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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잃어버린 역사, 보이는 흔적 원문보기 글쓴이: 心濟
운영자의 논거와 거의 일치하는 내용은 논거4로 하남 제원이 위만조선의 왕검성이며 이지역이 바로 한나라 무제가 세웠다는 한사군중에 낙랑군이 위치했던 지역으로 현토는 현재의 좌권 이북으로 비정된다. 따라서 수성 갈석은 산서 남동부 河東道에 속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중조산외 몇개의 산중에 하나일것이다.
아래 지도는 중공사가들이 확인한 현재 산서성 중부에 있는 태원이 적어도 唐이전에는 산서성 남단에 위치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아래의 논거를 읽기 바랍니다.
중국사회과학원 학자들이 고증한 우공구주도에서의 冀주는 하북,산서를 포함하는데 태원과 악양이 산서성 남서부가 원래위치와 태산이 보인다.(이사실은 거란지리도에서도 확인된다)
論 據 - 4
당태종 이세민의 아들 李泰, 太嶽-王屋-碣石의 진실을 말하다.
길이 갈라지어 <형산荊山>에 이르며 하수河水-黃河-를 건너가 壺口山、雷首山이 나온다. <대악大嶽-태악太嶽>-으로 나아가 이르면 지주산厎柱山、석성산이고 <왕옥산王屋山>으로 가면 太行山, 긍산恆山에 도달하니 나아가 갈석碣石에 이르러 해海로 들어간다... (중략)
아래 지도는 현재의 한중일학계가 말하는 霍泰山과 한서지리지와 史記三家注와 唐태종 아들 이태李泰가 말하는 霍泰山위치
아래는 한서지리지에서 그동안 간과 되어오던 부분중 당태종이전까지의 고대 강역추적에 있어 이정표가 될 매우 중요한 기록.섬서 <형산荊山>에서 황하를 건너서 지리를 설명하는데 <대악大嶽-태악太嶽>의 산군을 지나면 다음으로 나오는 거대한 산군이 <왕옥산王屋山>이라고 한다. 서에서 동으로 이동하며 지리를 설명하는데 왜 <대악大嶽-태악太嶽>다음에 <왕옥산王屋山>이 나올까요?
여기서, <대악大嶽-태악太嶽>은 바로 곽태산霍泰山을 말하기 때문이다.사기史記 하본기夏本紀 二를 보면 태악太嶽에 대해 색은索隱을 인용 주석하기를, 태악太嶽은 곽태산霍泰山이라 하였습니다.[원문] 道九山[一]:汧及岐至于荊山[二],踰于河;壺口﹑雷首[三]至于太嶽[四]; (중략)[주석] [四]" 集解孔安國曰:「三山在冀州;太嶽在上黨西也.」 索隱即霍泰山也.已見上."곽태산霍泰山은 즉 곽산霍山은 <왕옥산王屋山>북쪽인데 왜 서쪽의 <호구산壺口山>을 설명하다 뜬금없이 북으로 올라가 곽태산霍泰山을 말하다 다시 남으로 내려와 서쪽의 <왕옥산王屋山>을 설명하는지 의문이 듭니다. 더우기, <왕옥산王屋山>의 太行山, 恆山 다음이 바로 碣石과 해海로 이어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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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 상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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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道钐及岐,至于荊山,逾于河;壺口、雷首,至于大嶽;厎柱、析城,至于王屋;太行、恆山,至于碣石,入于海。西傾、朱圉、鳥鼠,至于太華;熊耳、外方、桐柏,至于倍尾。道嶓冢,至于荊山;內方,至于大別;崏山之陽,至于衡山,過九江,至于敷淺原。
길이 갈라지어 <형산荊山>에 이르며 河水-黃河-를 건너가 壺口山、雷首山이 나온다. <대악大嶽-태악太嶽>-으로 나아가 이르면 厎柱山、析城山이고 <왕옥산王屋山>으로 가면 太行山, 恆山에 도달하니 나아가 碣石에 이르러 海로 들어간다... (중략)즉,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 원문은
