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독서
▥ 요한 묵시록의 말씀 3,1-6.14-22
나 요한은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1 “사르디스 교회의 천사에게 써 보내라.
‘하느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말한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살아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죽은 것이다.
2 깨어 있어라.
아직 남아 있지만 죽어 가는 것들을 튼튼하게 만들어라.
나는 네가 한 일들이 나의 하느님 앞에서 완전하다고 보지 않는다.
3 그러므로 네가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들었는지 되새겨, 그것을 지키고 또 회개하여라.
네가 깨어나지 않으면 내가 도둑처럼 가겠다.
너는 내가 어느 때에 너에게 갈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4 그러나 사르디스에는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이 몇 있다.
그들은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닐 것이다.
그럴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5 승리하는 사람은 이처럼 흰옷을 입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생명의 책에서 그의 이름을 지우지 않을 것이고, 내 아버지와 그분의 천사들 앞에서 그의 이름을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6 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14 라오디케이아 교회의 천사에게 써 보내라.
‘아멘 그 자체이고 성실하고 참된 증인이며 하느님 창조의 근원인 이가 말한다.
15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16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
17 ′나는 부자로서 풍족하여 모자람이 없다.′ 하고 네가 말하지만, 사실은 비참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깨닫지 못한다.
18 내가 너에게 권한다.
나에게서 불로 정련된 금을 사서 부자가 되고, 흰옷을 사 입어 너의 수치스러운 알몸이 드러나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제대로 볼 수 있게 하여라.
19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는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열성을 다하고 회개하여라.
20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21 승리하는 사람은, 내가 승리한 뒤에 내 아버지의 어좌에 그분과 함께 앉은 것처럼, 내 어좌에 나와 함께 앉게 해 주겠다.
22 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9,1-10
그때에
1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시어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2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관장이고 또 부자였다.
3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4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
5 예수님께서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6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
7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8 그러나 자캐오는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10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실존의 변화>
오늘 복음은 자캐오 이야기로,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이 인간을 찾아나서는 거대한 역사의 한 단면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앞 장면(1-4절)이 자캐오가 예수님을 찾는 이야기라면, 뒤 장면(5-10절)은 예수님이 자캐오를 찾는 이야기입니다.
앞 장면에서 자캐오는 ‘키 작은 세관장이고 부자’였지만 동포의 조롱과 멸시를 받아야 했고, 매국노의 혐오를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키가 작다’는 말은 그가 외면적으로뿐만 아니라 내면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그처럼 초라했고 ‘작은 자’였다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그래서 깊은 자괴심과 열등감으로 황폐해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예수님을 보려고 애쓰는 사람이었고, 예수님을 보려고 앞질러 달려가 무화과나무 위에까지 올라갔습니다.
뒤 장면에서 자캐오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오신 ‘사람의 아들’로 드러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무화과나무 위에 걸린 죄인 세리 자캐오와 나무 아래 있는 예수님 사이에서 드러납니다.
마치 그것은 십자가 아래 있던 백인대장의 고백처럼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십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루카 19,5)
참 이상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아셨는지 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마치 이곳에서 서로 만나기로 약속한 이를 부르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곳이 당신께서 자캐오를 불러내신 약속 장소였습니다.
당신이 누구신지를 드러내는 장소요, 자캐오가 구원을 얻는 장소요,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되는 장소였습니다.
그분은 그의 이름을 알고 계시고, 그의 아픈 마음도 이미 다 헤아려 아시는 분이셨습니다.
당신이 그를 약속 장소로 이끄시고, 당신이 그 약속장소로 찾아오셨습니다.
마치 “내가 당신을 찾았다면, 그것은 당신께서 저를 먼저 찾으셨기 때문입니다.”라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루카 19,10)
그렇습니다.
이제 나무 위에서 얼른 내려와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 사람이 하늘로 올라갈 필요가 없는 까닭입니다.
하늘에서 이미 인간이 되어 내려오시고, 먼저 나무 위에 달리셨던 그분이 이제 우리 안에 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캐오처럼 ‘일어서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횡령한 것이 있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루카 19,8) 하고 고백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루카 19,19)고 선언하실 것입니다.
