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를 먹는 집 이른 아침에 방문을 열어젖힌다. 새들이 개나리 울타리 사이를 드나들며 재재거린다. 나의 눈꺼풀을 일으켜 세우는 것은 새 소리만이 아니다. 고개를 들면 멀리 삼악산 봉우리가 우뚝하며 가슴까지 열어 보인다. 봉우리는 맑은 날이면 나무로 깃털을 세우고 흰 구름이 흘러가는 날이면 살짝 몸피를 감춘다. 그렇게 나와 봉우리 사이엔 고정되지 않은 정경들이 숨어있다. 산마을에는 열여섯 가구가 산다. 내가 거처하는 집은 허름하다. 지어진 지 오래고 양철지붕이다. 비가 오면 나는 빗방울이 양철지붕과 만나는 지점에서 튕겨 오르는 화음을 듣는다. 소리는 지붕의 낡음과는 하등의 연관성이 없기에 그저 좋다. 다만 먼 곳에서 보면 지붕의 색깔이 칙칙하여 얼마 전에는 주홍색 옷을 새로 입혔다. 주홍색은 집 뒤 소나무 숲으로 인해 마을 입구를 지나 집으로 향하는 삼거리로 들어설 즈음이면 더욱더 확연하게 시야를 끌어당긴다. 허름한 집의 방문은 마당과 곧장 이어져 있다. 그래서 창으로 낸 손바닥만 한 유리를 통해 시간의 흐름을 따라 빛의 밝기가 전해진다. 창은 빛의 밝기뿐만 아니라 내가 방안에 앉아 바깥 풍경을 살피는데도 한몫한다. 그 창을 통해 직선으로 마당의 한편에 자리한 작은 연못이 보인다. 여름 연못은 오리들이 독차지한다. 오리의 키는 한 뼘 정도 된다. 오리가 물에서 나오면 노랑 병아리와 함께 흙 마당에서 유유자적하며 돌아다닌다. 서로의 꼬리가 잇닿아 있어 언뜻 보면 같은 종인가 싶다. 요 녀석들을 보고 있으면 사람들이 말하는 끼리끼리란 애초에 물 건너간 셈이다. 함께 무슨 얘기들을 하는지 알 수 없지만, 저녁이 되어 닭장과 오리장으로 들어갈 때까지 신나는 것은 분명하다. 내가 병아리와 오리에게 할 수 있는 것은 밤에 몰래 오는 천적으로부터 보호해주는 것이다. 이 보호에는 나의 어설픈 경험이 담겨있다. 처음 나는 자고 일어나면 병아리와 오리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모이만 주면 알아서 쑥쑥 크는 줄 알았다. 어느 순간 그 숫자가 눈에 띄게 확연히 줄어들었을 때야 큰 종이박스가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래서 부랴부랴 밤에 편히 쉴 수 있는 든든한 철망으로 집을 마련해주었다. 그 후 아침마당은 더욱더 활기찼다. 나는 가끔 장난삼아 구구하고 입소리를 낸다. 그러면 녀석들은 뒤뚱거리며 어디선가 달려왔다가 이내 심드렁하게 흩어진다. 마당에서 양철지붕의 처마까지 이어놓은 줄에는 보라색 나팔꽃이 긴 팔을 펼친다. 기온이 올라가면 밤새 다문 입술을 연다. 햇빛은 더욱더 찬란하여 나를 집 아래 빨래터로 이끈다. 겨우내 얼어있던 물은 시간의 흐름에 순응하며 봄을 지나 여름의 한복판으로 흘러내려 간다. 울퉁불퉁한 바위로 기울기가 생긴 곳은 겨우내 잉태했던 소리를 시원스럽게 풀어놓는다. 물속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새끼손가락만 한 물고기가 고물고물하다. 바닥엔 닳고 닳은 바위의 잔해들이 오랜 세월을 거쳐 이곳까지 왔노라고 눈도장을 찍는다. 나는 공용 빨래터에서 오전 내내 텃밭을 휘젓고 다닌 흔적이 묻은 바짓가랑이와 발을 씻는다. 물을 손에 담아 이슬처럼 굴리며 얼굴을 문지른다. 