첫째, 현재의 산동성의 태산太山을 지나면 갈석碣石과 해海가 나오는 것이아니라 산서성 중남부의 <왕옥산王屋山>에 포함된 산악들인 태행산太行山, 긍산恆山을 지나면 바로 갈석碣石과 해海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 태악太嶽이 곽태산霍泰山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史記를 읽어보면 霍泰山 혹은 霍山이라 부르는 이 산은 상당히 영험하고 신령스러운 산이라고 수많은 기록들이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임분시 북쪽에 현재의 곽주시에 있다고 말하는 곽태산, 즉 太嶽의 여러산들중 대표적으로 언급된 厎柱山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료를 탐색해보니, 史記에도 언급되었지만 주석서인 正義에 그 기록이 나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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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삼가주史記三家注 / 본기本紀 / 권卷 二 하본기夏本紀 第 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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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正義括地志云:「厎柱山,俗名三門山,在陝州硤石縣東北五十里黃河之中.孔安國云『厎柱,山名.河水分流,包山而過山, 見水中,若柱然也』.」
『정의正義』에 『괄지지括地志』를 인용해 이르길, 「지주산은 이름이 三門山이다. 섬주陝州 硤石縣 동북 오십리의 黃河의 가운데에 있다. 孔安國이 이르길, 『厎柱는 산이름이며 河水-黃河-가 나뉘어 산을 감싸 안으며 흘러서 산을 지나가므로 물 한가운데 높이 솟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였다. 」
☞ 주석에 인용된 사료들『사기집해(史記集解)』 남조(南朝) 송(宋·420~479)나라 배인(裴駰)의 사기 주석서, 모두八十卷『사기정의(史記正義)』 당(唐) 현종(玄宗) 개원년간(713~741) 장수절(張守節)의 사기 주석서, 모두 三十卷
『괄지지(括地志)』唐太宗 이세민의 넷째 아들 이태李泰가 주찬한 지리서, 정관 16년(642년) 완성되어 당태종에 바침놀랍게도, <태악太嶽>-곽태산霍泰山-의 대표적 산봉의 하나인 厎柱山은 산서성 중부인 霍州市서 부터가 아니라 산서성 남서부인 陝州 , 바로 三門峽市일대에 위치한 것입니다. 한서지리지의 기록에 나온 지리 설명 또한 이제 이해할 수 가 있습니다.
황하를 따라 서에서 동으로 잇달아 있는 王屋山까지 이르는 산군들의 지형을 설명했던 것이며 碣石 또한 王屋山이 끝나는 지점에 있었던 것이며 따라서 여기서 海란 바다가 아니라 하남과 산서사이의 황하를 따라 왕옥산王屋山이서로 펼쳐진 대평원을 일렀던 것입니다.
대청광여도에서 <우공기주지>를 강조하므로서 갈석에 대한 것을 상고할 수 있다.
지주산厎柱 속칭 삼문산三門과 석주산砥柱이 하남성과 산서성을 가르는 황하물길속에 섬처럼 고립된 산으로 표시되어 있다. 석성산은 垣縣동북쪽으로 표시되어 있다.
◆ 당태종 李世民의 넷째 아들 李泰는 자신이 주인이 되어 편찬한 지리서인 『괄지지括地志』에 당당하게 <태악太嶽>-곽태산은 현재의 산서성 중부의 霍州市가 아니라 산서성 서남변의 하남성의 접계에 있다고 스스로 말한 것이다.◆
이것은 엄청난 기록이며 중대한 역사적 지위를 갖는 것으로 당태종의 아들 이태가 그것도 唐太宗에게 헌납한 唐의 공식적인 사료인 『괄지지括地志』에서 <태악太嶽>은 곽태산霍泰山이고 그 위치는 산서성 서남변의 현 삼문협시三門峽市일대라고 대내외에 선포한 것이다.
