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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요한 묵시록의 시작 1,1-4.5ㄴ; 2,1-5ㄱ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하느님께서 머지않아 반드시 일어날 일들을 당신 종들에게 보여 주시려고 그리스도께 알리셨고, 그리스도께서 당신 천사를 보내시어 당신 종 요한에게 알려 주신 계시입니다.
2 요한은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 곧 자기가 본 모든 것을 증언하였습니다.
3 이 예언의 말씀을 낭독하는 이와 그 말씀을 듣고 그 안에 기록된 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그때가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4 요한이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이 글을 씁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또 앞으로 오실 분과 그분의 어좌 앞에 계신 일곱 영에게서,
5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나는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2,1 “에페소 교회의 천사에게 써 보내라.
‘오른손에 일곱 별을 쥐고 일곱 황금 등잔대 사이를 거니는 이가 이렇게 말한다.
2 나는 네가 한 일과 너의 노고와 인내를 알고, 또 네가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사도가 아니면서 사도라고 자칭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너는 그들이 거짓말쟁이임을 밝혀냈다.
3 너는 인내심이 있어서, 내 이름 때문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지치는 일이 없었다.
4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
5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8,35-43
35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의 일이다.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36 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37 사람들이 그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하고 알려 주자,
38 그가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39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40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41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42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43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군중도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영혼의 눈을 뜨는 일>
오늘 복음은 예리고의 눈먼 거지(바르티메오)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른 이들의 꾸짖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악을 쓰듯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루카 18,39)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에게서 나온다는 <이사야>(11,1) 예언서의 말씀을 믿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가까이 오자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루카 18,41)
예수님께서는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으시고, 그의 믿음을 유도하고 고백하게 하기 위해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물으십니다.
곧 당신께 대한 믿음을 묻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청원기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곧 첫째는 믿음으로 청하는 일이요, 둘째는 자신이 바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주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청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진정 청해야 할 것, 주님 뜻에 합당한 것을 청하는 일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는지 빤히 아시지만, ‘우리가 진정 원해야 할 것’과 ‘믿음’을 깨우쳐주십니다.
그러자 거지 장님은 신뢰와 의탁으로 청합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루카 18,41)
그런데 대체 무엇을 보아야 ‘다시 본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보다'(anablefo)라는 단어는 ‘위를 쳐다보다’, ‘새로운 것을 보다’, ‘시력을 회복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눈을 뜨기 위해서는 바라보아야 할 대상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 ‘위에’ 달리신 예수님을 쳐다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그분의 사랑’을 보게 될 때 비로소 눈을 뜨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곧 ‘관상(theoria)의 눈’입니다.
결국 ‘그분의 사랑을 보는 눈’이 새로운 것을 보는 눈이요, 믿음으로 새롭게 보는 영적인 눈인 것입니다.
그것은 육신의 눈을 치유 받는 것을 넘어서 ‘영혼의 눈을 뜨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믿음’이 ‘다시 보게 하고 구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루카 18,42)
우리가 태어나면서 물질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면, 이제는 ‘믿음’을 통해서 영적인 세계, 곧 ‘새롭게 보는 눈’을 떠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그분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는 일이요, 지금 우리의 길을 사랑으로 동행하고 계시는 그분을 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제 '길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동행하시는 주님을 '따라' 따라나서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루카 18,41)
주님!
제가 보지 못함은 태양이 떠오르지 않아서가 아니라 눈을 감고 있는 까닭입니다.
마음이 완고한 까닭입니다.
성전 휘장을 찢듯, 제 눈의 가림막을 걷어 내소서!
완고함의 겉옷을 벗어던지고, 깊이 새겨진 당신의 영혼을 보게 하소서!
제 안에 선사된 당신 사랑을 보게 하소서.
제 안에 벌어진 당신 구원을 보게 하소서.
제가 바라고 싶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해주시고 싶은 것을 바라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다시>
오늘 묵시록의 시작과 복음에서 우리는 '다시'라는 말을 공통으로 발견합니다.
묵시록은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을 나무라며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묵시 2,5ㄱ)라고 합니다.
그리고 복음의 눈먼 이는 “다시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루카 18,41ㄴ)라고 청합니다.
그래서 오늘 먼저 다시 사랑하는 것에 관해 성찰하고 묵상코자 합니다.
그런데 처음에 했던 사랑을 다시 하는 것을 우리는 잘 이해해야겠습니다.
