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흥馬史(馬事), 마류(馬留)성, 회령진 목장, 古장성’/ 예강칼럼(102)/박형상/변호사 |
장흥신문 2020.01.31 자
1. 장흥 마사(馬史,馬事) - 작년에 대덕읍에 있는 ‘한국 말산업고’ 졸업생이 장제(裝蹄)사 대회1위를 했고, ‘장흥군수배 제3회 전국승마대회’가 열렸다. 필자의 어린 시절 장흥읍내에 마방(馬房)은 없었지만, 몇 마부(馬夫) 마차(馬車)가 있었다. 용산 금곡과 대덕 연정에는 ‘말 무덤’ 속설이 전해지고, 임진난 정유난에 ‘김헌 (1561~1592), 애마총’과 ‘문기방( 1548~1597)’ 의마총’이 생겼다. 아마 장흥에 가장 많은 말이 모인 곳은 1271년경 여몽연합군 출정때의 고마도(叩馬島)로 여겨진다. 장흥 벽사역(驛)의 말단 속역 속원으로 ‘마정, 삼마정’ 지명이 있고, 1531년경에 청백리 ‘삼마(三馬)태수’ 송흠(1459~1547)이 장흥부사로 부임하였다. 가장 멋진 모습은 1597년경 정유재란 때에 회령포진(鎭)으로 홀로 ‘단기치도(單騎馳到)’를 하시어 삼도수군통제사로 취임한 이순신 장군일 것. 여기서 ‘단기치도’는 상징적 표현일 터지만, 이제는 그 상징적 ‘單騎馳到’ 동상도 필요한 것 아닐까?
2. 장흥府 지역 馬 목장 - 말 목장(牧場)은 국력의 기초로 중시되어 선초부터 설치되고 점마별감과 감목관(監牧官)이 파견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1454>에 장흥府 관할로 ‘도양곶 국마(國馬)421필’과 ‘우슬곶(흥양) 馬121필’이 나온다. ‘흥양 외이매도’ 목장은 1436년에 말1천필이 기록되었다. 말 목장은 ‘진도,해남,강진,장흥,고흥’? 등 남도해안에도 설치되는데, 특히 ‘해남, 강진, 장흥’ 연안은 육지로 건너오는 ‘제주마’의 선별 계류장 역할을 했을 것. (강진 馬島鎭은 馬度鎭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해안 목장들은 농지피해는 물론이고 왜구침입으로 이설폐지가 잦았다. <대동지지,1863)>에 ‘이미 폐지된 목장’으로 장흥의 ‘득량도, 래덕도(소 목장, 1470년에 牛188두 기록이 있다), 장내곶’, 강진의 ‘조약도, 고금도, 신지도, 완도’가 언급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오래 지속된 목장은 ‘해남 황원, 진도 관내, 흥양 관내 목장’ 등이다)
3. 1453년경 마류(馬留)성 실체 - 강진 대구면에서 장흥 대덕읍에 걸친 계치(戒峙,界峙) 구간에
남아있는 석성(石城)의 내력은 어찌되는가? 구전설화로 ‘만리장성說’이 있다. 또한 ‘마류성(馬留城)說’이 있는데, 정약용 제자로 대구면 항동에
살았던 ‘황상(1788~1870)’은 ‘馬목장(牧場)說’을 주장하였다. 기타 ‘장보고(~846) 청해진(828~851) 군사기지說’과 ‘삼별초
반군(1270~1273) 군사기지說’도 있다. 검토하면, 이른바 군사기지說은 설득력이 없다. 그 지형적 지세가 전술적 요충지도 아니고, 군사시설
유적도 없고 전쟁터도 아니었다. 역사적 근거도 없고, 청해진 시대든 삼별초 시대든 너무 짧았던 기간이고, 특히 전라도 해안을 유린하던 삼별초는
이동형 기습군대라서 대구~대덕 지역에 주둔형 석성을 만들 리 없다, 청해진 군대도 그 지역을 차지할 그 어떤 전략적 필요가 없을
일.