당조정과 唐太宗과 唐의 史家들이 스스로 기록하고 대내외에 공표하였으니 唐나라이전의 한대부터 북위시대는 물론이고 그 이전인 춘추전국시대의 곽霍땅 또한 현 삼문협시三門峽市일대로 내려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唐나라때에 현재의 태원太原은 물론이고 霍州 또한 현재의 위치가 아니었고 霍州가 현재의 산서성 서남변-정확히는 황하남쪽 하남성 섬현-이었음을 唐나라 황제와 그 아들인 이태李泰와 사가史家들이 자인하였으니 이들은 모두 남쪽으로 내려와야 하고 이것은 또한 남북조시대 배인裴駰의 기록과도 일치하며 이로서,
우리역사를 깎아내리기는 했지만 현재와 같이 지명을 변조해 역사 왜곡한 주범은 唐이 아니라 바로 그 후대로서 명대에 주로 이루어졌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덧붙여 쐐기를 박을 곽태산의 또다른 주봉인 析城山의 위치 또한 당나라 무측천때의 사가史家 사마정(司馬貞)가 쓴 주석서인 색은索隱의 기록으로 확인된다.
[원문] 索隱: 析城山在河東濩澤縣西南.王屋山在河東垣縣東北.水經云砥柱山在河東大陽縣南河水中也
색은索隱에 이르길, 석성산析城山은 河東 濩澤縣 서남이다. 왕옥산王屋山은 河東 垣縣 동북쪽에 있다. 수경주에 이르길, 砥柱山은 河東 大陽縣 남쪽 하수河水-황하黃河- 가운데에 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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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자 심제정리.
論 據- 3
遂城縣은 낙랑군지이며 갈석산이 있는 고대사 즉 한나라와 위만조선간의 흥망사와 관련된 한군현중 낙랑군이 있었다는 지명이며 한중고대사간의 핫이슈로서 낙랑수성을 일제에게 교육받은 한국인 미친사학자가 황해도 수성으로 끌여들이므로서 중국장성이 한반도 중부까지 이어진 그야말로 중국에게 빼도 박도 못하는 바보짓을 저질렀음을 말해서 무었하랴만 주의할것은 遂城이 북방이냐 남방이냐에 따라 낙랑의 위치도 연동된다는것이다.
아래 처럼 추적해보지만 사서와 그림으로 추적한 갈석은 산서성 북단 상산 주변과 하북성 수성현으로 보이지만 통전의 해석 즉
通典 卷第185 邊防1
碣石山在漢樂浪郡遂成縣 長城起於此山 今驗長城東截遼水而入高麗遺址猶存 按尚書云 夾右碣石入於河 右碣石即河赴海處 在今北平郡南二十餘里 則高麗中為左碣石 .
갈석산은 한 낙랑군 수성현에 있다. 장성이 이 산에서 시작되었다. 지금 그 증거로 장성이 동쪽으로 요수를 끊고 고구려로 들어간 유지가 아직도 남아 있다. 상서에 말하는 "갈석을 오른쪽으로 끼고 황하로 들어간다"는 문구로 비추어 보건데 우갈석은 황하가 바다 근처에 다다르는 곳에 있다. 지금 북평군 남쪽 이십여리에 있는 즉 고구려에 있는 것은 좌갈석이다.
의해석과 본인이 찾은 위만조선의 험독과 왕검성이 하남성 제원 주변임을 비추어볼때 한사군을 설치했다는 낙랑군 수성현 갈석은 산서북으로 비정되기에는 당시 부여가 이미 그지역을 점유하고 있었다고 보기에 무리가있어 보이고 요수 즉 청장하가 있는 箕山 부근에 갈석이 있었을것이라 본다.
1. 원문으로 본 갈석의 여러 위치
遂城 碣石
《山海经.海内东经第十三》:“滹沱水出晋阳城南(현 평형관),而西至阳曲(현 태원)北,而东注渤海,入越章武北。漳水出山阳东,东注渤海,入章武南。”,滹沱、漳水都曾是禹河的支流。“章武”在今天津以南、黄骅东南一带.
