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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즈카르야 예언서의 말씀 2,14-17
14 “딸 시온아,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15 그날에 많은 민족이 주님과 결합하여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그때에 너는 만군의 주님께서 나를 너에게 보내셨음을 알게 되리라.
16 주님께서는 이 거룩한 땅에서 유다를 당신 몫으로 삼으시고 예루살렘을 다시 선택하시리라.
17 모든 인간은 주님 앞에서 조용히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의 거룩한 처소에서 일어나셨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2,46-50
그때에
46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
47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48 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49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50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성모님은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여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입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께 봉헌된 것을 기리는 날입니다.
곧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실 때 가득했던 그 성령의 감도로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을 기리는 날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성모님은 세 살 때 그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에 의해 하느님께 봉헌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찾아온 어머니와 형제들을 문전박대하십니다.
사실 마리아는 이와 같이 아들로부터 냉대당한 것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 잃었던 아들을 성전에서 찾았을 때,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라고 했을 때도 그러했고,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어머니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 하였을 때,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 하였을 때도 그랬습니다.
이는 마치 옷가지와 음식을 마련하여 찾아오는 어머니를 돌로 쫓았던 성철스님 이야기를 떠올려줍니다.
이는 참으로 불효처럼 여겨지지만 사실은 진리를 향한 결연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
~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이다.”
(마태 12,48-50)
이 말씀은 언뜻 보기에는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내치신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성모님에 대한 외적인, 가시적인 이해를 뛰어넘도록 해줍니다.
사실 성모님께서는 육적인 혈연으로서만이 아니라, 영적으로 당신의 첫 번째 가족이셨음을 드러내줍니다.
왜냐하면 어머니 마리아는 그 누구보다도 먼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의 방문을 받고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실 때 바로 그렇게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였습니다.
그렇게 성모님은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여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그러니 분명 성모님께서도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분으로서 ‘예수님의 영적 가족’이 되셨습니다.
이처럼 성모님께서는 어렸을 때부터, 또한 아기를 잉태하는 순간부터, 자신을 봉헌하고 또한 축성 받으셨습니다.
결국 성모님도 예수님도 다 같이 아버지께 봉헌하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과 함께 하루하루를 아버지께 봉헌하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면서 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제 자신을 들여다봅니다.
성모님과 그리스도와 함께 아버지를 향하여 있는지, 그분의 뜻을 실행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마태 7,21)
<오늘의 말·샘 기도>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마태 12,48)
주님!
당신께서는 당신의 혈통에 저를 입적시키셨습니다.
당신과 함께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형제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오니, 제 삶이 당신 신성으로 거룩해지게 하소서!
제 안에서 당신의 말씀이 자라나고, 아버지의 뜻이 실행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봉헌과 은총>
은총은 선물입니다.
거저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돈을 주고 사는 것이 아니고, 일의 대가로 받는 것도 아니며, 공로의 상급으로 받는 것도 아니고, 애써 얻는 게 아니라 거저 받는 것이며, 그러기에 능동태가 아니라 완전한 수동태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본래 이런 것인데, 오늘 성모 자헌 축일의 봉헌기도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성자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전구를 들으시어, 봉헌하여 은총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없게 하시고, 청원하여 응답을 얻지 못하는 사람이 없게 하소서.”
그러니까 봉헌하여 은총을 받는 측면도 있다는 말이고, 오늘 축일을 지내는 성모님처럼 자신을 봉헌하여 우리도 은총이 가득한 사람이 되라는 기도입니다.
성모님처럼 아버지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도록 완전한 순종의 수동태가 되는 것도 은총의 길이지만, 성모님처럼 자신을 온전히 내어드림으로써 능동적 사랑의 수동태가 되는 것도 은총의 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능동적으로 수동태가 되게 하고, 사랑은 능동적으로 자신을 봉헌하게 하며,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갈망하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사랑의 갈망이 은총을 받기 위한 능동적인 자세입니다.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이루어지라는 순종보다 더 적극적인 은총의 자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종보다 동정녀가 더 은총에 어울리겠지요?
이렇게 비유하면 어떻겠습니까?
