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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과연 성경이 말하는 예언이 이런 성격인가? 성경에 나타난 예언의 은사가 이교세계에서 무당이나 점쟁이가 인간의 생사화복이나 길흉에 대하여 점치는 것과 같은 것인가? 성경은 ‘예언’이라는 말을 어떻게 사용할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우리는 성경 전체를 살필 것이다. 먼저 구약의 이스라엘 안에서 예언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살피고, 다음에 신약의 교회에서 나타난 예언의 기능과 성격이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한다. 다음 세 가지 질문을 염두에 두는 것이 유익하겠다.
첫째, 이 예언의 은사는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어떤 봉사를 했는가?
둘째, 이 예언의 은사는 누구에게 주어졌는가?
셋째, 이 예언의 은사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가?
A. 구약에서 예언의 성격
구약에서 예언은 선지자라는 직분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예언하는 일은 일반 신자의 직무가 아니라 특별한 직분자 곧 선지자의 직무였다. 따라서 먼저 선지자들이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살펴보면서, 예언의 기능이 무엇인지 정의를 내려보자.
1. 선지자와 예언
선지자의 직분적 성격이 무엇인지를 잘 드러내 주는 본문 중에서 최초의 말씀은 출7:1,2에서 찾을 수 있다.
“야웨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선지자)가 되리니 내가 네게 명한 바를 너는 네 형 아론에게 말하고 그는 바로에게 말하여....”
이 구절은 잘 아는 대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바로의 압제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모세를 바로 앞에 보내는 장면이다. 모세가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면서 바로 앞에 가지 않으려 할 때, 하나님은 모세의 형 아론을 모세의 대언자[선지자]로 세우셨다. 그러면서 마치 모세와 아론의 관계를 신(하나님)과 선지자의 관계로 설정하신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아론에게 전달하면, 아론이 모세로부터 들은 것을 그대로 바로에게 전달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선지자(대언자)의 직분적 특성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된다. 즉 선지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들은 말씀을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달하는 사람”이다.
출4:10-16에서 더 자세한 것을 알 수 있다. 15절, 모세는 그의 형 “[아론]에게 말하고, 그 입에 말을 준다”. 16절, “아론은 모세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같이 되리라.” 여기서 우리는 선지자는 ‘하나님의 입을 대신하는 자’로서, 하나님께서 그 입에 주신 말을 전달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레미야1:7과 17절에서도 이 사실은 분명히 증거된다. “야웨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그러므로 너는 네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내가 네게 명한 바를 다 그들에게 고하라.....”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보내시든지 가야하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명한 것을 다 말하고, 고하여야 한다. 이것이 선지자의 사명이고, 곧 예언 사역이다. 선지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을 말하는 것을 “예언”이라고 하는 것이다. 아모스3:8 “...야웨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셨는데, 누가 예언을 하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
2. 선지자의 예언 사역
2.1 선지자는 축복과 저주를 선포했다
▶ 아브라함의 경우
성경에서 제일 먼저 선지자라는 말이 나오는 곳은 창세기20:7이다. 아브라함은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이를 곧이 들은 아비멜렉은 사라를 취하였다. 그 날 밤 하나님께서 꿈으로 아비멜렉에게 나타나 모든 사실을 알게 하신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 대하여 말씀 하신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 줄 알지니라.”
이 구절에서 아브라함이 선지자(나비)로 기술되고 있다. 그리고 선지자는 기도하는 자로 설명이 되고 있다. 아비멜렉이 사라를 돌려보낼 때,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을 위하여(바아드카, 너를 위하여) 기도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을 살려두실 것이다. 그러나 만약 돌려보내지 않으면, 역시 아브라함은 기도할 것인데, 하나님은 아비멜렉을 죽일 것이다. 이때 주목할 것은 아브라함의 기도는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창12:3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하셨다. 아브라함의 기도는 단순히 개인적인 기도가 아니라 선지자 직무를 수행하는 기도이다. 즉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근거하여 자기를 축복하는 자를 축복하고, 자기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를 돌려보내지 않는 것은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일이며, 돌려보내는 일은 그를 축복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후손을 통하여 큰 민족을 이루실 것이며, 또 장차 이 후손을 통하여 땅의 모든 민족에게 구원의 복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결코 사적인 축복기도가 아니라 선지자로서 직분적 기도였다.
▶ 엘리야의 경우
선지자의 기도하는 직무는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다른 선지자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대표적으로 엘리야이다. 엘리야 선지자는 아합 왕과 그의 백성들이 야웨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섬김으로 언약을 배반했을 때, 그 땅에 비가 오지 않기를 위해서 기도했고, 또 나중에 하나님께서 아합 왕과 그 백성들을 돌이키셨을 때, 다시 그 땅에 비가 오기를 위해 기도했다. 물론 엘리야 선지자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레위기26장, 신명기28장에 언약하신 것을 따라 기도드린 것이다(왕상17-18, 약5:17-18).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언약의 말씀에 불순종할 때, 여러 가지 저주를 내실 것인데, 그 중에 하나가 하늘의 문을 닫아 기근의 고통을 주시는 것이었다(26:19). 또 반대로 자기 백성들이 돌아올 때, 다시 하늘의 문을 열어 언약의 복을 주신다(26:4).