그것은 못 이룬 첫사랑을 다시 찾아 만나는 것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고, 부부간에 처음 만났을 때는 서로 정말 사랑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그래서 그때의 사랑을 다시 하라는 그런 뜻도 아닐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좋아서 사랑했던 그 사랑을 다시 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이제 와 다시 좋아하게 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좋아서 사랑했던 그런 사랑은 오히려 풋사랑이라고 내동댕이치고, 볼 것, 못 볼 것을 다 보고 난 뒤의 싫고 좋은 것을 넘어서 사랑하는, 그런 성숙하고 참된 사랑을 다시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물론 우리 인간 사랑도 이렇게 다시 해야겠지만, 오늘 묵시록이 다시 하라는 사랑은 조금 다른 차원일 것입니다.
아예 사랑 자체를 잃어버렸다면 그 사랑을 다시 찾으라는 뜻이고,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잃어버렸다면 그 사랑을 다시 찾으라는 뜻일 겁니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사랑한다는 것을 사치스러운 생각이라며 제쳐놓았습니다.
먹고 사느라 지쳐서 사랑이 완전히 메말라버렸는데 그 무슨 사랑 타령이냐고, 고목에서 싹이 나겠냐고 냉소적으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이나 사랑 타령은 젊었을 때나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하고, 무엇보다 하느님 사랑은 나이 먹어 새로이 시작하고 나이 먹을수록 더 오롯한 사랑을 하고 더 성숙한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우리 생각을 바꿔야 할 것입니다.
유행가에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데’라는 기막힌 가사처럼, 우리는 나이 먹을수록 하느님 사랑하기에 딱 좋은 나이라고 생각을 바꿀 것입니다.
다음으로 다시 보는 것에 관해 성찰하고 묵상해보겠습니다.
다시 본다는 것은 눈이 먼 적이 있음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욕심에 눈이 머는 것이고, 더 친절하게 풀이하면 세상 욕심에 눈이 머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 욕심에 눈이 멀었었고, 안경에 세상 때가 많이 꼈었습니다.
그런데 살 만큼 산 지금 눈에서 욕심을 벗겨낼 때가 되었습니다.
그놈의 욕심 때문에 얼마나 고통스러웠고 불행했습니까?!
그러니 우리도 복음의 눈먼 이처럼 눈을 멀게 했던 욕심을 벗겨내고, 다시 보고자 하는 갈망이랄까 열망이 마음에서부터 솟아나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세상을 따라가지 않고, 오늘 복음의 눈먼 이처럼 주님을 따라 아버지 계시는 하느님 나라로 가야겠습니다.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루카 18,43ㄱㄴ)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영혼의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시력이 6.0인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그는 아주 멀리 있는 것도 잘 봅니다.
그렇다고 그가 늘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볼 수 있다는 것이 행복이기도 하지만, 볼 것 안 볼 것 다 보면 마음은 오히려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외적으로는 잘 보지만 혹 자기 자신을 볼 수 없다면 그는 불행합니다.
육신의 눈이 중요하지만, 내면의 세계를 보는 마음의 눈은 더 소중하고, 하느님 나라를 보는 영혼의 눈은 더욱더 고귀합니다.
우리는 감겨진 영혼의 눈을 떠야 합니다.
어떤 눈먼 이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8,38) 하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습니다.
‘이웃사촌’이라 했는데 아무래도 눈먼 소경은 이웃을 잘못 만난 것 같습니다.
유다인들의 표현으로 자비라는 것은 애간장, 애타는 심정을 말합니다.
호세아서에서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마음을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11.8)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애간장이 녹는 안타까움!
이것이 바로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이며 사랑입니다.
눈먼 이는 바로 그 자비를 간절히 청했습니다.
절박한 부르짖음을 외면한 사람들은 아무리 좋은 눈을 가졌다 할지라도 마음의 눈은 뜨지 못했으니, 정작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외쳐야 할 사람은 눈먼 소경이 아니라 오히려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이웃의 마음을 읽고 그의 부족함을 채워야 할진대 시끄럽다고 야단을 치고 있었으니, 그들이 소경입니다.
자비는 적선이 아닙니다.
함께하면 손해 볼 것 같아도 주님의 마음으로 함께 머무는 것입니다.