이 ‘자캐오 이야기’는 예수님의 구원사건이 자동적이거나 법칙적인 것이 아니라, 실존적이고 창조적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에 대한 순명으로 자동적이고 법칙적으로 구원이 온다’는 당시의 신학을 뛰어넘어, 자캐오와 같이 실존의 변화라는 창조적 행위를 통해서 구원은 비로소 역동적으로 체험되고 현실이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오늘, 이러한 역동적인 실존의 변화를 우리에게 요청하십니다.
'얼른 내려오라'고!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루카 19,6)
주님!
당신은 숨어있는 저를 훤히 아십니다.
사람들 위에 드러냄으로 숨어 있음을 보시고 당신이 계신 아래로 불러 내리십니다.
주님, 제가 얼른 내려와 엎드리게 하소서.
사람들 아래로 내려가게 하소서.
사람들을 내려다보지 말고 올려다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타오르게 하소서!>
성체 분배하며 자주 마주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자캐오 얘기를 묵상하면서 떠올랐습니다.
성체를 모시러 나오는 분들 가운데서 마뜩잖은 모습을 자주 접합니다.
걸음이 불편하지 않으면서도 제게 가까이 와 성체를 받지 않으십니다.
제가 다가가거나 손을 내뻗어야만 할 정도로 떨어져 받으시는 겁니다.
또 어떤 분들은 손 높이가 너무 낮아 제가 낮춰야만 영해 드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영하시기에 제가 불편한 것도 있지만 그렇게 영할 거면 뭐 하러 영할까 생각도 됩니다.
혹시 성체를 별로 영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닌지.
열망은 없고 네가 주고 싶으면 주라는 식은 아닌지.
그런데 제가 왜 이 얘기를 오늘 길게 하냐 하면, 오늘 묵시록에서 이렇게 나무라시기 때문입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이렇게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버리겠다.”
(묵시 3,15ㄴ-16)
그리고 오늘 복음의 자캐오와도 비교되기 때문입니다.
묵시록의 말씀에 비춰볼 때 자캐오는 한때 차디찬 인간이었습니다.
돈을 끌어모으기 위해 사람들에게 냉혹했을 뿐 아니라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에 관한 관심과 열망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자캐오가 오늘 주님을 뵙기 위해서 나무 위로 올라갈 정도로 대단한 열성을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캐오처럼 주님을 만나 뵙고 내 집안에 모셔 들이려면 이 정도의 열성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의 열성은 어느 정도일까요?
그리고 우리가 주님의 팬이라면 어떤 팬이고 어느 정도로 열광할까요?
유명한 가수의 공연에 가려면 몇십만 원의 표가 아깝지 않고, 그렇게 주고라도 공연에 갈 수 있는 것을 행운으로 생각하고, 공연장에 가서는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손길이라도 스치기를 바랄 정도로 열광하는데, 우리는 그 정도로 주님께 열렬한 팬이고 뵙고자 합니까?
그런데 저 자신을 들여다보면 애초부터 저는 뜨겁지 않았고, 온돌로 치면 저는 뜨끈뜨끈한 돌이 아니라 차디찬 돌이었습니다.
온돌이 본래 그렇습니다.
불을 때기 전에는 차디찬 돌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뜨거운 불로 달궈지기 전의 우리는 본래 차디찬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차디찼던 자캐오를 주님께서 뜨겁게 해 주셨던 것처럼 우리도 먼저 주님이 당신의 뜨거운 불로 달궈주시길 바라는 것이 올바른 순서이고 겸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 이렇게 기도합시다.
주님, 저를 오늘 뜨겁게 하소서!
주님, 제가 타오르게 해 주소서!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협력이 필요하다>
사람은 각기 자기 위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은 그에 맞는 처신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대접은 크게 받기를 원합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일수록 자기의 것을 포기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잘 대해주기를 바라며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줄 수 있는 풍요로움이 있을 법 한데 그 반대입니다.
이스라엘의 갈릴래아 호수와 사해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해는 말 그대로 죽음의 바다입니다.
어떤 생물도 살지 못하고 주위에는 나무도 새소리도 없습니다.
사해는 물이 흘러 나가는 강을 지니지 않았기 때문에 받아들인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썩어버렸습니다.
반면에 갈릴래아 호수는 요르단 강에서 물을 받아들인 만큼 사해로 흘려보내기 때문에 언제나 생명이 넘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받을 줄만 알고 줄 줄을 모르면 결국 생명력을 잃고 맙니다.
