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媤아버지
권인자
오월이 가기 전에, 아카시아 꽃이 지기 전에, 무작정 차를 달려 그곳에 가보기로
했다. 가로수 터널을 지나면서 많은 생각들이 밤하늘에 별무리처럼 흩어졌다 모이
고 또는 더 영롱하게 빛나기도 해서 더욱 속력을 내게 했다.
강산이 두 번하고도 세 번째 바뀌어가는 세월의 흐름 속에 그곳은 개발지역이
되어버려서 모를 심어놓고 엎드려 뜬모 하시던 아버지의 손길 닿았던 논의 흔적은
간 곳 없이 메꾸어 졌고, 어느 때보다도 더욱 짙은 향기를 발하며 나를 위로했던
아카시아 나무도 없어졌다. 어디쯤인가 가늠해보면서 들판을 걸어본다 ‘아버지 여
기쯤이죠? ‘싯째 왔구나'(시아버님이 생전에 셋째며느리인 나를 부르던 호칭, 사투
리) 네, 아버지!’ 그때를 생각하며 마음으로 대답해본다. 22살에 한 살? 아니 정확
하게 몇 개월 더 먼저 태어났고 군대를 막 제대한 남편을 만나 함께 양장점을 차
려 운영하면서 이듬해, 또 이듬해에 연년생 딸을 낳아 사대가 한집에 사는 셋째
며느리가 되었다. 첫아이를 낳을 때 마흔 여섯의 젊고 말수가 없으신 시어머니와
달리 공직에서 막 퇴직하신 시아버님은 무척 자상하셔서 친정아버지 이상으로 잘
해주셨다.
많은 논농사를 지어도 기계로 모든 일을 하니까 그리 바쁘지 않았기에 대서소를
차려서 운영하며 노년을 알차고 건강하게 지내셨다. 아이 둘을 낳기만 했지 기저
귀와 우유 등 밤에도 우리가 퇴근하면 잠깐 내 방에 왔다가 손수 데리고 주무실
정도로 며느리에 대한 배려와 손주들의 사랑이 지극하셨다. 결혼만 해주면 밤 하
늘에 별도 달도 다 따준다고 하던 약속을 결혼하고 몇 년 동안은 잘 지켜가더니
어느날 부턴가 남편은 바깥세상이 많이 궁금했나보다. 여기 저기를 기웃거리기 시
작했고 그럴 때 마다 다투는 일이 많아졌다.
양장점과 집의 거리는 몇 정거장 멀리 떨어져 있었고 일감도 많아서 늦은 밤까
지 모든 걸 혼자 감당하기엔 너무 벅찬 때이기도 했다. 유난히 무서움이 많은 나
는 혼자 퇴근하는 시간이 공포 그 자체였다. 여러 해 동안 그런 날이 지속되다 보
니 엄마와 아내 그리고 며느리의 자리도 나에겐 더 이상 버티며 살아갈 꿈도 희
망도 없었다. 그날도 아버지는 아카시아 꽃이 만발하여 향기 진동하고 논두렁에
쇠뜨기풀이 유난히 많던 그 논을 돌아보시며 물꼬를 틔워주고는 후우~ 한숨과 함
께, 담배 한 모금을 허공을 향해 연기와 함께 날려 보내고 계셨다 “아버지” “으응!
싯째 왔구나”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철없는 어린 새댁은 다정다감하신 시아버님께
이야기를 했고 또 혼자 다니는 모습을 보아서도 짐작하고 계셨던 모양이다. “아버
지! 제 마음이 너무 아프고 힘들어서 죽을 것 같애요. 더 이상 아버지의 며느리도,
애들의 엄마 노릇도 할 수가 없어요. 부족한 것 많지만 아버지의 착한 며느리, 또
착한 애들 엄마, 착한 아내가 되고 싶었지만 아무리 몸부림쳐도 잡을 수 없는 것
은 사람의 마음인가봐요. 아버지” 한참을 울면서 말을 하고 대답 없는 아버지를 보
니 울고 계셨다. “나쁜놈의 자식!” 이미 모든 상황을 보아 알고 계셨던 아버지는
마음속으로 어린 며느리의 삶이 애처로왔지만 아이도 둘이나 있고 매사에 적극적
이며 열정을 다하길래 잘 이기고 있구나 속으로 응원하며 격려하고 있었다면서
“너는 처음부터 며느리가 아니고 내 딸이었다. 지금까지 잘 이기고 왔던 것처럼
엄마 아버지 믿고 의지하며 같이 살면 안되겠니? 아니 같이 살자" 그래도 너무 힘
들어서 못살겠다고 논두렁에 앉아서 목 놓아 우는 며느리를 시아버지도 함께 울며
오랜 시간 다독여 주셨다.
그 일이 있고 어느 때 부터인지 시아버님이 아버지로 어머님은 엄마로 호칭이
바뀌었다. 먹는 것에서부터 모든 삶에 자잘한 것 까지, 철없는 아들의 미흡함을 더
없는 사랑으로 덮어주시려는 듯, 심지어 퇴근해서 집에 갈때면 “엄마 나 지금 집
에 가려구” “응, 그래 알았다. 어서와” 신작로까지 마중은 늘 있는 일이고, 밤중에
화장실 출입도 “엄마!” 하고 부르면 대청마루 끝에서 기다려 주던 엄마는 지금까
지도 김치며 모든 것을 공급해주시고 우리 집에 오시는 걸 무척 기뻐하신다. 명절
때 동서들과 전을 부치고 있으면 “싯째야 물 좀 떠와라” 물 떠온 나에게 아버지는
예쁘게 포장한 선물을 건네시며 형님들 모르게 빨리 차에 갖다 실으라고 하신다.
이튿날 보면 똑같은 선물을 동서들에게도 주시면서 껄껄껄 웃으시던 아버지!!! 나
에게 엄마의 자리를, 아내와 며느리의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나를 지켜 주시던
아버지! 아무 사정을 모르던 동서들의 시샘에도 아버지는 언제나 우리 싯째가 먼
저이셨던 것은 약하고 부족한 자식에게 그늘이 되어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이셨을
것이다. 그런 아버지께서 십여년 전 아직도 건강하고 젊으시다고 느끼던 어느날
갑자기 하늘로 가셨다. 며느리에게 그 어떤 효도할 기회도 주지 않으시고... 아버지
의 진자리 마른자리도 감당할 마음의 다짐이 있었는데! 황량한 세월 속에 태산이
되어주셨던 시아버지가 아닌 나의 아버지를 그리며 하늘을 본다. ‘아버지께 못다한
것 혼자계신 엄마에게 더 잘해드릴께요’ 하고...
2006/24 집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