종의 순종이 계곡 저 아래에서 은총이 물처럼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라면, 동정녀의 사랑은 원천을 향하여 물길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사랑과 은총의 원천을 향해 열정적으로 산을 치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사랑과 은총을 갈망하며 자신을 봉헌한 마리아에게 은총을 거절하지 않으셨던 것처럼, 우리가 마리아처럼 자신을 봉헌하며 은총을 청하면, 우리에게도 거절하지 않고 은총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과 희망으로 은총을 갈망하고 청하는 우리가 되기로 결심하며 그 결심을 봉헌하는 우리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 나라의 가족>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잘났건 못났건 경건한 사람이건 죄인이건 상관없이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입을 수 있고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있음을 선언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예수님의 행동은 오해를 사기도 했고,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생겨났습니다.
가족과 친지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이 들리자 그를 붙잡으려 나서기도 하였습니다(마르 3,21).
예수님께서 의인과 죄인,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거나 거부하지 않으시고 그들과 함께 섞이고 어울렸기 때문입니다.
힘들어 아파하는 곳에 그분이 사랑으로 계셨습니다.
열린 마음으로 모두를 받아들이신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 안에서도 살아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 12,48)고 반문하시며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 말씀은 하느님 나라의 참된 가족에 대한 기준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형성되는 새로운 가족은 더 이상 혈연관계에 기반을 두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에 기반을 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족 공동체를 형성하고 결속시키는 데 초석이 되는 것은 혈연, 학연, 지연이나 좋은 감정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의지입니다.
그러므로 설혹 예수님과 가족관계에 있는 사람들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할 때 비로소 그분의 참다운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아시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내 뜻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내려놓으려면, 그분의 뜻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하고, 그 신뢰가 믿음이죠.
아버지의 뜻이 나에게서 이루어지도록 내 삶을 맡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마태 7,21)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마태 10,37)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려면 그분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성모님의 삶을 보면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가브리엘 천사에게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하고 응답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을 지닌 복된 분으로서 사셨습니다.
마지막 아드님이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는 것까지도 감당하시면서 흔들림 없는 믿음을 지키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모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참된 가족에 속하십니다.
성모님은 성령의 은총으로 처음부터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된 분이시고. 그 품위를 한 번도 잃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비록 예수님과 혈연관계에 있지 않더라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면 누구든지 그분의 가족이 됩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해를 형님으로 달을 누님으로 고백했습니다.
해와 달은 생겨난 뒤로 하느님을 거역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지구는 우리 공동의 집이고, 하나인 인류 가족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모든 사람을 따뜻하게 맞아들이며 모든 사람을 사랑합니다.
어디서 왔든, 가난하든 부유하든, 어느 민족에 속하든, 사회적 출신이 어떠하든, 모두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한 가족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이들은 서로가 형제자매입니다.
많은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행동하는 믿음으로 형성되는 새 가족의 품위를 지켜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1)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가족’에 관한 가르침이 아니라, ‘구원’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당신의 가족들과 친척들이 찾아온 일을 계기로 삼아서, 하늘나라에서 ‘당신의 참 가족’이 되는 방법을 말씀하신 것인데, 그 나라에서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된다는 것은 곧 구원을 받아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것입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라는 말씀은 ‘어떤 사람’이, 또는 ‘어떻게 사는 사람’이 나의 참 가족이 될 수 있겠느냐? 라는 질문입니다.
(‘그들은 내 가족이 아니다.’ 라는 뜻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라는 말씀은 산상 설교에 있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라는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2)
성모님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신앙인들’ 가운데에서 첫 자리에 계시는 분이고, 신앙인들의 모범이신 분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믿을 수 없는 일도 믿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서 한 말은 모두 인간의 머리로는, 또는 상식적으로는 믿을 수 없는 일들에 관한 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성모님께서는 그 말이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으셨고,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으셨습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 라는 천사의 말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의 과학을 초월하고, 인간의 상식을 초월하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성모님께서는 바로 그것을 믿으셨습니다.
동정녀가 남자의 도움 없이 아기를 잉태하는 것, 그 아기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아라는 것, 메시아의 나라가 영원하다는 것 등은 인간의 과학과 상식을 초월하는 일입니다.
사실 믿을 수 없어서 믿지 못하는 것이 죄는 아닌데,믿지 못하면 하느님의 일에 참여하지 못하게 됩니다.
바로 그 점에서 성모님은 위대한 신앙인이십니다.
