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택상의 '사과문', 김대중의 '앙망문'>
장택상.
한국 정치사나 현대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 쯤은 들어봤을 이름이다.
독립운동가 출신으로서 이승만 정부 때 외무장관, 국회부의장, 국무총리, 4선 국회의원을 지낸 인물이다. 미군정 때는 수도경찰청장(지금의 서울경찰청장)을 지내기도 했다.
젊은 시절의 김영삼이 국회부의장이던 장택상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장택상-박정희 '엇갈린 운명'
장택상은 박정희와도 인연이 깊다.
박정희와 장택상 고향은 철길 하나 사이로 가까운 이웃마을이다. 해방 무렵까지만 해도 장택상 집안은 영남 제일의 만석꾼으로 고향 일대에서 남의 땅을 밟지 않고 다닐 정도였다.
이와 달리 박정희 집안은 소작농이었다. 박정희 아버지 박성빈은 장택상 아버지 땅 다섯 마지기를 소작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소년 박정희는 가을 추수가 끝나면 둘째 형이 지게에다 도지(賭地, 논밭을 빌린 삯)와 마름에게 줄 뇌물 씨암탉을 지고 장택상 댁으로 가는 것을 보고 자랐다.
인생은 눈 감을때 까지 모른다고 했던가.
5.16 군사쿠데타로 두 사람의 처지는 완전 역전되고 만다. 5.16 후에 박정희가 권력을 잡은 후에도 '박정희 의장'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공식 호칭 대신 '박정희 군'이라고 낮춰 부르며 특유의 독설을 늘어놓던 장택상은 1963년 6대 국회의원 선거 때 박정희가 총재로 있었던 민주공화당의 30대 정치 신인에게 참패를 당한다.
그러다가 장택상은 그만 병이 들었다. 마침 미국에 있는 딸의 초청으로 신병을 치료하고자 수속을 밟는데, 외무부에서 여권이 나오지 않았다.
그제야 장택상은 냉엄한 현실을 깨닫고 마침내 '박정희 대통령 각하 전상서'라는 사실상 항복 편지를 청와대로 보낸다.
"각하의 건승하심을 축복합니다. 각설 소생은 금년 1월경에 신병으로 의사의 권유에 의하여 미국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기로 결심하고 외무부로부터 회수여권을 발급받아 미국에 가서 치료를 마치고 금년 초에 귀국한즉, 의외에도 비행장에서 여권을 압수당하고 1주일 후에 다시 외무부에 가서 압수된 여권의 반환을 요청하였더니, 외무부 측은 본인의 여권은 취소되었으니 반환할 수 없다고 거절을 당하였습니다.
지금 소생은 자양(滋養)할 여유도 없거니와 일체 비용은 미국에 거주하는 소생의 여식이 부담하므로 외화 유출의 과오를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소생이 비록 부덕하여 국가에 공로는 없을망정 그렇다고 해서 국가에 해를 끼친 일도 없습니다.
일제 36년간 여권으로 굶주림을 받다가 건국 후 제1대 외무부 책임자(외무장관)로 이 나라 여권을 창조한 바가 있는 소생에게 회수여권 한 장 허용할 아량이 없대서야 참으로 가혹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각하의 처단이라면 소생은 다시 개구(開口)할 여지조차 없지만 만일 그렇지 않고 한 하부의 처사라면 각하의 재결(裁決)이 있으시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소생은 금후도 병세 여하에 따라 미국에 가야만 하는 처지에 서 있습니다. 소생의 신상 관계로 각하의 염려를 번뇌케 하여 드려 죄스러움을 미리 사과 올립니다."
- 장택상 자서전 <대한민국 건국과 나> 288~289쪽
현실에서 약자가 강자에게 자신의 어려움을 풀기위한 수단으로 '반성문' 만한 것이 없다.
이 편지가 청와대에 접수된 뒤, 박정희의 지시로 장택상은 외무부로부터 여권을 받고 미국에 가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지난날 대지주의 아들이 소작인 아들에게 꼬리를 말고 무릎 꿇은 굴욕의 대가였다.
김대중-전두환 '극과 극의 인연'
이런 사례는 또 있다. 이른바 김대중 '앙망문'이다.
1980년 이른바 '내란음모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김대중은 사형에서 무기징역, 그리고 징역 20년으로 형량이 줄어 목숨을 건진 이후인 1982년 12월 대통령 전두환에게 ‘선처’를 호소하는 자필 탄원서를 보낸다. 탄원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두환 대통령 각하.
국사에 전념하신 가운데 각하의 존체 더욱 건강하심을 앙축하나이다. 각하께서도 아시다시피 본인은 교도소 생활이 2년 반에 이르렀사온데 본래의 지병인 고관절 변형증과 이명(耳鳴) 등으로 고초를 겪고 있으며 전문의에 의한 충분한 치료를 받고자 갈망하고 있습니다. 본인은 각하께서 출국 허가만 해주신다면 미국에서 2∼3년간 체류하면서 완전한 치료를 받고자 희망하온데 허가하여 주시면 감사 천만이겠습니다. 아울러 말씀드릴 것은 본인은 앞으로 국내외를 막론하고 일체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으며 일방 국가의 안보와 정치의 안정을 해하는 행위를 하지 않겠음을 약속드리면서 각하의 선처를 앙망하옵니다.”
김대중의 탄원을 받은 전두환은 사흘 뒤 ‘은전(恩典)’을 베풀었다. 김대중은 보석(保釋)으로 풀려나 서울대병원으로 이송돼 치료를 받는다. 그리고 그해 12월 부인 이희호, 삼남 홍걸과 함께 미국행 노스웨스트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그러나 어떻게 정치인이 정치를 안할 수 있으랴. "국내외를 막론하고 일체의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다"라며 서약하고 출국한 김대중은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곧 왕성한 정치활동을 시작한다. 그리고 1985년 2.12총선 때 귀국해서는 신한민주당과 민추협 활동 등 본격 정치에 나선다. "나는 일생 동안 한번도 거짓말한 적이 없다"라고 한 김대중의 대표적 거짓말 사례다.
이후 김대중 대통령 시절과 퇴임 이후 이희호는 설, 추석, 전두환 생일, 이순자 생일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난과 장뇌삼을 선물로 보낸다. 생전의 전두환과 이순자도 김영삼에 대해서는 악평을 서슴지 않았지만 김대중-이희호에 대해서는 "평생 사랑과 화합을 실천하신 분"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장택상도 김대중도 인간이었다. 허물 없는 사람 없고 약점 없는 사람없다. 인생은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