자캐오는 세관장이고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세관장이라는 위신과 체면을 포기하고 나무에 올랐습니다.
주님을 뵙고자 하는 갈망 때문입니다.
갈망이 큰 만큼 키가 작다는 장애를 극복해야만 했고, 따라서 나무에 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먼저 달려가 주님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의 정성을 지나치지 않으시고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 19,5) 하시며 그를 기억해 주셨습니다.
유다인들은 자캐오가 세리였기 때문에 그를 죄인 취급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죄인을 찾아주시고 품어주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처신을 보고 못마땅해 하였지만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루카 19,9-10)
만약 자캐오가 부자라는 것에 대한 자만이 있었더라면, 세관장이라는 위치를 고집했더라면, 그 위신과 체면 때문에 나무에 오를 수 있었을까?
그는 자기를 버림으로써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난 후 사람이 바뀌었습니다.
돈에 눈멀었던 그였지만 가난한 이를 위해 재산의 반을 내놓을 마음이 생겼고, 혹시라도 횡령한 것이 있다면 네 곱절로라도 갚아 자신이 지은 죄의 대가를 치룰 수 있는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자캐오는 채우고 또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을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극복하였습니다.
작은 키에 세리라는 공적인 죄인으로 시쳇말로 왕따의 삶을 살아야 하는 열등감은 부자라는 이름으로도 극복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남으로서 모든 것이 해결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아무리 풍요하더라도 인간의 협력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가 나무에 오르지 않더라도 자캐오를 부르실 수 있으시지만, 그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 19,10)고 하신대로 모든 이를 구원에로 초대하십니다.
그러나 모두가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선물이지만 주님 때문에 자기의 위신과 체면을 버리고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이에게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할 수 있는 것은 협력과 맡김으로써 가능합니다.
자캐오가 구원을 얻었습니다.
오늘은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가 나무에 오르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모쪼록 주님과의 깊은 입맞춤으로 삶의 쇄신을 이루기를 희망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1티모 1,15)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혹시라도 지금 인생의 최저점(最低點)에 서 계십니까?>
자캐오 회개 사건은 아주 짧은 스토리지만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흥미진진하게 전개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예리코라는 도시를 들르셨습니다.
수많은 군중들이 그분의 동선을 뒤따르기도 하고 길가에 나와 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천천히 걸어가시던 예수님께서 큰 돌무화과 나무 앞에 딱 멈춰서셨습니다.
숨어있던 자캐오를 보신 것입니다.
당시 제가 예수님이었다면 어떻게 처신했을까, 생각해봤습니다.
당시 자캐오는 예리코에서 무시 못할 존재였습니다.
죄인으로 소문난 사람이었지만, 지역 유지였습니다.
그런 자캐오가 돌무화과 나무 위에 올라가 몸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지만, 그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 아마도 그냥 모르는체 하고 지나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자캐오를 뚫어지게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꽤나 짖궂은 분이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끄럽고 송구스러웠던 나머지 애써 몸을 숨기고 있던 그였는데, 그러려니 하고 지나가셨으면 좋으련만, 굳이 멈춰서서 한참동안 그를 바라보신 것입니다.
이윽고 예수님의 시선과 자캐오의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습니다.
그 순간 자캐오의 심정이 어떠했을 것인지는 불을 보듯이 뻔합니다.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긴장감이 밀려와 숨이 멎을 것만 같았을 것입니다.
‘아니, 생면부지의 저분이 왜 내 앞에 서시는 거지?
왜 나를 빤히 바라보시는 거지? 저분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데, 내 어두운 과거를 모두 알고 있을 텐데, 오늘 이러다가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인 창피를 당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여기서 상황은 급반전됩니다.
자캐오의 걱정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언성을 높이지 않으십니다.
화를 내지도 않고 야단치지도 않습니다.
세상 다정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루카 복음 19장 5절)
자캐오는 ‘존귀하신 분이 내 집에 머물겠다니, 이게 꿈이냐? 생시냐?’ 생각하며, 다람쥐처럼 조르르 나무 아래로 내려섰습니다.
한없이 따뜻하고 자상하신 예수님의 배려 앞에 자캐오의 눈에서는 쉼없이 감사와 기쁨의 눈물이 흘러내렸을 것입니다.