3)
성모님께서는 '내가 원하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직 결혼을 하기 전이고 동정녀인 자신이 갑자기 아기를 잉태하게 된다는 것은 성모님의 입장에서는 원했던 일도 아니고, 그런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던 일이었는데도, 하느님의 뜻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기꺼이 순종하셨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라는 응답의 말씀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니 저도 그 일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각자 원하는 일들이 있고, 원했던 일들이 원하던 대로 이루어지면 은총을 받았다고 좋아하고 기뻐하다가, 원하는 일은 안 이루어지고, 원하지 않는 쪽으로만 가게 되면, 하느님을 의심하거나 원망합니다.
좋은 예가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의 인사 발령인데, 만일에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이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만 가겠다고 고집 부린다면, 교회는 그대로 병들어 버릴 것이고, 하느님의 뜻이 그들을 통해서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원하지 않는 곳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더라도 기꺼이 순종하는 것, 그것이 성모님을 본받는 믿음의 자세입니다.
신자들이 본당에서 어떤 직책에 임명될 때 받아들이는 일, 또는 반대로 그 직책에서 물러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4)
성모님께서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끝까지 절망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서 이집트로 피신해야만 했을 때에도 많이 고통스러우셨을 텐데, 그래도 하느님을 믿으셨기 때문에 절망하지 않고 고통을 참고 견디셨습니다.
성모님의 생애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때에, 사도들은 모두 달아나거나 숨어버리고, 다른 여자들은 극심한 슬픔과 고통 속에서 울고 있었지만, 성모님께서는 전혀 흔들림이 없으셨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아마도 성모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가 예고한 일들이 십자가로 가로막히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으셨을 것입니다.
5)
성모님께서는 '믿음과 순종이란 전적인 헌신'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루카 1,38) 라는 응답의 말씀이 바로 그것을 나타냅니다.
이 말씀은 “종이 주인에게 복종하듯이 주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겠습니다.” 라는 뜻이고, 전적인 헌신을, 즉 당신의 전 생애를 모두 바치겠다는 결심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 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은 성모님의 믿음과 순종에 그대로(첫 번째로) 적용됩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의 참가족 -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
“거룩하신 어머니, 찬미받으소서.
당신은 하늘과 땅을 영원히 다스리시는 임금님을 낳으셨나이다.”
(입당송)
요즘 산책 때 수확이 끝난 텅빈 밭의 흙을 바라보며 잔잔한 감동에 젖습니다.
흙은 제 영원한 스승입니다.
흙같은 어머니를 생각하며 그 겸손의 덕을 배웁니다.
며칠 전 써놨던 글입니다.
“흙의 침묵
흙의 겸손
흙의 사랑
우람한
무우 자식들
초연히 다 떠나 보내고
늘 깨어
묵묵히 기다리며 준비하는
어머니 흙, 흙같은 어머니”
<2024.11.13.>
흙(humus)을 닮아 겸손(humilitas)한 사람(homo)입니다.
겸손도 사람도 흙에 어원을 둡니다.
수도원 내에서야 흙냄새를 맡으며 흙을 보며 흙길을 산책하지만, 수도원 정문을 나서면 온통 포장으로 어머니 흙을 보기가, 흙길을 걷기가 참 힘든 사막한 현실입니다.
더불어 며칠전 나눴던 ‘소망’이란 글도 다시 나눕니다.
청정과 온유의 마음 역시 마리아 어머니의 마음처럼 생각됩니다.
“차가운 날씨
청정해서 좋다
맑고 깨끗하다
살짝 덮인 회색 구름 사이
쏟아지는 햇빛
온유해서 좋다
따뜻하고 부드럽다
청정淸淨과 온유溫柔를 겸할 수 있다면”
<1997.12.2.>
요즘 만추의 위령성월이 청정한 날의 연속입니다.
청정에 온유를 겸할 수 있다면 더할나위 없이 이상적일 것입니다.
아주 예전 미국에 있는 미네소타주 생존 수도원에 머물 때 노수도사제와의 우정을 잊지 못합니다.
어느 추웠던 날 노수도사제에 악수를 청하니 손이 차다며 사양할 때 드린 짧은 덕담과 더불어 시작된 우정입니다.
“Your hands are cold, but your heart is warm!”
(네 손은 차나 네 마음은 따뜻하다!)
날씨는 차가워도 마음은 늘 따뜻하고 부드러웠으면 좋겠습니다.
바로 오늘 기념하는 복되신 동정마리아 성모님 마음이 그러할 것입니다.
오늘 옛 어른이 말씀도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마음에는 저마다의 알맞은 자리가 있다.