그의 필요를 절박함으로 함께하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있는 이들에게 형제애로 이웃이 되어줄 수 있을 때 그들을 통해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눈먼 이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붙잡으려는 심정으로 발버둥치듯이 그렇게 절박하고 간절하게 매달렸습니다.
'잠자코 있으라'는 꾸짖음에 굴하지 않고 믿음을 가지고 외쳤습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믿음은 군중이라는 장벽을 넘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믿음은 군중의 손가락질도 마다하는 예수님께 대한 일편단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믿음을 보시고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눈먼 이는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즉시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하느님을 찬양하며 따랐다는 것은 단순히 외적인 눈만 뜬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을 뜨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우리도 눈을 떠야 합니다.
믿음의 눈을 뜨면 세상이 달라 보이고 이웃의 요구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영혼의 눈이 뜨여, 내가 변하면 세상이 아름답습니다.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기 전에 그의 처지와 절박한 마음을 공감하게 되고, 오히려 주님을 불러 세우고 주님께로 인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하고 부르짖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영적인 시력을 키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나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찬양하게 합시다.
“착각하지 맙시다.
자선은 단순히 무엇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선을 베풀 때 가장 큰 은총을 받는 이는 그 손을 내민 사람입니다.
그 순간, 주님의 시선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되는 은총을 받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의 절박한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으시는 주님>
이스라엘의 지형은 독특합니다.
해발 천미터 남짓되는 높은 곳에 위치한 도시가 있는가 하면, 해수면 보다 낮은 곳에 위치한 도시도 있습니다.
다양한 꽃들과 식물들로 온화하고 풍성한 지역이 있는가 하면 황량하고 척박한 광야도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들르신 지역도 정말이지 특별한 곳이었습니다.
예리코!
지구 상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자리한 도시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지구상 가장 낮은 도시 예리코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가련한 한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심각한 시각 장애를 안고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간의 세월이 얼마나 고달팠겠습니까?
비장애인인 우리는 상상도 못할 고통을 그는 겪고 살아왔습니다.
앞이 조금도 안 보이니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눈 떠도 깜깜 눈 감아도 절망!
그 삶이 참으로 혹독하고 절망스러웠습니다.
지구상 가장 낮은 도시에서 살아가던 그, 이 세상에서 가장 가련히 살아가던 예리코의 시각장애인에게 어느 날 뜻밖의 행운이 찾아옵니다.
해방자요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코앞으로 지나가시는 소식을 전해 들은 깃입니다.
그는 직감으로 느꼈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온 인생의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그래서 그는 젖먹던 힘까지 다해 크게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수많은 군중의 말소리에 파묻혔을 법도 한데 예수님께서는 그의 절박하고 목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그의 간절함을 나 몰라라 하지 않으시고 마침내 그의 평생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오늘 우리를 향해서 주님께서는 자상하게 물으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는 구원의 빛을 받아 빛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1)
어떤 눈먼 이의 이름은 ‘바르티매오’입니다(마르 10,46).
바르티매오가 처해 있는 상황에서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마태 4,16)
바르티매오가 눈이 멀었다는 것은 어둠 속에 앉아 있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의 경우에, ‘어둠’은 죄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메시아를 아직 만나지 못했음을 뜻하는 말로 해석됩니다.
바르티매오가 길가에 앉아서 구걸하고 있었다는 것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인생을 살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의 경우에, ‘죽음의 그림자’는 구원의 길을 아직 모르고 있음을 뜻합니다.
아직 예수님을 모르고, 그래서 구원의 길을 모르고, 인생의 허무함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인들은 ‘빛으로 오신’ 메시아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고, 어둠과 죽음의 그림자에서 해방된 사람들입니다.
2)
바르티매오의 상황에서 요한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도 연상됩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우리는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이제 밤이 올 터인데 그때에는 아무도 일하지 못한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요한 9,1-5)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라는 말씀에서, 코린토 2서에 있는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이 일과 관련하여, 나는 그것이 나에게서 떠나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세 번이나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
(2코린 12,8-10).”
우리는 어떤 질병이나 신체장애 같은 고통과 불행을 함부로 ‘죄’에 연결해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는 주님 말씀대로, 그 고통과 불행을 겪고 있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들보다 더 주님의 권능과 은총을 드러낼 수 있고, 증명할 수 있습니다.
