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마오유우는 총집편이긴 하지만 이전에 얘기하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서 언급해 볼까 합니다.
마왕의 아이템 수정농원...즉 유리온실 아마 1619년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개발된 유리온실을 모델로 한 것 같은데(한 때는 이게 세계최초의 온실인줄 알았습니다.) 원작에서도 카카오 재배하려고 한번 만들어봤습니다만, 비용이 무진장 많이 들어서 그 이후 별 언급이 없었죠
그도 그런 것이 저 당시 판유리라는게 엄청나게 비싼데다. 난로를 때워서 난방을 하는 방식이어서 연료비도 많이들고 또한 관리도 매우 까다로웠기 때문에 널리 보급하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헌데 이런 온실보다 훨씬 전에 동방의 어느 나라에서는...
세종 81권, 20년(1438 무오 / 명 정통(正統) 3년) 5월 27일(경술) 5번째기사 이순몽이 유이민 방지를 위한 호패법 재시행 등을 아뢰다
[중략]신은 또 강화(江華) 인민의 말을 듣사온즉, 〈당초〉 귤나무[橘木]를 옮겨 심은 것은 본시 잘 살 수 있는 것인지의 여부를 시험하려는 것이었다는데, 수령이 가을에는 집을 짓고 담을 쌓고 온돌을 만들어서 보호하고, 봄이 되면 도로 이를 파괴하여 그 폐해가 한이 없으며, 그 귤나무의 길이가 거의 10척이나 되기 때문에 집을 짓는 데 쓰는 긴 나무도 준비하기 어려워서 사람들이 몹시 곤란을 겪는다 하옵니다. 신이 이 말을 듣고 이것이 비록 한 군읍의 사소한 폐단이긴 하오나, 영세민의 근심거리를 진단하지 않을 수 없사와, 감히 천총(天聰)을 번독(煩瀆)하는 바입니다.”
예... 세종대왕때는 조선에서 귤나무를 강화도에 설치한 온실에 심을 수 있을가 실험을 해본 적 있습니다. 물론 결과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드는데 비해서 백성들의 불만이 많아서 결국 실패합니다만 기록을 보면 재배 자체는 성공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토우라고 쓰고서 실록에서 찾아보면(참고로 온실이라고 치면 거진 대부분 조선시대 찜질방 이야기입니다.)
명종 13권, 7년( 1552 임자 / 명 가정(嘉靖) 31년) 1월 12일 을미 3번째기사 검토관 왕희걸이 제때 피지 않은 꽃은 관람할 가치가 없다고 아뢰다
상이 야대에 나아갔다. 검토관(檢討官) 왕희걸이 아뢰었다. “신이 일찍이 《국조보감(國朝寶鑑)》을 보건대, 성종조(成宗朝) 때 장원서(掌苑署)에서 영산홍(暎山紅)【꽃 이름.】을 바치자 이를 물리쳤다고 하였으니, 그 의도가 참으로 훌륭합니다. 그런데 지난번에는 장원서가 꽃을 잘 기르지 못하였다 하여 관리를 추문하였습니다. 또 겨울철에 꽃을 기르는 것은 폐단이 매우 큽니다. 토우(土宇)와 시목(柴木)의 역사(役事)에 백성들이 많이 시달리고 있는데, 초목의 꽃과 열매는 천지의 기운을 받는 것으로 각각 그 시기가 있습니다. 제때에 핀 것이 아닌 꽃은 희완(戲玩)에 가까운 것이니 무슨 관람할 가치가 있겠습니까. 정파(停罷)하소서.”
연산 58권, 11년( 1505 을축 / 명 홍치(弘治) 18년) 7월 20일 계묘 4번째기사 장원서·사포서 등으로 하여금 겨울에도 흙집을 쌓고 채소를 기르게 하다
전교하기를, “시금치[辛甘菜] 따위 여러 가지 채소를 장원서(掌苑署)·사포서(司圃署)로 하여금 흙집을 쌓고 겨울내 기르게 하라.” 하였다.