크신 주님의 자비에 힘입어 어둡고 스산했던 자캐오의 겨울이 지나가고 따뜻하고 찬란한 봄날이 시작된 것입니다.
반전은 그 한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용광로보다 더 뜨거운 주님 사랑 앞에 수전노 자캐오는 자신도 모르게 지갑을 활짝 열어버립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횡령한 것이 있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루카복음 19장 8절)
그리고 이어지는 마지막 반전, 세상 사람들은 그의 구원 가능성을 0퍼센트로 봤는데, 주님께서는 그에게 100퍼센트 선포하십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루카복음 19장 9절)
예리코는 해저 258m에 건설된 지구상 가장 낮은 도시로 유명합니다.
서쪽 40㎞에 위치해 있는 예루살렘과 무려 1000m 넘는 고도차를 보입니다.
그런데 가장 높으신 예수님께서는 지구상 가장 낮은 도시에서 살아가던 가장 키 작은 사람, 가장 짙은 어둠 속에 살아가던 자캐오에게 내려오셨습니다.
그의 집에 머무르시며 그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회개하는 그를 칭찬하시며 바로 그 자리에서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자캐오에게 베풀어진 즉각적인 구원의 선포, 그 비결은 무엇일까요?
자캐오는 열렬히 예수님을 뵙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돌무화과 나무 위로 올라가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인간의 구원은 열렬히 바라보고, 간절히 기다리고, 진지하게 들음을 통해 다가옵니다.
혹시라도 지금 인생의 최저점(最低點)에 서 계십니까?
너무 슬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음 크게 먹고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머지 않아 기적처럼 그분께서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 옛날 자캐오에게 하신 것과 똑같이 내 이름을 불러주시며, 내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주실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부르심에 응답했다면, 당연히 회개와 보속도 해야 합니다>
1)
오늘 복음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자캐오를 부르시고 자캐오가 그 부르심에 응답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자캐오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맞아들인 일은 묵시록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묵시 3,20)
예수님께서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라고 말씀하신 것은 자캐오의 문을 두드리신 일과 같습니다.
아마도 자캐오는 예수님의 소문을 이미 들었던 것 같은데, 그가 예수님을 보려고 애쓴 일을, 예수님께서 그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셨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모든 사람’을 향해서 하신 일이고, ‘모든 사람’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신 일이고, ‘모든 사람’을 부르신 일입니다.
자캐오만 따로 특별히 부르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자캐오만 부르신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부르신 예수님의 부르심에 자캐오가 응답한 이야기라고 표현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부르시는데, 그 부르심에 ‘모든 사람’이 응답하는 것은 아니고, 무시하고 외면하는 사람들도 있고, 응답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2)
응답했더라도 온 마음과 온 삶으로 응답하지는 않고, 겉으로만 응답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몸만 따르고 마음은 다른 곳을 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미사 참례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몸만 성당에 있고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다면, 그것은 미사 참례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
(콜로 3,1-4)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 버리고,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
새 인간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콜로 3,9ㄴ-10)
자캐오가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혹시라도 횡령한 일이 있었다면 네 곱절로 갚겠다고 말한 것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서 자신의 온 삶을 완전히 새롭게 변화시키겠다는 결심을 말한 것입니다.
3)
우리는 그의 직업이 세관장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사람인지, 무슨 죄를 얼마나 지었는지는 모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서는 그것이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했고, 어떻게 변화했고, 어떻게 ‘새 인간’이 되려고 노력했는지가 중요할 뿐입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따르기 위해서 새롭게 변화되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 ‘응답’입니다.
그래서 ‘회개’와 ‘보속’은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이 반드시 실행해야 하는 일입니다.
‘회개’와 ‘보속’은 ‘낡은 삶’을 버리고 ‘새 삶’으로 나아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새 인간’으로 변화되지는 않고, 그 ‘삶’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다르지 않다면, 부르심에 응답한 것이 아닙니다.