3)
바르티매오는 메시아를 만나기를, 또 메시아의 구원을 얻기를 갈망하면서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을 것이고, 소문만으로도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믿었을 것이고, 예수님에게 희망과 기대를 걸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처지에서 예수님을 만나러 갈 수는 없었고, 예수님께서 그에게 오시기를, 또는 그의 앞을 지나가시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39절의 ‘더욱 큰 소리로’ 라는 말은 그의 간절한 심정을 나타냅니다.
4)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라는 예수님의 질문은 몰라서 하신 질문이 아니라, 바르티매오 자신이 자기의 믿음을 능동적으로 고백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 말씀입니다.
주님이신 예수님은 사람 속을 꿰뚫어 보시는 분입니다.
'그분께는 사람에 관하여 누가 증언해 드릴 필요가 없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것까지 알고 계셨다.'
(요한 2,25)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라는 말은 겉으로만 보면 ‘시력 회복’을 간청하는 말이지만, 전후 상황을 모두 생각하면, 이 말은 예수님을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오신 메시아’로 믿고 있음을 고백하면서 메시아께 구원을 간청하는 신앙고백입니다.
그의 시력이 회복된 것은 예수님 덕분에 ‘구원의 길’을 알게 된 것을 나타내고, 눈을 뜬 다음에 예수님을 따랐다는 말은 그 자신이 간절하게 원했던 그대로 ‘구원의 길’을 걷기 시작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길은 곧 ‘구원의 길’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개안의 여정 -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
“당신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
나의 길을 비추는 빛이오이다.”
(시편 119,105)
날마다 등불에 불을 켜는 마음으로 강론을 씁니다.
어린왕자의 '점등인點燈人'을 이해합니다.
어린왕자는 예전 초등학교 6학년 제자들과 나눴을 때 참 좋아했던 책이었습니다.
일부 내용을 인용합니다.
-
그 별에 발을 들여 놓으며 어린왕자는 점등인에게 공손히 인사를 했다.
“안녕 아저씨, 왜 지금 마악 가로등을 껐어?”
“명령이다. 안녕.”
점등인이 대답했다.
“명령이란 무어야?”
“가로등을 끄라는 명령이다. 안녕.”
“그런데 왜 다시 가로등을 켰어?”
“명령이라니까.”
“알아들을 수 없는데.” 하고 어린왕자가 말했다.
“알아듣고 어쩌고 할 것이 못돼. 명령이야, 안녕.”
-
명령에 복종하듯 쓰는 날마다 쓰는 강론입니다.
이유가 필요없습니다.
진리이신 주님 명령에 복종할뿐입니다.
얼마전 새롭게 읽은 한용운의 시 ‘복종’이 생각납니다.
순명, 순종 말마디보다 요즘 부쩍 좋아진 복종이란 말마디입니다.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라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진리이신 주님의 명령에 기쁘게 복종하는 마음으로 쓰는 강론입니다.
오늘 루카복음은 소복음서라할 만큼 내용도 상징도 풍부합니다.
이 복음을 대할 때는 늘 새롭습니다.
강론 제목은 언제나 제가 좋아하는 ‘개안의 여정’입니다.
날로 눈이 열려가는 눈밝은 개안의 여정인 우리의 영적 삶이라는 것입니다.
점차 눈이 열려가는 개안의 여정중에 날로 자비롭고 지혜롭고 자유로워지는 인생입니다.
개안하면 떠오르는 행복기도 한 대목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꽃자리 하느님의 나라 천국이옵니다”
오늘 복음은 한폭의 살아있는 아름다운 그림 같습니다.
오늘 복음의 ‘길가에 앉아 구걸하는 어떤 무명의 눈먼 이’가 상징하는 바, 바로 눈이 가려 방향을 잡지 못한 가련한 인간 존재를, 또 길가에 앉아서 길이신 주님을 갈망하는 인간 존재를 상징합니다.
어찌보면 우리 인간은 도인道人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 복된 운명의 도인들일 수 있습니다.
육신의 눈은 닫혀있지만 영적 갈망에 마음의 귀는 활짝 열려 깨어 있는 눈먼 걸인입니다.
예수님이라는 말마디를 듣자마자 본능적으로 반응합니다.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부르짖습니다.
잠자코 있으리는 꾸짖음에 아랑곳 없이 더욱 큰 소리로 부르짖습니다.
그야말로 영혼의 절규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아마 이렇게 부르짖지 않았다면 주님은 그냥 지나쳤을 것입니다.