하지만 역시 가장 유명한 것은 전순의라는 사람이 1450년에 편찬한 산가요록으로 이 책의 동절양채 편에서는 이 온실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산가요록을 지은 전순의는 세종대왕~세조시절 어의로 생각됩니다.)
일단 이 온실의 구조를 살펴보면
1.온실의 크기는 임의로 하되, 세 방향으로 벽을 쌓는다
2.구들장을 만들되 연기가 새지 않게 하고, 구들 위에 흙을 한자 반 정도 쌓는다 온돌 위에 황토나 배양토를 쌓으라는 얘기인데 역사스페셜과 또는 이걸 참고한 인터넷 사이트들은 1자를 30cm로 생각해서 계산 했더군요 물론 영조척으로 했을 경우 맞지만 이 영조척은 대체적으로 목수들이 많이 사용합니다 오히려 주척(1척 또는 1자가 20cm)을 적용시켜야 하는 것은 아닌지
3.관을 솥에 연결하고 아침-저녁으로 불을 뗀다. 솥에서 나는 수증기를 안으로 끌어들여 실내를 훈훈하게 한다 위에 관은 나무로 만든 것으로 솥에 끓는 물을 실내로 공급합니다
4.남쪽으로는 살창을 내고 기름종이로 바른다 한지에 피마자유를 발랐다는데 당시 어떤 기름을 발랐을지는 모르겠지만 구하기 쉬운 걸로 했겠죠?
일단 위의 토방 온실의 우수성에 대해 살펴보면 난방뿐 아니라 습도조절,채광이 가능합니다
구들의 역할은 역시 난방인데 열 효율도 우수하고 열기를 오랫동안 보존하는 것도 있지만(만약 전설의 온돌인 아자방[亞字房]이면 ㅡ.ㅡ;;) 더욱 좋은 것은 지중난방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서양 최초의 유리온실과 다른 점인데 서양의 온실은 난로를 설치하여 따뜻하게 한 것이었는데 문제는 이런 방식은 땅 속까지 따뜻하게 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최근에도 유리-비닐 온실은 열풍 방식으로 온도를 유지했는데 문제는 이런 방식은 기계 소음과 진동 때문에 식물들이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나온게 파이프로 따뜻한 물을 보급하는 거였고 최근에 나온게 지중난방 방식으로 이 방식을 적용하니 수확량이 40~50%증가했다고 하더군요 즉 조선인들은 21세기 방식을 이미 15세기에 사용하고 있었던 셈이죠
물론 이런 온돌 방식은 방을 건조하게 하기 쉬운데 이걸 해결하기 위해서 아궁이에 물을 넣은 가마솥을 데워 나무관을 연결해 수증기를 공급하는데 이로 인해 습기 공급 효과와 방의 공기를 데우는 효과를 동시에 봅니다(또한 온돌을 데우면서 가마솥의 물도 끓이고)
기름종이의 경우 여러 가지 효과가 있는데 생각보다 질겨서 폭우에도 상당히 잘 버팁니다(비닐보다 더 질기다고 하더군요)또한 기름이 섬유와 섬유 사이에 존재하여 물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또한 비닐과 유리와 달리 이슬이 맺히지 않는데 그 이유는 기름종이가 액체상태의 물은 통과시키지 않지만 기체 상태의 물은 밖으로 내보냅니다 이슬이 맺히지 않게 하는게 중요한 이유는 이 이슬이라는 것이 맺히면 햇빛 투과율을 떨어뜨려 식물 광합성에 악영향을 미칩니다 거기다 이슬 자체적으로도 유해물질이 있어서 식물에게 다으면 질병을 일으킬 수도 있고 찬 이슬 때문에 성장을 저해할 수도 있습니다
빛의 투과율의 경우 일반적인 창호지보다 뛰어나 일반적인 종이가 2만 룩스인데 비해 기름종이는 3만7천 룩스입니다
또한 보온성의 경우 유리와 비닐보다 약간 더 우수하다는 실험결과로 나옵니다(물론 한지 종류에 따라 또는 쓰는 기름에 따라 달라질 것 같지만)
이런 토우의 기능은 주로 궁중에 바칠 꽃과 야채와 과일나무를 재배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당시 역사스페셜 실험에서는 얼갈이 배추는 3주 만에 수확할 만큼 자랐고 이외 다른 꽃과 야채들도 빠른 시간에 자랐다고 합니다
(너 내가 초가집 같이 보인다고 무시하냐?)
