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의 숲을 읽고-상실의 끝에는 아무것도 없고
원래 계속 글을 쓰고 있던 논어를 이어 쓰려 펼친 순간 내 눈 앞에 펼쳐진 공자 선생의 수많은 말씀이 내 머리를 너무 어지럽게 했다. 한 번쯤 은 설교에서 벗어나도 좋지 않을까? 그렇게 전에 읽고 고이 모셔 두었던 ‘노르웨이의 숲’을 꺼내 한번 훑어본다. 저 멀리 늙은 선생의 책은 치워 두고 스피커로는 노르웨이의 숲을 읽으며 배운 노래 {Puff The Magic Dragon}를 틀어 둔 체 이리저리 휘둘린다. 책의 이야기를 생각하고 인물들의 대사를 떠올리며 하루키가 설정해 놓은 그 구성안에 푹 빠지기 위해서 온 신경을 집중한다. 그럴수록 이유 모를 우울감과 함께 이름 모를 기분에 감싸인 체, 앉아 있던 자리가 점점 아래로 꺼져 내려가는 듯 점점 일어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이내 깨닫는다. 난 더 이상 앉아 있으면 안된다고, 이 책을 들고 있어서는 안된다고, 차라리 저 멀리 있는 논어를 집어야 한다고, 그것이 하루키가 만든 이야기의 끝이라고. 하지만 난 걸음을 때지 못하고 ‘마무리는 이거지’ 하며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를 틀고 결국은 다시 ‘노르웨이의 숲’을 읽기 시작한다.
노르웨이의 숲의 한국에서 초판 번역은 ‘상실의 시대’였다. 어쩌면 이 작품을 완벽하게 표현한 제목일지도 모르겠다. 책에 대한 에세이를 쓰는 입장으로 책에 대한 내용 요약을 하고 싶지만 마음처럼 되지는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 책을 어떻게 요약하고,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기 때문이다. 그나마 설명할 수 있는 길은 ‘상실의 시대’라는 키워드를 빌리는 일 밖에는 없다고 생각이 든다.
상실(喪失)의 뜻은 “어떤 사람과 관계를 끊거나 헤어지다”, “어떤 것을 아주 잃거나 사라지게 하다” 라는 두가지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책에는 상실을 겪고 있는, 어쩌면 상실 그 자체인 인물들이 나온다. 해석에 따라서는 이 책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이 상실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주인공은 와타나베, 그의 첫사랑 나오코, 소꿉친구인 기즈키, 학교 형 나가사와, 그의 여자친구 하쓰미, 학교 친구 미도리, 중년의 여성 레이코. 이들을 제외하고도 책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전부 무언가를 상실했으며, 그 무언가를 채우려 노력한다. 누구는 성욕으로, 누구는 병원과 환경으로, 누구는 노래로, 누구는 친구로, 누구는 농담으로, 누구는 외면으로, 누구는 멍청해 지기를 선택하면서 자신안에 있는 상실되어 있는 부분을 채우려 발버둥을 치는 듯 싶다. 책은 잔잔하다. 발버둥이라는 단어와 안 어울리지만 그럼에도 그 잔잔함 속에는 인물들의 감정은 활 시위를 쫙 당기고 있는 느낌이다. 잠시라도 놓으면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은, 터져버릴 것 같은. 그렇게 잔잔한 긴장감 속에 발을 들이면 책은 더욱 이 안으로 오기를, 이 인물들의 상실에 깊숙이 빠져서 공감하기를 권한다.
그 방법으로 책은 음악을 소개한다. 바흐의 클래식과 비틀즈의 올드 팝, 여러 뮤지션들의 시티팝과 커티스 풀러의 재즈 등 수많은 곡들을 소개하고 이 책의 푹 빠지기 원하는 독자들은 그 곡들을 찾아 듣는다. 곡의 소개와 함께 더불어 읊조리는 것 같은 대사들. 그 대사들을 노래들과 함께 듣노라면 그들이 나에게 말을 건 듯하고, 내가 그들의 마음에 들어 간 듯하다. 그렇게 그 책에 푹 빠져 있을 때에 나는 상실의 시대에 서있게 된다.
왜 수 많은 사람들이 이 책에 빠졌을까? 이 질문을 순간 대답은 심하게 간단하다. 이 시대가 상실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절대가치도 없고 절대선, 악이 없다. 모든 건 상대적으로 나뉘어 너도 옳고 나도 옳고가 되어 모든 것의 가치가 인정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사실 상대가치도 없고 그냥 아무런 가치도 없다. 기준도 없고 한계도 없다. 어디까지 해야 만족할지도 모르기에 언제까지고 만족할 수 가 없다. 모두가 옳다고 말하지만 그 뒤에서는 편을 나누어 갈라 치고 무엇을 이루든 그 이상을 원한다. 그러기에 무엇을 이루어도 이룬 것 같지가 않다. 업적을 쌓음으로 기뻐하지 못하고 그 이상의 것을 바라며 동시에 전에 쌓아 두었던 업적은 무가치로 변하고 업적의 기쁨이 차지해야 할 공간은 상실로 가득 찬다. 책 속의 등장 인물도 웃고는 있지만 사실은 그 속에는 아무것도 없다. 무언가 즐겁고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그저 현재에 만족하고 이상을 즐기고 있는 것 같지만 그저 시간이 다 되어 터지기를 기다리는 폭탄에 불과한 것이다.