호타하가 晉양성(현 평형관 부근) 남쪽에서 발원하여 서로 양곡(현 태원)의 북쪽에 이르고 동으로 흘러 발해로 들어간후 장무의 북을 넘어간다.장수는 산양 동쪽에서 발원하여 동으로 발해로 흘러 장무의 남쪽으로 들어간다.(산해경도 후대에 개정한것으로 보인다 양곡이란 지명이 당시에 있었을까? )
호타하의 근원은 산서 오대산북 평형관에서 시작된다.(평형관의 글자가 변형되었다)
《水经注•河水(三)》载:“始皇令太子扶苏与蒙恬筑长城,起自临洮(현 감숙성),至于碣石”。
<수경주 하수3>진왕 영정의 아들 부소와 몽염이 쌓은 장성,감숙성 염조에서 부터 갈석까지이다.
중국 사학자들이 그린 진장성도는 산서성을 넘지못했다 서단은 감숙 임조에서 동단은 산서 수덕까지.
《晋太康三年地记》乐浪郡“遂城县有碣石山,长城所起。”
<진태강3년지기>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있다.장성이 시작된곳이다.
서기284년이면 후한이 망하고 위촉오가 대륙서부에서 자웅을 겨루던 시절로 진나라의 수도인 代縣을 중심으로 태강지리지를 쓰기 이전에 존재한 성들은 한나라 장성이 시작된곳으로 보아야한다.
《通典•州郡典》:“碣石山在汉乐浪郡遂城县,长城起于此山”。此碣石山,史籍中称之为“遂成碣石”。
갈석산은 한낙랑군 수성현에있는데 장성이 시작된곳이다.이 갈석산이 수성갈석이다.
通典 卷 178 州郡
盧龍漢肥如縣有碣石山 碣然而立在海旁故名之 晉太康地志云 秦築長城 所起自碣石 在今高麗舊界 非此碣石也
노룡은 한나라 때 비여현이다. (노룡현 관내에는) 갈석산이 있는데 바닷가에 우뚝 솟아 있어 그 이름을 얻었다. 진 태강지지에 말하기를 진나라가 쌓은 장성이 이 갈석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지금 고구려와 옛 경계에 있는 것은 이 갈석(노룡현 관내 바닷가에 우뚝 솟아 있는 갈석)이 아니다.
通典 卷第185 邊防1
碣石山在漢樂浪郡遂成縣 長城起於此山 今驗長城東截遼水而入高麗遺址猶存 按尚書云 夾右碣石入於河 右碣石即河赴海處 在今北平郡南二十餘里 則高麗中為左碣石 .
갈석산은 한 낙랑군 수성현에 있다. 장성이 이 산에서 시작되었다. 지금 그 증거로 장성이 동쪽으로 요수를 끊고 고구려로 들어간 유지가 아직도 남아 있다. 상서에 말하는 "갈석을 오른쪽으로 끼고 황하로 들어간다"는 문구로 비추어 보건데 우갈석은 황하가 바다 근처에 다다르는 곳에 있다. 지금 북평군 남쪽 이십여리에 있는 즉 고구려에 있는 것은 좌갈석이다.
(이해설이 맞을것이다.왜냐하면 장성이 요수를 끊고 고구려로 들어간곳이라한다. 당시 요수는 청장하가 발원하는 기산 남부에있다 북평이라함은 당시 북평이었겠지만 지금은 하북 阜平이라 비정된다 )
섬서 남단에서 산서 서북단으로 해서 산서의 雁門關- 代縣- 平荊關에 이르는 성이 한나라 장성으로 보인다.
2. 수성현 어느것이 맞을까?.
1918 년도 중국군사지도에 遂城이 아니고 遂成集이다.(위지도 백석산이 갈석으로 비정되는곳- 이일봉 설)
사서로 위치를 따지면 갈석은 산서성 항산(상산) 동남방에 있어야한다, 왜냐하면 갈석은 항산 구문현에 있다고 하였다.