하지만 당시에는 기름종이의 가격도 꽤 비쌌고, 전반적인 관리도 비용이 많이 들어서 민간에 보급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연구가 꼭 쓸데 없다고 하기 그런게...
세종 102권, 25년(1443 계해 / 명 정통(正統) 8년) 12월 14일(갑오) 3번째기사
평안·황해·함길·강원도 관찰사(觀察使)에게 이르기를, “지금 들으니, 도내의 기민(飢民)을 진제(賑濟)하는 장소에 온실(溫室)이 없기 때문에, 기민들이 모두 오려고 하지 않고 여염(閭閻)으로 구걸하면서 우숙(寓宿) 하기를 청한다고 하니, 이제부터는 토우(土宇) 쌓아 되도록 따뜻하게 하여 떠돌면서 구걸하는 자에게 얼고 굶주림이 없게 하라.”
뭐 이건 조선시대 찜질방인 온실이야기이긴 한데... 사실 이 당시 방 전체에 구들을 깐다는 개념이 등장한지 얼마 안되었을 때입니다.(즉 토우 연구 결과가 여기에 전용되었을 가능성이 있긴 합니다.) 실제로 조선전기에는 방 전체에 온돌을 까는 경우는 위와 같이 가난한 백성들의 치료소나 스님들이 숙식하는 절 밖에 없었습니다.
오히려 조선전기 한국 건축물은
오히려 중층건물도 많았고(보통 현재의 일본처럼 2층에서 잤다고 하더군요) 심지어는 다다미 같은 구조물도 있었던 걸로 보입니다 ㅡ.ㅡ;;;(풀을 얼개서 만든 것으로 바닥 전체에 깔 경우는 포진(鋪陳) 방석처럼 깔 경우는 포단(蒲團)이라고 불렀습니다... 뭔가 너무 익숙한 용어가 있군요 참고로 사용 용도조차 방한대책이라는 면에서 ㅡ.ㅡ;;; 군대에서 썼던 포단을 떠올리게 합니다.)
일찍이 여러 노인들의 말을 들으니 “백 년 전에는 고위 관리들의 좋은 집에도 온돌[煖堗]이 한 두 칸에 불과하여 노인과 병자의 처소가 되었고, 나머지는 모두 공중에 들린 마루[板架] 위에서 자고 거처했다. 마루에 병풍[屛障]을 두르고 돗자리[茵]를 겹으로 깔아 각기 여러 자녀들의 방으로 삼았다.(중략)”고 하였다.--성호 이익
물론 이걸로 난방하면 부족하니 대체로 임금님들은 잘 때 침대 아래다가 세발 솥이나 네발 솥 등을 놓았는데...황천길 티켓 끊을 뻔했죠 (실제로 명종의 경우 침상 밑판에 불이 붙어서 큰일 날 뻔했습니다.)
헌데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부터는 궁궐부터 시작해서 양반님 댁 그리고 서민들 집과 주막 등등 방 전체에 온돌을 설치하는게 트렌드가 되는데, 아무래도 위의 연구성과들이 결코 헛된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죠(물론 농업을 위해서 개발햇던게 치료 및 복지를 위해 운용되다가 난방기술로 전용되긴 했지만요...)
즉 마왕이 참고한 것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으면서도 훨씬 더 발전된 개념의 온실은 다른 용도이긴 했지만 마왕이 사실상 포기했던 것과 달리 백성들에게 유용하게 사용되었으며, 한 나라의 문화를 변화시킨 온실이 동양의 한 작은 나라에서 개발되었습니다.
1차 극광도 탈환전... 여기서 남부제왕국들은 지원 받은 코그선을 이끌고 극광도를 탈환하러 갑니다.