감정의 자리를 찾을 수 있어야 흔들리지 않게 된다.”
<다산>
“희로애락이 생겨나지 않은 평온한 상태를 ‘중中’이라 하고, 질서에 맞게 감정을 발현하는 것을 ‘화和’라고 한다.”
<중용>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결같이 충실한 삶을 살 때, 마음과 감정의 순화로 평온하고 질서에 맞는 마음에 감정일 것입니다.
바로 성모님의 마음과 감정이 이러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입니다.
로마가톨릭이나 동방정교회나 오늘 똑같이 축일을 지냅니다만, 동방정교회는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의 어머니 입당 축일’이라 부릅니다.
이 축일은 신약성경에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200년경에 쓰여진 외경인 야고보 원복음서에 근거합니다.
이 문헌에 따르면, 요아킴과 안나는 오랫동안 자식이 없어 걱정중 하늘로부터 한 아이를 갖게 되리라는 계시를 받고 딸 마리아를 갖게 되었고, 3세 정도 나이에 성전에 봉헌합니다.
전승에 의하면, 마리아는 성전에 있는 동안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기 위한 준비과정으로 종교교육을 받습니다.
콥트교 전승에 의하면, 마리아의 부친 요아킴은 그녀가 6세 때, 모친 안나는 8세 되던 해에 사망합니다.
증명되지 않은 전설이지만 한가지 중요한 것은 마리아가 유년시절부터 하느님께 전적으로 봉헌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며, 이를 토대로 마리아의 자헌 축일이 생기게 됩니다.
동정녀 마리아의 자헌 축일은 543년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이나누스 1세 황제의 명령으로 과거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곳 근처에 비잔티움 양식으로 건축된 성 마리아 대성당의 축성식에서 유래합니다.
동방에서 오랫동안 기념되었던 이 축일은 9세기쯤 이탈리아 남부 수도원들에서 기념이 시작되었고, 1372년 교황 그레고리오 11세는 아비뇽에 있는 교황 전용 경당에서 처음으로 이 축일을 기념합니다.
그후 1472년 로마 미사 경본에 처음으로 기재되었다가 사라졌지만, 1585 교황 식스트 5세는 이 축일을 다시 허용했고, 1597년 교황 클레멘스 8세는 2등급 축일로 지정했으며, 마침내 1969년 로마 전례력에 그대로 남아 지금까지 계속 오늘 11월 21일 ‘복되신 동정마리아 자헌 기념일 미사’를 봉헌하게 됩니다.
오늘 제1독서 즈카르야 예언서의 말씀이 은혜롭습니다.
시온의 딸은 바로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집단인격으로서의 이스라엘 백성을, 우리 공동체의 형제자매들을 상징합니다.
그러니 성모 마리아는 물론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이해해도 무방합니다.
“딸 시온아,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그날에 많은 민족이 주님과 결합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 모든 사람은 주님 앞에서 조용히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의 거룩한 처소에서 일어나셨다.”
그날이 바로 오늘이요, 예언 그대로 오늘 복음에서도 실현되고 오늘 우리 교회공동체에서도 실현되어 주 예수님을 중심으로 참가족이, 한가족이 되어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은 교회 공동체의 원형을 보여줍니다.
그대로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를 미사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밖에서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당신을 찾고 있다는 전갈에 주 예수님은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하고 반문하신 후, 당신을 에워싸고 있는 당신 공동체의 제자들을 가리키며 이르시니 오늘 복음의 절정이자 요약입니다.
바로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주 예수님은 혈연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들이 당신의 참가족이자 한가족임을 천명하십니다.
주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은 그가 언제 어디에 살든 모두 당신의 한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로, 성모님을 교회의 어머니로 둔 우리들은 모두 한가족의 형제자매들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한가족 교회 공동체 모두의 어머니인 마리아 성모님을 잊어선 안됩니다.
평생 그 누구보다 한결같이 아드님과 함께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해온 마리아 성모님이야말로 봉헌 삶의 영원한 모범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자헌 기념미사를 봉헌합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의 참가족, 한가족을 이뤄주시며, 더욱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참 삶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행복하여라,
하느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
(루카 11,28)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귀한 봉헌>
오늘은 특별한 기념일을 맞이해서 그동안 루카 복음의 말씀을 차곡차곡 들추어 만나던 흐름이 잠시 끊기었습니다.