* 발람이 이스라엘을 축복했다(민수기23장)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평지에 진을 쳤을 때, 모압은 심히 두려워했다(민22:1). 그때 모압 왕 발락은 발람 선지자를 보내어 이스라엘 자손을 저주하도록 부탁했다(11절). 그러나 하나님은 발람 선지자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축복하도록 명하셨다(23:5 이하, 8-10, 18-24, 24:1-25).
23:8 “하나님이 저주하지 않으신 자를 내 어찌 저주하며, 야웨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 어찌 꾸짖을꼬?”
23:20 “내가 축복의 명을 받았으니 그가 하신 축복을 내가 돌이킬 수 없도다”
▶ 이삭의 축복(창27:27-29)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을 선포한 것은 역시 선지자로의 역할로 인정되어야 한다. 당연히 이 축복도 개인적인 행복과 번역의 축복기도가 아니라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성취하는 관점에서 행한 축복이다.
“...축복하여 가로되 내 아들의 향취는 야웨의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 노아의 축복과 저주 선포(창9:18-27)
노아가 술을 먹고 취하여 벌거벗은 채로 누워 자고 있을 때 자기 아들들의 행위를 알고 난 후에 셈, 함, 야벳에게 각각 축복과 저주를 선포하였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 셈의 하나님 야웨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2.2 미래에 일어날 일의 예언
▶ 에녹(창5장, 유다서)
에녹은 자기 시대의 타락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했다. 이 예언은 노하 시대의 홍수심판으로 성취되었다(창6-9장).
“아담의 칠 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는 자의 경건체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유9).”
▶ 야곱의 예언(창49장)
야곱은 죽기 전에 12아들을 자기 앞에 불러놓고, 그들의 장래가 어떻게 될 것임을 예언했다. 그러나 이 예언은 단순히 12아들의 개인 운명에 관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 언약과 관련되어 있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는데, 그 약속이 어떻게 12아들을 통해서 성취가 될 것인지에 대한 예언이다. 특별히, 유다에 관한 예언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지파를 통해서 나올 것이 예언되었다(10절,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
구약의 대표적인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장래와 더불어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하여 예언하였다. 특별히, 이들은 북쪽 이스라엘, 남쪽 유다의 멸망과 회복에 대하여 많은 예언을 하였다. 또 어떤 선지자들은 이방민족들의 멸망에 대하여 예언을 하였다. 이 멸망에 관한 예언은 단순히 한 민족이나 국가의 흥망성쇠의 예고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언약하신 것을 어떻게 성취하시는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멸망에 대한 예언은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에 따른 마지막 저주선포였다(레26장, 신28장). “... 너희가 들어가 얻는 땅에서 뽑힐 것이요. 야웨께서 너를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만민 중에 흩으시리니...”(신28:63-64). 동시에 이스라엘과 유다의 회복에 대한 예언도 언약에 따른 축복의 선포였다(레26:44-45). 회복에 대한 선포 가운데서 선지자들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예언하였다. 이 예언은 창3:15의 원시복음과 노아 언약, 아브라함 언약, 모세(시내산) 언약, 다윗 언약을 계승하고 성취하는 새 언약의 선포였다(렘31:31-34, 겔36:22-31).
2.3 회개를 촉구하는 책망과 저주를 선포하는 사역
▶ 갓과 나단
선지자들의 사역 중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책망과 격려이다. 대표적으로, 갓과 나단 선지자가 다윗을 책망한 경우이다. 첫째로, 다윗은 갓 선지자로부터 책망을 받았는데(삼하24:11-19 대상21:9-19), 다윗 인구조사를 끝냈을 때, 하나님은 갓 선지자를 보내어 다윗의 죄를 지적하시고 책망하셨다. 그리고 갓은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세 가지 저주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했다. 7년 동안 기근, 3개월 동안 다윗이 원수로부터 도망 다니는 것, 3일동안 백성이 죽음의 역병이 임하는 것. 이 셋 중에 다윗은 세 번째를 택하였으며 그 결과 7,000명이 죽었다.
또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을 하고, 그의 충신 우리야 장군을 전쟁터에서 죽였을 때,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다윗의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였다. 이 책망의 목적은 다윗으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이끌기 위함이었다.
▶ 실로 사람 아히야
실로 사람 아히야(왕상14:2-28): 여로보암의 아들이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그의 아내가 아히야를 찾아왔을 때, 아히야는 여로보암의 죄악으로 그 아들이 죽을 것이라고 선포했다.
