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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3일 토요일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제1독서 : 1코린 4,6ㄴ-15
복 음 : 루카 6,1-5
1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가로질러 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다.
2 바리사이 몇 사람이 말하였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한 일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4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아무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집어서 먹고
자기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5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몇 년 동안 사람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바로 마스크 때문입니다.
얼굴의 거의 절반을 가리다 보니 누구인지 알아보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며칠 전, 읍내에 있는 빵집에 갔다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식빵을 사기 위해 이 집을 가끔 들리는데 사장님께서 “신부님이시죠?”라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사제임을 쉽게 알 수 있는 로만칼라를 하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반바지에 흰색 면티를 입고 있어서 겉모습만 보면 그냥 동네 아저씨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신부인지를 아셨는지, 혹시 성당에 다니시냐고 여쭈었습니다.
신자는 아니었습니다.
단지 지난번에 한번 로만칼라를 하고서 빵집에 왔던 것을 기억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스크도 쓰고 있었을 텐데 어떻게 기억하느냐고 물었더니,
“신부님 눈이 많이 처져 있어서 기억났습니다.”라는 것입니다.
눈 하나만으로 저를 기억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사람을 잘 기억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특징적인 것을 잘 관찰하고 기억한다고 합니다.
이 사장님께서 그런 분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그렇지 않을까요?
주님의 전부를 봐야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큰 특징인 사랑으로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사랑이 아닌 다른 것을 보고 주님을 알려고 합니다.
제대로 알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바리사이와 율법을 지키는 일에 관한 충돌이 일어납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율법 자체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때를 가리어 지켜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즉, 율법 자체가 절대적이 아니라, 특별한 상황이 있다면 관면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밀밭 사이를 지나가다가 제자들이 밀이삭을 잘라 손을 비벼 먹은 것이 문제가 됩니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밀 두 이삭 이상을 따면 그것은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추수 행위로 간주했습니다.
또 손으로 이삭을 비비는 것은 곡식을 타작하는 것으로 봤습니다.
하긴 안식일에 떨어진 과일을 먹어서는 안 되었고,
과일이 떨어질 수 있으니 안식일에 나무에 올라가서도 안 되었습니다.
안식일에 난 계란도 먹어서는 안 된다고 했으니,
제자들의 행동에 대한 고발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잊어버린 것이 있었습니다.
율법은 하느님의 법으로 사람을 잘 살게 하려는 것이지,
사람을 율법으로 얽어매서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을 알려면, 주님의 사랑만을 봐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 입맛에 맞는 것만을 보고서 주님을 알려고 한다면 잘못된 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 예수님을 반대했던 종교 지도자들처럼 말입니다.
섬김의 여정
-섬김의 모범이신 그리스도 예수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한평생 은총과 복이 이 몸을 따르오니,
오래오래 주님의 집에서 사오리다.”(시편23;1.6)
어제 오전 내내 수녀님들의 고백성사를 드렸습니다.
이 역할 또한 섬김의 직무 중 하나이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삶은 단 하나, ‘섬김’으로 요약됩니다.
‘봉사’란 한자보다 ‘섬김’이란 순수한 우리말이 훨씬 좋고 마음에 와닿습니다.
원장 수녀님에게 고백성사를 드리며 감동했습니다.
그 섬김의 직무가 시작도 끝도 없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절감했습니다.
고백성사 후 사죄경과 더불어 격려성 조언이 생각납니다.
“아, 순교자 성월 9월은 수녀님의 달입니다. 수녀님은 살아 있는 순교자의 삶입니다.
공동체에서 그리스도 예수님께 가장 가까이 있는 분입니다.
참으로 섬김의 여정, 섬김의 직무를 통해
날로 주님과 가까워질 것이며 날로 주님을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섬김의 중심 자리에 섬김의 모범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섬김의 사랑, 섬김의 겸손, 섬김의 직무, 섬김의 권위, 섬김의 여정, 섬김의 책임 등 끝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영성이 있다면 단 하나 파스카의 영성,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의 영성이 있을 뿐이요,
우리 모두 섬김의 직무를 맡은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을 뿐입니다.”
