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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672
2월15일 [연중 제6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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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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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Hbqck6BTRX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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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환하게 미소 짓고 살아가는 것, 대단한 표징입니다!>
지금만 그런 줄 알았는데, 예수님 시대에도 특별한 표징만을 따라다니던 사람들이 있었던가 봅니다. 몰지각한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의 장탄식이 제 귓전까지 들려오는 듯합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르코 복음 8장 12절)
해도해도 너무한 유다인들이었습니다. 사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명확하고도 뚜렷한 표징이었습니다. 죽어가는 불치병 환자들을 말씀 한 마디로 치유시켜주셨습니다. 이미 죽은지 사흘된 사람마저 되살려주셨습니다.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수많은 군중을 배불리먹이셨습니다.
그런데도 유다인들은 노골적으로 또 다른 표징, 더 큰 표징, 더 신비스럽고 강력한 표징을 예수님께 요구했습니다. 그들의 불신앙과 몰염치함에 크게 실망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뒤로 하고 호수 건너편으로 넘어가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가운데도 분명 그런 사람들 있습니다. 어디 가나 특별한 현상을 찾습니다. 대규모 신앙 행사에 참석하면, 오늘은 뭐 없나? 하고 하늘만 올려다 봅니다. 촛불을 켜고 기도할 때도, 촛농이 조금만 이상하게 녹아내려도 큰 의미를 부여합니다.
지역 교구장님의 정식 교령에 의해 미사, 전례, 성사 집전이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불순명하며 선량한 신자들을 현혹시키고, 교회 분열을 초래하고 있는 나주 추종자들 역시 그렇습니다.
2011년 3월 30일자 공식 서한을 통해 교황청 신앙교리성은 나주 문제에 대해서 명확하게 판단을 내린 바 있습니다. “율리아의 추종자들이 기적의 사례들이라고 보내온 것들은 참된 그리스도교 신심과는 거의 연관성이 없어 보입니다.”
또한 신앙교리성은 나주의 기적이라고 알려진 사건들에 대해 교황청의 입장이 광주대교구 교구장의 입장과 동일하다는 것을 명확히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주 추종자들은 교황청이 조만간 자신들의 입장을 지지하고 승인할 것이라는 허위사실을 계속 유포하고 있습니다. 이거 다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판단 유보’니 ‘순례 허용’이라고 강조합니다. 더 새빨간 거짓말이니 절대로 속아 넘어가시면 안됩니다.
그들이 단골로 써먹는 미끼가 있습니다. 유치찬란함의 끝판왕입니다. 피눈물, 참젖, 황금향유, 율신액(창시자의 소변)... 그런 어이없는 대상들이 치유와 은총, 축복과 구원의 아주 중요한 도구랍니다.
이토록 어색하고 불편한 신심을 아직도 추종하고 따라다니는 분들의 조속한 회심을 위해 열심히 기도해야겠습니다.
우리 가톨릭교회가 지니고 있는 가장 1차적인 모습은 공번된 교회의 모습입니다. 보편적이고 통상적인 모습,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모습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신앙이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거나 부담스럽다면 진지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자연스럽고 평범하고 편안하다면 방향성이 괜찮은 것입니다.
특별하고 신비스런 표징이나 기적에 너무 연연하거나 집착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사실 예수님 시대와 사도 시대에 펼쳐졌던 표징이나 기적만으로도 차고 넘칩니다. 이제 공은 우리 손에 넘어왔습니다. 표징과 기적은 이제 우리 손으로 행할 때가 온 것입니다. 보잘 것 없는 우리를 생명으로 불러주신 것, 하루하루 하느님 은총 속에 살아가는 것 자체가 표징이요 기적입니다.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환하게 미소 짓고 살아가는 것, 대단한 표징입니다. 나도 힘겹지만 나보다 더 힘겨운 이웃을 향해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 엄청난 기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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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wEgXabYiGw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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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표징은 영광에서 시작하여 십자가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예수님께서 5천 명을 먹이시고, 4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하셨는데도 바리사이들은 여전히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죽었던 라자로가 살아나는 표징을 보고도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이 말씀은 교회 안에 우리를 먹여 새로 태어나게 하는 ‘은총과 진리’가 있는데도 그것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믿지 못한다면 그 사람에겐 희망이 없다는 뜻입니다. 어머니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으로 자녀에게 먹을 것을 주고 가르침을 주는데도 여전히 그분이 아버지임을 보여달라고 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믿을 마음만 있다면 어머니를 보고 아버지 사랑을 의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느 태국 광고에서 어머니 없이 자신을 키우는 아버지에 대한 딸의 마음을 닮은 편지 내용이 있습니다.
“아빠는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아빠다. 아빠는 가장 멋있다. 가장 똑똑하고 가장 영리하고 친절하고. 아빠는 나의 슈퍼맨이다. 아빠는 내가 학교에서 잘하기를 원한다. 아빠는 대단하다.
그러나 그는 거짓말을 한다. 직업을 가지는 것에 대해. 그는 거짓말을 한다. 돈을 버는 것에 대해. 그는 거짓말을 한다. 피곤하지 않다고. 그는 거짓말을 한다. 배고프지 않다고. 그는 거짓말을 한다. 왜냐하면, 나 때문에. 더 나은 삶을 살도록. 아빠 사랑해요.”
아빠는 왜 거짓말을 할까요? 사랑은 생색내는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그런 모습을 아이는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그런 아버지를 보며 차리라 학교에 가지 않는 편이 아버지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빠의 사랑은 자녀에게 점차적으로 주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위해 어머니가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곧바로 느낀다면 그 사랑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어느 정도 높은 경지에 도달한 성인들도 예수님의 아주 작은 당신의 계시에 까무러칩니다. 아빌라의 데레사도 수난당하시는 예수님상을 보고 엎어져서는 한없이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상의 비오 신부는 미살 때 성체를 바라보며 한 시간이 넘도록 눈물만 흘리셨다고 합니다. 비안네 신부는 사제가 성체의 참 의미를 알게 된다면 기절하지 않고 버틸 수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그 사랑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이끌어준 교회가 있기에 다행입니다.