4)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이라고 예수님을 비난했던 사람들은 자캐오의 직업만, 또는 과거만 생각하면서, 그의 변화는 보지 않으려고 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직업에 대한 편견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자캐오의 변화를 인정하기가 싫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의 직업이나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모습만, 즉 그의 변화된 삶과 마음만 보셨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라는 말씀은 자캐오의 응답과 회개와 보속을 인정하신 말씀이고, 그가 ‘구원의 길’을 걷기 시작했음을 인정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오늘’이라는 말도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은 어제도 아니고, 내일도 아니고, 바로 ‘오늘’ 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행복하여라 - 주님을 감동시키는 아름다운 믿음의 사람들! 우리를 감동시키는 아름다운 사랑의 하느님!>
오늘은 이런저런 감동스런 일화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마음의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일어나는 감동스런 사건을 발견합니다.
너무나 감동을 잊고, 잃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감동도 능력입니다.
정말 순수한 믿음의 사람들이, 사랑의 사람들이 감동합니다.
무엇보다 찾고 키워야 할 감동의 능력입니다.
“수사님! 여자 손님 화장실이 크게 막혀 엉망입니다!
가능한 속히 손봐줘야 하겠습니다!
너무 불편하고 혐오스럽습니다! 속히 급합니다!”
끝기도 후 화장실에 들리자마자 수도형제에게 긴급 메시지를 발송했고 새벽 잠깨어 열어보니 오후 8:30.
“되었습니다!” 답신 메시지가 도착했었고 신속한 조치에 감동했습니다.
늘 감동을 선사하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믿음의 수도형제입니다.
제 주변에는 감동을 선사하는 좋은 분들이 참 많습니다.
순수할 때 아름답고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감동을 선사하고 우리를 정화합니다.
없는 돈, 없는 시간을 내어 꽃을 사들고 허리에 파스를 붙인 불편한 몸을 이끌고 바람같이 수도원에 들려 꽃꽂이를 한 자매 역시 멧시지와 더불어 은은한 향기같은 감동을 선사합니다.
“세상사 복잡하여 오늘 꽃시장에 들려 꽃을 삽니다.
마음이 험악하여 지기전에 다스려봅니다.”
옛 어른의 지혜도 우리에게 깨달음과 더불어 잔잔한 감동을 줍니다.
“생각하기를 포기하면 살아가는데 급급해진다.
그러니 삶이 사납게 닥쳐올수록 생각하고 또 생각하라.”
<다산>
다산 정약용 역시 감동의 현자입니다.
생각하는대로 살지않으면 사는대로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정말 깊이 공부하고 생각하여 스스로 분별의 지혜를,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굶주린 자는 달게 먹고, 목마른 자는 달게 마신다.
굶주림과 목마름이 본래 맛을 가리기 때문이다.”
<맹자>
진리에 굶주리고 목마른 자가 진정 행복합니다.
진리이신 주님맛을 비로소 알겠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란 주님 말씀이 귓전에 생생합니다.
어제부터 시작된 연중 33주간 동안의 수도원 연피정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무엇보다 아름다운 만추의 단풍과 잘 어울리는 고즈넉한 고요와 침묵의 분위기를 마련해 주신 하느님의 사랑에 감동했습니다.
어제는 온종일 ‘감동’에 대해 묵상했습니다.
주님을 감동시키는 아름다운 믿음의 사람들만 생각하다가 후에 소스라친 깨달음을 잊지 못합니다.
바로 우리를 끊임없이 감동시키는 아름다운 하느님을 잊은 것입니다.
하느님은 복음의 아름다운 예수님을 통해 얼마나 우리를 감동시키는지요!
감동의 하느님을 닮을수록 우리 또한 감동의 사람이 됩니다.
어제 하루는 19년 전 세상을 떠난 어머니 생각을 하며 많이 감동하고 회개한 날이기도 합니다.
어머니의 평생 일상이 감동의 연속이었는데 지금서야 깨닫고 감동하며 회개하게 됩니다.
한번도 매든 적 없고, 한번도 화낸 적 없고, 한번도 아버지와 싸우거나 다투거나 하는 것을 적 본 적도 없습니다.
삶이 고단한 탓이었던지 어머니 얼굴에 웃음은 거의 없었고 삶 자체가 고요한 순종이었습니다.
참으로 어쩌다 아버지와 다툴 때 보면 어머니는 안방에서 아버지는 윗방에서 서로 말을 주고 받으며 싸웠습니다.
험악하게 다투거나 싸우는 것을 한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소위 말하는 가정폭력은 한번도 목격하지 못한 두 분은 참 지혜롭고 인내심 많고 점잖은 분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부족했어도 어머니는 절대 아버지에 대해 늘 두둔하셨지 부정적으로 말한 적은 한번도 없었으니 지금 생각하건데 어머니는 아버지를 깊이 사랑하며 신뢰했던 것입니다.