요지의 말씀을 드렸는데 후에 만나 뵐 때, 환하고 밝은 모습에,
‘아, 수녀님은 원장이란 섬김의 직무를 기쁘게 수행하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십 대 초반, 삼십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한 수도원 초창기, 분원장 소임에 주방장 소임,
손님 담당에 전화 소임 등 1인 몇 역으로 전천후 다목적용으로 뛸 때 있었던 일입니다.
이때는 자동응답기도 없어, 한밤중 자다 깨어나 피정 신청 전화를 받았을 때
퉁명스럽게 전화를 받았다가 격렬한 항의를 받고 즉시 사과한 후 깨달은 바로 다음의 진리입니다.
“아, 나는 섬김의 직무인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구나!
교회는 수도원은 서비스업종이구나!
훌륭한 서비스업에 종사하려면 세 요소를 갖춰야되겠다,
첫째 사람이 좋아 친절해야 하고,
둘째 실력이 좋아 유능해야 하고,
셋째 내외적 환경이 좋아 쾌적快適해야 하겠구나.
서비스업인 음식점이나 병원, 학교를 보면 금방 드러나는구나.
수도원의 우리 수사님들은 모두 섬김의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셈이구나.”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섬김의 직무입니다.
성덕의 잣대는 섬김의 겸손, 섬김의 사랑, 섬김의 환대일 것입니다.
섬김의 직무에 온 힘을 다하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보십시오.
온통 섬김의 삶으로 사생활이 없을 정도로 투명하게 비워졌습니다.
그대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제1독서의 바오로 사도를 닮았습니다.
어제 가톨릭 신문 1면에는 추기경에 서임 된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 유흥식 추기경 서임식에 대한 기사와 사진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교황은 서임식에서 유추기경에게 바레타를 씌워 주며 “우리 함께 나아가자”고 말했고,
유추기경은 “교회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돼 있다”고 화답했습니다.
유추기경은 미사 강론에서
“지난 5월 29일 추기경에 임명됐을 때 순교자의 삶을 본받겠다고 다짐했다”며
“잘 죽는 삶을 살겠다”고 각오를 피력했습니다.
주님의 착한 목자로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사랑하고 섬기듯
교회를 사랑하고 섬기는 일에 분골쇄신粉骨碎身,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군림하거나 지배하려는 생각을 말끔히 치워버리고
당신을 닮아 섬김의 직무에 충실하라는 우리 모두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의 소임 등 모든 일은 “섬김의 일” 하나로 요약됩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
섬김의 중심에서 만나는 살아 있는 그리스도 예수님이라는 확언입니다.
참으로 섬김의 여정에, 섬김의 직무에 항구하고 충실할수록
날로 주님과 가까워지며 주님을 닮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의 전형적 모범, 섬김의 사도가 바로 오늘 제1독서의 바오로입니다.
“우리가 선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하고,
우리 자신은 예수님을 위한 여러분의 종으로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바로 질그릇 같은 우리 안에 선사 된 하느님 영광의 빛이
섬김의 활동에 마르지 않는 원천이 됨을 깨닫습니다.
평주간 오늘 제1독서 중 섬김의 사도, 바오로의 다음 말씀도 감동입니다.
“지금, 이 시간까지도, 우리는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 맞고
집 없이 떠돌아다니고 우리 손으로 애써 일합니다.
사람들이 욕을 하면 축복해주고, 박해를 하면 견디어 내고, 중상을 하면 좋은 말로 응답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쓰레기처럼, 만민의 찌꺼기처럼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1코린4,11-13)
우리를 한없이 부끄럽게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사부, 성 베네딕도 역시 당신의 수도공동체를 주님을 섬기는 학원으로 정의합니다.
다음 유명한 성구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학원을 설립해야 하겠다.
우리는 이것을 설립하는데 거칠고 힘든 것은 아무것도 제정하기를 결코 원치않는다.”(성규, 머라45-46)
그러니 우리 믿는 이들은 모두 예외 없이 평생 졸업이 없는 죽어야 졸업인,
주님을 섬기는 학원에 재학 중인 평생 학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도와 사랑의 여정에서처럼 우리 역시 섬김의 여정에서 영원한 초보자임을 깨닫습니다.