따라서 먼저 교회가 베푸는 은총을 감당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나아갑니다. 아버지는 이를 위해 처음엔 자신을 조금 숨깁니다. 사랑은 생색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생색내는 아버지의 모습을 본다면 잘 자랄 수 없습니다. 사랑의 본성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내어주는 순수함에 있습니다. 그래야 나중에 알게 된 아이가 제대로 자랄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어머니가 존재하듯, 이를 위해 교회가 존재합니다. 먼저 어머니를 믿지 못하면 아버지께 갈 수 없고, 교회를 믿지 못하면 그리스도께 갈 수 없습니다.
김창옥 강사의 아버지는 술과 폭력과 도박, 그리고 폭군에다 호랑이였습니다. 김창옥 강사는 아버지가 가정을 파괴하는 주범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런 아버지가 되지 않으려고 술도 마시지 않고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낳지 않으려 했습니다. 김창옥 강사가 지금도 딸에겐 매우 자상하지만, 쌍둥이 아들에게는 대하는 게 매우 어색한 이유는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기에 자녀에게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 아버지가 임플란트하며 아들에게 돈을 내줄 수 없느냐고 전화를 했습니다. 아들은 당연히 내주겠다고 말했는데, 귀가 들리지 않는 아버지는 큰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막둥이냐? 아버지다……. 미안하다….”
아들은 아버지가 당연히 미안해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 작은 목소리로 미안하다는 말을 생전 처음으로 들었을 때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자녀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아픔입니다. 다 컸는데도 그렇습니다.
그 이전까지 아버지에게 용돈을 드린 적이 없었던 김창옥 강사는 공항에서 아버지에게 용돈을 처음으로 드렸습니다. 아버지는 그 돈을 세며 뒤돌아 걸어가셨습니다. 그 어깨가 축 처지고 한 다리를 저는 뒷모습을 보았을 때 아들은 그 자리에 앉아서 울고 싶었습니다. 아버지는 자녀를 아주 조금 사랑했어도 자녀는 그 사랑을 감당하기 쉽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자녀에게 기둥과 같은 존재입니다. 어렸을 때는 다 아버지처럼 되려고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무너진 작은 모습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 이것을 모든 아버지는 본능적으로 압니다. 아버지가 커야 자식도 기가 죽지 않았음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자신을 무너뜨리고 갈아 넣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아버지는 이 두 상반되는 모습에서 처음엔 자신의 사랑을 숨깁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역할을 어머니에게 맡깁니다. 아버지는 무너지면서도 굳건한 기둥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어머니의 사랑을 통해 아버지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우선 하느님의 모습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아버지께 자녀를 위해 파견받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그리스도께 파견받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 사랑의 표징이고, 교회는 그리스도 사랑의 표징입니다.
따라서 교회를 보면서도 또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보여달라는 것은, 어머니의 사랑을 보면서도 아버지의 사랑을 직접 보여달라는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는 어린 자녀에게는 하느님과 십자가에 달린 두 모습을 동시에 보여줄 수 없는 딜레마를 가졌습니다. 따라서 교회를 보면서도 그리스도를 보여달라는 그런 사람에게 더는 표징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가장 완전한 표징이 어머니인 것처럼, 그리스도의 가장 완전한 표징은 교회입니다.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 십자가의 참 의미를 발견할 때 우리는 비로소 새로 태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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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8,11-13 : 기적을 요구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
빵의 기적이 있은 뒤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의 속을 떠보려고 한다. 즉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참된 메시아로서 그것을 말씀과 행적으로 드러내셨다. 바리사이들은 그것의 사실 여부를 시험하려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을 아시는 예수께서는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12절)고 거절하셨다.
예수님의 이 거절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마음의 회개와 더불어 사람들이 하느님께로 이르는 영적이고 내적인 변화의 기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현세적인 물리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요구한 메시아적 징표란, 참으로 깜짝 놀랄만한 일로서, 요르단 강물을 갈라놓고 그곳을 지나다니는 길을 낸다든지, 말 한마디로 견고한 성벽을 무너뜨린다든지 하는 무력적이고 파괴적인 것이었다. 그러한 행위로 이스라엘을 억압하고 있는 로마를 정복하여 자신들이 타민족을 지배할 수 있는 현세적인 지상왕국을 만들어내는 징표를 보이라는 것이다.
파라오 시대에는 원수에게서 해방되어야 했기에 그런 표징들이 일어나야 했지만(탈출 3-15장 참조), 하느님이신 그분께 다른 표징을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뜻은 그것과는 다른 것으로 인간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방법으로 세상의 구원을 향하여 가시고 계시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은 어리석음의 상징으로 보이는 십자가를 통해서였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과연 어떠한 기적을 하느님께 청하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현세적인 부귀영화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사는가? 아니면 나 자신의 내적인 회개와 쇄신을 통해 하느님께서 부르시고 열어놓으신 구원의 길을 찾고자 하는지? 즉 나 자신의 변화를 위해서 기도하고 살아가고 있는지 반성해 보자. 가장 큰 기적이란 바로 나 자신의 변화라는 것이다. 내가 변할 때에 세상도 바뀔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발견하기 위해서 어떤 곳을 꼭 찾아가야 하는 것도 아니며, 어떤 사람에게 꼭 배워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어디서나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에게 항상 감사와 찬미를 드릴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사람에게서 배운다면, 아마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에 귀의 수준은 높아질 수 있을지 몰라도 삶이 없으면, 실천이 따르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모든 것 안에서 그분을 발견할 수 있는 나 자신으로 변화되는 기적을 항상 청하고 열심히 노력하자. 주님께 이러한 은혜를 청하며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성화를 위해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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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성경은 인류 첫 번째 형제인 카인과 아벨의 깊은 우애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질투와 시기로 시작된 감정이 살인으로 이어지는 끔찍한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형제 간의 갈등 원인은 하느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시고, 반대로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원인이십니다. 카인의 제물이 아벨의 제물보다 정성이 없었습니까? 성경 본문 어디에서도 그런 내용은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냥 그것은 하느님 마음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번만큼은 하느님께서 잘못하셨고, 원인을 제공하신 것이라고.
