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속도보다 중요한 것"
[빌립보서 3:1-14]
개미는 자기 몸에 40배나 되는 물건을
들 수 있습니다.
사람은 기껏해야 3배를 드는 것에 반해
엄청난 힘을 자랑합니다.
그걸로 거대한 애벌레도 옮기고,
모래알도 이동합니다.
여름 내내 쉬지 않고 일을 합니다.
그런 개미가 다른 개미와 싸우다가
더듬이를 잃어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갈 길을 찾지 못해 제자리에서
빙빙 돌고 맙니다.
개미는 더듬이를 이용해서
방향을 압니다.
그런데 더듬이가 끊어지면
방향을 잃고 그 자리를 돕니다.
자기의 몸의 몇십 배를 들 정도로
엄청난 힘을 가진 개미지만,
더듬이가 고장나면 마땅히 가야할 길을
가지 못합니다.
개미의 모습을 보며
오늘날 우리의 삶이 떠올랐습니다.
우리 모두 개미들처럼
치열하게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을 가만히 돌아보면
더듬이를 잃은 개미처럼
어디로 갈지 몰라 헤매고 있음을 봅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예수를 믿는 우리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우리도 똑같이 헤맬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박영선 목사님은
그의 저서 <믿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은 목표를 향해 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도 목표가 없으면
잘못된 길을 걷는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목표가 명확한 사람일수록
인생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그랬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알길 소망했고,
부활의 권능을 깨달아
그 고난에 참여하고자 했습니다.
바울 정도면 이미 주님을 알고,
부활도 깨닫고, 고난도 실컷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 찾듯이
여전히 달려갈 길이 남았다며
갈급해 합니다.
왜 그럴까요?
부름의 상 때문입니다.
본문 13-14절을 읽어봅시다.
빌립보서 3:13-14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그는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께서
분명히 예비하신 부름의 상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마라톤 선수들이 42.195km를
왜 쉬지 않고 달립니까?
몇 시간을 죽어라 뛰는 이유가 뭡니까?
마지막 결승점에서 받을
'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1등은 아니더라고 참가상이라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걸 위해 뛰고 또 뛰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도 이와 같습니다.
예수를 위해 뛰고 또 뛰다보면
반드시 예비하신 상이 있습니다.
이걸 바라보면서 뛰어나 뛸 맛이 납니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이전에 경험했던 사건들을
잊어버리겠다는 말입니다.
성공과 실패, 환희와 눈물 등
과거의 삶에 나를 묶지 않겠다는 결단입니다.
이게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과거 자신이 이룬 성공에
지나치게 집착합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아?'
'라떼는 말이야.‘
성경에 사도바울만큼 대단한 인물은
많지 않습니다.
그는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자를
걷게 했습니다.
또한 감옥에서 찬양했더니
옥문이 열렸습니다.
기적이 수시로 일어났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금수저였습니다.
본문 5-6절입니다.
빌립보서 3:5-6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그랬던 그가 말합니다.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 버렸다!”
왜 이런 말을 했을까?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히면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인 물은 썩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히면
푯대를 향해 갈 수 없게 만듭니다.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지 못합니다.
'또 이 고생을 해야 해?‘ 란
부정적인 생각이 듭니다.
그냥 여기 머물자며
현재에 만족하려 합니다.
그러나 마라톤에서 혼자만 멈춘다고
다 멈춘 게 아닙니다.
내가 멈춰도 시간은 가고,
주변 사람들은 뛴다.
결승점 바로 앞까지 1등으로 달려도
거기서 멈추면 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토끼와 거북이의 동화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멈추면 안 됩니다.
가야 합니다.
우리의 목적지는 이 땅이 아닙니다.
여기서 잘나갔다고 해서,
부흥하는 교회를 일궜다고 해서
끝이 아닙니다.
마지막까지 전심전력해야
진짜 상을 얻습니다.
만약 부산역 가는 기차를 탔는데
대구까지 잘 왔다고 해서 내리면 될까요?
안 됩니다.
keep going! 계속 가야 합니다!
이와 반대로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상처받고,
평생 그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이 실수했던 작은 일을 곱씹으며,
새로운 시도조차 해보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합시다.
사람은 누구나 상처를 받고,
누구나 실수를 합니다.
발명왕 에디슨이 67세였을 때
실험실에 불이 났습니다.
이제껏 쌓아놓은 모든 업적이
한 줌의 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에디슨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재난도 쓸모가 없진 않아.
그동안 나의 모든 실수를
말끔히 태워 버렸으니 말이야.
하나님, 제가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패배했을 때 끝나는 게 아니라
포기했을 때 끝이 납니다.
권투 선수가 링 위에서 다운 몇 번 당했다고
패배가 되는 게 아닙니다.
넘어졌다면 다시 일어나십시오.
아이들을 키우며 느끼는 게 있습니다.
걸음마를 시작할 때 보면 자꾸 넘어집니다.
그래도 또 일어서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습니다.
이게 너무 귀여워서 사진도 찍고
동영상도 촬영합니다.
여기서 아이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든 아이가 넘어져도 다시 일어납니다.
아빠 손을 잡고 일어나던 지
물건을 잡고 일어나던지 꼭 일어납니다.
그러다 보면 점점 걷는 법을 배우고,
나중에 뛰어다닙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이런 마음으로
보시지 않을까요?
