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난살이와 고달픈 인생의 비탈길이 있는 풍경, 항도 부산
한국 현대사에서 부산은 6·25 전란을 빼놓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40계단 층층대’에 앉아 우는 사나이, 국제시장 좌판에서 무엇이든 팔아서 하루를 연명해야 하는 금순 오라비, 영도다리 밑에서 우야든동 만나자던 피난민, 떠나가는 서울행 십이열차 차창에 매달려 우는 경상도 아가씨까지 모두 그 시대의 등장인물이다.
물지게를 지고 올라가야 하는 숱한 부산의 산복마을과 갯내음 비릿한 자갈치시장에도 고단한 삶은 너나 없었다. 노래가 있어 견딜 수 있었고, 유행가가 있어 위로받을 수 있었던 1950년대의 풍경으로 가본다
우리나라 제2의 도시이자 항도인 부산은 언덕길과 친해지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관부연락선이 떠나던 부두, 썰렁한 부산항국제여객터미널
부산 노래의 주무대는 바다다. 부산은 우리나라 제2의 도시면서 항도의 삶이 서울과는 결이 다르다. KTX로 부산역에 내리면서 우선 연락선이 드나드는 국제여객터미널로 향한다. 최신식 건물로 지은 국제여객터미널은 그저 한산하다. 오전이라 그렇기도 했겠지만 악화된 한일관계의 여파가 그대로 덮친 결과다.
이병주 소설로도 유명한 <관부연락선>은 일제 때, 부산역에서 선로를 이어낸 ‘부산잔교역’에서 바로 탈 수 있도록 했다. 오늘날의 중앙동 제1부두 언저리에서 떠나 일본땅으로 건너갔다. 누구는 현해탄을 건너면서 식당칸에서 새어 나오는 미소시루(일본식된장국) 냄새에 “아, 이 좁은 해협을 지나 이제 나는 일본 땅으로 건너가는구나”하고 감회를 적었었다.
여러 척의 연락선이 다니던 대한해협의 바다는 헐렁해졌다. 후쿠오카, 시모노세키, 쓰시마의 이즈하라와 히타카츠로 가는 배편은 반토막이 났다. 운항정보에는 코비5호, 블루쓰시마, 오션 플라워, 오로라 같은 선명이 임시휴항을 알린다.
‘노 재팬‘((NO JAPAN)’의 부박한 운동이 만든 씁쓸한 풍경이다. JR큐슈고속선 소속의 후쿠오카행 쾌속선 ‘비틀호’를 탑승 수속중인 대열 하나마저 없었다면 주말의 이 한산한 국제선 부두의 풍경은 쓸쓸하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항구도시의 이야기야 다 그러하지만 ‘떠나는 배’, ‘파이프를 문 마도로스’, ‘잡을 수 없는 사랑’이 키워드다. 숱한 부산의 노래 가운데 한 축이 바로 그렇다.
<아메리카 마도로스> 김진경 작사, 김민우 작곡, 고봉산 노래, 1961, 아세아레코드
텍사스촌과 차이나타운, 날이 새면 떠나는 마도로스의 사랑인가
경부선 철길 아래 지하도를 빠져나와 부산역 앞으로 오면 텍사스촌과 차이나타운 간판이 부산역을 향한 채 팔 벌려 맞아 준다. ‘텍사스’라는 난데없는 이름은 바다 사나이의 이미지와는 매칭이 되지 않는다.
아무래도 코 큰 사람은 미국인이 으뜸이니 ‘황야의 무법자’나 ‘OK목장의 결투’ 같은 데서 등장하는 거친 서부영화 속 배경에서 따온 것이리라. 이 거리의 벽화만 해도 서부 사나이들의 결투 장면이 여기저기 그려져 있다.
항구에 정박한 배는 망망대해에서 차단된 사내들의 욕망을 풀어 놓는다. 역전이라는 배경 속 초량동 뒷골목은 적당히 음습하고 홍등 아래 비틀거리는 술집과 하룻밤 사랑을 위한 공간으로는 제격이었으리라. 마도로스 사랑은 기약 없는 약속만을 남기고 떠나는 야속한 하룻밤이기 십상이다.
술 취한 뒷골목의 풍경 속에 탄생한 <마도로스 부기>란 노래를 내가 처음 들은 것은 경북의 내륙인 상주 함창에서 다닌 국민학교 고학년쯤 된다. 우리집 골목길 어귀에 있던 방석집 ‘송죽관’에서 밤마다 아저씨들이 본견 치마저고리를 입은 작부들과 질펀한 육담을 버무려가며 젓가락 장단에 맞춰 부르던 노래였다. 그 시절 자연스레 따라 배운 유행가다.