그런데 창세기 저자에게는 하느님께서 왜 카인과 그의 제물을 굽어보지 않으셨는지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저자의 눈은, 화를 내고 얼굴을 떨어뜨리면서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는 카인에게 관심을 표현하시는 하느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벨보다 카인을 더 돌보아 주시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카인은 하느님의 말씀과 설득에도 한마디 대꾸도 없이, 들로 나가 동생 아벨을 죽입니다.
하느님의 행동과 판단과 계획이 우리의 눈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고, 더 나아가 우리를 분노하게 만들 때도 있습니다. 카인의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잊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카인을 걱정하며 설득하십니다.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 하느님께서는 분노와 미움의 감정으로 가득한 우리를 오늘도 계속하여 설득하고 계십니다. 죄악을 다스릴지 아니면 죄악에 맡길지, 그 선택은 하느님이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이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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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믿음과 표징>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였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마르 8,11-13)
1) 이 이야기 바로 앞에는 예수님께서 빵 일곱 개로 사천 명 이상의 군중을 먹이신 이야기가 있습니다.(마르 8,1-10) 두 이야기가 바로 이어지는 이야기라면, 바리사이들은 ‘빵의 기적’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하고서, “그 정도의 기적으로는 당신을 믿을 수 없으니, 우리가 믿을 수 있도록 그것보다 더 놀라운 기적을 보이시오.” 라고 요구했을 것입니다. (바로 이어지는 이야기가 아니라면,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당신이 메시아라면 그것을 증명해 보이시오.”라고 요구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하늘에서 오는 표징’이라는 말은, 하느님만이 일으키실 수 있는 어떤 놀라운 기적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라는 말과 ‘표징’을 요구했다는 말은,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라고 예수님께 요구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깊이 탄식하신 것은, 그들이 믿고 싶어서 표징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믿기 싫어서 표징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믿으려고 하지도 않고 회개하려고 하지도 않고, 그래서 ‘구원’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것을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어떤 표징을 보여 주셨다면, 그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계속 시비를 걸면서 다른 표징을 또다시 요구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떠나신 것은, 그들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하신 것인데,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표징을 보여 주지는 않겠다는 뜻이고, 믿으라고 강요하지도 않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2)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첫 제자들’의 이야기는 믿음의 시작과 발전 과정을 잘 보여줍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은 것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가서,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예수님의 삶을 보고,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요한 1,35-39) (어떤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을 믿게 된 안드레아는 자기 형 시몬에게 가서,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라고 증언했고,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갔습니다.(요한 1,41-42) 또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제자가 된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가서,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라고 증언했고, 예수님을 만나보라고 권고했습니다.(요한 1,43-46) 필립보와 나타나엘의 이야기에도 표징에 관한 말은 전혀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 교회는 ‘증언’에서 ‘증언’으로 이어진 교회입니다. 오늘날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도 사도들과 순교자들과 선배 신앙인들의 증언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선교활동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의 믿음을 증언’합니다.)
3) 마르코복음서 끝부분에, 예수님께서 표징들을 통해서 제자들을 도와주셨다는 말이 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마르 16,19-20)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라는 말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을 통해서 주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셨다는 뜻입니다.)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라는 말은, 제자들이 일으키는 기적은 그들이 전하는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증명하는 표지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항상 ‘말씀’이 먼저이고, ‘표징’은 그 ‘말씀’을 도와주는 보조수단입니다. (‘말씀’을 믿는 일이 먼저이고, ‘표징’은 그 믿음을 더욱 확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보조수단입니다.) 따라서 ‘표징’은,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억지로 믿게 만드는 힘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에게 내리는 은총입니다.
4) 예수님께서는 이런 경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나, 할 수만 있으면 선택된 이들까지 속이려고 표징과 이적들을 일으킬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조심하여라. 내가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해 둔다."(마르 13,22-23) 이 말씀에서,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일으키는 ‘표징과 이적들’은 표징과 기적을 흉내 내는 속임수일 수도 있고, 속임수가 아닌 실제로 놀라운 어떤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놀라운 어떤 일이라 하더라도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면 모두 거짓 표징이고, 거짓 기적입니다. (마귀들도 표징과 기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고을에는 전부터 시몬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마술을 부려 사마리아의 백성을 놀라게 하면서 자기가 큰 인물이라고 떠들어 댔다. 그리하여 아이에서 늙은이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사람이야말로 ′위대한 힘‵이라고 하는 하느님의 힘이다.’ 하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사도 8,9-10) 사람들은 마술에 현혹되어서 시몬이라는 마술사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흔히 보는 사이비 종교의 모습입니다.