심제 글
갈석을 조작한 금서룡(이마니시 류 - 일본인 학자 경성제대교수)는 갈석비문을 하북성에서 평남 온천군 해안에 옮겨 놓았다 한다, 실제 조선의 고대사로 부터 근세사까지를 조작하기위해 일본사학계에서 기울인 이런 방법이 최근 일본열도 구석기시대 조작과 관련된 맥을 같이하는 전통적인 수법이 아닐까? 개탄스럽다.
시대별로 변한게 없어보이는 갈석의 위치 전부 하북성내 이다.
평안남도 온천군에 심어놓은 낙랑군 점제현비 (2011년 sbs 특집방송에서 사진조작으로 드러났다)
우공구주도에 기록된 갈석은 항산의 동북이다.
우적도에 기록된 갈석 하북성 노룡 동남 해안
추리도에 기록된 갈석 역시 동일지역
거란지리도기록 갈석 역시 하북이다.
명나라지도 역시 같다.
청나라지도 역시 같다.
1913년 중국군사지도의 상산과 추정되는 갈석산은 하북 백석산?
論 據 -2
사실과 주장이 묘하게 섞여있는 재야역사가 윤여동의 글에서 보면, 한나라,수나라 당나라가 고조선,고구려를 치기위해 하북성 북부까지 와서 그부근에 있는 갈석에 올라 제를 지냈다는 이론에는 수긍하기 힘들지만 인용해본다.
우공 갈석은 상산(항산) 구문현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고, 중국 역사상 9명의 황제들이 올랐다는 유명한 산이다. 진(秦) 시황이 올랐고, 진 2세 호해가 올랐다고 하며,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침공하기 전인 기원전 110년에 올랐고, 소설 삼국지에 등장하는 조조 즉 위 무제가 올라 “관창해(觀滄海)”라는 시를 읊었다 하고, 진(晉) 선제 사마의가 공손연을 토벌할 때 창려를 거쳐 갈석산에 올라 불로초를 구한 진시황을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북위 문성제, 북제 문선제가 올랐고, 수 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할 때 올랐다고 하고, 당 태종 역시 고구려를 침공할 때 올라 “춘일관해(春日觀海)”라는 시를 읊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 시황제(B.C.215), 진2세 호해(B.C.209),
한 무제(B.C.110),
위 무제(조조)(A.D.207),
진 선제(사마의,A.D.238),
북위 문성제(A.D.458),
북제 문선제(천보4년 A.D.553),
수 양제(A.D.612)
당 태종(A.D.645)이 갈석산에 올랐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이 우공 갈석은 언젠가부터 그 위치를 잃어버리게 되어 지금은 아무도 그 정확한 위치를 아는 사람이 없게 되고 말았다.
사기 하본기를 보면, “.........조이피복 협우갈석 입우해(鳥夷皮服 夾右碣石 入于海)”라 기록하고 있다. 이는 하나라 우왕 때 갈석의 동쪽에 위치했던 조이(鳥夷 : 그 외의 기록들에는 도이[島夷]라 표기하고 있어 어느 기록이 정확한지 알 수 없다)가 공물을 바치러 갈 때 갈석을 오른쪽으로 바라보면서 강을 타고 갔다는 의미이다.
이를 잘 새겨보면 우공갈석은 강(요수로 보인다)의 북쪽에 위치해 있었고, 조이(또는 도이)는 갈석의 남쪽을 흐르는 요수를 타고 서쪽으로 가서 공물을 바쳤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주에는 “갈석은 해변에 있는 산(공안국설)”, “해(海)는 하(河)라고도 한다(서광설)”, “갈석산은 북평 려성현 서남쪽에 있다(지리지)”, “낙랑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는데, 장성이 시작된 곳이다(태강지리지)”, “갈석산은 요서 임투현(臨渝縣) 서남 물 가운데 있다(수경)” 라고 하고는 “대개 갈석은 둘인데, 여기에서 말하는 협우갈석입우해라는 것은 당연히 북평의 갈석이다” 라고 결론을 짓고 있으나 지금 이 기록을 아무리 잘 새겨보아도 실제 갈석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하는 말인지 매우 헷갈린다.