간혹 제가 아버지에 대해 불평하면 “네가 아버지 없이 어디서 나왔느냐?”한 마디로 저의 입을 닫았습니다.
지금서야 어머니의 한없이 강인하며 부드럽고 깊고 고요한 마음을, 사랑과 지혜를 깨닫고 감동합니다.
성경은 주님을 감동시킨 아름다운 믿음의 사람들의 일화로 가득합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 가난한 과부의 기도가 주님을 감동시켰고, 어제는 눈먼 걸인의 간절한 갈망이, 오늘 복음에서는 자캐오의 기발한 행동의 연속이 주님은 물론 우리를 감동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 넣습니다.
이런 감동이 저절로 회개로 이끕니다.
참으로 주님은 물론 우리를 즐겁고 행복한 감동에 젖게 하는 자캐오입니다.
복음의 정수요 요약같은 오늘 주님과 자캐오의 만남입니다.
자캐오뿐 아니라 예수님의 아름다운 사랑도 우리를 감동하게 합니다.
사실 시편들은 거의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에 감동한 시인들이 들려준 노래들입니다.
시편을 노래하면서 하느님 사랑에 감동을 배우는 우리들입니다.
주님 은혜에 감동하고 감사하는 것도 배우고 훈련하고 습관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선입견이나 편견을 넘어 자캐오의 순수한 아름다운 행위에 감동한 주님은 돌무화과나무위에서 자기를 보고 있는 자캐오를 쳐다 보시며 말씀하십니다.
정말 전무후무한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정말 이심전심 두분간의 아름답고 감동적인 마음과 마음의, 눈길과 눈빛의 만남입니다.
이어지는 두 분간의 대화는 오늘 복음의 절정입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이니 환대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이런 자캐오처럼 기쁘게 환대의 사랑으로 미사중 주님을 마음 깊이 모셔야 함을 배웁니다.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투덜거리는 참 딱한 철부지들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감동한 자캐오는 환대의 사랑에 이어 재산을 아낌없이 나눌 것을 선언하니 회개의 진정성이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했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자캐오의 회개에 감동한 주님의 참으로 아름답고 감동적인 장엄한 구원의 선언입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자캐오는 물론 예수님이,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이 우리에게 끝없는, 한량없는 기쁨의 감동을, 아름다운 감동을, 구원의 감동을 선사합니다.
자캐오에 감동한 예수님이요, 예수님께 감동한 자캐오입니다.
주님께 참으로 본능적으로 기민하게 응답한 자캐오는 참 행복한 은총의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묵시록의 주님의 초대에 참으로 멋지게 응답한 자캐오요, 우리 모두 자캐오처럼 회개의 응답으로 실현되는 축복의 미사잔치임을 깨닫습니다.
고해인생을 축제인생으로 바꿔주는 주님의 참 아름다운 감동의 미사잔치 은총입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묵시 3,20)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진리에 대한 목마름, 진리를 찾고자 하는 열정>
‘대세(代洗)’를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대세는 아직 세례를 받지 않았지만, 세례를 받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사람에게 주는 세례입니다.
대개는 건강이 좋지 않아서 교리를 받을 수 없는 상태에 있는 분에게 줍니다.
병의 증세가 위중해서 하느님 품으로 갈 수 있는 분에게 줍니다.
형제님은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대세를 위해서 형제님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형제님은 외견상 매우 쇠약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뚜렷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었고, 본인이 세례명을 직접 정하였습니다.
2년 전에 세례를 받았던 아내와 중학생 때 세례받았던 딸과 아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저는 형제님과 가족들에게 천주교회의 4대 교리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형제님은 저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었습니다.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 하느님은 삼위일체라는 것,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사람이 되셨다는 것, 착한 이에게는 상을 주고 나쁜 이에게는 벌준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형제님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2년 전에 은퇴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형제님은 예전에 성경을 2번 읽었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시간 되면 성경을 써 보라고 하였습니다.
형제님은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형제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도행전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주님의 천사가 필리포스에게 말하였다.
필리포스는 일어나 길을 가다가 에티오피아 사람 하나를 만났다.
