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독서
▥ 요한 묵시록의 말씀 4,1-11
나 요한이
1 보니 하늘에 문이 하나 열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에 들었던 그 목소리, 곧 나팔 소리같이 울리며 나에게 말하던 그 목소리가, “이리 올라오너라. 이다음에 일어나야 할 일들을 너에게 보여 주겠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2 나는 곧바로 성령께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하늘에는 또 어좌 하나가 놓여 있고 그 어좌에는 어떤 분이 앉아 계셨습니다.
3 거기에 앉아 계신 분은 벽옥과 홍옥같이 보이셨고, 어좌 둘레에는 취옥같이 보이는 무지개가 있었습니다.
4 그 어좌 둘레에는 또 다른 어좌 스물네 개가 있는데, 거기에는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쓴 원로 스물네 명이 앉아 있었습니다.
5 그 어좌에서는 번개와 요란한 소리와 천둥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어좌 앞에서는 일곱 횃불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일곱 영이십니다.
6 또 그 어좌 앞에는 수정처럼 보이는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좌 한가운데와 그 둘레에는 앞뒤로 눈이 가득 달린 네 생물이 있었습니다.
7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둘째 생물은 황소 같았으며,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았습니다.
8 그 네 생물은 저마다 날개를 여섯 개씩 가졌는데, 사방으로 또 안으로 눈이 가득 달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밤낮 쉬지 않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또 앞으로 오실 분!”
9 어좌에 앉아 계시며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신 그분께 생물들이 영광과 영예와 감사를 드릴 때마다,
10 스물네 원로는 어좌에 앉아 계신 분 앞에 엎드려,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신 그분께 경배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금관을 어좌 앞에 던지며 외쳤습니다.
11 “주님, 저희의 하느님, 주님은 영광과 영예와 권능을 받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셨고 주님의 뜻에 따라 만물이 생겨나고 창조되었습니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9,11ㄴ-28
그때에
11 예수님께서는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신 데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나는 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2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아 오려고 먼 고장으로 떠나게 되었다.
13 그래서 그는 종 열 사람을 불러 열 미나를 나누어 주며,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 하고 그들에게 일렀다.
14 그런데 그 나라 백성은 그를 미워하고 있었으므로 사절을 뒤따라 보내어, ‘저희는 이 사람이 저희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하고 말하게 하였다.
15 그러나 그는 왕권을 받고 돌아와, 자기가 돈을 준 종들이 벌이를 얼마나 하였는지 알아볼 생각으로 그들을 불러오라고 분부하였다.
16 첫째 종이 들어와서,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어들였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7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
18 그다음에 둘째 종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로 다섯 미나를 만들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9 주인은 그에게도 일렀다.
‘너도 다섯 고을을 다스려라.’
20 그런데 다른 종은 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21 주인님께서 냉혹하신 분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기에,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
22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나는 네 입에서 나온 말로 너를 심판한다.
내가 냉혹한 사람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23 그렇다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넣지 않았더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되찾았을 것이다.’
24 그러고 나서 곁에 있는 이들에게 일렀다.
‘저자에게서 그 한 미나를 빼앗아 열 미나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25 ─ 그러자 그들이 주인에게 말하였다.
‘주인님, 저이는 열 미나나 가지고 있습니다.’ ─
2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27 그리고 내가 저희들의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은 그 원수들을 이리 끌어다가, 내 앞에서 처형하여라.’”
28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앞장서서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길을 걸어가셨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믿는 이’는 믿음의 열매를 맺을 것이고, ‘불신한 이’는 불신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겨울의 길목입니다.
바퀴를 달고 달아나는 가을의 뒷모습이 을씨년스럽고, 길가에 군데군데 몰아다 놓은 가을의 노고, 가을의 땀방울이 쓸쓸합니다.
그런데 잎이 떨어지고 꽃도 떨어지고 벌거숭이로 알몸이 되면, 그 나무가 속이 꽉 찬 나무인지 속 텅 빈 나무인지가 훤히 드러나 보입니다.