▶ 스마야(대하12장)
르호보암이 자기 왕국이 두 개로 분열되는 것을 보고, 그것을 막기 위하여 유다와 베냐민 지파로부터 180,000명의 군대를 모아 여로보암을 치러 갈 때, 스마야는 이 모든 일이 하나님께로부터 허락된 일이기 때문에 전쟁을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 하나니(왕상16장; 대하19:2)
유다 왕 아사가 이스라엘 왕 바아사로부터 경제적인 압박을 당하고 있었는데, 바아사가 예루살렘에 이르는 남북 통상로를 장악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의 북쪽 라마를 침략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아사는 다메섹에 도움을 요청한다. 다메섹이 이스라엘의 북쪽을 침략하는 바람에 바아사는 할 수 없이 라마를 철수하게 되었고, 아사는 오히려 바아사가 라마에 건축한 게바와 미스베를 증축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니 선지자를 보내어 아사 왕을 책망하였다. 왜냐하면 아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이방의 왕 다메섹을 의지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니는 과거에 아사 왕이 하나님을 의지하여 구스인 세라를 격퇴시킨 사실을 상기시키면서(대하15:1-8) “야웨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고 교훈하였다(대하16:9). 그러나 칭찬을 기대했던 아사왕은 하나니를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 예후(왕상16:3, 대하18:28-34, 왕상22:29-40)
예후는 바아사에게 “하나님께서 너 바아사와 네 집을 쓸어버려 네 집으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같이 되게 하리라”고 선포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여로보암의 죄로 인하여 바아사로 하여금 여로보암의 집을 파멸토록 하셨는데, 바아사도 역시 여러보암만큼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예후는 여호사밧을 책망한다. 여호사밧은 라못-길르앗에서 다메섹과 싸움에서 아합과 동맹을 맺어 그를 도왔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여호사밧에게 책망하신다.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야웨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가하니이까 그러므로 야웨께로 진노하심이 왕이에 임하리이다(대하19:2)”
▶ 마레사 사람 엘리에셀(대하20:37)
여호사밧 왕이 오므리의 집과 두 번째 동맹을 맺었을 때이다. 즉 여호사밧 왕이 아합 왕의 장남 아하시야와 동맹을 맺고, 통상을 하기 위하여 에시온게벨 항구에서 배를 건조하였다. 배가 건조되고 있는 중에 하나님은 엘리에셀을 보내어 “왕이 아하시야와 교제하는 고로 야웨께서 왕의 지은 것을 파하시리라”고 경고한다. 결국 배가 건조되었지만 파괴되었고, 통상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2.4 격려와 위로를 선포하는 사역.
▶ 야하시엘(대하20장)
유다 여호사밧 왕 때, 모압, 암몬, 에돔의 연합군이 침략하였다. 이때 연합군을 대항할 충분한 군사력을 보유하지 못한 여호사밧은 금식을 선포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했다. 기도가 끝났을 때, 성령이 야하시엘에게 임하여 “야웨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대하20:15)”고 말한다. 그리고 “항오를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야웨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17)”고 격려한다.
3. 선지자들은 어떤 방식으로 계시를 받고 전하는가?
히1:1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3.1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때는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이 있었다. 즉 직접 말씀을 받을 때도 있고, 꿈으로나 환상을 통해서 받을 때도 있다.
창12:1 야웨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창15:1 이 후에 야웨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창17:1 아브람의 구십구 세때에 야웨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창18:1-2 야웨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출3:2 야웨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출6:2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나는 야웨로라....
출19:19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수1:1 야웨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야웨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삿6:11 야웨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 앉으니라..... 야웨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삿13:3 야웨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삼상3: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야웨를 섬길 때에는 야웨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삼상3:4 야웨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10절).
사1:1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이라.
렘1:2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다스린 지 십삼 년에 야웨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렘7:1 야웨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가라사대...
겔1:1 제삼십년 사월 오일에 내가 그발 강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이 내게 보이시니
겔8:1 제육년 유월 오일에 나는 집에 앉았고 유다 장로들은 내 앞에 앉았는데 주 야웨의 권능이 거기서 내게 임하기로...
욜1:1 야웨께서 브두엘의 아들 요엘에게 이르신 말씀이라.
나1:1 느니웨에 대한 중한 경고 곧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
합1:1 선지자 하박국의 묵시로 받은 경고라.
3.2 선지자들이 받은 계시를 전할 때 역시 여러 모양과 여러 방법이 있다. 직접 말로 전하기도 하고, 표적과 기사를 통해서 전하시고 하며,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전하기도 한다.
사7: 3. 이사야는 유다 왕 아하스를 직접 만나서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그 입의 말로써 전했다.
사37:1이하, 이사야는 유다 왕 히스기야 왕이 보낸 사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게 했다.
렘13:1-11,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베띠를 사서 허리에 띠고 있다가 그것을 유브라데 강가 바위틈에 감추었다가 여러 날 후에 그것을 취하라고 하셨다. 감추었던 띠를 파서 보니 그 띠가 썩어 있었다. 이것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교만을 이와 같이 썩게 할 것임을 보여주는 행위계시이다.
렘19:1-13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토기장이의 오지병을 사서 그것을 유다 왕과 예루살렘 거민 앞에서 깨뜨리게 하신다. 이것은 이 백성과 이 성이 파멸할 것을 보여주는 행위계시이다.