그는 에티오피아 여왕 칸다케의 내시로서, 그 여왕의 모든 재정을 관리하는 고관이었다.
그는 하느님께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면서, 자기 수레에 앉아 이사야 예언서를 읽고 있었다.
그때 성령께서 필리포스에게, "가서 저 수레에 바싹 다가서라." 하고 이르셨다.
필리포스가 달려가 그 사람이 이사야 예언서를 읽는 것을 듣고서, "지금 읽으시는 것을 알아듣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누가 나를 이끌어 주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서, 필리포스에게 올라와 자기 곁에 앉으라고 청하였다.
필리포스는 입을 열어 이 성경 말씀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그에게 전하였다.
이렇게 그들이 길을 가다가 물이 있는 곳에 이르자 내시가 말하였다.
"여기에 물이 있습니다. 내가 세례를 받는 데에 무슨 장애가 있겠습니까?"
"마음을 다하여 믿으시면 받을 수 있습니다." 하고 필리포스가 대답하자, "나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하고 그가 말하였다.
필리포스와 내시, 두 사람은 물로 내려갔다.
그리고 필리포스가 내시에게 세례를 주었다.'
저는 세례를 받고 싶어 하는 형제님의 의지를 보았습니다.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의 마음을 보았습니다.
아버지를 위해서 직장을 그만두고 아버지 곁에 있는 딸의 사랑도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자캐오’의 이야기입니다.
자캐오는 필리포스에게 세례를 받았던 에티오피아 여왕의 내시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열정이 있었습니다.
세상이 주는 권위와 세상이 주는 재물로는 영적인 목마름을 채울 수 없었습니다.
자캐오는 바람 따라 들려오는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표징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기꺼이 자캐오의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의 이야기를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대세를 청하였던 레오 형제님, 세례를 받고자 했던 에티오피아 여왕의 내시, 타는 목마름으로 예수님을 찾았던 자캐오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진리에 대한 목마름입니다.
진리를 찾고자 하는 열정입니다.
진리를 찾았다면 다른 것들은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용기입니다.
우리들 또한 주님께 대한 목마름으로, 주님께 대한 열정으로, 주님께 대한 희망으로 주님을 찾으면 좋겠습니다.
“깨어 있어라.
아직 남아 있지만 죽어 가는 것들을 튼튼하게 만들어라.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는 과연 어디에 붙어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어렸을 때 자석을 가지고 놀았던 기억이 납니다.
막대자석의 경우, 같은 극일 때는 서로 밀어내고, 다른 극일 때는 서로 붙는 모습이 정말 신기했습니다.
또한 그냥 평범한 못이 자석에 붙으면 다른 못을 잡아당기는 자성이 생긴다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철 자체에도 자성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자석이 되지 않습니다.
자석에 붙어서 자장을 걸어줄 때 비로소 자석이 됩니다.
이를 떠올리며 우리가 하느님 뜻에 맞게 사는 방법을 깨닫게 됩니다.
특히 아버지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거룩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 붙어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주님께 붙어 주님 뜻에 맞게 사는 것을 하나의 걸림돌, 짐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하느님처럼 거룩해질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아닌 세상에만 붙어 있으려고 하니, 하느님의 뜻과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포도 가지가 포도나무에서 떨어지면 아무런 열매도 맺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역시 주님께 떨어져 나가면 주님께서 인정하신 열매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세상 것에 꽉 붙어 있으려고 하면 욕심과 이기심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욕심을 과감하게 버릴 때, 주님께 꼭 붙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있으며, 우리도 하느님처럼 거룩해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자캐오를 보십시오.
그는 세관장이고 부자였습니다.
동포들에게 세금을 걷어서 로마에 가져다주고 있으면서 벌어들인 세상의 부입니다.
세상 것에 꽉 붙어 있는 사람이 분명합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의 노력도 정말로 대단했습니다.
세관장이고 부자였음에도 앞질러 달려가 아이처럼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갑니다.
예수님을 보기만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노력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부르셨고 자캐오는 기쁘게 맞이합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재산을 내려놓습니다.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횡령한 것을 네 곱절로 갚겠다는 것은 모든 재산을 포기한 것입니다.
주님께 붙어서 주님처럼 거룩해진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디에 붙어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세상 것인가요? 아니면 주님인가요?
주님께 붙은 사람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멀리에 있지 않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