이 초겨울 우리의 몸을 치장하고 있던 가식과 허영의 옷들을 벗어버리고, 우리의 속내를 들여다보아야 할 때입니다.
오늘 복음인 '미나의 비유'는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당신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 이루어진 ‘하느님 나라’에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곧 ‘하느님 나라’는 선물이요 은총임과 동시에, 그에 따른 과업과 소명이 주어집니다.
선물인 ‘미나’는 주인이 ‘벌이를 하라고 맡긴 것’(루카 19,13 참조)으로 주어집니다.
그래서 주인은 돌아오면 그 소명을 실현하였는지의 여부에 따라 심판을 하게 됩니다.
이 비유에서 ‘왕권을 받으러 먼 고장으로 떠난 어떤 귀족’은 예수님의 승천을, ‘다시 돌아옴’은 재림과 종말을 암시해줍니다.
이 비유는 겉보기에는 마치 결과에 따라 평가받는 것처럼 보여지지만, 사실 결과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비유의 핵심은 결실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결심을 많이 맺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결실을 내는 나무’가 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곧 결실을 통해서 나무의 본질을 보는 데 있습니다.
결국 어떤 나무가 결실을 낼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열매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는 나무’에 대한 비유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착한 종’은 선물과 선물을 주신 분에 대한 믿음으로 성실하여 열매를 맺게 되었지만, ‘악한 종’은 주인에 대해서 '냉혹한 분이어서 가져다놓지 않는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는 것을 거두어 가시는 분'(루카 19,23)으로 여겼기에 결국 그에 따른 결과를 낳았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이 비유의 핵심은 ‘주인과 맺는 관계성’에 있습니다.
곧 주인에 대한 믿음과 순명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믿는 이’는 믿음의 열매를 맺을 것이고, ‘불신한 이’는 불신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니 먼저 우리의 마음을 ‘믿음’으로 가꾸어야 하고, 우리의 행실을 ‘순명’으로 채워나가야 할 일입니다.
주인의 ‘선물’을 악용하거나 혹은 자신의 안정과 보존에만 머물지 말고, 선으로 활용하고 충실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선물’(미나)을 주신 분에 대한 감사와 믿음을 간직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선물에 충실하고 있는지, 자신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 활동하신 분의 힘을 믿고 있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명령에 순명으로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
(루카 19,13)
주님!
저에 대한 당신의 믿음과 사랑이 열매를 맺게 하소서.
오늘도 제 희망이 아니라 당신의 희망이 제 안에서 이루어지소서.
제 안에서 활동하시는 그 크신 힘에 감사할 줄 알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이 두려움을 몰아내는데>
오늘 비유에서 주님께서는 백성이 임금이 될 귀족을 미워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귀족은 자기를 미워하는 종들에게 미나를 맡기는 셈이 됩니다.
저 같으면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 미나를 맡기지 않을 텐데, 주님께서는 당신을 미워하는 사람에게도 맡기신다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이라야 사랑하는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지, 미워하는 사람이 미워하는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까?
사실 사랑하는 사람이라야 최선을 다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창조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를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자기 일을 사랑하는 사람도 최선을 다해 그 일을 하고, 자녀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녀를 위해 뭐든 하고 최선을 다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도 주님 영광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반대로 미워하는 사람은 파괴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있기에, 파괴하는 일을 하거나 아무것도 하지 못하거나일 것입니다.
한 미나를 그대로 도로 가져온 종이 바로 이 경우입니다.
주인을 위해서 아무것도 할 마음이 없습니다.
이렇게 된 데는 오해가 마음 안에 단단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나무랄 때 오히려 속마음을 여과 없이 드러냅니다.
“주인님께서 냉혹하신 분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기에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
(루카 19,21)
그러고 보면 오해(誤解)이기도 하지만 불신입니다.