<마도로스 부기> 이철수 작사, 한복남 작곡, 백야성 노래, 1960, 도미도레코드
한 블록을 건너면 부산차이나타운 ‘상해거리’다. 이 골목의 연원이야 1884년 설치된 청국 영사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지금까지 자리를 잡고 있는 화교들이 늘어난 것은 역시 6·25전쟁과 피난살이였다. 중국영사관은 화교들에게 영주동 일대에 터를 잡도록 해줬다. 이제는 중국본토에서도 잃어버린 ‘중국인의 보수성’이 부산 화교에게는 고스란히 남아있다.
대만과 중국 사이에서 대만을 선택했던 그들의 삶에 한국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도 많지만 참고 살아왔다. 세월이 흘러간 탓일까. 화교 2세 3세는 “중국도 대만도 내 고향은 아니다. 그저 여기 초량이 내 고향일 뿐이다.”는 말로 이 터전에 대한 애착을 대신한다.
교자만두와 공갈빵을 파는 중국집 앞에는 관광객들이 왕서방의 손맛을 줄지어 기다린다. 그 텍사스와 차이나의 틈새로 러시아 문자로 된 간판이 여기저기 엉덩이를 들이밀기 시작했다. 러시아 음식과 환전상, 대낮부터 취한 백러시아의 살비듬 좋은 여인들의 목소리가 대륙답게 거칠다. 러시아도 멀지 않은 뱃길과 곤고한 생활 탓에 이국까지 흘러들어온 삶이리라.
피난살이 40계단에 슬피 우는 사연,
<경상도 아가씨>
영주동을 지나 ‘40계단 기념관’이 있는 동광동으로 향한다. 40계단은 피난 시절의 부산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동광동주민센터 5층에 자리 잡고 있는 기념관을 보면 부산 피난살이의 그림이 구체화된다.
1953년 11월 영주동 판자촌에서 발생한 대화재는 부산역마저 전소시켰다. 오늘날의 부산역이 초량으로 옮겨가게 된 배경이다. 40계단도 동광동 영주동 일대를 재건하면서 원래 자리에서 25m 남쪽으로 옮겨다 놓았다.
부두노동자로서 하역일을 하거나, 지게꾼을 하며 살아가던 피난민들이 미국 등지에서 들어오는 구호물자를 받아다 팔고 사는 곳이 40계단 아래에서 이루어졌고, 윗편 동광동 일대는 산비탈로 올라가며 틈만 생기면 게딱지 같은 판잣집과 움막들이 들어섰다.
40계단 아래에 조형물로 서 있는 튀밥장수나 물동이 지게를 진 소녀상은 그래도 살아야 하는 삶을 표현하고 있다. 아마도 흥남철수를 했거나 평안도 어디메쯤에서 내려온 사나이의 고달픈 현실과 흐느끼는 망향을 위로하는 경상도 아가씨의 손길은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 저마다의 주제가 되어 방방곡곡에서 불려졌다.
<경상도 아가씨> 손로원 작사, 이재호 작곡, 박재홍 노래, 1955, 미도파레코드
이 외에도 40계단 주제곡 가운데서 원조라 할 수 있는 손인호의 <함경도 사나이>(손로원/나화랑), 윤일로의 <그리운 고향산천>(이삼항/김현), 한정무의 <그대는 바람같이>, 신세영의 <추억의 40계단>(손석우/토미), 최희준과 쟈니브라더스가 부른 <무정의 40계단>(박춘석 작사·곡)이 있다.
한발 올려 맹세하던 사랑의 용두산,
<용두산 엘레지>
용두산공원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부산영화체험박물관’이 있다. 영화의 도시 부산답다. 홍영철영화아카이브 전시실, 어린이 영화 마을을 비롯하여 영화와 관련된 체험을 할 수 있는 최신시설이 준비되어 있어 젊은이와 아이들의 발길도 잡아끈다.
용두산은 해발 69m에 불과한 언덕 같은 산이다. 용꼬리에 해당하는 용미산도 있었으나 일제때 평지로 깎여 6·25 때는 피난민들이 근처에 몰려 살았다. 부산타워가 있어 부산의 이정표 구실을 한다.
황해도 안악 출신의 고봉산이 <아메리카 마도로스>에 이어 작곡한 <용두산 엘레지>는 부산이 남긴 그 시절 10대 명곡에 들어있다. 최근 미스트롯 송가인의 인생곡이 되리만치 더욱 널리 불리는 국민가요가 되었다.
