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 공부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학교에서나, 연수원에서 간혹 듣는 질문이다. 교양으로서 한문이 아니라 전공으로서 한문 공부를 말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연수원을 기준으로 보자면 사서삼경과 『고문진보』, 『소학』, 『통감절요』, 『대전통편』, 『주서백선』 등을 가르치는데, 사서 완독하기도 힘들다. 저런 커리큘럼 외에도 두보시(杜甫詩), 『장자』 등등을 읽어봐야 겨우 한문을 공부했다는 구색을 갖춘다. 읽었다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실제 문집에서 단어 몇 글자를 유의어로 바꾸거나 축약하여 쓴 경우는 장님 길찾듯 빙글빙글 우회하다가 인용 출처를 찾기도 한다. 사고전서나 고전번역DB가 잘 갖추어져 있어도 그 본질의 내용을 모르면 엉뚱한 검색 결과에 도달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조선 문인들은 어떻게 공부했을까? 당시는 공식적인 기록문자가 한자였으므로, 온갖 글을 능수능란하게 쓸 수 있어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타인의 글을 보아도 거기에 인용된 문구의 출처가 어디인지까지 파악해야 겨우 식자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영조대 영의정을 역임한 홍봉한(洪鳳漢)의 집안은 19세기 연천 홍석주(洪奭周), 항해(沆瀣) 홍길주(洪吉周), 해거재(海居齋) 홍현주(洪顯周)라는 걸출한 세 형제를 배출한다. 홍석주는 19세기를 대표하는 고문가로서 당대의 문풍을 주도한 인물이었고, 정치적으로도 순조·헌종대 좌의정을 역임했다. 홍길주는 기발하고 참신한 발상과 형식을 통해 자신만의 글쓰기 세계를 구축하여, 형 홍석주로부터 ‘장자나 사마천에 버금간다.’라는 평을 받았다. 막내 홍현주는 1807년 정조의 서차녀 숙선옹주(淑善翁主)의 부마가 된다.
『해거재시초(海居齋詩鈔)』 서문에 의하면, 홍현주 또한 어려서부터 뛰어난 기상이 있었지만 두 형만큼 독서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던 듯하다. 하지만 대체로 막내들이 형들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듯 홍현주도 자연스럽게 독서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당대를 대표하는 두 사람이 자신의 형인데다가 홍석주가 1774년생, 홍길주가 1786년생, 홍현주가 1793년생으로 형제 간의 나이 터울이 많이 나다보니, 홍현주의 학문은 두 형의 가르침이 절대적으로 컸을 것이다. 홍현주는 둘째 형에게 간략하면서도 오랫동안 활용할 수 있는 필수 독서를 추천해달라고 문의한다. 그리고 두 형이 막내 동생을 위해 집필한 책이 『사부송유(四部誦惟)』이다.
홍길주는 홍현주에게 경사자집(經史子集) 4부에서 핵심적인 책들을 제시하는데, 첫째, 사서오경(四書五經)이다. 사서오경을 읽을 때는 주돈이(周敦頤), 장재(張載), 정호(程顥)·정이(程頤), 주희(朱熹)의 책을 보조하여 정수를 추출해야 한다. 그다음 『춘추좌씨전』부터 『후한서』까지 6종류 사서(史書)이다. 위(魏), 촉(蜀), 오(吳) 이후의 사서들은 문약하니 읽을 필요가 없다고 한다. 이들 사서는 간결함, 엄숙함, 충실함, 곧음 등 각기 특색을 거론하는데, 이를 통해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많이 아는 것보다 사건을 정확하게 논평(論評)하는 힘을 기르라는 의미인 듯하다. 유가의 경서들을 읽고, 고금의 치란을 살펴 경전대로 다스렸는지 징험한 다음, 세 번째로 제자서(諸子書)를 읽는다. 이는 유가 이외의 지식 확장이다. 홍길주는 40종의 제자서(諸子書) 중 『장자』와 『순자』 두 책을 꼽는다. 홍석주의 『홍씨독서록』에 의하면, 『장자』는 비록 유가의 글과 다르게 방탕하게 되는 폐단이 있지만 거침없는 변론은 선진(先秦) 이래로 없다고 평가하였으며, 『순자』 또한 성악설을 주장하는 등 패악함이 심하지만, 선왕의 도를 칭술(稱述)하고, 격언(格言)이 될 부분이 종종 있으며 문장도 『장자』에 짝할 만큼 웅장하고 뛰어나다고 평하였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기 위해 집부류의 책들을 읽는다. 홍길주는 『초사(楚辭)』, 『문선(文選)』, 『문원영화(文苑英華)』, 『당송팔대가문초(唐宋八大家文鈔)』를 4종을 꼽는다. 그리고 각각의 글들을 읽었을 때의 효용에 대해 언급하는데, 『초사』, 『문선』, 『문원영화』는 딱딱하고 재미없는 글에 활력을 주고, 이것이 너무 지나칠 경우 『당송팔대가문초』를 보완하는 역할로 삼았다.
사실 홍길주가 아무리 정수(精髓)만 골라줬지만, 사서오경만 해도 외우는 데만 몇 년씩 걸리는 전적이다. 더구나 저 많은 전적들을 언제 다 외운단 말인가. 막내는 둘째 형이 뽑아준 책 목록들을 큰 형 홍석주에게 갖고 가니, 큰 형은 이 책들 중 필수적으로 읽어야 할 챕터들을 뽑아 2책으로 만들어 준다. 1책 당 150쪽 정도니까 오늘날 300쪽 정도 된다. 책의 바다에서 필수적인 책들을 뽑고, 1,000책이 넘는 사이즈를 단 2책으로 압축한 두 사람의 식견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이후 홍현주는 부마로서 입신할 수 없다는 신분적 제약이 있었지만 대신 왕실을 통해 얻게 되는 최신의 문화 정보를 토대로 한평생 서화의 수집과 문예 활동 및 학술 교류 활동을 벌인다. 이는 모두 두 형이 만들어 준 단단한 뿌리가 바탕이 되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남는 것이 없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공자의 말씀이다. 처음에 배울 때는 그저 수많은 말씀 중 하나로 넘어갔는데, 번역을 하고 논문을 쓸수록 절실하게 와닿는 구절이다. 어느 분야든 마찬가지이지만 공부가 깊어질수록 기본기가 중요하고, 그 기본기는 결국 암기와 사유로 귀결된다. 암기는 정보의 습득이고, 사유는 정보의 적용이다. 창의력이란 백지 상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정보의 축적이 있어야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마르지 않듯, 무궁하게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은 더더욱 직종의 주기가 짧아지고 있다. 당장 10년 뒤 우리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다. 이럴 때일수록 옛날 문인들의 독서법처럼 박이약(博而約)하는 공부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