아니, 오신(誤信)이라고 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그에게 주인은 사랑의 주인이 아니고, 그래서 선을 베푸는 분이 아닙니다.
주지도 않고 요구만 하는 분입니다.
그러니 그런 그에게 주인은 냉혹한 분이고, 사랑할 수 없는 분이며,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빛이 어둠을 몰아내듯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내는데, 사랑이 없으니 불신과 두려움이 대신 자리 잡은 것입니다.
주인으로서는 대단히 서운한 일이고 노여운 일입니다.
열 미나를 줄 마음이 있는 분인데, 주지는 않고 요구만 하는 분이라고 하니 말입니다.
주 하느님도 이렇게 믿는 대로 되시는 분입니다.
햇빛을 주시고, 비바람을 주시고, 온갖 것 다 주셨어도, 주지 않으셨다니 그에게는 주님이 사랑이 아니고 전혀 좋은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이 다 자기 손해입니다.
은총을 살지 못하고 두려움 가운데 사는 것이 믿지 못하는 자기 탓이요 그렇게 믿는 자기 탓입니다.
만일 우리가 여태껏 하느님을 믿어왔는데 이런 신앙생활을 했다면 일생 살아왔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고 얼마나 불행합니까?
그래서 나는 열 미나를 더 받는 사람인지 한 미나마저 도로 뺏기는 사람인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작은 일에 충실해야>
하느님의 나라, 영원한 생명, 천상의 축복은 믿는 이들이 바라는 희망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놀랍고도 신기한 모습으로 오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잘못된 환상에 빠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릇된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서 비유를 들어 이야기해 주십니다.
각자는 자기 맡은 일에 충실하고 적극적으로 협력하며 노력해야 합니다.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은 사람들이 있었고, 다섯 미나를 벌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각자의 탈랜트대로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 충실하게 힘들여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협력의 강도는 분명히 다릅니다.
열 개도 있고, 다섯도 있습니다.
그림과 같은 호숫가에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험한 파도가 치는 바다에서 모험을 강행하는 담대한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극히 수동적인 사람도 있습니다.
한 미나를 그냥 수건에 싸서 보관한 사람입니다.
그는 은총의 삶과는 멀리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잘 활용해야 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희망한다면 걸맞은 행동을 해야 합니다.
눈먼 거지는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외쳤습니다.’
자캐오는 ‘먼저 달려 나무에 올라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철은 녹이 슬고, 용수철도 느슨하게 풀어집니다.
깨끗한 물도 흐르지 않으면 썩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큰 은혜를 받았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잘 써야지!
결정적인 순간을 놓치지 말고 하느님의 은혜에 적극 협력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적극적인 것처럼 보이는데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인이 ‘한 미나를 가진 자에게서 한 미나를 빼앗아 열 미나를 가진자에게 주어라.’하고 말하자, 주인에게 ‘주인님, 저이는 열 미나나 가지고 있습니다.’하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얘기한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겉으로 드러난 것만 가지고 따지고 대드는 사람입니다.
순명하지 않고 이유를 대는 그들은 결국 마지막에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성실하지 못한 사람은 자기는 물론 이웃을 망가뜨립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탈랜트가 있고 그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는 용기와 지혜가 함께 하길 기도합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몫을 사용한 대로 그만큼의 대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인과법칙을 피할 수 없으니, 주님께서 주신 탈랜트를 뿌리고, 가꾸며 때를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루아침에 무엇을 이루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주님께서 무엇을 원하실까?’를 소중히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어떠한 큰일도 작은 것에서 시작되니만큼 작은 것이 결코, 작지 않음을 일깨워야 하겠습니다.
각자가 받은 은총은 다 다르고 그것은 단순 비교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주어진 것을 분수에 맞게 쓸 수 있으면 그것이 행복입니다.
많이 이룬 것도 중요하지만 이루기 위한 과정을 귀히 여기는 주님이시니 하나를 가지고 열 개를 늘렸건 다섯으로 늘렸건 그것이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를 위한 땀과 노력과 정성, 희생이 값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성공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최선으로 부르셨습니다’(성녀 마더데레사).