렘27:1-11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줄과 멍에를 만들어 그의 목에 얹고 예언하라고 하신다. 이 멍에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말한다.
4. 작은 결론:
구약 선지자들의 이 모든 사역들은 단순히 한 사람이나 한 민족의 운명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선지자들의 예언 사역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다스리는 방편이었다. 특별히 선지자들의 예언 사역은 항상 시내산에서 선포된 그 율법에 근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책망하고 저주하시는 것도, 반대로 자기 백성들을 회복시키고 축복하는 것도 다 언약의 말씀에 기초한 것이다. 선지자들은 백성들이 이 율법의 길을 벗어날 때, 책망하고, 죄를 지적하고, 율법의 길을 가르치고 회개의 길로 인도하였다. 때로는 불순종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저주를 선포하기도 했다. 가장 중요한 사역은 그리스도의 강림과 그로 인한 구속사역의 성취와 완성을 예언한 것이다.
구약에서 나타난 모든 예언활동은 선지자들의 직무와 관련되어 있다. 이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말씀하시는 통로였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에게 자신의 말씀을 들려주셨고, 그들은 백성들에게 그대로 알렸다. 그리고 선지자들의 예언활동은 단순히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알리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 축복, 책망과 교훈, 격려와 위로 등 다양한 활동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B.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
1. 세례 요한
세례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실 메시야(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에 대하여 예언하였고, 백성들이 그를 맞이하도록 준비시켰다. 그의 사역은 백성들이 죄를 회개하도록 준엄하게 책망하고, 회개의 세례를 받도록 한 것이다. 이는 전형적인 선지자들의 사역으로서 앞 선 선지자들이 시내산 언약에 기초하여 백성들을 가르치고 지도한 사역과 동일하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유대인들에게 “임박한 진노”를 선포하였고(마3: 7절, 10절, 12절), 동시에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권면하였다(8절, 10절). 이것은 전형적인 선지자의 사역을 보여준다. 세례 요한은 특별히 바리새인들에게 “독사(뱀, 사탄)의 자식들”이라고 저주를 선언하면서 그들 위에 임할 진노가 임박했다고 선포했다. 왜냐하면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여 있기 때문에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는 찍어 불에 던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저주 선포는 시내산 언약의 저주에 근거한다. 따라서 요한은 그들에게도 회개하라고, 회개의 열매를 나타내라고 설교했다. 요한은 바리새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유대인들에게 동일한 설교를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자복하였다(3:6). 세례요한은 백성들이 무슨 죄를 회개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지적해 주었다. 옷 두벌 있는 자는 옷이 없는 자에게 나누어주라고 했고, 세례들에게는 정한 세금 외에는 늑징(勒徵)하지 말라고 했으며, 군인들에게는 사람들에게 강포를 행하지 말고, 무소(誣訴)하지 말고, 받는 요(임금)에 만족하라고 가르쳤다(눅3:10-14). 이것은 가르치는 사역이다.
또 세례 요한은 구약의 선지자들 특히, 이사야가 예언한 그 예언이 곧 이루어질 것을 선포하면서 오실 메시야, 그리스도를 맞이할 것을 촉구했다.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방법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일이다. 그리고 세례 요한은 회개한 자들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다. 물로 세례를 받는 것은 죄를 씻을 때, 용서하신다는 언약의 표와 인침이다. 이 뿐 아니라 요한은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시며, 그가 하실 일을 예고했다. 즉 그리스도는 세례 요한 자신이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하지 못할 능력 많으신 분이시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이시다.
* 선지자로서 요한의 사역의 핵심은 심판과 회개를 촉구하는 사역이었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가르치는 사역이었다.
2. 예수 그리스도
가장 크고 위대한 선지자는 예수님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천국)를 선포하시고, 회개를 촉구하셨다(막1:14-15). 그가 전한 천국의 복음은 전에 감취었다가 이제 나타난 “비밀”이었다(마13:11). 선지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들을 저희의 죄에서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의 모든 계획을 밝혀주셨다. 이를 확정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많은 표적과 기사를 행하셨다(눅7장, 마11장, 요20:30-31).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실 때, 그리스도로 임직하셨다(마3:13-17). 그 때 그는 왕과 제사장 직분과 함께 선지자 직분을 취하셨다. 그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실 때, 그것은 바로 선지자로서 행한 사역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천국복음의 선포(설교)와 가르침을 들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선지자로 고백하였다.
마16:14,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마21:11 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요6:14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요7:40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선지자로서 예수님은 결코 자의로 말씀하지 않으셨다.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씀하셨다(요8:28). 그리고 오직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요8:38),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전하신 것이다(요17:8, 14). 그는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 곧 하나님의 선지자였다(요8:40).
선지자로서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를 성취된 관점에서 가르쳐서 천국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대로 보여주셨다(예, 마5-7장). 또한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을 향하여 저주를 선포하셨고(예, 마23장), 장차 이루어 질 일 예루살렘의 멸망과 당신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성령강림과 재림을 예언하기도 하셨다(마16장, 24-28장). 또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자신이 전한 그 말씀이 진정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확증하기 위하여 다양한 표적과 기사를 행하셨다. 복음서에 나타나는 각종 병 고치는 일과 귀신을 쫓아내신 일 그리고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과 같은 능력행함은 모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표적들이다.