간절히 찾을 때 응답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이어지는 주님과의 문답은 불가의 선문답을, 또 사막교부를 찾았던 제자와의 문답을 연상케 합니다.
진실하고 간절하면 말도 글도 행동도 짧고 순수합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단도직입적 질문에, “주님, 제가 다시 보게 해 주십시오.”
사실 제대로 잘 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여기서 문득 법정의 스승이었던 효봉선사가 그의 스승 석두 스님을 만나 제자가 된 경우가 생각납니다.
정처없이 떠돌던 효봉이 석두스님 소식을 듣고 금강산 신계사 보운암을 찾습니다.
“어디서 왔는가?”
“유점사에서 왔습니다.”
“몇 걸음에 왔는가?” 스님의 물음에 “이렇게 왔습니다.” 대답하며 큰 방을 한 바퀴돌고 앉습니다.
“10년 공부한 수좌보다 낫다.” 감탄하며 바로 계를 주고 원명이라 법명을 내립니다.
진리를 찾는 열망이 간절했기에 이런 동작으로 답했고 이에 화답한 석두 큰 스님입니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남아있는 일화입니다.
예수님의 눈먼 걸인에 대한 즉각적인 구원의 응답입니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주님의 은총의 말씀에 전제되는 바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문제는 믿음입니다.
영적 믿음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부익부 빈익빈의 진리입니다.
다시 보게 된 눈먼 걸인의 믿음은 더욱 깊어졌을 것입니다.
다시 보게 된 눈먼 걸인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라나섰고, 이를 본 군중도 고무되어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니 이들의 믿음도 한층 고양되었을 것입니다.
새삼 진리이신 주님의 말씀을 들으라 있는 귀요, 진리이신 주님을 보라 있는 눈이요, 진리이신 주님께 찬미드리라 있는 입이며, 진리이신 주님을 따르라 있는 발임을 깨닫습니다.
이제 주님을 만나 눈이 열린 그는 이제 더 이상 눈멀지도 않았고, 더 이상 걸인도 아니고, 더 이상 길위에 있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길이자 희망이신 주님을 만나 길의 방향을 잡았고 주님과 함께 여정에 오르게 됩니다.
삶의 방향, 삶의 목표, 삶의 중심, 삶의 의미이신 주님과 함께 날마다 새롭게 펼쳐지기 시작한 인생입니다.
말 그대로 개안의 여정이요 그의 마음의 눈은 날로 밝아지고 맑아졌을 것이며 영적시야는 날로 넓어지고 깊어졌을 것입니다.
과연 개안의 여정은 잘 진행되고 있는지요?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물음입니다.
오늘 제1독서 묵시록에서 주님께서 에페소 교회에 주는 말씀이 흡사 우리에게 주는 말씀이듯 우리의 분발을 촉구합니다.
개안의 여정에 충실하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시작하여라.”
초발심을 회복하여 주님 사랑을 다시 새롭게 하라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기도하고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개안의 여정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은총이 주님 찾는 열정에 불을 붙여 우리 모두 개안의 여정에 항구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한 8,12)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과 함께 가는 길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주일 미사 마치고 교우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한 형제님과 자매님이 면담을 청했습니다.
저는 사목회가 있었지만, 저를 찾아온 부부와 면담했습니다.
10년 전에 달라스 성당에서 아들과 함께 세례받았다고 합니다.
필라델피아로 이사 갔다가 다시 달라스로 왔다고 합니다.
세례는 받았지만, 곧 성당을 멀리하였다고 합니다.
저를 보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제가 성당에 다니지 않아서 벌 받았습니다.
제 둘째 아들이 죽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부부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저는 성당에서 장례미사를 하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형제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제가 염치가 없이 어찌 그런 청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신부님께라도 이렇게 말을 하지 않으면 괴로워서 죽을 것 같아서 왔습니다.”
아드님이 하느님의 품으로 간 것은 형제님이 성당에 오지 않아서가 아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비록 형제님이 성당에 다니지 않았을지라도 이렇게 청하면 기꺼이 장례미사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하시는 분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슬픔이 가득했던 부부는 위로받았고, 아들을 위한 장례미사를 청하였습니다.
그렇게 아들은 모든 성인 대축일에 장례미사를 하였습니다.
모든 성인의 전구함으로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 믿습니다.