이에 필자는 ‘마류성(馬留城) 목장說’을 지지한다. 우선, 역사적 기록이 있다. <왕조실록>에 1453년(단종1년)
1월과 7월 기사로 ‘강진현 계참곶(桂站串/界站串)에 둘레90리, 말1천필 목장’ 개설을 지시하고 있으며, 점마별감을 파견하였다. 그런데
1466년에 ‘장흥 助役도 말300필 목장’이 등장할 뿐 더 이상 ‘계참곶 목장’은 나오지 않는데, 그 설치 이후 얼마 안 있어 폐지된 것
같고, 평지(平地)형이 아닌, 산곡(山谷)형 목장의 비효율성 때문일 것. 둘째 이유로, 石城 형세를 보면, 단지 성안에서 바깥으로의 도주방지용
석벽이 설치되어 있다. 즉 석성 안쪽을 바라보고 막는 ‘향내(向內) 석벽?’이라서 말 관리 용도에 부합한다. 달리 군사방어용 시설은 없으며,
북쪽에서 내려오는 외부세력에 대한 침입방지용 석벽이 아니다. 세째 이유로, 1453년경 ‘계참(桂站/界站)’곶 지명은 오늘날
‘계치(界峙/戒峙)’지명과 상통한다. 앞서 ‘만리장성’이란 구전(口傳) 자체도 ‘마류장성’의 와전(訛傳)일 것. (한편 1575년경는 부작용
폐해로 감목관 제도가 폐지되며 인근 '수령, 만호'의 감목관 겸직조치를 지시하지만, 예컨대 1628년경 기록에도 감목관이 여전히 있고, 조선말기
고종 때에도 감목관을 음직 채용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4. 1658년 회령진 목장 - 처음 소개하는 향토史로, ‘정관재 이단상(1628~1669)’의 <정관재집>에 나온다. 연안이씨 李단상은 조부가 ‘옥봉 백광훈’의 <옥봉집> 서문을 쓴 ‘월사 이정구’이고, 부친이 ‘이명한’으로 당색은 노론이다. 1648년 진사장원, 1649년 문과급제에 1658년경 ‘전라도 암행어사’로 장흥 회령진(會寧鎭)의 목장폐해 민원을 해결한다. 요약하면. “수년 전에 ‘사복시’ 관청에서 회령포 本鎭의 고성유지(古城 遺址)에 목장을 병설(竝設)한데서 사졸(士卒)의 경식(耕食)전답이 군마(群馬)로 유린되었는바, 진하(鎭下) 사졸배(士卒輩) 노소남녀가 어사에게 읍소(泣訴)하였다”는 것. (아마 감목관을 겸직하게 된 회령포 만호 역시 별 이득 없이 귀찮고 괴로웠을 것) 이에 어사 이단상은 친심(親審)하여, “회령성 본진여목장(本鎭與牧場) 일처병설불가(一處幷設不可) 결정”을 하고, “牧場의 타처 이설(移設)”을 바로 지시했다. 회진성 본진에 가까운 ‘진목리 마장(馬場)골’도 그 시절 터전으로 여겨진다.
5. <정묘지, 1747>의 대흥방 古장성(長城) - <정묘지>는 ‘古장성’에 대해
“기자(起自)진목리後 橫亘(횡긍)평원(平原) 踰(유)戒峙(계치) 至강진(康津)界 석축面皆向內 연대미상”이라 하였다. 풀이하면 “진목리 후등에서
시작되어 평원(平原)을 가로질러 계치(戒峙)를 넘어 강진 경계(境界)에 이르고 있으며, 석축면이 모두 안쪽으로 향내(向內)하는데, 설치연대
미상이다”는 것. 앞서 언급한 ‘마류성(馬留城) 목장說’에 ‘회령진 본진에의 병설목장 이설(移設)기록’과 ‘진목리 마장(馬場)골,
계치(界峙/戒峙) 석성’을 연계하면, 그 전후 내력을 이해할 수 있을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