C. 성령강림 이후의 선지자
1. 신약 교회의 선지자
사도 바울은 에베소의 교회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움을 입었다고 말한다(엡2:20). 여기서 말하는 선지자들은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이 아니라 신약 시대의 선지자들이다. 사도 시대 당시에 예수님께서 교회에 주신 직분적 은사 중에 선지자들이 있었다. 에베소서4장 11절,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고전12장 28절에서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요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선지자는 분명히 신약의 교회 안에 한 직분자로 임명을 받았다. 그래서 성경에 나타나는 각 지역 교회에는 선지자라는 직분이 있었다. 예를 들어 고린도 교회뿐만 아니라 그 전에 이미 세워진 안디옥 교회에도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었는데, 곧 바나바 시몬(니게르), 루기오(구레네 사람), 마나엔(분봉왕 헤롯의 젓동생), 사울 등이다(행13:1). 또 이미 예루살렘 교회에도 선지자들이 있었다(행11:27).
2 신약성경에 나타난 선지자들과 그 활동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세우진 신약 교회의 선지자들의 활동에 관한 구절은 사도행전에 단지 3 곳이 있다.
▶ 아가보(행11:27-30)
아가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선지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가 다른 선지자들과 함께 안디옥에 와서 “천하가 크게 흉년이 들리라”고 성령으로 예언하였다. 이 예언은 글라우디오 황제 때에 성취되었다. 이 예언은 단순히 흉년 들 것임을 예언했다기 보다는 오히려 교회들이 이 흉년의 때를 미리 준비하여 가난한 형제를 위해 부조할 것을 지도할 목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안디옥에 있는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형제들을 위하여 부조를 준비하였기 때문이다.
▶ 유다와 실라(행15:32)
유다와 실라는 선지자였다. 이 두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사도들의 결정 -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지 않고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 - 을 안디옥 교회에 전달하고,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였다.” 여기서 선지자의 직무는 교회의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고(설교), 그 믿음을 굳게 하는 사역으로 나타난다.
▶ 아가보(행21:10-14)
이 아가보는 아마도 예루살렘 교회의 그 선지자일 것이다. 그는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결박당할 것을 예언하였다. 그는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손과 발을 잡아매고서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고 말한 것이다.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선지자들의 사역은 첫째, 장래에 일어날 일을 예언하는 것,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가르치는 사역(과 권면)으로 정리된다.
3 고린도전서14장에서 “예언 혹은 예언하는 자(선지자)”의 특징
3절,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4절,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31절,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헬: [호 데 프로패튜온 안뜨로포이스 랄레이 오이코도맨 카이 파라클래신 카이 파라뮈띠안] 직역: 그러나 예언을 하는 자는 사람들에게 세움과 격려와 위로를 말한다.
이 구절들은 방언의 은사와 대조하는 가운데 예언의 은사를 받은 선지자는 세 가지 사역을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첫째, 덕을 세운다[오이코도맨] - 헬라어 “오이코도메오”는 집과 같은 건물을 높고 견고하게 세우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종종 하나님의 집인 교회와 관련하여 사용된다. 대표적으로, 마16:18에서 예수님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오이코도메오)”고 하셨다. 사도 베드로는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오이코도메오)”라고 하였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우는 일을 “건축한다(오이코도메오)”는 말로 표현했다. 그러므로 예언을 하는 자가 “오이코도메오” 한다는 것은 선지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으로 사람들에게 가르쳐서 그 신앙의 지식과 인격이 성장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 권면한다[파라클래신] - 선지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으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서 더욱 그 신앙에 힘쓰도록 격려하는 것을 말한다.
셋째, 안위한다[파라뮈띠안] - 선지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으로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특별히, 신자들이 신앙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 시련을 만나 고통받는 상황에서 필요하다.
넷째, 배우게 한다[만따노] -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내용을 가지고 사람들을 가르쳐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게 해야 한다.
4. 요한계시록에서 예언의 특징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서 어느 주의 날에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계시를 받는다(1:1). 요한은 자기가 본 이 계시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라고 말하면서(2절) 다시 이것을 “예언의 말씀”이라고 말한다(3절). 그리고 이 예언의 말씀을 편지로 받은 수신자들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들”이다(4절). 그러므로 “예언”은 단순히 어떤 개인이나 공동체의 장래 운명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이다.
물론 요한계시록의 예언은 “반드시 속히 될 일”을 말하고 있다(1:1). 그러나 이 속이 될 일은 영광을 받으신 교회의 머리요 온 세상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주를 저버린 옛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의 완전한 멸망과 함께 그 가운데서 새 언약의 백성인 교회를 어떻게 보전하시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예언의 말씀 속에 장차 될 일과 교훈과 책망과 위로와 격려, 축복과 저주가 포함되어 있다.
5. 성경 전체는 예언의 말씀이다.