그런데 필자가 보기에는 기원전 128년 한나라가 예의 땅에 창해군을 설치한 이후 또는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한사군을 설치한 이후부터 우공 갈석의 위치를 헷갈리기 시작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즉 한 무제가 위만조선(도읍은 왕검성으로서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을 멸망 시킨 후 왕검성 부근을 나누어 낙랑군으로 만들게 되자 중국 사람들 일부는 지금의 진황도 창려 갈석산을 우공 갈석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던 듯 하고, 또 일부는 원래의 우공 갈석을 진짜 갈석으로 인식했을 것이다.
이때 한나라 사람들이 지금의 진황도 창려 갈석산을 우공갈석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진나라 때 쌓은 장성이 시작된 곳에 갈석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나라 사람들이 오가면서 보니 장성이 지금의 북경 서북쪽 관청수고 부근에서 끝난게 아니라 북경 북쪽을 지나 산해관까지 이어져 있었기 때문에 연(燕), 진(秦)때 쌓은 장성의 끝이 사실은 지금의 산해관까지였던 것으로 착각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의 진황도 창려의 갈석산이 진짜 우공갈석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나게 되었을 것이고, 세상에 두 개의 우공 갈석이 존재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세상에 “두 개의 갈석”이 존재하게 되자 사람들은 그를 구분하기 위하여 진황도 창려의 갈석산은 좌갈석(동쪽에 위치한 갈석이라는 의미)이라 하고, 원래의 우공갈석은 우갈석(서쪽에 위치한 갈석이라는 의미)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을 것이다. (이상 윤여동 )
어쨌거나 주장에 의하면 적어도 후한서에 나타나는 고조선의 지명들은 후한수도 낙양에서 동북으로 3000리이상 의 지점에 위치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의심스런 부분이 한두가지가 아니다.개인적으로 생각하건데 위만이 도망간 장색과 진나라 공지는 하남성 북부와 산서성 남부로 비정되어야 한다고 본다. 고조선과 관련된 하북성 북부는 진과 한의 영지인 함양인근에서 진격 할 수 있는 쉬운 거리가 아니다.게다가 이지역을 기반으로한 왕조의 제왕이 기도를 하기위해 하북성 장가구까지 간다는 주장은 억지스럽다.
편의상 각왕조의 수도를 남북으로 나눈다면 ,
섬서성 함양인근 기반왕조는
진 황제(B.C.215) 영정, 진2세 호해(B.C.209),
한 무제(B.C.110),
수 양제(A.D.612)
당 태종(A.D.645)
진 선제(사마의,A.D.238),
산서성과 하북서부 기반왕조
위 무제(조조)(A.D.207),
북위 문성제(A.D.458),
북제 문선제(천보4년 A.D.553)
論 據 - 1
실제로 갈석은 역사상 중요한 지리지명으로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멸하고 그 지역에 한사군을 설치하였다는 한국인으로서는 치욕의 역사를 상징하는것으로 일본인들은 그들의 학설을 증빙하기위해 식민지가된 조선의 역사를 깎아 내리는데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실제 갈석은 낙랑군의 치소였으며 고조선지에 세웠다는 상징성이 있다.
이에 대해 최근 북한의 역사연구소는 점제현신사비가 한반도에 있엇는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평남 온천지방의 화강함성분과 점제현비의 성분을 분석하였다.
온천관입체의 화강암의 생성년대와 조성성분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이 검증되었다. 생성년대에서는 흑운모를 시료로 하여 핵분렬흔적법으로 측정한데 의하면
점제비 화강암의 생성년대는 1억 2천 9백만 년±1천 3백만 년이고
평남온천 화강암의 생성년대는 1억 4백만 년±1천 2백만 년,
오석산 화강암의 생성년대는 1억 백만 년±1천 2백만 년,
마영 화강암의 생성년대는 1억 7백만 년±1천 2백만 년이다.