옛말에 “젊어서 고생은 돈 주고 산다.”고 했습니다.
젊어서 열심히 노력하면 나중에 큰 보람을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듯이 주님을 뵙고자 노력하면 만나게 되고 열매도 맺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면 지금은 힘들고 고달프겠지만 그만큼 보람도 기쁨도 크게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있는 사람은 더 받겠고 없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카 19,26) 하신 말씀은 노력한 정성과 수고는 크게 이룰 것이요, 그렇지 못함은 결국 잃는다는 의미입니다.
많은 경우, 빼앗아 가기도 전에 잃고서는 남의 탓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욕심부리지 말고 지금 주어진 일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모두를 잃게 되는 심판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께서 그대에게 베풀어주신 은총의 선물은 무엇입니까?>
나이를 조금씩 먹어가면서 자주 지난 삶의 순간들을 돌아보게 됩니다.
때로 주님 앞에 송구스러운 부끄럽고 초라한 인생이라는 자괴감이 들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 제 인생 여정 안에 스스로도 놀랄만한 반전과 성장도 있었음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가끔 신학교에서 동고동락했던 신부님들을 30년 40년 만에 만날 때가 있는데, 너무나 변해버린 제 모습에 화들짝 놀라기도 합니다.
사실 저는 젊은 시절 저는 마치 꿔다 놓은 보리 자루 마냥 존재감이 단 1도 없이 지냈습니다.
누가 말을 붙여도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할 정도로 지극히 소심하고 내향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늘 여기저기 아프고 비실비실하다 보니 관계 안에서나 공동체 안에서도 영향력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제가 생각해도 놀랄 정도로 완전 바뀌어버렸습니다.
약장수 저리 가라할정도로 말빨도 쎄졌습니다.
나이가 들었지만, 그 어떤 장애물도 넘어설 수 있다는 자신감과 적극성으로 똘똘 무장하고 있습니다.
제게 주어진 재능이라고는 쥐뿔도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깜짝 놀랄 정도로 많았습니다.
비록 늦게 발견했지만, 죽기 살기로 계발시키고 성장시키기 위해 노력해보니, 부족하지만 참 좋은 결과물들을 얻었습니다.
사실 한 인간 존재가 환골탈태한다든지 개과천선한다는 것 벼락 맞는 일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원판을 완전히 바뀌기 위해서는 위로부터 오는 은총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가만히 되돌아보니 주님께서 큰 은총과 자비를 제게 베푸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제게 다양한 유형의 고통과 시련, 셀 수도 없이 잦았던 바닥 체험, 굽이굽이 지난했던 우여곡절을 겪게 하심으로 저를 부단히 거듭나게 하시고 성장시켜 주셨습니다.
눈물나게 감사한 고통의 신비입니다.
우리네 삶이라는 것, 한결같이 변함없는 것도 참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게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의미의 한결같음이 아니라면, 진지하고 심각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탈렌트의 비유와 흡사한 미나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열매 맺는 삶, 성장하는 삶의 소중함을 강조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베풀어주신 은총의 선물들이 얼마나 다양하고 많은데, 우리는 그것들을 얼마나 귀히 여기고, 더 성장시키고, 주님과 이웃을 위해 기꺼이 사용하고 있는지 잘 한번 살펴보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1)
루카복음의 ‘미나의 비유’는 마태오복음의 ‘탈렌트의 비유’와 같은 비유이고, 같은 가르침입니다.
‘미나’(탈렌트)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부르심의 은총’이고, 미나를 활용해서 더 많은 미나를 벌어들이는 것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서 구원받는 것을 뜻합니다.