예전 김수환 추기경님이 산행 중 산사山寺에 들렸을 때 젊은 스님이,
“추기경님은 고등학생 같다”는 말에 “아니다. 나는 재수생이다”라 대답한 유머가 생각납니다.
주님을 섬기는 “섬김의 학교”에서 졸업이 없는 영원한 재수생인 우리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섬김의 베테랑을 소개합니다.
바로 성 예로니모, 성 아우구스티노, 성 암브로시오와 더불어
서방의 4대 교부에 속하는 오늘 축일을 지내는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입니다.
“대(大)”자가 붙는 교황은 대 레오 교황과 둘뿐입니다.
생전에 동시대의 베네딕도 성인은 비록 못 만났지만, 성인을 참으로 흠모하여
그 유명한 베네딕도 전기를 쓰신 분으로 누구보다 베네딕도 성인의 영성에 정통했던 교황님입니다.
어제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님에 관한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나무위키를 출력하니 장장 13쪽이었습니다.
1. 생애초기, 2. 수도생활, 3. 교황사절, 4. 교황시절, 5. 선교,
6. 전례개혁과 방대한 저술, 7. 자선 등
항목을 통해 파란만장한 삶에 그 위대한 업적이 정말 불가사의 하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 그대로 중세기 초 로마는 물론 유럽을 구한 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쩌면 이처럼 다방면에 천재일 수 있는지, 64년 한 생애에 보통 사람의 몇백 배는 사신 분이요,
천재라는 말도 적합하지 않을 정도로 정말 불가사의한 인물입니다.
교황님의 전 삶을 요약한다면 섬김에 전력투구했던 삶입니다.
성인의 그리스도 예수님께 대한 사랑, 교회에 대한 사랑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입니다.
교황에 대한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란 정의도 그레고리오 교황으로부터 유래합니다.
얼마나 신도들의 사랑을 받았는지 대중의 강력한 지지로 사후 즉시 성인으로 시성 됩니다.
교황님의 어머니 역시 성녀로 “실비아”입니다.
교황은 604년 선종 전 약 5년간은 크나큰 병고를 겪습니다. 교황님의 일기에 나오는 고백입니다.
599년에는 “열한 달 동안 나는 거의 침대를 떠날 수 없게 되었다.
통풍과 고통스러운 근심들로 너무 괴로운 나머지, 매일 죽음의 안식을 기다린다.”고 적었으며,
600년에는 “근 2년 동안 나는 침상 위에 매여 있었다.
통증이 너무 괴로워서 축일에조차 세 시간 동안 일어나 미사를 봉헌하기 버겁다.
나는 매일 죽음의 문턱에 서고, 매일 그 앞에서 내쳐진다.
그리고 601년에는 ”오랫동안 침상을 떠나지 못했다. 나는 애타게 죽음을 기다린다.“
교황님이 선종한 해는 604년이니 임종 전 말년의 병고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대로 섬김의 직무에 전력투구했던 순교적 삶의 결과요,
참으로 휴식이 없는 죽어야 휴식에 늘 고통이 따랐던 성인들의 생애임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고통의 와중에도 마음 깊이에는 찬미, 감사, 평화, 기쁨, 희망, 사랑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매일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각자 주어진
섬김의 직무에 충실하고 항구할 수있는 힘을 주십니다.
아름다운 입당송이 대 그레고리오 교황의 관상가이자 신비가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 줍니다.
섬김의 원천은 바로 주님과의 관상적 일치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복된 그레고리오는 베드로 좌에 올라,
언제나 주님의 얼굴을 찾고, 주님 사랑의 신비를 기리며 살았네.”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통신호는 신호등과 수신호 중에 수신호가 우선권이 있습니다.
교통사고가 있거나, 공사 중인 경우에는 교통경찰이 수신호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 교통신호등은 따르지 않아도 됩니다.
시내에 볼일이 있어서 대중교통을 검색했습니다.
차로 가면 주차료도 비싸고 워낙 교통이 막히기 때문에 대중교통을 검색했습니다.
인터넷으로 검색하니 환승하는 역의 이름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막상 지하철을 타니 환승하는 역이 한 정거장 차이가 났습니다.
인터넷을 믿고 내렸더니 환승하는 지하철이 없었습니다.