5) 이미 예수님을 믿고 신앙인이 되어서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 말씀’을 듣지는 않고, 또 ‘말씀’대로 살지는 않고, 기적만 바라면서 신기한 일과 놀라운 일만 찾아다닌다면, 시몬이라는 마술사에게 현혹되어서 거짓말에 귀를 기울인 사람들처럼 되거나, 예수님을 믿지는 않고 표징만 요구했던 바리사이들처럼 될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올바른 신앙의 길을 떠나서 사이비 종교에 빠지게 됩니다.) ‘기적’은 내가 바란다고 일어나는 일도 아니고, 나의 힘으로 내가 내 마음대로 일으킬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기적은 주님께서 필요하다고 판단하실 때에 예외적으로 일으키시는 일입니다. 표징이 없어도, 기적이 일어나지 않아도, ‘말씀’을 믿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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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1월 20일 미국 대통령의 취임식이 있었습니다. 미국 대통령의 취임식은 아름다운 전통이 있었습니다. 선거의 결과가 나오면 승자에게는 축하의 박수를, 패자에게는 위로의 인사를 전하는 것입니다. 현직 대통령이 선거에서 지는 경우에는 새로운 당선자를 백악관에 초대해서 차를 마시고, 직접 백악관을 안내하는 것입니다. 평화로운 권력인계를 위해서 협조하는 것입니다. 정권은 교체되지만 국가의 안보와 경제는 계속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대통령의 취임식에 전직 대통령이 함께하면서 축하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245년 동안 이어진 아름다운 전통이며, 자랑이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민주주의의 ‘꽃’이 될 수 있었습니다. 미국이 국제사회에서 인정받는 것은 경제력과 군사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미국식 민주주의와 합리적인 삶의 태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번 46대 대통령 취임식은 예전의 아름다운 전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현직 대통령이 선거의 결과에 불복하였고, 소송을 제기하였습니다. 당선인에게 축하의 인사를 하지 않았고, 백악관에 초대하지도 않았습니다. 지지자들에게 행동하라고 선동하는 연설을 하였습니다. 급기야 1월 6일에는 미국 국회의사당에 폭도들이 난입하였고, 사람들이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경제력과 군사력은 세계 최고일지 모르지만 정치와 민주주의에서는 실망을 넘어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2번이나 의회에서 탄핵되는 오점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코로나19에 대한 방역도 실패하였으며 가장 많은 확진자와 사망자가 나오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국민에게 선택받지 못한 것을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아름답게 퇴장했으면 박수를 받았을 것입니다. 존경받는 대통령으로 기억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비슷한 경우를 보았습니다. 카인과 아벨이 하느님께 제물을 드렸지만 하느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을 더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아벨이 하느님께 선택받았습니다. 카인은 아벨에게 축하의 인사를 했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제물이 선택받지 못한 이유를 생각하고, 반성했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정성이 부족했을 수도 있습니다. 제물에 문제가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동생에게 물어볼 수도 있습니다. 동생은 형에게 하느님께서 받아주신 제물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을 것입니다. 겸손하지 않았던 카인은 동생을 시기하였습니다. 동생만 없으면 하느님께서 제물을 받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동생을 들판으로 데리고 나가서 죽이고 말았습니다. 국민에게 선택받지 못한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지낼 수 없듯이, 하느님께 선택받지 못했고, 동생을 죽였던 카인은 고향에서 쫓겨났습니다.
성서는 인류의 첫 형제가 서로 아껴주고, 보듬어주고, 사랑하며, 도와준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요? 역사는 담담하게 이야기 합니다. 조선의 개국 당시에 ‘왕자의 난’이 있었음을 말해 줍니다. 권력 때문에 사랑해야 할 형제들이 서로 싸우고, 죽였습니다. 1950년에 있었던 ‘한국전쟁’은 사상과 이념 때문에 사랑하는 동포의 가슴에 총을 겨누었던 비극의 역사입니다. 끊임없이 분쟁이 벌어지는 중동의 전쟁은 역시 형제들의 다툼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들인데 지구촌에는 가난, 굶주림, 질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인류의 사망 원인은 자연재해와 질병 그리고 다른 동물의 공격도 있었지만 많은 경우에 서로 죽이고 죽는 전쟁 때문이었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형제의 이야기는 지금도 현재 진행형의 이야기입니다.
어릴 때 국어책에서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배려하는 형제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형은 이제 막 장가를 간 동생을 위해서 자신의 논에서 소출한 벼를 동생의 논으로 가져다줍니다. 동생은 자녀들이 많은 형을 위해서 자신의 논에서 소출한 벼를 형의 논으로 가져다줍니다. 달빛이 아름답게 빛나는 밤에 형제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감사와 기쁨의 눈물을 흘립니다. 참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1997년 우리나라는 IMF라는 높은 파도를 스나미처럼 맞이해야 했습니다. 당시에 형님은 부도가 나고 말았습니다. 그때부터 부모님을 제가 모시게 되었습니다. 커다란 어려움을 겪었으면서도 신앙을 잃지 않고 가족들이 서로 아껴주며 살아가는 형님과 형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벌써 24년이 지난 일입니다. 돌아보면 그런 일도도 다 감사할 뿐입니다. 덕분에 제가 효도할 기회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표징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 배려하고, 아껴주고, 존중하며 하느님의 뜻이 세상에 드러나도록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에게 새로운 계명을 줍니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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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소명>
마르코 8,11-13 (바리사이들이 표징을 요구하다)
그때에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였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
<소명>
하늘에서
오지 않은 것이
무엇이랴
땅에서
솟지 않은 것이
무엇이랴
모든 것에
하늘과 땅이
담겨있으니
하늘을
우러르고
싶거든
땅을
아우르고
싶거든
지금여기
곁을 두루
보듬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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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이정호 요아킴 신부님]
신학생이던 시절에 이 길이 내가 가야 할 길인가를 고민하면서 하느님께 분명하게 알게 해달라고 기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기도 끝에 ‘성직자의 길이 제가 가야 할 길이라면 알기 쉽게 표징을 보여주십시오’라고 청하였습니다.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만 ‘어떤 표징을 주신다면 신학교에 남고 그렇지 않으면 짐을 싸겠습니다’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요구한 표징은 보이지 않았고 결국 저는 하느님께서는 내가 성직의 길을 걷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나보다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내 마음대로 요구한 우연한 표징 하나에 제 인생을 건다는 것이 참으로 미련스럽게 여겨져 죄송한 마음에 다시 한 번 기도하고 마음을 다잡은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확실한 표징을 보고 싶어하지만 표징을 보았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표징을 볼 수 있습니다.
특별한 표징도 있겠지만 하느님의 일을 믿고 신뢰하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표징이요. 그러기에 또 다른 표징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는 곳에는 표징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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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이재학 예로니모 신부님]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
오래전에 상영된 영화 <기적>이 있다. 그 영화는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떠난 수녀를 대신해 수녀원의 성모상이 그 수녀로 변해 돌아올 때까지 대신 수도 생활을 한다는 내용이다. 수녀가 돌아오자 성모상이 있던 자리로 스윽 올라가는 성모님의 그림자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중학교 때 그 영화를 처음 보았던 것 같은데, 그때는 성모상이 수녀로 변신해서 오랜 시간을 그 수녀로 살았던 일이 기적이고, 영화 제목도 그래서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중에 다시 영화를 보고, 생각해 보니 그런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 기적이 아니라 주인공 데레사 수녀가 방황 속에서 다시 하느님의 사랑을 찾고, 자신의 삶의 소중함을 깨달아 본래 자리로 돌아와 무릎 꿇는 것, 그녀 스스로 하느님의 사람으로 먼 길을 돌아온 것이 진정한 기적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신기하고 놀라운 일은 기적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림자는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한다. 신기하고 놀라운 일을 보아야 믿겠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런 태도가 영 잘못되었다고 질책하신다. 기적의 본모습을 알아봐야지 그림자만 쳐다보려 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손가락을 들어 달을 가리키면 달을 보아야지 손가락 끝만 보아서는 안 된다.