최근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를 살짝 봐 봤다. 그렇게 찬사를 들었던 [나의 아저씨]를 쓴 작가의 차기작이라니 기대를 안고 시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감상평은 매우 실망스러웠다. 쉬지 않고 들리는 신음으로 가득 찬 대사는 ‘노르웨이의 숲’과 마찬가지로 이 시대의 상실을 표현하는 듯했다. 정말 한 순간도 쉬지 않고 그 드라마속 인물들은 자신의 상황을 푸념하며 상실감을 들어냈다. 그리고 드라마는 그 해결책으로 사랑을 제시한다. 이 부분을 보고 난 생각 했다. ‘해리포터보다 훨씬 판타지구나.’
[나의 해방일지]에서 소개하는 상실의 해결 방법은 사랑이다. ‘노르웨이의 숲’에서 주인공인 자신 안에 상실감을 해소하려 자신의 선배인 나가사와와 함께 밤새 술을 마시며 하룻밤을 보낼 여자를 찾고 하룻밤을 보낸다. 하지만 주인공은 해결하지 못한다. 그저 더욱 상실감에 빠질 뿐이며 잠깐의 즐거움이 채웠던 마음속 공간을 영원한 우울감과 상실감에게 자리 내어준다. 이에 비해 드라마는 사랑으로 해결된다. 모든 것이 한 층 더 좋아진다. 주인공들의 신음이 줄어들고, 상실감이 행복감으로 채워진다. 그 감동적인 내용을 보고 난 후 나는 더 이상 그 드라마를 시청하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너무 노르웨이의 숲에 푹 빠져 버린 것일 수도 있겠다. 세상에는 분명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감동적인 이야기도 일을 터이다. 상실이 없는 인생도 있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인생속에 상실이 도대체 무엇인가? 이런 생각을 하며 동시에 난 앞서 말했던 내용을 하나 철회하겠다. ‘상실의 시대’는 이 작품을 완벽히 표현해 내지 못했다.
상실이라는 것은 분명히 이 책에 중요한 키워드 일지 몰라도 이 책의 결론은 상실이 아니다. 이 책의 결론은 상실을 상실한 것이다. 쉽게 말하면 아무것도 없는 감정도 없다. 잃어버렸다는 감정도 잃어버렸다. 이 책은 정말 아무것도 없다. 책에서는 사람들의 상실에 대해 수많은 이야기를 하지만 그 이야기 또한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여러 생각을 하게 한 다음에 전부 없는 셈 친다. 480페이지가 넘는 이야기를 마지막 단 한페이지로 전부 먹어 버린다. 그 페이지의 주인공은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지 못했다. 바로 전까지 기억했던 장소를 잊어버리고 마치 꿈을 꾼 듯이 말했다.
그 감정은 나에게도 전달되는 듯했다. 이전까지 인간 삶의 상실에 대해 고민했던 기억이 상실되어 이 책에 대한 평이 아무것도 남지 못했다. ‘인생속에 상실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도 전에 그 질문이 의미가 없는 듯 보였다. 책의 줄거리도 해석도 남지 않았다. 나에게 남은 건 오로지 노래들의 이름 뿐이었다. {Puff The Magic Dragon} {노르웨이의 숲}.
‘책 이름 참 잘 지었다.’ 이 책을 완벽히 표현해 낸 제목은 난 노르웨이의 숲이라 생각한다. 이 책을 읽고 나니 기억에 남는 것은 ‘상실의 시대’을 살아가는 인간의 대한 고민이 아니다. 그냥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 뿐이다. 그저 그 노래를 들으며 생기는 이유 모를 우울감과 이름 모를 감정들뿐이다. 고로 이 책이 왜 인기가 많았는지, 사람들이 왜 이 책에 빠졌는지에 대한 결론도 바뀐다. 책에 나오는 상실감에 대한 공감도 아니고, 동참도 아니고, 고민도 아니다. 그저 이유 모를 우울감과 이름 모를 감정들 모든 걸 상실한 표현 못한 허무에 빠지기 위함이었다.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한다.
그 사실을 알았기에 책을 다시 펼치자 마자 난 논어를 집어 들기를 원했다. 아무런 의미 없는 감정에 이리저리 휩쓸리기 보다는 차라리 설교를 듣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책을 쓴 하루키 역시 이 책을 등지고 일어서서 걷기를 바랬을 것이라고, 쓸데없는 감정에 인생을 쏟지 말고 무언가 더 의미 있는 일을 하나라도 더 하라고 말하는 듯싶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의미 없는 감정의 몸을 맡기는 즐거움을 알았기에 다시 한번 [노르웨이의 숲]을 틀고 쓸데없는 감정에 적셔 시간을 낭비한다. 내 책장에는 [인간 실격]이 꽂혀 있었고, 이미 내 손에는 [만년]이 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