지금 지하철에서 안내하는 노선을 따라야 했습니다.
인터넷을 너무 믿었기 때문에 잘못 내리는 혼동이 있었습니다.
삶에도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됩니다.
그러나 긴급한 상황에서는 내가 꼭 해야 할 일을 먼저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는 하인처럼 늘 깨어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슬기로운 처녀가 기름을 준비해서 신랑을 맞이했던 것처럼
다가올 하느님 나라를 깨어서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2022년 9월은 어떤 상황인가?’
먼저 지구의 환경을 생각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상황은 위기의 상황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교황님은 ‘하느님은 언제나 용서하시고, 사람은 경우에 따라서 용서하지만,
자연은 결코 용서하는 법이 없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지금처럼 우리가 자연을 파괴하고, 환경을 오염시키면 지구는 곧 ‘임계점’에 다다를 것이라고 합니다.
지구는 계속 우리에게 더 이상의 자연 파괴와 환경오염을 하지 말라고 경고를 보내고 있다고 합니다.
북극의 얼음이 녹고, 만년설이 녹으면 엄청난 자연재해가 발생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지금 북극의 얼음은 녹고 있습니다. 만년설도 녹아내리고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유례가 없는 가뭄, 홍수, 무더위, 태풍을 겪고 있습니다.
화석연료의 사용으로 지구의 기온이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 해수면이 상승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지구의 온도가 상승하면 많은 대도시들이 물에 잠길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지구의 주인이 아니라, 지구에 머물며 잠시 지내고 가는 손님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을 생각합니다. 신앙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외적으로 박해와 시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종교로 개종을 강요하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의 위기는 내적인 곳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첫째는 성소자의 감소입니다.
제가 있는 미국은 교회를 통합하고, 줄여야 하는 곳이 생기고 있습니다.
빈 교회가 늘어나고 있으며, 매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둘째는 급격한 고령화입니다.
저출산이 원인이기도 하지만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의 팬데믹을 겪으면서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것이 익숙해진 사람들이 늘었습니다.
큰 교회는 유지가 되지만 작은 교회는 교회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제가 속한 서울대교구는 1990년도에 2000년대 복음화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복음화가 무엇인지 설명하였습니다. ‘소공동체 운동’을 도입하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교회는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매년 신축성당이 늘어가고 있었습니다.
예비자들도 늘고 있었습니다.
교구에서 주도하는 2000년대 복음화 운동과 소공동체 운동은 30년이 훌쩍 지났지만,
아직도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호미로 막을 수 있는 것을 가래로도 막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고인이 된 삼성의 이건희 회장은
1993년에는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식으로 혁신을 강조한 ‘신경영 선언’,
2003년에는 ‘천재경영론’, 2010년에는 ‘위기론’,
취임 25주년인 2012년에는 ‘창조 경영’에 이르기까지
한국 경제사에 변곡점이 될 만한 혁신을 주도해 왔습니다.
그 결과 삼성전자는 1992년 세계 최초 64M D램 개발을 시작으로
삼성은 반도체, 스마트폰, TV 등의 분야에서 글로벌 1위에 올랐습니다.
‘타산지석’이라고 합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도 혁신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의 주인이 아니라,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2022년 9월의 교회에도 혁신과 변화가 필요한 것은 아닌지 생각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대가 가진 것 가운데에서 받지 않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모두 받은 것이라면 왜 받지 않은 것인 양 자랑합니까?
나는 여러분을 부끄럽게 하려고 이런 말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나의 사랑하는 자녀로서 타이르려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이 아닌 은총의 새 시대를 열어 가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누구신지를 밝히십니다.
곧 앞 장면에서는 단식논쟁을 통해 새로운 시대인 당신의 때를 알리시고,
오늘 복음의 안식일 노동을 통해서는 당신이 누구신지,
곧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 6,5)라고 밝히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이라는 ‘밀밭’을 가로질러 가시고, 제자들은 '밀 이삭'을 뜯어 비벼 먹습니다.
이는 그들을 교회의 사도적 활동에 참여시킴을 암시해줍니다.