어디서 성모상이 눈물을 흘린다고 호들갑을 떨면서 신기해 쫓아다니는 것은 그림자를 부여잡으려는 바보짓과 같다. 신기한 일만 붙잡을 것이 아니라 그 뜻이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 예수님과 성모님은 사랑과 일치를 주시는 분이시다. 사랑과 일치에 어긋난다면 그 신기한 일은 기적도, 참된 것도 아니다. 표징만을 쫓는 바리사이는 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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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분도회 이성근 사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보여 달라는 바리사이들의 요구를 거절하시며 깊이 탄식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과,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마귀를 쫓아내시는 위대한 업적을 어느 정도는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하느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의심하였고, 그래서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하느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 사명을 주실 때, 표징을 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바리사이들이 표징을 요구하는 것이 잘못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표징을 거부하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표징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주시는 것이지, 사람이 자기 입맛에 맞는 표징을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하느님께 표징을 요구하는 행위를 불신앙의 표시로 여겼습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 뜻에 따라 살아야 하지, 하느님을 우리 마음대로, 우리가 원하는 대로 부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역사 안에 들어오셨고,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수많은 기적을 보여주셨는데도, 그것을 표징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표징을 요구하는 바리사이들의 불신앙에 예수님께서는 깊이 탄식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도 2,000년 전으로 돌아가 예수님의 모습을 실제로 볼 수 있다면 우리 신앙이 더욱 굳건해질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미사 안에서 빵과 술의 형상으로 당신을 내어 주시는 주님을 믿을 수 없다면, 실제로 그분을 본다 해도 달라질 것은 없을 것입니다. 성체로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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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희극 배우 찰리 채플린의 유명한 일화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가 했던 모든 작품이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끌자 한 기자가 찰리 채플린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여러 작품이 모두 히트를 했는데 그중 최고로 꼽는 작품은 무엇입니까?”
저 역시 그가 했던 영화를 거의 봤기 때문에 최고로 꼽을 수 있는 작품이 무엇일까 생각했습니다. 제가 생각했던 최고의 작품은 기계화되는 인간을 보여준 ‘모던타임즈’가 아니었을까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답은 이러했습니다.
“다음 작품입니다.”(Next One.)
과거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그의 강한 의지를 엿볼 수가 있습니다. 그는 오직 미래를 생각하면서 현재에 충실했던 것입니다.
과거에 얼마나 많이 연연하는 우리일까요? 미래에 그리고 현재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떠올릴 필요가 없는 과거인데, 또 떠올린다고 해서 바뀌지도 않는 과거인데, 많은 이가 이 과거에 연연하면서 현재를 만족스럽게 살지 못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점을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께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놀라운 표징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을 고쳐 주셨고, 마귀들을 쫓아냈습니다. 또 빵의 기적도 행하셨습니다. 그밖에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얼마나 많이 보여주셨는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표징을 요구합니다.
그들이 요구했던 표징은 무엇이었을까요? 이스라엘에게 해방을 가져다줄 정치적 메시아를 원했다는 것을 기억할 때, 그들은 사람을 고치고 배 불리 먹고 또 마귀를 쫓아내는 것이 중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보다 그들이 보고 싶은 표징은 과거 모세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기 위해 보여주었던 하느님의 표징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표징은 전혀 보여주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표징은 그 자리에서 가장 필요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 자리에서 가장 필요한 것을 불완전한 인간의 눈으로 알아볼 수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많은 표징을 보고서도 알아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볼 수 있는 눈도 없으면서 계속 표징만 보여달라는 억지만 부리고 있었던 것이지요. 주님은 과거에 연연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미래를 바라보게 하면서 현재에 충실할 수 있도록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를 말씀하시면서, 이미 우리 곁에 왔다고 하신 것이었습니다. 지금 무엇을 바라보면서 현재를 살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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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연히 텔레비전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떤 프로그램 전에 광고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먼저 아웃도어 광고입니다. 아주 멋지고 아름다운 장소를 여행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광고를 보면서 세상에는 모험과 구경거리가 가득한 곳임을 깨닫습니다.
뒤이어 화장품 광고가 나왔습니다. 이곳에 등장하는 모델을 보면서 세상에는 미남, 미녀들이 정말로 많구나 싶었습니다. 다음은 텔레비전 광고였습니다. 최신 과학기술이 접목된 텔레비전을 알리는 광고를 보면서, 최신기술에 발맞춰서 살아야 할 것만 같습니다.
광고를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광고의 목적은 소비입니다. 그래서 광고를 보면서 ‘사고 싶다’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를 목적으로 촬영을 했을 테니 말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 광고를 보면서 위축되기도 합니다. 멋지고 아름다운 장소를 여행하기에는 시간이 없고, 화장품 광고에 나오는 모델와 달리 외모가 형편없고, 최신기술에 발맞춰 살기에는 머리가 따라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소외를 느끼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소외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소비를 목적으로 하는 광고를 보지 않으면 됩니다. 그리고 나의 삶을 살면 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나와 다른 것들과 비교하는 것에 매이게 되면 자유로운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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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삶의 자리가 기적의 자리>
청주교구 감곡매괴성모순례지 성당 안에는 수난 받은 성모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매괴성모님상은 루르드에서 제작하여 1930년 대성전 건립당시 제대뒤편 중앙에 안치되었습니다. 한국전쟁 때 성당은 인민군의 사령부로 사용되었고 인민군이 성모상을 없애려 총을 쏘았는데 7발을 맞았는데도 부서지지 않았고, 그래서 성모상을 없애 버리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끌어내리려 하였으나 성모님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며 힐책하는 모습으로 바라보셔서 인민군들은 성모상을 더는 건드릴 수 없었고, 그때부터 성당에서 철수하였다고 합니다. 6,25가 지난 후부터는 이 성모상을 ‘칠고의 어머니’로 불리게 되었고 많은 사람이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고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치유의 성모님'이라고도 합니다.