코그선은 10세기에 처음 만들어지고 이후 북유럽에서 오랫동안 상선-군선으로 쓰입니다. 위키피디아 설명을 보면 한자동맹이 이 선박을 자주 사용했다는데, 마오유우에서 동맹이라는 단체가 한자동맹과 유사하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코그를 애니에서 전함으로 내세운 것은 상당히 적절한 고증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사실 소설이나 만화는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아서 모르겠지만 애니판은 은근히 고증을 더 잘 맞추려고하고 쓸데없는 사족은 넘어가려는 경향이 있어서 오히려 마음에 들더군요)
그리고 원작에서도 그렇고 애니판의 뉘앙스를 보면 이 국가들 수군이라는게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것 처럼 나오는데, 실제로 중세-근세 당시 조선 같이 수군을 육군과 동급 병력을 가진 상비군으로 운용한 나라를 제외하면 제대로 된 수군 개념이 있는 나라가 없었습니다 ㅡ.ㅡ;;;(조선군은 전성기 총동원하면 각 진과 성에 30~35만명 동원가능했고, 평시에는 육군 5만 수군 5만을 운용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계사년[1593년] 조선군 총 병력은 17만 2천 400명이었습니다.)
거진 그 나라 해적=수군이거나 또는 육군이 주 전투원이거나 또는 상선 수집해서 운용하거나 했었죠 ㅡ.ㅡ;;;
즉 남부제왕국이든 중앙국가들이든 간에 마족들이 굳이 크라켄 동원 안하고 정상적인 해전 했었다고 치더라도 승산은 없었습니다.(그와 비교되는 조선군은 확실한 통신체계까지 확인되는 등 당대 해군 중에서는 상당히 선진적이긴 했습니다. 영국해군의 경우 폽햄의 전술 신호서 이전에 공식적으로 확인되는 통신체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근데 사실 수군을 유지하는게 결코 쉬운게 아니었던게 조선수군도 저렇게 유지가 가능한게, 수군 복무가 무려 세습제였고 ㅡ.ㅡ;; 육군보다 복무기간이 압도적으로 길었습니다... 그도 그럴게 너무 힘들어서 다들 기피했거든요(그 대신 식사는 푸짐하게 줬던 듯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3723652 '수군은 평상시에는 쌀밥에 홍합미역국·봉총찜(꿩다리 찜)·산갓침채(갓 물김치)를, 전쟁에서 이긴 뒤에는 굴죽·숭어전·약과·노루고기포·설하멱(쇠고기 꼬치구이)에 술·참외를 곁들여 들었다.')
예...한해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는다는 것도 놀랍지만 이 중 전사자의 비율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게 좀 무섭죠...
그래서 당시 로얄 네이비는 지원자가 부족할 경우 상선 직원과 어부들을 납치해서 징집하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미국 선원들 납치했다가 영미전쟁까지 벌여졌죠 ㅡ.ㅡ;;;(그리고 백악관은 캐나다인들의 커다란 캠프파이어 장작이 되었습니다. 당시 해군력이 약했던 미국 해군은 도망다니느라 바빴고 주로 사략선들이 영국 상선 털어먹는 활약을 했죠, 물론 슈퍼 프리깃인 컨스티튜션은 한번은 영국 전열함 피해서 필사의 도주를 했지만 나중에 프리깃 게르에르를 무력화시키는 활약을 했습니다)
즉 마왕이 아무리 천재라고해도 저 당시 인간측의 수군을 강화시키는 것은 엄청난 시간과 비용을 들여야 그나마 체질이 개선 가능할 뿐이지 강력한 해군을 만들기에는 힘들다고 볼 수 있습니다. 뭐 일단 해군 개념부터 바꿔야할테니 말입니다.
첫댓글 아래 고층건물 관련 질문 때문에 올려봅니다. 근데 저도 논문이 아니라 민속사 수업 때 들었던 것과 그거와 관련된 논문을 읽어본게 다여서 실증성이 높은 것은 아님
오오 승리의 기름종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