조금 후 내가 묻힌 비누 거품은 자연 정화되어 눈앞에서 사라진다. 부피가 작은 수건은 비누에 비벼서 물속에 담그고만 있어도 저절로 씻어진다. 빨래터에 앉아 하늘 몇 번 올려다보면 바람결에 마른 발이 어느결에 이마처럼 말갛다. 비누는 빨래터 한 편에 척 올려놓는다. 그것은 다음에 와도 항상 그 자리에 있다. 집으로 올라가는 길 왼편에는 논두렁길이 구불구불 이어져 있다. 나는 논두렁길을 따라 이웃집으로 간다. 그곳에는 등이 활대처럼 굽은 노부부가 산다. 가끔 그곳에서 뜻하지 않은 끼니를 해결하고 초보자의 텃밭에 짓고 있는 농작물에 대한 소중한 정보를 듣는다. 가령 콩은 세 알을 심어야 한다. 하나는 새가 먹고 하나는 사람이 먹고 하나는 싹이 안 틀 것을 대비한다는 것이다. 조곤조곤 들려주는 산골 할머니의 이야기 속에는 반짝이는 지혜가 담겨있다. 나는 어설프지만, 주섬주섬 가슴에 새긴다. 그리고 용기를 낸 아이가 되어 밭에 세 알의 콩을 심는다. 나는 여름 내내 잡초와 씨름한다. 첫 번째 고랑의 잡초를 호미로 매면 다음 날이면 다른 고랑에 잡초가 무성하다. 할머니의 콩밭은 할아버지의 이마처럼 훤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제초작업의 시기를 놓쳤기 때문이었다. 여하튼 모르면 몸이 고생이다. 다행인 것은 애초에 욕심을 부리고 시작한 일이 아니니 안달하지는 않는다. 여름날의 오후, 논두렁길을 걷는다. 벼는 한창 주변을 초록으로 물들이고 있다. 풀은 내 종아리의 절반까지 웃자랐다. 나는 조심조심 걸음을 옮긴다. 쓰르륵 소리를 내며 초록 뱀이 눈앞에서 금세 꼬리를 감춘다.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오열한다. 뱀의 꼬리는 사라진 지 오래여도 머릿속에 박힌 두려움은 한동안 나를 괴롭혔다. 그날 내가 허공에 내지른 소리와 발돋움하며 몸을 뒤뚱거렸던 모양새는 지금도 생각하면 소름이 돋는다. 그 일로 인해 할머니 집으로 가는 길은 미루나무가 있는 길을 빙 둘러서 이루어졌다. 그 길은 비록 시간은 배로 걸렸지만 내게 평안을 안겨주는 길이 되었다. 가끔 아침이면 산마을의 스피커를 통해 알림장이 날아온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오늘 어느 어르신의 생신이니 아침을 먹으러 그 댁으로 모두 넘어오라는 것이다. 나는 처음엔 이런 일이 낯설었다. 맨손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선 마당은 사람들로 왁자하다. 음식은 상다리가 받치기 힘들 지경으로 차려져 있다. 이것은 마을의 정겨운 관습이었다. 나중에는 은근히 밥하기 싫은 날이면 귀를 기울이며 꾀를 부려본다. 하지만 나의 꾀는 봄 여름 가을에는 통하지 않는다. 어르신들의 생신은 주로 겨울이다. 상상해보건대 아마도 농사철과 생일도 맞물려 있는 듯하다. 그래서 겨울은 강추위로 매서워도 마음이 지핀 화톳불로 인해 마을의 속내는 따듯하다. 산마을은 소리가 열매처럼 풍성하다. 고요는 생명체와 만나면 미리 준비하지 않아도 색깔이 다른 소리를 낳으며 가슴에 메아리처럼 담긴다. 나는 산마을의 초입에 들어서면 한 걸음 앞서 빈 오선지를 내게 선물한다. 걸음걸음 내딛을 때마다 경직된 오감이 빗장을 다투어 미소로 화엄의 입술을 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