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식의 어른 왈 / 그 빛 좋은가?
1953년, 2차 세계대전을 통해 널리 알려진 영국의 한 은퇴 정치인이 노벨상을 받았 다. “고귀한 인간의 가치를 수호한 뛰어난 웅변술과 역사 및 전기적 묘사의 숙달”이 이유였다. 그가 총리였던 1943년 식민지 인도 벵골에 대기근이 닥쳤는데, 전쟁물자를 조달한다며 구조를 외면한 탓에 약 300만 명이 굶어 죽은 사실(事實 史實)은 무시됐다. “인도인들은 토끼처럼 번식한다”는 인종차별적 인식과, 식민지 유지 목적으로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견해도 알려져 있었다.
2016년에는 유행가를 만들고 부른 한 가수도 그 상을 받았다. “위대한 미국 노래 전통 내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한 공로”가 있다는 것이었다. 유행가 ‘따위’가 전통적 의미의 문학이 될 수 있는가부터, 특히 큰 상을 받을 만한 성취가 있느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그러나 스웨덴 학술원 사무총장은 “그는 대중의 귀를 위한 시(詩)를 쓴다”며 시비(是非)를 덮어버렸다.
그런가 하면 1964년 한 인물은 그 대단하다는 상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프랑스 작가인 그는 “작가의 과업에 대한 관념에 입각한 것”이라고 거부 사유를 밝혔다. ‘노벨문학상 수상자’라는 수식어를 원치 않는다는 것이었다. ‘누가 나를 평가해!’ 정도의 자부심 때문 아니었을까?
예술은 뭘까? 단지 타고난 재능인가 아니면 고된 연습 끝에 얻은 기능이나 기술인가? 톨스토이는 ‘예술론’에서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예술을 한다며 재능과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지!’라며 안타까워했다. 문학(문예가 맞을 듯)은 또 어떤 것일까? 혼자서 혹은 떼를 지어 다니면서 뻔한 소리를 노랫가락에 담아, 달콤하고 간지럽게 속삭여 끼니와 잠자리를 얻은 것이 문학의 시작 아니었나?
그런데 예술(문학) 한답시고 인간의 본성을 멋대로 떠들고, 사회와의 갈등을 마구 주절대고, 그 과정의 고통을 함부로 뇌까린다. 한 마디로, 못할 짓이 없는 것이다. 상상력을 들먹이고 창조를 내세우면서, 사실과 진실은 내팽개치고 도덕과 상식은 짓밟아버린다. 새로운 것을 만든다고 곱게 분칠하기만 하면, 거짓도 아름다워지며 ‘상 받을 만한’ 것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어떻든 오래 된 직업이니, 그 방식이나 종사자를 나무랄 일은 아니다. 예쁘고 잘 생긴 배우들이나 눈부시고 섬뜩한 말에 홀렸다고 탓할 것은 더욱 아니다. 문학을 포함한 예술은, 좋게 보면 분장이거나 포장이고, 독하게 말하자면 과장 혹은 사기(詐欺)일 가능성이 크고 많다. 지적(知的) 지진아와 감성적 미숙아들이 빠져들기 쉽다. 힘들게 배우거나 괴롭게 알 필요 없이, 쉽고 즐겁게 재미를 찾고 그냥 믿으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근차근 조여오는 목줄을 애써 외면하고만 있는 것은 아닐까? 혹시 조직적 우민화(愚民化)를 기꺼이 반기는가?
그나저나 걱정이다. 이 나라뿐 아니라 세계적인 추세가 된 듯한 ‘하나 된 세계’를 향한 폭주(暴走)가 마침내 정점에 이른 느낌이다. 아무쪼록 ‘대박난’ 개인은 물론이고 그 패거리들 모두, 꺼지기 직전 마지막 발광(發光)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그 빛, 과연 고운가? 밝은가? 환한가? 진정 좋은가 말이다.
글 / 호남일보 / 주성식 선임기자
소향 So Hyang - 홀로 아리랑 Arirang Alone 2021.0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