자꾸 넘어지는 우리에게
'다시 일어나. 내가 도와줄게'라며
손을 내미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시편 37:23-24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힘을 주셔서,
또 그분의 성실하심과
전능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실패 가운데
버려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그 목표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과
시간이 필요함을 아는 사람입니다.
미국 라이프 처치 담임이신
크레이그 그로쉘 목사님이 말을 했습니다.
“당신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하는 말을
듣지말라.
당신 생각 속에서 반복 재생되는
부정적인 말도 듣지 말라.
예수님은 당신을 평범한 사람에서
비범한 사람으로 바꾸신다.
그러므로 그분과 시간을 보내라!”
실패를 용납하지 못하는 건
하나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자신아닌가요?
넘어졌다면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다시 일어나십시오.
주님은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우리를 언제나 돕고 계십니다.
이런 믿음의 전진에는
늘 장애물이 있습니다.
원수 사탄은 빌립보 교회의 전진을 막으려고
할례파들을 심어두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을 향해
십자가의 원수라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3:18-19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그들의 끝은 멸망이며 신은 배이며,
땅의 일을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생각하다'는 말은
영어로 'set on'이라고 나왔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땅(육신)에 고정시켜 버린 것을
말합니다.
정욕이 원하는대로 행동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반면 성도는 어떤 자들인가요?
하늘에 시민권을 둔 자들입니다.
20절을 읽어봅시다.
빌립보서 3: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이유가 되십니다.
그분을 의지하는 자는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돼지는 목뼈가 일자에 가깝답니다.
그래서 하늘을 향해 목을 치켜 들 수 없습니다.
약간 끄덕이는 정도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평생 하늘을 두 번만 본다고 합니다.
태어날 때 한 번, 죽을 때 한 번입니다.
그런데 예외가 있습니다.
넘어졌을 때다.
그러면 칙칙한 오물 덩어리가 아닌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의 아름다움을
볼 것입니다.
바울도 원래는 땅만 보며 살았습니다.
그게 최고인 줄 알고 그 성공에 취했습니다.
그러던 중 인생 최대 실패를 맞이합니다.
엄청난 빛을 보고 눈이 멀어
시각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떠실 것 같아요?
저라면 인생의 회의를 느끼고
괴로움에 사무칠 것 같아요.
그런데 그게 은혜였습니다.
빛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거든요.
그제야 그는 하늘을 보았습니다.
그 뒤로 그는 어떤 영적 장애물을 만나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는 넘어져도 다시 일으켜
하늘을 보게 하시는 주님을 믿었거든요.
하늘의 시민권자임을 확신했거든요.
우리는 어떤가요?
오늘 우리의 생각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땅인가?
아니면 하늘인가?
저 천국을 소망하여 쉼 없이
부름의 상을 향해 달려가는
성도가 되길 축복합니다.
그런 자는 시험을 만나도 인내합니다.
함께 야고보서 말씀을 읽겠습니다.
야고보서 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승자의 관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습니다.
시험을 참고, 시련을 견딘 자에게만
주어집니다.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선수들을 보면
대부분 눈물을 흘립니다.
왜 그럴까요?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시간
인내했기 때문입니다.
그냥 동네 체육관에서 1등하는 것과
올림픽에서 1등은 차원이 다르죠.
오늘 말씀을 준비하며 떠올랐어요.
시험의 난이도가 높을수록
주어지는 영광의 무게도 달라지는구나.
우리가 왜 요셉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감동을 받을까요?
그의 삶에 어떤 시험과 고난이 있었는지
알기 때문 아닙니까?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울 왕의 칼날을 피해 밤해
뜬 눈으로 보내야만 했고,
눈물로 침상을 띄운 날도 많았습니다.
그는 이러한 시련 가운데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님을 의지하며 고백했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
그렇게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었을 때
감격의 눈물을 흘리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므로 인내함으로 씨를 뿌려야 합니다.
시편 126편 5-6절을 읽어봅시다.
시편 126:5-6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설교 제목 기억하십니까?
우리 인생에서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방향입니다.
아무리 크고 화려한 배라고 하더라도
방향키가 망가지면 어떻게 될까요?
더듬이가 끊어진 개미처럼 빙빙 돌 뿐입니다.
오늘날 방향을 상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를 다니지만 왜 다니는지 모르고,
인생을 살지만 무엇을 위해 사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잠깐 지나가는 즐거움을 위해
혈안이 되어있는 게 아닐까?
말씀을 준비하며
찬송가 324장을 묵상했습니다.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1)예수 나를 오라 하네 예수 나를 오라하네
어디든지 주를 따라 주와 같이 같이 가려네
주의 인도하심 따라 주의 인도하심 따라
어디든지 주를 따라 주와 같이 같이 가려네
4절을 보면 더 큰 은혜가 됩니다.
(4)주가 크신 은혜내려 나를 항상 돌보시고
크신 영광 보여 주며 나와 함게 함께 가시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주님이 계신 푯대를 향해 멈추지 맙시다.
주님과 함께 걸어 갑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천국이라는
확실한 목표를 향해
멈추지 말고 전진합시다.
우리에게 주어질 생명의 관을 기다리며
흔들림 없이 뜁시다.
그런 자들을 주님께서는 크신 손으로
붙드실 줄 믿습니다.
카페 게시글
주일 설교영상 및 설교문
2025년 2월 23일 함요셉 목사님의 주일 예배 설교문입니다
사명자
추천 0
조회 70
25.02.23 13:26
댓글 0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