그들이 바로 하느님 밀밭의 일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이 트집을 잡습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루카 6,2)
그런데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서는 안식일에 소경을 고치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사실 그들이 트집 잡은 것은, 밭의 이삭을 뜯어 먹은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날이 안식일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비는 일을 했다고 해서 트집을 잡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안식일의 정신을 일깨우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제사 빵을 먹었던 일’을 말씀하십니다.
곧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그런 일들을 '해서는 안 되는 일'로 알았지만,
다윗이 제사 빵을 주었던 것처럼
이제 당신께서는 배고픈 제자들에게 아직 빵이 되지 않은 밀을 먹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안식일의 본질이 율법의 규범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사랑’에 있음을 밝히십니다.
곧 율법을 은총으로 바꾸십니다.
사실 탈출기의 계약의 책에서도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음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 이레째 되는 날에는 쉬어라.
~ 그래야 계집종의 자식과 몸 붙여 사는 사람도 숨을 돌릴 것이 아니냐?”(탈출 23,12)
이처럼 안식일은 인간을 위해 주어진 날입니다.
하느님을 위하여 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하여 쉬는 것이며, 인간에게 주어진 은총인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병렬 구문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 않았을 것이다.”(마태 12,7)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에게 자비로운 일이 바로 안식일 계명의 근본정신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마르코복음의 병렬 구문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마르 2,27)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 6,5)
주님!
이날을 새롭게 하시고 저희를 새롭게 하소서.
거룩함을 입었으니 거룩한 일을 행하게 하소서.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푸는 이가 되게 하소서!
이날은 저희를 위하여 마련하신 날,
새 마음 새 살이 돋게 하고, 당신이 주 하느님임을 알게 하소서!
아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안식일을 잘못 알고 있음을 지적하신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밀밭을 지날 때 일어난 일을 전하고 있다.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다.”(1절)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2절)
주님께서는 율법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고 또 그렇게 훈련을 시키셨다.
그래서 제자들은 주님께서 율법을 어기셔도 놀라지 않았다.
안식일에도 사람을 구원하시는 일에는 서슴없이 하시는 것을 늘 보았기 때문이다.
그분은 안식일에도 병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고쳐주셨다.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데리고 가셨다는 것은
그들을 풍성하게 익은 곡식들 사이로 데리고 가신 것이다.
안식일과 풍성한 결실을 본 이삭은 큰 신비를 의미한다.
땅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았고, 하늘 씨가 뿌려진 밭은 풍성한 결실을 보았다.
인간 구원에 굶주린 제자들이 놀라운 활동으로 밀 껍질을 벗기고 알곡을 거두듯이,
그 몸에서 믿음의 빛을 향한 마음의 열매를 거둔 것이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되는 줄 알았지만,
예수께서는 새로운 은총의 선물을 주셔서 율법의 나태를 은총의 수고로 바꾸셨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1사무 21,1-6을 인용하여 이에 대해 응답을 하신다.
그 내용은 다윗과 그 일행이 보통 사람들은 먹을 수 없는 지성소의 떡을 먹었지만,
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죄가 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다윗과 그 일행의 배고픈 상황은
율법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 관례에 매지 않는다는 것이다.
율법의 준수보다도 현실적으로 더 절박한 인간적 요구를 채워주는 것이 우선이다.
인간이 있고 나서의 율법이지,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율법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율법 때문에 정상적인 인간의 필요가 희생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율법 그 자체를 지키는 것보다, 율법에 담겨있는 근본정신을 잘 깨달아야 한다.
율법의 근본정신은 우선 인간을 위한 사랑이 담겨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 양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양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다고 하자.
그러면 그것을 잡아 끌어내지 않겠느냐?”(마태 12,11)라고 책망하시면서
인간을 무시한 율법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지키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법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안식일이 있고 율법이 있다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이 이미 “안식일의 주인이다.”(5절) 하신다.
율법의 근본정신을 올바로 실천하는 우리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인정도 사정도 없는 사람의 법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5,17)
예수의 가르침과 행동에 이미 反感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의 눈앞에서 중풍병자를 고쳐주실 때부터 그랬다.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신 일은 그들의 관심 밖이었고,
병의 뿌리로 간주되는 “죄를 용서한다.”는 말에 대하여 그들은 트집을 잡았다.(5,20-21)
이는 그들이 유다교의 지도자들이었고 예수의 가르침과 행동이 다분히 종교적이었으며,
동시에 유다교의 기존 정서를 위협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와 그 일행을 要注意 인물로 정하고 따라다니면서 감시하기로 결정했을 것이다.