어쩌면 끊기었다기보다 말씀께서 어머니의 기념일을 맞아 잠시 그분께 길을 내어드렸다고 보아도 좋을 듯합니다.
오늘은 마리아께서 어릴 때부터 하느님께 봉헌되셨음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오늘은 제1독서를 먼저 보겠습니다.
"딸 시온아,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즈카 2,14)
하느님께서 예언자의 입을 통해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을 위로하십니다.
버려졌던 예루살렘을 다시 선택하시어 옛 영화를 되찾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개인 차원으로도, 공동체적 차원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곧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신부인 예루살렘일 수도 있고, 우리가 모여 이룬 교회 공동체가 예루살렘일 수도 있습니다.
'한가운데'
중심을 말합니다.
사람은 무엇을(누구를) 중심으로 사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과 방식이 크게 달라집니다.
자기 내면에 어떤 생각을 품고 어떤 가치를 지향하며 사는지도 이 중심이 좌우하지요.
하느님께서 그 한가운데에 들어와 머무르시겠답니다.
우리 존재를 관통해 들어오셔서 차지하시겠다는 뜻이지요.
"모든 인간은 주님 앞에서 조용히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의 거룩한 처소에서 일어나셨다."
(즈카 2,17)
주님께서 오신다는 소식과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외치던 목소리는 이제 침묵을 명합니다.
오시는 그분을 맞는 영혼에게 지금 필요한 건 고요입니다.
개인이건 공동체건 주님께서 존재 가장 깊은 곳을 뚫고 들어오시는 것은 놀라운 사건입니다.
더 이상 구구절절 변명이나 설명이 필요없는 신비입니다.
이천 년 전 주님께서 나자렛의 마리아에게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몸과 영혼을 관통해 들어와 한가운데에 자리하시도록 터를 내어드리셨지요.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허용하신 분이란 뜻입니다.
이 신비로운 순간, 하느님의 뜻, 말씀께서 그분 안에 심겨지셨지요.
마리아는 이렇게 존재 안에 들어오신 하느님을 열 달은 몸으로, 나머지 시간은 마음으로 품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이 관통과 현존은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어떤 존재의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으신 순간, 그도 그분 심장에 자리를 잡게 됩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귀하디 귀한 신부가 되어 그분을 사로잡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꽂혀 서로의 한가운데를, 중심을 차지합니다.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마태 12,47)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실 때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서 기다립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이야기하고 싶어하지요.
'밖에'
분명 공간적으로는 예수님과 제자들 무리에서 소외된 자리입니다.
육으로 맺어진 가족이 그분을 둘러싸고 말씀을 듣는 이들 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그분을 만나고자 다른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마태 12,49)
이는 물리적인 안과 밖을 초월하시는 말씀입니다.
지금 밖에 계시지만 하느님 한가운데에 자리하신 마리아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예수님의 어머니, 인류의 어머니이십니다.
그분은 영과 육을 통째로 하느님과 그분 뜻에 바치신 분이니까요.
성모님의 봉헌일에 우리 각자의 봉헌을 떠올려 봅시다.
교회 제도 안의 공적 신분으로 자신을 봉헌한 이도 있고, 제도 밖에서 주님과 자기만 아는 봉헌으로 스스로를 묶은 이도 있을 겁니다.
제도적으로야 안과 밖이 분명하지만, 봉헌의 자취는 그 영혼 한가운데에 주님께서 거하심으로 새겨집니다.
기준은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함'입니다.
주님께서 존재 한가운데로 들어오시도록 허용하고, 자기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의 뜻을 행하며 그분의 거룩한 처소로 살아가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귀한 봉헌을 축하드립니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의 것’이라는 틀>
마리아는 성령으로 인한 예수님의 잉태를 하느님께 대한 순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은 어머니이고, 마리아는 초대 교회 사도들과 함께 복음을 선포했던 사도들의 어머니입니다.
초대 교회는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 사도들의 어머니인 마리아, 신앙인의 모범인 마리아를 공경하였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교회는 마리아의 역할에 대해서 새로운 교리를 선포하게 됩니다.
성모 마리아의 승천, 성모 마리아의 평생 동정, 성모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교리입니다.
저는 신학교에서 ‘마리아론’을 배웠습니다.
