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희용 (3) 가난한 대학 시절… 틈나면 막노동, 주말엔 고향 농사일
김아영2026. 5. 13. 03:08
의대 전액 장학금 받을 기회
의사되기까지 장기간 부담에 포기
‘노숙자 대학생’ 같았던 고난의 시간
컵라면 한끼, 맹물로 하루 버텨
박희용 선교사가 고단한 학창 시절을 이겨내고 1994년 대학원 졸업식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한림대 의과대 전액 장학금이라는 보장된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지만 나는 그 길을 포기했다. 의사가 되기까지 필요한 긴 시간 동안 홀어머니와 가족들에게 짐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가족을 조금이라도 빨리 뒷바라지할 수 있는 경제학을 택해 서울로 올라왔다.
하지만 그 선택의 대가는 혹독했다. 서울 한양대 재학시절 내내 하루 식사는 컵라면 한 개가 전부였다. 그마저도 돈이 떨어지면 맹물로 배를 채우며 버텼다. 위장이 쓰린 배고픔은 차라리 익숙해졌지만 진짜 견디기 힘든 것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막막함이었다.
잠잘 곳이 없어 밤거리를 헤맨 날들도 많았다. 더부살이하던 친구 집에 손님이 오면 나는 당연히 방을 비워줘야 했다. 자정이 넘은 시각 주머니에는 동전 하나 없었다. 결국 밤 12시 불 꺼진 도서관을 나와 왕십리에서 영등포와 구로를 지나 경기도 부천을 거쳐 인천까지 하염없이 걸었다. 가로등 아래 길게 늘어진 내 그림자가 방향을 잃은 내 인생 같았다.
나는 ‘노숙자 대학생’이었다. 당시 기억 때문에 지금도 나는 컵라면을 잘 먹지 못한다. ‘하나님, 살려만 주세요.’ 그 기도는 믿음이 아니라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는 자의 마지막 절규였다. 하지만 그날 밤 기적은 없었다. 상황은 바뀌지 않았고 나는 여전히 차가운 밤길 위에 있었다.
고학생이었던 나는 시간이 나면 막노동 현장으로 달려갔고 주말이면 어머니를 도우러 시골로 향했다. 아버지와 큰형이 세상을 떠난 뒤라 내가 주말에 논밭을 갈아놓아야 어머니께서 일하실 수 있었다. 한여름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경운기를 몰다가 상경하면 더위를 먹어서 며칠을 앓기도 했다. 자정까지 과외를 할 때는 저녁 식사조차 사치였다.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끼니를 때우며 서너 가지 일을 닥치는 대로 하며 가족을 돌봤다.
군 휴가 때도 마찬가지였다. 2주일 휴가 동안 나는 공사 현장에서 20~30층 높이까지 비계(발판 구조물)를 설치하는 작업을 했다. 위험수당을 받을 수 있어 짧은 기간에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렇게 번 돈은 어머니께 드리고 다시 부대로 복귀했다. 책상에 앉아 공부할 시간이 부족해 지하철과 길거리에서 공부하는 법을 터득해야 했다. 그렇게 나는 7남매 중 막내였지만 사실상 가장으로 가족을 지켜내며 대학원 과정까지 마쳤다.
고통의 터널을 지날 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확신한다. 기도조차 할 수 없어 주기도문을 읊조리며 꺼이꺼이 절규할 때도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그 어두운 밤길에서 나와 함께 밤새도록 걸으셨다. 내가 주저앉고 싶을 때도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배고픔보다 무서웠던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하나님은 나를 붙들고 계셨다.
그 밤길은 단순한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음을 뼈저리게 깨닫는 은혜의 시간이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 23:4)
한 발자국씩 내디디며 믿음을 선포하자. 하나님을 신뢰하는 한 모든 것이 괜찮다.
우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자유에 이르는 그분의 자녀들이기 때문이다.
정리=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