세 번째 종의 죄는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은 죄’, 또는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죄’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죄’ 라는 말에서 루카복음 16장에 있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가 연상됩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루카 16,19-21)
부자는 라자로를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큰 죄’입니다.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이라는 말과 ‘개들까지 와서’ 라는 말은, 그 부자가 오며가며, 마치 개들에게 던져 주듯이 라자로에게 음식 부스러기를 던져 주었음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고, 라자로를 모욕한 일이기도 합니다.
부자 자신은 “나는 라자로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나는 최선을 다 했다.” 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위선자들의 모습입니다.
누가 보아도 선행이 아닌데, 자기 혼자서만 선행을 실천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선이고, 어리석음이고, 교만이기 때문에, 그런 생각 자체가 죄입니다.
2)
루카복음 10장에 있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은 강도당해서 죽어가는 사람을 보았으면서도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루카 10,31-32).
그것도 분명히 ‘큰 죄’입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나는 강도짓에 가담하지 않았다. 나는 강도당한 사람을 위해서 기도했다.” 라고 변명할지도 모릅니다.
악한 짓에 가담하지 않는 것은 잘하는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입니다.
악을 막거나 물리치고, 적극적으로 선의 실현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잘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실천 없는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빈말’입니다.
3)
‘주인님이 두려워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세 번째 종의 변명은 글자 그대로 어설픈 변명일 뿐입니다.
그리고 “잘못한 것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다.” 라고 주인을 비난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신앙인이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유는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 때문도 아니고,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도 아닙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고 싶어도 두려워서 못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귀찮고 힘들고 재미없는 일은 ‘하기 싫어서 안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큰 죄’가 되는 것입니다.
두려워서 못하는 것과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두려워서 못하는 경우에는 정상참작의 가능성이 있지만,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4)
‘탈렌트의 비유’를 보면, 세 번째 종을 ‘쓸모없는 종’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마태 25,30).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나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나 하느님을 위해서나 아무런 쓸모가 없는 사람입니다.
이 말은 ‘소금’에 관한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마태 5,13)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결과를 요구하시지 않고, 최선을 다 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결과보다 과정이, 즉 얼마나 노력했느냐가 중요한 생활입니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는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구원’이라는 큰 은총을 받게 되고”이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구원의 은총을 받지 못하고, 처음에 받은 은총마저 모두 잃게 될 것이다.”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희망의 순례자 - 이미 지상地上에서 시작된 천상天上의 삶>
대한민국 어디나 하느님의 아름다움에 감동하는 단풍 황홀한 11월 만추의 위령성월입니다.
눈만 열리면 온통 우리를 감동시키는 하느님의 위업을 발견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아름다움으로 표현되고 이에 감격한 우리들은 찬미와 감사로 응답합니다.
이런 감동은 결코 값싼 감동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며, 사회 현실에 민감히 깨어 있게 하고 정의와 평화가 실현된 천국 삶의 실현으로 이끌 것입니다.
오늘 옛 어른의 가르침도 새롭게 마음에 와 닿습니다.
“욕심을 비우라는 성현들의 말은 욕심으로 잃었던 나다움을 회복하라는 뜻이다.”
<다산>
참으로 하느님을, 진리를 사랑할수록 욕심은 저절로 비워져 나다움의 회복이요 지상에서 시작될 천상의 삶이겠습니다.
“성誠에서 명明에 이르는 것은 본성本性이라 하고, 명明에서 성誠에 이르는 것은 가르침이다.
진실하면 밝아지고, 밝히면 진실해진다.”
<맹자>
이래서 하느님 공부와 참나의 공부는 함께 가는 평생공부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과 가까워 질수록 밝아지고 진실해지고 성실해지므로 참나가 되겠기 때문입니다.
만추의 단풍 아름다운 계절, 땅위에 깔린 단풍잎들이 참 장관입니다.
20년전 이때쯤 ‘마침내 별들이 되어’라는 제 시를 읽고 감동한 두 자매들이 자기들의 심정을 고스란히 반영했다며 감사를 표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해의 단풍은 유난히 풍성했고 곱고 밝게 빛났습니다.