살면서 ‘왜 나만’이라는 생각이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머피의 법칙’이라고도 합니다.
시험을 볼 땐 꼭 자신이 공부하지 않고 지나친 곳에서만 문제가 출제됩니다.
물건이 없어져 한참을 찾다가 결국 같은 물건을 사고 나면 찾게 됩니다.
기계가 고장 나서 기술자를 부르면 갑자기 잘됩니다.
세차하면 비가 옵니다.
예전에 엠피쓰리를 잃어버린 줄 알고 새 것을 샀는데 나중에 가방에 들어있던 엠피쓰리를 발견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소경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소경은 ‘왜 나만’이라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처지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가 드러날 수 있기를 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소경은 즉시 다시 보게 되었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네가 한 일과 너의 노고와 인내를 알고, 또 네가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너는 인내심이 있어서, 내 이름 때문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지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저항과 열정, 인내와 신념도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처음에 지녔던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회개입니다.
예전에 엘리베이터의 게시판에서 읽은 글이 생각납니다.
‘눈이 오는 추운 겨울에는 소나무와 전나무가 더욱 푸르다.’
모든 것이 푸르른 여름에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시련의 때, 고난의 때에는 유독 그 푸르름이 돋보이는 나무가 있는 것처럼, 주변을 보면 그렇게 자신의 길을 충실하게 걸어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신앙인은 세상의 흐름에 따라서 흘러가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거친 물살을 거슬러 올라갈 줄 아는 용기와 신념이 있어야 합니다.
흘러가는 삶은 살아지는 것이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것들을 받아들이고, 편안하게 살아도 결국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주님은 소경의 간절함을 보시고, 보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보아야 하는 것들은 빠르고 편하고, 쉬운 길만은 아닐 것입니다.
비록 느리고, 힘들고 어렵다고 할지라도, 주님과 함께 가는 길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살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굳이 당신의 힘과 능력을 내세우지 않으셨습니다.
당신께서 세우신 질서와 법에 따라야 한다고 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선택과 결정을 전적으로 본인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이유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질서입니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필요한 것만을 청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식복사 없이 생활했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주로 대형 할인 매장을 자주 이용했습니다.
이 안에는 없는 물건 없이 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카트를 끌고 다니다 보면,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하다’라는 생각으로 카트 안에 넣게 됩니다.
특히 ‘원플러스원’ 상품의 경우는 큰 이득이라는 생각에 지금 별로 필요하지 않음에도 카트 안에 넣곤 했습니다.
산 것을 집에 와서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한숨을 짓게 됩니다.
찬장, 창고에 1년은 거뜬하게 살만한 물건들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혼자 사는데 이 많은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싶었습니다.
필요한 것이 아닌, 필요할 것 같은 것을 필요 이상으로 산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너무 많아져서 때로는 골치까지 아파집니다.
필요하지 않은 물건으로 집을 어수선하게 만들고, 유통기한이 지나 ‘아깝다’라는 생각을 하며 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필요할 것 같은 것을 필요 이상으로 사면 안 됩니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은 필요한 것을 필요한 만큼만 사는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면서 물건만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우리 감정도 그렇습니다.
필요한 감정만 가져야 하는데, 불필요한 감정까지 품고 삽니다.
미움, 원망, 판단, 걱정, 불안, 절망 등의 부정적인 감정을 갖는 우리입니다.
필요하지 않은 것을 갖는 우리가 아닌, 필요한 것만을 갖는 우리가 될 때 현명하게 이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물건도 그렇고 또 감정도 그렇습니다.
이렇게 필요한 것만을 가지려고 할 때, 주님께도 필요한 것만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것저것 모두 다 달라는 욕심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겸손된 마음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에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외칩니다.
사실 보통 구걸하는 사람이 주로 하는 말은 무엇일까요?
자신의 빈곤함을 해결할 수 있도록 물질적인 요구를 하지 않을까요?
아마 “한 푼 줍쇼~”를 말하는 것이 정답처럼 보이는데, 그는 자비를 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르느냐?”라고 묻습니다.
눈먼 거지는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기에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필요한 것을 청하는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이르셨고, 그는 즉시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자기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저것 다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또 어떤 것이 필요한지도 모른 채 알아서 해달라고 해서도 안 됩니다.
불필요한 것은 제외하고, 필요한 것만을 청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고 주님으로부터 응답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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