사도 베드로는 그의 독자들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라고 말한다(벧후1:16). 그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로서 존귀와 영광을 받으신 사랑하는 아들에게서 친히 들은 예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리하심에 대한 “더 확실한 예언”이 있다고 말한다(19절). 이 구절에서 알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능력이나 또 그의 강림과 같은 사건들이 “예언”으로 불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 베드로는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벧후1:20-21)고 말한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내용 전체가 “예언”으로 불려지고 있음을 뜻한다. 모세가 기록한 창세기부터 사도 요한에 의해 기록된 66권의 성경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계시의 말씀 곧 “예언”이다.
D. 예언의 은사는 오늘도 존재하는가?
예언의 은사는 오늘날 신약 교회에 여전히 존재하는 은사인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예언의 은사를 주시는가? 이 질문에 대답을 하기 위하여 질문을 바꾸어 보자. 즉, 오늘날에도 여전히 예언하는 자, 즉 선지자라는 직분이 있는가? 예언자, 선지자 직분의 존속 여부가 예언의 은사의 존속 여부를 결정할 것이다.
1. 사도 시대의 교회는 선지자 직분이 있었다.
고린도 교회는 분명히 선지자들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언의 은사가 주어졌고, 그 선지자들은 교회의 공적인 모임(예배)에서 예언을 하여 신자들을 배우게 하고(만따노), 덕을 세우고(오이코도메오), 권면하고(파라클레오), 위로하였다(파라뮈떼오).
26절.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또 (위에서 언급한) 안디옥 교회에도 선지자들이 있었고(행13:1), 예루살렘 교회에도 많은 선지자들이 있었다. 이들 역시 각 교회의 공적인 모임에서 예언(계시)을 하여 신자들을 가르치고 권면하며 위로하였다.
2 우리 시대의 교회는 선지자 직분이 사라졌다.
사도 시대의 교회는 분명히 선지자 직분이 있었고, 따라서 예언의 은사가 주어졌다. 그러나 우리 시대는 선지자 직분이 사라졌으며, 따라서 예언의 은사도 중단되었다. 그렇다면, 왜 선지자 직분이 사라졌는가? 선지자 직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기초를 세우기 위하여 임시적 기간 동안에 교회에 세우신 직분이었기 때문이다.
엡2:20 너희는 사도와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움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에포이코도메뗀테스 에피 토 떼멜리오 톤 아포스톨론 카이 프로패톤, 온토스 아크로고니아이우 아우투 크리스투 예수]
사도 바울은 교회를 하나의 건물에 비유한다. 그는 이 교회의 모퉁이 돌(기초석)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이 교회의 기초는 바로 사도들과 선지자들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선지자들은 사도들과 함께 교회의 기초를 놓은 직분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면, 교회의 기초는 다 놓아졌는가? 그렇다. 고전도전서3장 10-11절에서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사도 바울은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다”고 말한다. 이 구절을 통하여 바울을 포함한 모든 사도들과 함께 선지자들은 교회의 터를 닦아 둔 직분자들이었다. 그리고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이 터를 닦았고, 그들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을 자가 없다고 못을 박는다. 그러므로 다른 터를 닦을 자는 이제 없는 것이다. 즉 교회의 터(기초)를 놓을 직분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예언의 은사도 주어지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교회의 기초를 세우는 이 일은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사도와 선지자들에게 예언을 통하여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주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아 교회를 가르치고 권면하고 위로하였다.
또 더욱 분명한 구절은 고린도전서13장 8-12절이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사도 바울은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한다”고 말한다. 이 시점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첫 번째 편지를 쓸 때이다. 그 당시에 여전히 예언의 은사가 있었고, 선지자들은 교회를 가르치기 위하여 예언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온전한 예언이 아니라 “부분적인 예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의 선지자들은 다른 선지자들에게 제재를 받았다(휘포타쎄타이, 14:32). 여기서 선지자들이 다른 선지자들에게 제재를 받는다고 할 때 사용된 헬라어 단어는 “휘포타쎄타이”인데, 아내들이 자기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할 때 사용된 그 단어와 동일한 것이다. 당시 예언의 말씀이 주어졌을 때, 하나님은 다른 선지자들을 통하여 앞의 예언을 수정하기도 하신 것이다. 이런 식으로 당시의 예언은 완전한 것이 아니었고, 부분적이었다.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예언하는 사역이 폐하여질 것이라고 사도는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장성한 사람이 되었을 때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린 것과 같다. 어린아이였을 때는, 말하는 것과 깨닫는 것과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 이것은 바로 부분적으로 예언하던 시대를 가리킨다. 장성한 사람은 완전한 것이 올 때를 가리킨다. 장성한 사람이 되었을 때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린다는 것은 완전한 것이 올 때는 부분적으로 하던 예언의 사역이 끝난다는 것이다. 바울은 또 부분적으로 예언하던 시대를 거울로 보는 것 같다고 말한다. 부분적으로 예언하던 시대는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이 희미했다. 그러나 “그 때에는” 즉 온전한 것이 올 때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밝히, 온전히 알게 된다.