“별들이
땅을 덮었다
땅이
하늘이 되었다
단풍나뭇잎들
하늘 향한
사모思慕의 정情 깊어져
빨갛게 타오르다가
마침내
별들이 되어
온땅을 덮었다
땅이 하늘이 되었다
오!
땅의 영광,
황홀한 기쁨
...
죽음도
축제일 수 있겠다.”
<2005.11.20.>
2005년은 제 어머님이 돌아가신 해입니다.
이미 지상에서 시작된 천상의 삶이요, 천상을 향한 희망의 순례자되어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시공을 초월하며 참 성인들은 언제나 천상을 향한 여정에 희망의 순례자로 살았습니다.
천상의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두고 진리이자 생명이요 길이신 주님을 따라 살아갔습니다.
사막이 빛나는 것은 우물을 품었기 때문이라는 어린왕자에 나오는 대목처럼, 사막의 순례 여정중에도 희망의 주님을 품고 살았기에 환희로 빛나는 삶을 살았던 성인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미나의 비유’가 참 적절합니다.
예수님은 천상여정을 상징하는 예루살렘 여정중에 참 의미심장한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그대로 지상에서 천상을 향한 여정중의 우리에게 교훈이 되는 말씀입니다.
열 미나를 열 사람에게 한 미나씩 나눠줬고 왕권을 받고 돌아온 주인은 결과를 확인합니다.
지상에서 천상을 향한 여정중이었던 종들 중 천상의 꿈과 비전, 희망을 지니고 기쁘게 최선을 다함으로 열 미나를, 또 다섯 미나를 남겼던 종들은 주인의 극찬과 더불어 넘치는 상급도 받습니다.
“잘 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
...너도 다섯 고을을 가져라.”
천상의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두고 자기 역량을 다했던 이들의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지상의 삶이 참 아름답고 보기 좋습니다.
그러나 한 미나 그대로였던, 천상의 하느님을 잊고, 희망을 잃고 절망중에 무기력하고 나태하게 지냈던 의심많고 소심한 종은 주인의 호된 질책을 듣고 한미나까지 빼앗겨 버립니다.
“이 악한 종아, 나는 네 입에서 나온 말로 너를 심판한다...”
이어 곁에 있는 이들에게 명령합니다.
“저자에게서 그 한미나를 빼앗아 열미나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 마저 빼앗길 것이다.”
과연 나는 어느쪽입니까?
이미 지상에서 시작된 천상여정의 삶이요. 생생한 희망과 꿈을 지니고 자기 몫의 인생에 최선을 다해야 함을 배웁니다.
희망을 잃고 시간을 낭비하면서 하나도 성취하지 못한 한미나 그대로의 인생이라면 얼마나 쓸쓸하고 허전하겠는지요!
텅빈 충만이 아니라 텅빈 공허의 삶이겠습니다.
그러나 좋은 수확을 끝낸 우리 수도원 배밭의 텅빔은 넉넉하고 편안한 텅빈 충만의 분위기입니다.
이런 노년이라면 참 행복할 것입니다.
쏜살같이 흐르는 세월입니다
받은 한 미나를 얼마나 남기고 있는지 매일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미 지상에서 시작된 천상 여정의 삶이요 우리는 희망의 순례자되어 살아갑니다.
과연 생생한 희망을 지니고 의욕적으로 내 역량을 발휘하여 한 미나를 잘 부풀리고 있는지요?
이의 빛나는 모범이 파트모스 섬에 유배되어 고립과 고독의 삶 중에도 풍성한 천상 체험을 통해 내적 풍요의 지상 천국을 살았던 요한사도입니다.
천상 체험 중 절정 부분을 인용합니다.
하느님 어좌 한가운데와 그 둘레에 있는 네 생물은, 저마다 날개 여섯에 안으로는 눈이 가득 달린 네 생물은, 밤낮 쉬지 않고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또 앞으로 오실 분!”