많은 분이 성모님 앞에서 기도하게 되는데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총을 겨누는 것은 하나의 미움이요, 분노, 증오, 시기, 질투, 적개심으로 생각해 볼 수 있고 7발의 총탄에도 부서지지 않았다는 것은 그 미움과 증오의 마음을 모두 가슴에 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원수의 총을 맞고도 하늘을 우러러보시는 모습으로 여전히 두 손을 모으고 계신 모습인데 마음이 천상을 향하고 계셨기에 모두를 품으실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용서와 화해, 자비와 한없는 사랑을 권고하며 어떠한 상황 안에서도 천상을 향하고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고 계십니다.
저도 그렇습니다만 사람들은 신비한 현상에 민감합니다. 어디에 어떤 기적이 있다고 하면 그곳에 쫓아가고 그 혜택을 입고자 애를 씁니다.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그 신비한 현상이나 표징을 통하여 드러내 주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뜻을 찾기보다는 현상에 더 많은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현실입니다. 은총을 주시는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주어진 은총의 결과에 매달리고, 삶을 변화시키기보다 오히려 신비한 것을 목격했다는 것을 자랑삼아 얘기하며 교만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을 베풀어 주셨음에도 많은 사람은 하늘의 기적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일도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보여주기 위해서 오신 쇼맨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결코 보여주기 위한 기적, 기적을 위한 기적을 행하진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기적을 많이 보고 체험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기적의 삶을 사는 것이 소중합니다. 사실 어떤 성모님 상을 모시든 그 앞에서 그분의 마음으로 많이 기도할 수 있다면 기적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사실 기도할 수 있는 자체가 이미 은총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사랑을 베풀고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며 소외된 사람들의 상황을 바꾸어 주시며 영원한 삶을 살아도 그것은 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그것이 살아있는 기적입니다. 그리고 어떤 특별한 기적을 베풀어 준 것은 그 기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적 사건 안에 담긴 의미, 메시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현상을 쫓아다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지금 나의 삶의 자리에서 기적의 삶을 살지 못한다면 하늘의 기적이 아무리 많이 일어난다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뭘 보여 달라고 조르지 말고 기적을 만드시길 바랍니다. 기이한 현상을 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현상을 통해 주님을 만나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미루지 않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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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지혜의 눈>
-우리가 카인이다-
요즘 제1독서 창세기의 내용이 참 흥미롭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날에도 여전히 현실감있게 마음에 와닿는 보편성을 띄는 내용들입니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듯 아담의 죄로 인해 줄줄이 죄의 세계가 열려가는 모습입니다. 오늘은 창세기는 카인이 아벨을 무자비하게 살해함으로 비극의 시작입니다. 살인 사건의 단초가 된 내용을 소개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 보셨으나,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 그래서 카인은 몹시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뜨렸다. 주님께서 카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어찌하여 얼굴을 떨어뜨리느냐?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그 죄악을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
이런 상황에서 카인을 비난할자 누구이겠는지요? 카인 역시 질투와 분노의 보편적 인간상을 보여줍니다. 하여 ‘카인의 후예’라는 소설도 있습니다. 저도 이런 유사한 추억이 있습니다. 초중등학교 시절 1.2등을 다퉜던 여학생이 있었는데 때로 저 여자 애가 없었으면 내가 늘 1등을 했을 터인데 하는 생각도 언뜻 들 때도 있었습니다. 바로 내 안에 있는 카인이지요.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는 이름 석자입니다.
삼국지에 나오는 오나라의 장군, 주유가 이른 나이에 병사하면서 평생 숙적인 제갈량을 두고 남긴 말도 생각납니다. “하늘은 이미 주유를 낳았는데, 어찌하여 또 제갈량을 낳았단 말인가(기생유 하생량;旣生瑜, 何生亮)!” 최대의 라이벌 제갈량을 낳은 하늘을 원망하는 주유 장군에게서 카인의 모습을 봅니다.
바로 이런 질투와 분노에 눈멀 때 누구나의 가능성이 카인입니다. 카인이 좀 더 냉정했다면 주님의 말씀에 귀기울여 자신을 들어봤어야 했을 것입니다. 정말 자기를 아는 것이 지혜와 겸손입니다. 참으로 카인이 주님의 알 수 없는 편애에 분노할 것이 아니라 이런 결정적 시험과 시련을 지극한 인내로 슬기롭게 견뎌냈어야 했습니다.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마음 깊이 담아두고 곰곰이 되새기며 끝까지 인내하며 자신의 존엄한 품위를 견지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조건반사적 감정적 ‘반응reaction’이 아니라 깊은 생각에서의 인격적 ‘응답respondence’이 필요한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이랬다면 주님께서도 카인이 한없이 고마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카인은 질투와 분노에 눈이 멀어 돌이킬 수 없는 살인의 범죄로 아우를 죽였습니다. 죽은 목숨은 다시 살릴 수 없으니 아무리 후회한들 소용이 없습니다. 평생을 살아도 그 죄의 아픈 상처는 안고 살아야 하니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예전 민주화 운동중 자식들을 잃고 투사로 변한 어머니들의 ‘내 죽은 아들을 살려내라!’는 피맺힌 절규도 생각납니다. 이어지는 주님과 주고 받는 대화도 의미심장합니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흡사 주님의 아담에 대한 ‘너 어디 있느냐?’의 물음을 연상케 합니다. 이때라도 카인은 죄를 고백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카인의 주님께 대한 분노와 불만이 가득 담긴 너무 안면몰수의 뻔뻔한 항의성 답변입니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창세기 저자의 심리 묘사가 인간 본질을 깊이 뚫어 볼 정도로 참 심오합니다. 이어 아담처럼 카인도 삶의 터전에서 쫗겨나 유랑의 처지가 되었지만 주님의 보호는 계속될 거라는 약속을 주십니다. 인간의 죄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자비는 계속됩니다. 비극의 역사지만 계속되는 삶의 역사입니다. 결국 아담-하와 부부는 카인과 아벨 두 아들을 잃고 말았으니 그 아픔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오늘날에도 갖가지 불의로 인한 자녀들의 억울한 죽음으로 이런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어머니들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비극의 역사지만 산 사람들은 슬픔을 이기고 살아내야 합니다. 주님은 다른 아들 셋을 선물하셨고 이어지는 하와 어머니의 고백입니다. “카인이 아벨을 죽여 버려, 하느님께서 그 대신 다른 자식 하나를 나에게 세워주셨구나.” 하면서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다 합니다.
