㎜ 내외이다. 이 지역은 원래 고구려의 옛 땅이었으나 고려시대에는 여진족이 점유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세종의 4군6진 개척으로 여진족을 몰아내고 남부 지방의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남부 지방으로부터의 이주민 중에는 화전민이 많았다.
20세기에 들어와서도 도로 연변의 큰 촌락을 벗어나면 곳곳에 화전이 많았다.
현황
주요 식량 작물로는 감자와 귀리를 비롯하여 대마·아마·홉 등의 특용 작물도 재배되고 있다. 그리고 산지가 넓으므로 갑산 지방을 중심으로 소를 많이 기르며, 서늘한 기후를 이용하여 양도 많이 기른다.
예로부터 ‘삼수·갑산’이라고 하면 하늘을 나는 새조차 찾지 않던 산간 벽지로 한 번 가기만 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의 대명사처럼 생각되었는데 20세기부터 삼림·광산·수력 자원이 개발되면서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이 지역은 무산의 삼림 지대에 연속되어 낙엽송·잎갈나무·전나무·가문비나무·잣나무 등의 침엽수와 일부 활엽수의 원시림이 울창하고, 하천을 통한 재목의 운반이 편리하여 임업의 중심지를 이루고 있다.
삼림 개발은 목재의 반출이 쉬운 하천 연안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허천강과 장진강 유역의 목재는 각각 강 하구 또는 하구 가까이에 위치한 혜산진과 신갈파진(新乫波津)으로 운반되고, 이곳에서 모아진 이른바 압록강재(鴨綠江材)는 뗏목으로 엮어서 다시 이 강의 중·하류로 운반되었다.
그리고 1937년에 개통된 길주∼혜산 간의 혜산선은 갑산·혜산 지역의 삼림 개발을 위하여 부설된 임산철도(林産鐵道)로서 동해안의 도시와 항구로 목재를 운반하는 기능을 수행하였다.
해발고도 2,000m 이상의 고산지대에서는 눈잣나무·눈측백·만병초·산진달래·담자리꽃나무 등도 자란다.
이들 하천 상류를 막아서 만든 호수의 물은 터널을 통하여 경사가 급한 동해 사면으로 낙하시켜 허천강발전소(32.5만㎾)·부전강발전소(22만㎾)·장진강발전소(32.1만㎾) 등 3대 발전소에서 총 86만㎾ 이상의 전력을 얻게 되었다.
이로써 동북부 해안 지방의 산업 발달에 박차가 가해졌다.
댐의 건설로 형성된 호수는 고원에 우거진 원시림과 함께 웅대하고도 수려한 경관을 이룰 뿐만 아니라, 여름에도 서늘하여 이상적인 피서·유람지역으로서 발전하게 되었다.
개마고원과 동해안 지방 간의 교통은 혜산선·신흥선(함흥∼부전호반)·단풍선(단천∼홍군) 등의 철도와 함흥∼황초령∼장진∼신갈파진, 함흥∼신흥∼풍산, 북청∼후치령∼풍산∼갑산∼혜산, 단천∼풍산 등지를 잇는 도로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이들 도로는 신작로로 확장되기 이전부터 귀리·모피·쌀·어염의 교역로로서 이용되어 왔다.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개마고원 일대
양강도 도청소재지 혜산진
아픈기억- 장진호전투
장진호전투는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 예하 미 제1해병사단이 서부전선부대와 접촉을 유지하기 위해 장진호 북쪽으로 진출하던 중 중공군 제9병단 예하 7개 사단 규모가 포위망을 형성한 장진호 계곡을 벗어나기 위해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2주간에 걸쳐 전개한 철수작전이다.
중공군의 한반도 진입 목적과 병력규모를 11월 초까지도 경시했던 유엔군사령관 맥아더(Douglas MacArthur) 원수가 선제공격을 단행하기로 결심함에 따라 동부지역을 담당한 미 제10군단 알몬드(Edward M. Almond)소장은 국경선을 목표로 한 북진을 재개하기로 결정하였다.
11월 1일 미 제10군단장은 국군 제1군단을 우측, 미 제7사단을 중앙, 미 제1해병사단을 좌측으로 하여 국경선으로 진격하는 공격명령을 하달하였다.
이 무렵 중공군은 미 제10군단 정면에 제9병단을 투입하고 있었다. 제9병단은 예하에 제20군단과 제27군단, 제26군단을 두고 있었다.
11월 27일 중공군이 유담리의 미 해병대를 공격하며 전투가 개시되었다.
중공군의 대규모 개입으로 장진호 지역의 전황이 급변하자 미 제10군단장은 11월 30일 하갈우리에서 작전회의를 열고 기존의 북진계획을 재검토하였다.
회의에서 알몬드 소장은 장진호 부근의 모든 부대를 함흥∼흥남의 작전기지로 이동한다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유담리에 대한 중공군의 공격에 미 제1해병사단의 제5연대와 제7연대가 각각 이를 격파하고 12월 4일 하갈우리에 진입함으로써 유담리 포위망 돌파작전은 일단락되었다.
한편 장진호 동쪽에서 고립된 미 제7사단은 구출이 지연되자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해 하갈우리로 이동하였다.
하갈우리에 대한 공격은 중공군 제58사단이 주축이 되어 시작되었다.
또한 중공군 제60사단은 이미 고토리까지 남하하여 하갈우리에 이르는 보급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 제1해병사단의 분전으로 12월 7일 고토리로 모든 병력을 집결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어 진흥리를 통과한 미 제1해병사단은 12월 11일 함흥지역에 모두 진입함으로써 장진호전투를 마무리하였다.
장진호전투는 여러 측면에서 전선에 영향을 주었다.
중공군은 장진호 부근 전투에서 전투손실 뿐 아니라 비전투손실도 상당히 입게 되었다.
이에 따라 더 이상의 군사작전 수행이 불가능하여 중공군 제9병단 지휘부는 3개월에 걸쳐 부대를 재편성하기 위해 후방으로 철수하였다.
반면에 미 제1해병사단은 중공군의 강력한 포위망을 돌파하여 함흥지역으로 철수하는데 성공하였다.
뿐만 아니라 중공군 제9병단이 서부전선의 제13병단을 증원할 수 있는 역량을 소멸시킴으로써 서부지역 전선의 미 제8군이 위기를 모면하는데 일조하였다.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