원래 감시자의 눈에는 좋은 것은 안보이고 瑕疵만 보이는 법이다.
어느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던 예수의 일행이
밀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 먹었던 일로 또 한바탕 논쟁이 벌어진다.
루카는 마르코의 같은 대목(2,23-28)을 그대로 베껴 쓰면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자,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다.”(27절)는
구절은 의도적으로 삭제해 버렸다.
남의 밭에 자라고 있는 곡식에 낫을 대지 않고
그 이삭을 손으로 잘라 먹는 것은 법적으로 허용된 일이다. (신명 2,26)
그런데 문제는 이 행위가 안식일에 행해졌다는 것이다.
인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내야 함은 십계명의 제3계명이다.(출애 20,8)
이 계명의 세부 규정은 안식일을 철저하게 쉬어야 하고 이를 어기는 자는 사형에 처해지는 것이다.
“엿새 동안 일하고, 이렛날은 야훼를 섬기는 거룩한 날이니 철저하게 쉬어야 한다.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하여야 한다.”(출애 31,15; 35,2; 레위 23,3)
여기서 ‘철저하게 쉬어야 하는 것’의 목적은 이날을 거룩하게 지내는 것이다.
그런데 좀 애매하지 않는가?
어떻게 하는 것이 철저하게 쉬는 것인지 말이다.
따라서 율법학자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39개의 세부지침을 만들게 된다.(미슈나 샤바트:(예루살렘 탈무드 참조)
바로 이 39개의 금령에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일’, 즉 추수하는 작업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먹는 제자들의 행동은 추수로 간주되어 안식일 법을 위반한 셈이 된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제자들은 분명히 유다교의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
예수께서는 사울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던 다윗의 일행이 몹시 굶주린 나머지
제단에 바쳐진 빵을 먹었다(1사무 21,1-10)는 이야기를 인용하여 법에도 예외규정을 있음을 횐기시킨다.
당시 율법학자들은 사람의 목숨이 위태로울 때에 한해서는 예외 규정을 인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한낱 예외규정으로 제자들의 행동을 합리화시키려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예수님의 진정한 의도는 전혀 다른데 있었다.
바로 “사람의 아들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다.”(5절)는 것이다.
이제부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자신들이 누구와 논쟁을 벌이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 바로 안식일의 주인인 하느님이신 것이다.(느헤 9,14; 이사 56,4; 에제 23,38)
루카가 마르코복음을 베끼면서
27절(“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다.”)을
삭제한 이유도 이점을 더 강조하기 위함이다.
루카는 예수께서 율사들에게 하신 답변의 인본주의적 법이념보다
그리스도론적 법이념에 역점을 두려했던 것이다.
오늘은 “주이을 거룩하게 지내라!”는 계명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겠다.
통상 주일의 聖化는 주일미사 참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주일미사 참례의무는 교회법이 명기하고 있듯이 모든 신자의 의무이다.(교회법 1246조)
그렇다고 주일미사 참례 하나만으로 주일성화의 계명을 완수했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교의 주일의무가
유다교의 안식일 규정에서 유래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우리 교회의 주일의무는 안식일 다음 날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여 인류의 죄를 씻고
세상에 구원을 선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신비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주일은 분명 부활신비를 기념하고 경축하는 날이요 기쁨과 해방과 구원의 날인 셈이다.
따라서 주일성화의 의무는 교회가 만든 법을 수행하는 것에 있다기보다
하느님께서 아들 예수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신 신비를 묵상하는 데 있다.
사람의 법은 법 자체의 이유만으로도 존재할 수 있겠지만,
하느님의 존재 이유는 법 자체 때문이 아니다.
사람이 만든 법은 그 정신이 비록 人本主義에 있다 하더라도
결국 사람의 복종을 무차별적으로 요구하며, 때로는 인정사정도 없고 피도 눈물도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법은 인간의 진정한 자유를 목적으로 한 것이기에
거기에는 人情도 있고, 事情 있고 눈물도 있다.
하느님이 그 법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