질투와 분노 역시 무지의 결과입니다. 이처럼 탐욕, 질투, 분노, 어리석음으로 드러나는 무지의 병이 얼마나 인간의 고질병인지 알게 됩니다. 그러니 평생 영적 전쟁이 무지와의 전쟁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무지에 눈먼 바리사이들을 봅니다. 있는 그대로의 실상이 아니라 고정관념, 선입견, 편견으로 무지의 색안경을 쓰고 보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기인하는 착각과 오해는 얼마나 많은지요!
어제 교황님의 “편견을 극복하고 타인의 삶을 품에 안으라.” 삼종기도후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당대 최고의 강론가 교황님의 강론 특징은 군더더기나 사적인 것이 전혀 없는 그러나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공적이며 보편적이며 본질적이라는 것이며 깊고 쉽고 실제적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무지에 눈먼 바리사이들은 그동안 예수님이 일으킨 무수한 표징을 보고도 하늘에서 내려 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참으로 눈밝은 지혜의 눈, 혜안을 지니신 예수님은 이들의 유혹을 떨처 버리고 바람처럼 지체없이 떠나시는 모습이 참 아름답고 통쾌합니다. 정말 지혜로운 사람은 진퇴進退가 뚜렷한, 떠날 때 잘 떠나는 사람입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
시공을 초월하여 모든 세대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지혜의 여정은 떠남의 여정과 직결됩니다. 평생 무지와의 영적전쟁중인 우리들입니다. 영적 전사의 최고의 롤모델은 예수님 한분 뿐이십니다. 예수님과 일치가 깊어질수록 무지에서의 해방이요 지혜로운 삶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무지와의 영적전쟁에 필요한 온갖 지혜와 사랑을 선물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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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영적 여정에서 유혹이 다가올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보여 주십니다.
"카인은 땅의 소출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고, 아벨은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을 바쳤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으나,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창세 4,3-5)
편애처럼 느껴지는 주님의 반응에 대해서 성경 저자는 "땅의 소출"과 "맏배들과 그 굳기름"이라는 말을 통해 함축적으로 설명합니다. 아벨의 제물인 "양 떼 가운데의 맏배와 굳기름"은 가장 소중한 제물을 가리키지요. 모든 맏배는 주님의 것이고, 특히 짐승의 굳기름은 '피와 비슷하게 일종의 생명의 자리로 여겨질'만큼 중요했다고 하지요.
이에 비해 카인의 제물에 대해서는 "맏물"이나 상태를 가늠하는 표현 없이 그저 "땅의 소출"이라고만 적었습니다. 성경을 읽는 이들은 두 제물의 차이를 통해 봉헌의 마음가짐을 미루어 짐작할 뿐이지요.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창세 4,7)
카인이 아벨을 질투하자 주님께서 카인에게 이르십니다. "옳게 행동"하지 않은 구체적인 사례에 대해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이미 하느님 눈앞에는 드러났을 터이지요. 화답송에서 시편저자는 "너의 번제야 언제나 내 앞에 있다."라고 주님의 마음을 노래합니다. 만물의 주인이신 분께서 무엇이 필요해서 제사를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제물을 바치는 이와의 충실하고 친밀한 사랑의 관계성을 기대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유혹은 우리의 빈틈을 노립니다. 우리의 옳지 못한 탐욕과 욕망의 실마리를 붙잡고 영혼의 문턱까지 들어선 죄악이 그 앞에서 덮칠 틈을 노리며 도사리고 있습니다. 기회를 노리는 유혹에 문을 열어줌으로써 죄악으로 기우느냐, 마음을 바로 세워 오히려 그 죄악을 다스리느냐는 영적 여정에서 자주 마주치게 되는 갈림길입니다.
오늘 복음은 당신을 시험하려는 바리사이들에게 단호히 대처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마르 8,11-12)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베푸신 가르침이나 치유, 구마 기적으로는 그분의 신원을 인정할 수 없었던 걸까요? 그래서 자신들이 납득할 때까지 새로운 표징을 요구한 걸까요? 하지만 어떤 표징도 그들을 만족시킬 수 없을 겁니다. 제도권 밖에 머무르며 율법의 문자보다 정신을 중요시하는 예수님은 기존 종교 기득권자들에게 오히려 위협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이미 답을 가지고 출발한 이 논쟁은 진리에 대항할 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넘어가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몇 가지 그럴듯한 기적들을 보여주시면 당신 신원에 대한 그들의 동조를 끌어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는 당장의 우쭐한 명예와 인정받음, 소속의 안정감이 중요하지 않으시지요. 바리사이들의 불신 앞에서 솟아나는 그분 마음의 깊은 탄식은, 겉은 멀쩡하나 속은 단단히 병든 가련한 이들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나옵니다.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마르 8,13)
되찾은 양의 비유에서처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목자의 사랑에 익숙한 우리에게 오늘 예수님의 모습은 신선하게 다가옵니다. 이 서슬 퍼런 단호함! 이 결단!
예수님은 그렇게 악을 내버려두고 떠나십니다. 지금은 그들의 구원을 위한 때가 아님을 아시니까요. 유혹이 우리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미끼를 던질 때, 호기심에 몇 마디 주고받으며 기회를 주다가 말려들어가기 일쑤인 우리에게 예수님의 이 단호한 결단은 많은 가르침을 줍니다.