<용두산 엘레지> 최치수 작사, 고봉산 작곡, 고봉산 노래, 1964, 아세아레코드
꼭 영도다리서 다시 만나자,
<굳세어라 금순아>
용두산공원을 내려와 국제시장에 들른다. 붙어있는 부평동 ‘깡통시장’과 함께 피난민의 삶이 범벅이 된, 치열한 삶의 현장이었다. 국제시장은 이미 일제가 물러가고 전시통제물자가 쏟아져 나오면서 모이기 시작해 6·25 난리통에 UN군 군수물자가 흘러들고 일본 등지에서 밀수품까지 유입되던 시장이었다.
영화 <국제시장>의 무대이자 금순이가 굳세게 살아가는 생존공간이었다. 지금은 650개 업체 1489칸의 점포가 6개 공구로 나누어져 없는 게 없는 도·소매시장이 되어 있지만 재래시장의 고전 속에 ‘국제시장 609청년몰’까지 시도하면서 활로를 모색하고 있기도 하다.
부산아지매의 억척스러움을 상징하는 ‘자갈치시장’도 그 옛날 좌판 다라이 사이를 헤치면서 흥정하는 왁자지껄한 향수는 기억 속에 보관해야 한다. 신축한 건물에 도열한 좌판 점포들은 정갈하기는 하나 완성품 레고처럼 어느 도시에나 있는 수산시장 같이 싱겁다. 자전거는 영도다리 아래로 향한다.
영도다리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영도의 풍경은 피난 시절 부산의 또 다른 상징이었다. 1934년 개통되어 하루에도 6번씩 바닷길을 열던 도개교식 다리는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철거위기까지 몰렸다가 확장 복원되었다. 2013년부터 매일 오후 2시 다리를 들어 올린다.
난리통에 헤어진 금순이는 그 시절 피난민 모두의 누이였다. 영도다리 난간 위로 뜨는 초생달도 이제는 영도 해안에 늘어선 고층건물로 인해 쉬이 보기가 어려워지고 말았다.
영도다리 아래에 수십 군데의 점집이 성업했다는 흔적은 사진으로만 남았다. 난리통에 손을 놓치는 가족은 부지기수였으니 “꼭 살아서 영도다리 아래서 만나자”는 약속은 누구나 쉽게 잊을 수 없는 만남의 광장 재회였다.
조형물 아래에 쓰인 “영도다리! 거~서 꼭 만나재이~”라는 말은 아무리 봐도 경상도 버전이다. 자유를 찾아 떠나는 피난짐 보따리를 싸면서부터 서로가 만일을 다짐했을 그 약속은 8도 사투리 버전 제각각이었을 것이다.
수많은 날을 기다려도 가족을 찾을 길이 없던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가족의 생사확인을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기댈 곳은 신통하다는 만신과 점바치뿐이었다.
그 시절 점을 봐 주었다는 한 점쟁이 할머니는 “점괘가 흐릿하긴 해도 희망를 버리지 말라”고 거짓 아닌 거짓으로 위로했던 일이 가슴 아팠다고 되돌아보았다. 중구청에서 운영하는, 허술한 ‘점바치체험관’만이 그 시절을 증거할 뿐이다.
<굳세어라금순아> 강사랑 작사, 박시춘 작곡, 현 인 노래, 1953, 오리엔트레코드
영도다리 아래서 본 부산 남항. 평평한 땅이 귀한 부산에서 남부민동, 초장동 산기슭에는 연흔 같은 스카이라인이 야경 속에 더욱 선명하다(남포동)
동백꽃 흐드러지게 핀 태종대, <동백아가씨>
영도는 작은 섬이 아니다. 인구 12만 명이 거주하고 해양대학교와 5천 명이 탑승하는 초대형22만톤 크루즈선이 입항할 수 있는 크루즈 전용부두가 확장되어 4월 첫 입항을 기다리고 있다. 영도에는 그래도 바다에 의존해서 사는 사람들답게 봉래산에 산다는 영도할매 귀신 이야기가 아직도 전한다.
“영도할매(영등할매)가 보이는 곳으로 이사 가면 3년 안에 망한다”는 전설 때문에 ‘밤에 이사를 가야한다’는 것이다. 흡사 제주 사람들이 ‘신구간’에만 이사하는 풍습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태종대는 영도의 종점이다. 태종대의 기억은 청춘남녀에게 선명하다. 부산으로 신혼여행을 온 신랑 각시는 태평양 바다를 만나는 벼랑에서 시원한 앞날을 기약했었다.
야간에만 차량통행이 가능하고 낮 동안은 다누비열차만 다니는 독점적 공간이 되었다. 자전거는 이때 자동차에 포함되어 불순한 존재 취급을 받는다. 등대 아래 몽돌해변까지 가는 일은 이제 추억이다.