그렇다면, 지금 교회는 어린아이인가? 아니면, 장성한 사람이 되었는가? 지금 교회는 거울을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보고 있는가? 아니면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것 같이 보고 있는가? 지금의 교회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장성한 어른이고, 거울이 아니라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것처럼 밝게, 온전하게 보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완전한 것이 왔기 때문이다. 즉 완성된 계시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완성된 계시 그것은 곧 우리 손에 들려진 성경이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시대는 성경이 완성되지 못했다. 여전히 성경이 기록되고 있었던 시대였다.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예언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성경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타내신 모든 계시를 다 알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더 이상 예언의 은사가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E. 결론
우리는 지금까지 구약에서 신약까지 성경 전체를 통하여 예언의 기능이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예언은 선지자의 직분과 관련을 맺고 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혹은 이방인들에게 말씀하시는 통로였고, 하나님의 입이었다.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백성들 혹은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사역, 그것이 바로 예언이었다.
구약에서 이 예언은 축복과 저주를 선포하는 것이나 혹은 그 축복과 저주가 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는 것, 하나님의 백성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것,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의 멸망과 회복을 선포하는 것 등이었고, 또 이스라엘 백성들의 멸망과 회복을 선포하는 문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실 것과 그가 행하실 사역을 예언하는 것이었다.
신약에서도 여전히 예언의 은사가 있었는데, 그것은 사도 시대에 한한다. 선지자들은 사도들과 함께 예언 사역을 행하였는데,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아 교회들을 가르치고,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위로하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 시대에는 예언의 은사가 중단되었는데, 그 이유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교회의 기초를 다 닦아 놓았기 때문이다. 그 때 부분적으로 예언하던 것이 이제 완성이 되었다. 더 이상 다른 터를 닦을 사람이 없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더 이상 필요 없다. 어린아이처럼 말하고 깨닫고 생각하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장성한 사람의 시대이다. 이제 우리는 거울을 보는 것 같이 하지 않고,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듯이 완전하게 보고 있다. 그러므로 온전한 것이 온 지금, 성경이 우리 손에 들려진 지금은 부분적으로 예언하던 것이 폐하여졌다!
(펌)이종인
`예언`과 `계시`를 구분짖기가 애매하지만,..통상 같은 개념으로 쓰이는것 같습니다!!..신앙안에서도 지성적인 경향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감성적인 경향이 풍부한 사람도 있지요!!..저도 한때는 예언과 계시가 있다고 믿어 왔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구 봅니다!!..그 영향은 약간의 신학공부에서 얻어진 결론 입니다!!..보통 신학공부 하면..그냥 학문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구 보여집니다!!..적어도 신앙의 바탕위에서 정립된 학문이라면 신앙(자기주관및 체험)에서 놓치기 쉬운 가치를 충분히 줄수 있다고 보여 집니다!!.`신앙`과 `신학`은 뗄래야 뗄수없는 관계인데,..우리는 `신학`을 무시하고 자기의 `신앙`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적어도 신학은 신앙과 함께 걸어온 것입니다!!..여기서 있냐 없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그만큼 이 문제는 오래도록 대립한 문제 입니다!..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것입니다!!..신앙은 쳬험이 중요 합니다!!..쳬험되지 아니하고서는 어찌 예수를 믿겠습니까??..다만 믿어지는 과정속에서도 검증이 필요합니다..그 검증 작업이 `신학`이라구 생각 합니다!!..지성과 감성이 겸비된 그런 신앙이 아주 바람직 하지만,..그것이 쉽지 않다는것이 우리의 고민이고 숙제인것 같습니다!!!
신앙이란 학문이 아니라는 측면에서 ~~ 신학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이 진리는 학문적인 것이 아니라, 다분히 하나님(영)의 역사하심으로 입니다. 하여 신학이란 인간이 그 진리를 체계화하여 학문화 한 것이라면 ~~믿음은 성경이란 확증된 진리를 통하여 각인의 영혼에 합당한 방법으로 역사하여 그 영을 흑암에서 인도하여 내시는 하나님의 전능적인 능력으로의 일입니다. 하여 신학?은 인간의 안목적인 체계화로 되어있어 하나님의 능력을 현저히 체계안에 가두는 역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머리좋은 사람이나, 학자적인 공부를 좋아하는 자들은 열심히 하십시요! 최종 추수는 내 아부지께서 하심이니 ~~ 그 때에는 누구도
그 판결에 항변치 못할 공의가 있을 것입니다. 아는것 보다는 체험이 중요합니다. 그럼으로 우리에게는 인생을 두어 전지전능하신 그 분의 능력으로 이 세상을 사단의 통치아래 두어 온갖 핍박을 맛보게 하며 그 속에서 각 영혼을 농사하여 가시는 것입니다. 높은 학문이 그를 구원하는 것도 아니요, 무식하다고 버리는 것이 아닌 전능의 하나님을 아신다면 신학을 치켜 세우는 일은 참으로 민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학을 좇아 신앙할 자는 그리하고 그렇치 못할 자는 체험으로 또는 예배당의 몽학 선생들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만날 것입니다.