교회에서 성모 마리아의 역할과 성모 마리아의 존재가 신학적으로, 교리상으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학적인 의미와 성모 마리아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잘 모르는 일부 개신교회는 가톨릭교회를 ‘마리아 교회’라고 오해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는 ‘마리아론’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을 지내면서 성모 마리아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과 성모 마리아의 신앙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교회의 영적 어머니 역할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 이 사람이 이제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제자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분이 이제 어머니이시다.”
교회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근거로 교회가 ‘사도’로부터 이어져 왔음을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습니다.
따라서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로 공경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런 측면에서 성모 마리아의 발현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발현을 통해서 치유와 기적이 일어나는 것은 발현의 현상이지, 발현의 본질이 아닙니다.
성모 마리아의 발현은 신앙인이, 교회가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파티마 발현에서는 회개와 평화의 중요성이 강조되었고, 루르드에서는 치유와 신앙의 부르심이 나타났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신앙인에게 '회개, 묵주기도, 단식, 미사참례, 선행'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성모님의 발현을 통해 신앙의 경고와 위로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자신이 변화하고 신앙을 깊게 하는 기회로 삼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서 깊은 성찰을 했습니다.
교회의 학자들이 모여서 하나의 결론을 내렸습니다.
예수님은 온전히 사람이면서, 온전히 하느님이라는 교리가 선포되었습니다.
이런 교리가 선포되면서 성모 마리아의 정체성도 재정립되었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인간 예수님의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어머니도 되었습니다.
이것이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교리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어머니는 당연히 죽음의 과정을 거치지 않을 거로 생각했습니다.
초대 교회는 성모 마리아가 죽음을 겪지 않고 승천하였다고 믿었습니다.
죽음을 거치지 않았으니, 성모님은 죽음의 원인이 되는 원죄를 받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교회는 성모님이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는 교리를 선포하였습니다.
루르드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은 ‘나는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였기에, 평생 동정이었다는 교리도 선포되었습니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입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서 성모님의 의견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성자 예수님을 성모님께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자신을 선택하신 예수님을 사랑으로 돌보셨습니다.
지금 내 곁에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신발, 옷, 책, 전자제품, 운동기구, 친구, 가족, 이웃’들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제가 선택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저를 선택해 준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라고 하면 애착이 있을 수 있고, 욕심이 생길 수 있고, 상실에 대해 아쉬움이 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나를 선택해 준 것으로 생각하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제 곁을 떠난다고 해도 속이 상하거나, 아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내 것’이라는 틀을 ‘하느님의 것’이라는 틀로 바꾸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이다.”
하느님께서 나를 선택하셨다고 믿는다면 우리를 가로막는 많은 벽이 사라질 것입니다.
외롭지만 우주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지구는 하느님의 선물이며, 하느님 나라는 바로 이곳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영원하신 성부의 아드님을 잉태하신 동정 마리아는 복되시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 하느님의 뜻처럼 우리가 모두 한 가족이 될 수 있도록>
부부싸움을 안 하는 집이 없다고 말합니다.
하긴 남남이 만나서 서로 맞춰서 산다는 것이 절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부모님께서 살아계실 때 부부싸움 하시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큰 목소리가 날 때가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그래서 남들이 서로 물건을 부수면서 싸운다는 것도, 말다툼으로 며칠 동안 말하지 않는다는 것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부부싸움 후 이혼하고 싶어도 자식 때문에 이혼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자녀 때문에 억지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이혼해서 한 부모 가정으로 자란 아이의 정서보다, 이혼하지 않고 같이 살면서 계속 싸우고 상대를 비난하는 말을 듣고 자란 아이의 정서 문제가 더 심각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아이 때문이라는 말을 하려면, 절대 아이 앞에서 싸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상대 때문이라는 말을 하며 싸우지만, 그때 아이를 위한다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이 때문이라면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부모님의 함 께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이제야 감사함을 깨닫습니다.
얼마나 좋은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셨을까요?
비록 배우자 없는 저의 삶이지만, 저 역시 좋은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며 최선을 다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함께 살아가는 이 세상에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주위 사람들의 영향을 받는 것처럼, 그들도 제게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실 때 은총을 가득히 채워주신 성령의 감도로 성모님께서 아기 때부터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을 기리는 날입니다.
성모님의 봉헌은 성모님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큰 것은 성령의 감도이지만, 성모님의 부모님이신 요아킴과 안나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오실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이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당신을 찾아온 어머니와 형제들을 뒤로 하고, 당신 제자들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되어 주위 사람에게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처럼, 우리가 모두 한 가족이 될 수 있도록 말이지요.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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