바로 이 부분은 미사전례 중 '거룩하시다'를 통해 우리가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부분으로 우리의 영적 풍요의 원천이 됩니다.
이어 스물네 원로는 어좌에 앉아 계신 분 앞에 엎드려 영원무궁토록 살아계신 그분께 경배하며 찬미합니다.
“주님, 저희의 하느님, 주님은 영광과 영예와 권능을 받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셨고, 주님의 뜻에 따라 만물이 생겨나고 창조되었습니다.”
(묵시 4,11)
바로 우리 가톨릭교회 수도공동체는 이 성구를 매주 화요일 저녁 성무일도 시 찬미가로 바칩니다.
그러고 보닌 성전 제대를 중심으로 하여 공동으로 바치는 교회공동체의 찬미와 감사의 전례기도는 그대로 천상 어좌 곁의 천사공동체의 찬미를 닮았음을 봅니다.
파트모스 유배중인 사도 요한이 이런 내적 풍요의 영적 체험으로 광야의 여정을 살아냈듯이, 우리 또한 미사 공동전례 은총이 천상 희망을 키워주면서 맡은 바 책임에 최선을 다해 살아갈 수 있는 지상 천국의 삶의 동력이 됨을 깨닫습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충실한 삶>
4달 전에 교통사고를 당했던 아이를 위한 세례식이 있었습니다.
사고 당시 아이는 의식이 없었습니다.
아이를 위한 중환자 병원에서 4달 동안 지내야 했습니다.
사고 직후 저는 아이를 위해서 기도하기 위해 병원을 찾았습니다.
기도를 마치면서 보니, 아이의 발가락이 조금 움직였습니다.
이렇게 3번 더 병원을 찾았고, 아이의 모습은 조금씩 좋아 보였습니다.
가족들은 병원에서 퇴원한 아이를 위해서 세례성사를 청하였습니다.
세례를 주기 위해 아이의 집을 방문했을 때입니다.
저와 봉사자들은 모두 놀랐습니다.
아직 아이가 말은 하지 못하지만, 기분 좋은 웃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도움을 받으면 조금씩 걸을 수 있다고 합니다.
겨우 발가락만 움직일 수 있었던 아이가 눈을 떴고, 웃을 줄 알았고, 손을 내밀면 꼭 잡을 수 있었습니다.
세례식을 진행하는 동안 아이의 부모는 물론, 봉사자도 모두 울었습니다.
기쁨의 눈물이었습니다.
저는 아이에게 요셉이라는 세례명을 정해 주었습니다.
앞으로 요셉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기를 청하였습니다.
앞으로 요셉이 큰 시련을 이겨내고,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기를 청하였습니다.
앞으로 요셉이 나자렛의 성 요셉처럼 가정을 보호하는 우산이 될 수 있기를 청하였습니다.
아이가 이렇게 기적처럼 좋은 모습으로 퇴원할 수 있기까지는 많은 이들의 기도와 도움이 있었습니다.
교우들은 아이의 병원비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정성 어린 나눔을 하였습니다.
아이와 남편을 위해서 간호해야 했던 아이의 엄마를 위해서 음식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아이의 할머니는 한국에서 와서 아이와 함께 했습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재활치료를 열심히 받았고, 조금씩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아이 엄마의 회사에서는 아이 엄마가 아이를 돌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보험이 적용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매주 주보에 아이를 위한 기도를 공지하였고, 교우들은 아이를 위해서 기도해 주었습니다.
아이의 부모에게 ‘성탄 미사’에 아이와 함께 오라고 하였습니다.
아이의 부모도 성탄 미사에 함께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아이의 세례식을 준비하면서 예수님께서 죽은 소녀를 살리셨던 표징이 생각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이는 죽지 않고, 자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죽은 소녀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탈리타쿰(일어나라)"
소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일어났습니다.
저도 아이를 위해서 ‘탈리타쿰’이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아이가 환하게 웃으면서 친구들과 함께 뛰어놀 수 있기를 청하였습니다.