저는 신학의 문턱에도 가보지 않고 예수를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로 확실히 믿는 영혼을 더 신실하게 보는 선입견이 있습니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것 같습니다!!..신학을 한다는것이 그 어떤 자랑거리가 아님을 밝혀 두지요!!,,글구 그 신학 문턱에도 못 가본것이 그렇게 자랑이 아님을 님이 더 잘 아시겠지요!!..다만 신앙없는 신학은 마땅히 비판 받거나 판단 받아야 될것 이지만,..신학없는 신앙이 얼마나 약한가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믿기는 믿는데 어떻게 믿어야 제대로 믿는가를 알수있는 길이 신학인 것입니다!!..또한 제대로 신학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도 아셔야 합니다!!..우리는 그저 내가 가보지 않았다고 해서 무조건 비판적으로 돌아서는것은 바람직 하지 않다고 생각 합니다!!
저의 견해입니다. 다른 생각일 뿐입니다. 그럼으로 오해는 없습니다.
할렐루야!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진실로 그리합니다. 하지만 제자신 수차 말씀드리고 모든 말씀중 권면하는 그것이 모든은사(님께서 말씀하신 감성)가 말씀(성경)의 증거(지성으로 말씀하시는)안에서만 온전합니다. 할렐루야! 샬롬
또 다른 한가지는 지성(말씀)에만 머물면 내믿음 지키기에 열심이고 방어적이지만, 말씀 과 성령에 함께 깨이면 하나님과 동행하여 그의 의를 이루는 힘들지만 큰 즐거움과 감격과 위로와 안위를 얻습니다. 아멘 샬롬
오늘날 예언의 은사는 있습니다만, 어떠한 경우에도 성경말씀의 계시와 절대성에 우선할 수 없고 동일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부분이 지켜지지 아니하는 예언은 하나님에게로 부터 온것이 아니며 거짓영에 의한 것이고 미혹에 빠트리기위한 것이며, 우는사자와 같이 삼킬자를 찾는 자들의 먹이감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거짓된 것들은 모든 이단들의 형상이며 사망에 이르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개인적이며 부분적인 예언의 사역은 오늘날에도 체험신앙을 통하여 분명히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예언이 성경말씀과 다르고 마음에서 품은데로 성경말씀을 끌어다 붙여서는 마귀의 밥이 됩니다. 주님안에서 승리하십시요.
아멘.
할렐루야! 아멘 진실로 그리합니다. 샬롬
무슨 희기한 기적이나 이적을 좇아 달음질 하려는 자마다 사단의 간계에 노출되기 쉬우니 이러한 일들은 일시적으로 족한 일로 능력의 본체이신 주님도 극히 제한적으로 사용하셨다!! 그러함에도 이 무지한 인간들은 그런 특별한 은사를 좇아 달음질 하기를 좋아하니 많은 이들이 이 사단의 궤술에 신음하고 있다. 물론 받은바 은사를 감사함과 주의함으로 은밀하게 행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동내방내 나발을 불어 자기의 영광을 취하는 거짓 교사 즉 삯꾼적인 목사들이 드러있으니 이들을 이용하여 사단이 수많은 영혼을 현저히 농락하고 있다. 그럼으로 최종은 확정된 그리스도의 말씀으로의 무장이다. 이 말씀으로 무장하지 못한 자마다
늘 사단이의 술수에 말려들고 자기 주위의 많은 영혼을 지옥의 자식으로 이끌기 쉽다. 인간이란 이런 기적과 이적을 좋아하는 특질이 있다. 능력 받기를 사모하고 자기의 높아짐을 좋아하니 이런 능력의 행함은 참으로 은밀하게 하여야 할 것이다.하여 주님도 이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셨으나 소문이 나서 많은이들이 좇았는데~~나중에는 그들을 피하여 도망가는 신세가 되곤하셨다. 너희가 나를 좇음은 먹고 배부른 탓이다!! 라고 한탄 하시기도 하셨다. 그러나 믿음님의 간증은 신실하심으로 듣는 이가 들어 유익으로 삼음이 좋겠습니다. 샬롬!!
예언에 대한 이야기만 다루고 있군요. 님께서는 왜? 방언의 은사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나요? 오늘날 방언을 특효약처럼 사용하는 목사님도 많은데 님께서는 기존의 기득권자들에게 공격 당하는 것이 무섭습니까?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페하여 진다는 말은 예언과 방언이 같은 맥락이 아닐까요?
방언을 하면,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구원 받는 역사가 병행되어야 하는데 그런일이 없고 다만 알지 못하는 말뿐이면 저는 악한영 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님! 이곳 지금의 이야기는 예언에 관한 것이며 방언에 관한 그것은 신앙상담방 17193 답글1,2,3,4,5번에 두었습니다. 사랑합니다. 샬롬
감사합니다, 다녀 보긴 했지만, 글 잘 못 올리면, 강퇴 당할 수도 있음을 보았습니다. 무소불위의 권능과 힘이 부럽게만 느껴지는 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