바라다보는 태종대의 저녁놀이 타는 가운데 동백꽃이 한창이다. 아껴두었던 부산 출신의 위대한 작곡가 백영호를 여기쯤에서 불러내야 할 듯싶다. 아마도 사랑에 병들고 돈에 속은 여인의 타는 가슴을 여기 태종대에서 먼 대양으로 씻어내는 게 좋을 듯도 싶다. 진주에 이어 고향 부산에서 등장한 백영호 선생은 수많은 히트곡의 유명세 때문이라도 앞으로 불려 나올 날이 여럿 기다리고 있다.
<동백아가씨> 한산도 작사, 백영호 작곡, 이미자 노래, 1964, 미도파레코드
서울 가는 십이열차에, <이별의 부산정거장>
자전거를 접어 시내버스를 타고 다시 부산역으로 나온다. 상행 KTX를 기다리면서 찬찬히 뜯어보는 부산역, 이제 거대한 철골 구조물의 기하학적 공간에서 만남과 떠남으로 움직이는 부산한 몸짓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피난살이 언저리에 초점을 맞추고 보면 역시 역에서 이별은 빼놓을 수 없는 주제다.
옛노래에는 기차역이라고 부르지 않고 ‘정거장’이라고 불렀다. ‘대전정거장’ ‘부산정거장’ 이렇게 불렀다. 대전이야 그야말로 경부선과 호남선이 분기하니 그렇다 치더라도 종점 부산은 왜 ‘부산정거장’이었을까.
더욱이 피난민들에게 부산은 ‘그래도 살아내야 하는’ 목숨을 부지하게 해준 고마운, 정 많은 도시이긴 하지만 되돌아가야 할 타향인 것도 사실인 탓이었을까. 그들에게 부산은 잠시 머물다 가야 할 수밖에 없는 정거장이지 종점은 아니었음이 틀림없다.
전쟁이라고 사랑이 없겠는가. 노래와 술이 빠질 손가. 경상도 아가씨를 두고 떠나야 하는 정거장, 40계단 층층대에 기대앉아 울던 사내의 시린 등을 감싸 안아준 여인을 두고 떠나야 하는 플랫폼의 눈물이 절로 그려진다. 서울 가는 십이열차, 짝수번호는 야속한 상행선의 표기다.
‘미카’로 시작하는 증기기관차가 기적을 울리며 육중한 바퀴를 굴리기 시작하면 차창에 매달리던 걸음은 점차 빨라져 간다. 무정한 이별, 기약 없는 내일을 하소할 뿐이다. 이 노래의 전주 또한 증기기관차가 내뿜는 연기와 구동에 착안하여 점층적 구조로 설계한 폭스 트로트의 약간 빠른 리듬에 남인수의 목소리가 실린다.
<이별의 부산정거장> 호동아 작사, 박시춘 작곡, 남인수 노래, 1954, 유니버설 레코드
1961년 개봉된 엄심호 감독의 동명 영화에는 피난살이 떠나온 법학도 김진오(최무룡)와 부산 기생 정채옥(김지미)의 맺지 못할 사랑 이야기로 형상화 된다.
피난살이 언저리의 부산 노래는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용두산 노래만 해도 박일남의<비 내리는 용두산> 등 8곡이 있고, 부산역의 노래는 방태원의 <부산역 이별> 등 6곡, 영도다리 노래는 윤일로의 <추억의 영도다리> 등 24곡, 부두의 노래는 오기택의 <부산항 제2부두> 등 22곡, 마도로스 주제의 노래는 하춘화의 <아빠는 마도로스> 등 11곡, 경부선 노래는 남인수의 <울리는 경부선> 등 8곡이 확인되어 있다.
그 밖에도 얼마나 더 많을지 알 수가 없다. 산, 바다, 섬, 항구, 마도로스, 다리 등 대중가요의 천혜의 입지를 지닌 부산, 수많은 가수가 탄생하고, 음반회사들이 명멸했던 항도 부산을 떠나는 KTX 238 열차는 미끄러지듯 구내를 빠져 2020년 한겨울 깊은 밤을 향해 달려간다.
조용연 여행작가
첫댓글 이 많은 자료와 설명.- 많은 수고로움
고맙고 감사합니다..
엣날가수님들..모르던 분까지
알게 해주셨습니다..
지인님 반갑습니다~
주옥같은 귀한 노래 잘들었습니다 철없을때 어머니따라 부르고 좋아하는 노래들과 자료설명 감사히 잘 보았습니다
정숙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