이야말로 주님이 카인에게 말씀하신 "죄악을 다스리는" 방법일 겁니다. 온전히 죄악과 분리되어 살아갈 수 없는 부족하고 나약한 죄인인 우리에게도 그 죄악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이 있다는 뜻입니다. 죄악에게 기회를 주지 말고 얼른 그곳을 떠나 주님께 몸을 던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은총의 사순 시기를 기다리며, 주님의 단호함에서 배우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모든 걸 아시는 주님 앞에서는 '대충 좋은 게 좋은 거'가 아니라, '아닌 건 아닌 것"입니다. 자기애와 분별 없고 무질서한 애착을 단호히 박차고 떠나, 마음을 보시는 주님께 진정한 사랑을 바치는 단계로 넘어가는 영적 여정을 걷고 있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새해 축제의 여운을 뒤로하고 이제 지척에 다가온 사순 시기를 하루하루 잘 준비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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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새해에 시간 속을 진리로 걸으며 :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우리들에게는 시간을 크로노스(chronos, 시계 시간)로 보려는 유혹이 끊이지 않는다. 크로노스는 단순한 시간의 흐름이요, 일련의 불연속적인 우연한 사건들이다. <시계 시간>은 산업사회에서 노동을 통해 많은 물건을 생산 가치, 곧 物質을 추구하고, 돈을 숭배하는 맘몬이즘, 맘몬(mammon)은 ‘부유함’을 뜻하는 부정적 의미이다. 맘몬(mammon)은 물신物神으로 재물을 신처럼 섬기는 하느님에 대적하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을 믿는 눈으로 시간을 보는 것을 카이로스(chairos, 질적 시간)라 한다. 즉 質的 시간은 일상에 일어난 일과 사건 안에 들려오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어서 그 사건을 성령의 힘을 받아 하느님의 뜻과 말씀에 따라 해석하고, 실천함으로써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된다. 시간은 단지 통과하거나 조종하거나 관리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일터로 바뀐다. 좋은 일이든, 궂은일이든, 신나는 일이든, 골치 아픈 일이든, 무슨 일이 닥치든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하느님이 여기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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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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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4천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에 이어, 예수님께 대한 바리사이들의 시험을 전해줍니다.
복음사가는 이렇게 전해줍니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마르 8,11)
그들은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마치 모세 때에 광야에서 내린 ‘만나’(탈출 16장)나, 여호수아의 간구로 해와 달이 멈춰졌던 일(여호 1,12-14)과 같은 하늘에서 오는 초자연적인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저의는 이러한 표징과는 상관없이 예수님을 넘어뜨리는 데 그 초점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너뜨리기 위해서 시험합니다.
마치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하여 넘어뜨리기 위해, “유혹자가 그분께 다가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에게 빵이 되라 해보시오.”(마태 4,3)라고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메시아인지를 스스로 증명해보이라는 지극히 도전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치 심문하듯이 예수님을 다그쳤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탄식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르 8,12)
이에 대해서, <마태오복음>의 병행구절에서는 표징을 분별하지 못하는 이유와 표징을 요구하는 이유도 밝혀줍니다.
“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징은 분별하지 못한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의 표징밖에는 아무런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태 16,3-4)
그렇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메시아의 시대의 표징을 드러내셨지만, 바로 앞 장면의 ‘4천명을 먹이신 기적이야기’를 통해서도 드러내셨지만, 표징을 받아들이지 않음은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임을 말해줍니다.
오늘, 도처에서 드러내시는 당신의 신성을 보고 또 보고 보면서도, 여전히 무시하고 거부하고 있는 우리의 마음이 바로 그럴 것입니다.
과학자 아인쉬타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한 부류는 세상에는 기적이 없다는 사람들이요, 또 한 부류는 세상의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다. 나는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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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마르 8,12)
주님!
당신의 진실은 오늘도 저의 믿음을 다그칩니다.
불신으로 왜곡된 마음을 밝혀주소서.
가리고 눈 감은 마음을 뜨게 하소서.
도처에서 드러내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당신의 신성을 보고 또 보고 보면서도 무시하고 거부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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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르8,12)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기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들의 이 요구는 예수님께서 일으키시는 기적을 보아야만 예수님을 하느님의 메시아로 믿겠다는 요구입니다.
기적을 요구하는 세대, 그 바리사이들이, 지금 우리의 모습, 나의 모습은 아닌지? '우리가 주님께 요구하는 기적', 그것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내 뜻이 이루어지는 기적'이 아닐까?
반면 '주님께서 지금 우리 안에서 일어나기를 바라시는 기적'이 있는데, 그 기적은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기적'이 아닐까?
우리 안에는 두 부류의 믿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부류는 토마스나 바리사이들처럼 '보아야만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인데, 그들은 '내 뜻이 이루어지는 그런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입니다. 또 한 부류는 '보지 않고서도 믿는 사람들'인데, 그들은 내 뜻이 아닌,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그런 기적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어떤 부류의 사람이고, 나는 어떤 기적이 내 안에서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는가?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들, 그래서 늘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려고, 그런 기적을 만들어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표징, 그런 기적이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주님이십니다.
내 뜻 안에 갇혀 있고, 내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바라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자기의 것을 받아주시지 않았다고 해서, 화를 내며 동생 아벨을 죽인 카인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온 세상이 주님께서 바라시는 기적으로 가득할 수 있도록, 보지 않고도 믿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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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dpUahk4aCKM&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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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마르 8, 12)
예수님
자체가
표징이며
기적이며
선물이다.
표징이
가야할 길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복음의 길이다.
마음이 없으면
표징도 보이지
않는다.
생명보다
더 큰 표징은
있을 수 없다.
표징을 결코
나의 틀에
가두어
둘 수 없다.
표징을
가둘 때
표징의
요구는
폭력이 된다.
표징은
순리이다.
하느님의 뜻대로
흘러가는 것이다.
복음으로부터
멀어지는 것도
표징을 요구하는
우리자신이다.
일상의 자리가
표징의 자리이며
복음의 자리이다.
표징은 우리
내부에 있다.
표징은
아픔을
껴안는다.
표징은
마음을
알아차린다.
표징을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우리가
거쳐 온
수많은
표징들을
떠올려본다.
모두가
은총의
표징이었다.
예수님께서
계시는데
표징을 요구하는
어리석은
우리들이다.
우리가
집착하는
표징을 깨야
예수님
그 자체를
만난다.
그래서 우리
일상이 표징이
되고 마음의
장벽을 허무는
소통이 표징이
되는 것이다.
살리는
관계의
표징으로
나가야한다.
마음 없는
표징은
가짜이다.
사람이
표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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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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