이처럼 점제비 화강암의 생성년대는 온천과 룡강일대의 화강암 생성년대보다 2천 8백만 년~2천 2백만 년이다 더 오래다. 점제비 화강암이 그 근방의 화강암과는 돌 나이에서 완전히 구별되는 다른 지방의 화강암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점제비의 화강암은 조성성분에서도 온천관입체의 화강암의 것과 다르다.즉 점제비의 화강암은 온천관입체의 화강암에 비하여 연은 2배, 월프람과 연, 니켈, 석, 린은 각각 2배 더 많으며 바리움은 10분의 1정도 밖에 안 된다. 카리 분석 결과에 의하면 나트리움의 함유량이 점제비에서는 2.8인데 온천관입체의 화강암은 4.1이다. 이처럼 점제비의 석재와 온천관입체의 화강암은 그 조성성분에서도 많은 차이가 있다. 이상의 사실은 점제비는 온천과 그 근방의 화강암이 아닌 다른 지방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지금도 온천과 그 근방에는 질 좋은 화강암이 많으며 평양일대에서는 그것을 많이 리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낙랑군의 지명에 대해 고찰할 필요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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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지리지 낙랑군 원문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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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산 구문현에 갈석산(현재의 항산유역)이 있었고 낙랑군 수성현은 바로 하북성 수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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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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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군은 6만2천8백12가구, 인구는 40만6천7백48명이다.25개현이 있다.
조선현, 남감현, 패수현, 함자현, 점제현, 수성현, 증지현, 대방현, 사망현
해명현, 열구현, 장잠현, 둔유현, 소명현, 누방현, 제해현, 혼미현, 탄열현,
동이현, 불이현, 잠태현, 화려현, 사두매현, 전막현, 부조현이다.
낙랑군은 무제 원봉 3년에 설치되었다.왕망때는 낙선이라고 했다.유주에 속해 있었다. 웅소는 “옛 조선국이다”라고 했다.안사고는 “낙랑으로 읽는다”고 했다.운장이 있었다.(주 : 상하운장은 위만과 관련이 있다. )조선현은 응소는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고 했다.(주 : 은나라가 망하자 기자가 조선에 와서 산곳은 하남성 서화 일대이다. 거기가 조선땅이라는 말이다)
남감현은 안사고는 “남감현으로 읽는다”고 했다.
패수현은 물이 서쪽으로 증지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점제현은 복건은 “점제현으로 읽는다”고 했다.
증지현은 왕망 때는 증토라고 했다.
해명현은 왕망때는 해환이라고 했다.
소명현은 남부도위가 다스렸다.
혼미현은 안사고는 “혼미현으로 읽는다”고 했다.
탄열현은 분려산에서 열수가 나와 서쪽으로 점제현으로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8백 20리를 간다.
동이현은 응소는 “동이현으로 읽는다”고 했다.
불이현은 동부도위가 다스렸다.
잠태현은 안사고는 “잠태현이라 한다”고 했다. (이상 구이넷)
운영자의 구분으로 볼때 진,한,수,당,진의 제왕들이 현 하북성 장가구까지 5000리나 되는 먼 지역으로 와서 갈석산에 제례는 누가봐도 불가능하다 한나라가 망가뜨린 나라는 위만조선이지 고조선이 아님을 알아야한다.
고조선 붕괴후 이미 부여가 개국하여 유방의 전한 개국을 도운 기록은 무엇인가? 따라서 이들이 행차할수있는 갈석은 적어도 하남이나 산서 남부에서 찾아야한다는게 운영자의 주장이다.
진,한,수,당시대의 碣石은 어디일까?
수서를 보면 양제 양광이 고구려를 치기위해 당시이미 한나라땅(?)이되어버린 옛위만조선의 한사군지역인 탄열,증지에서 군대를 나누어 출병하는 기록이 보이므로 수나라 수도인 장안에서 멀지않은곳으로 보인다.
운영자 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