요즘 우리는 묵시록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품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세상의 재물과 권력이 아니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길을 충실히 따라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전에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에게 손이 둘인 것은 하나는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고, 다른 하나는 남을 돕는 데 사용하라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우리에게 발이 둘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눈이 둘인 것은 하나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을 아름답게 보라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우리에게 귀가 둘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는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듣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의 어려움을 들어 주라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의 재능과 능력은 본인을 위해서 사용해야 하지만 그 반은 남을 위해서 사용하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이 가진 능력과 재능을 자신만을 위해서 사용하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리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가을에 잎이 떨어지는 것은 억울한 일이 아니고, 손해 보는 일이 아님을 나무는 잘 알고 있습니다.
나뭇잎이 그렇게 가을에 떨어지는 것을 보며 우리도 언젠가 인생이라는 나무에서 떨어져야 하는 나뭇잎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떨어지는 걸 슬퍼하기보다 떨어지기 전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떨어지는 것이 슬픈 것이 아니라 떨어질 것을 알고 준비하는 것이 참된 삶입니다.
그러한 믿음으로 부활의 태양은 떠오르고 새봄 새잎이 또 피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아 세웠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
밤하늘은 별이 있어서 아름다운 것처럼, 우리들의 선행과 우리들의 봉사가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희망의 별빛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삶 안에서 시간이 빨리 가고 끝이 좋은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런데 시간은 빨리 가지만 끝이 좋지 않은 것을 선택할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으로 자기 전에 유튜브를 본다면 어떨까요?
시간이 정말로 빨리 지나갑니다.
문제는 잠이 잘 오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끝이 좋지 않습니다.
소파에 누워서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립니다.
이 역시 시간은 정말 빨리 지나가지만, 무엇을 했는지 모르면서 허탈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 밖에도 시간이 빨리 가지만, 끝이 좋지 않은 경우는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끝이 좋은 경우도 분명히 많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 좋아하는 일을 할 때, 운동할 때….
이렇게 시간도 빨리 가고 끝도 좋다면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후회는 늘 끝이 좋지 않았을 때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를 구분하기가 어려울까요?
아닙니다.
충분히 식별해서 가려낼 수가 있습니다.
끝이 좋은 경우를 선택해야 하는데, 단지 순간의 만족이 더 크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가장 끝이 좋을 수 있음을 알아도 그때까지의 시간이 너무 느리게 흐르기 때문입니다.
어느 운동선수가 대회에 나가서 좋은 성적을 얻고자 합니다.
그냥 좋은 성적을 얻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될까요?
아닙니다.
힘든 훈련 시간을 거쳐야 합니다.
그 시간은 빨리 갈까요?
아닙니다.
아주 느리게 갈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시간 없이는 좋은 끝은 있을 수 없음은 분명합니다.
특별히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은 분명 끝이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늘 나라에 보화를 쌓는 것이 되어 끝이 가장 좋은 결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을 늘 뒤로 미룰까요?
순간의 만족만을 위한 이 세상 삶이 먼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힘든 지금의 순간을 이겨내기 힘들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느님 뜻을 멀리하면 분명 끝은 좋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미나의 비유 말씀을 하십니다.
종 열 사람을 불러 열 미나를 나누어 주며,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라고 그들에게 이릅니다.
이 말을 충실히 따라서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어들인 사람, 한 미나로 다섯 미나를 만든 사람은 칭찬받고 선물까지 얻게 됩니다.
그러나 한 미나를 수건에 싸서 보관만 해 둔 사람은 받은 그 한 미나마저 빼앗기고 맙니다.
누구의 끝이 좋았을까요?
주인의 말을 충실히 지킨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의 끝은 과연 어떨까요?
하느님의 선물이 이 세상에서 열매를 맺도록 부지런히 일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소홀히 하는 이들에게는 심판이 내리게 될 것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