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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요한 묵시록의 말씀 10,8-11
하늘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나 요한에게
8 말하였습니다.
“가서 바다와 땅을 디디고 서 있는 그 천사의 손에 펼쳐진 두루마리를 받아라.”
9 그래서 내가 그 천사에게 가서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고 하자, 그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이것을 받아 삼켜라.
이것이 네 배를 쓰리게 하겠지만 입에는 꿀같이 달 것이다.”
10 그래서 나는 그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 삼켰습니다.
과연 그것이 입에는 꿀같이 달았지만 먹고 나니 배가 쓰렸습니다.
11 그때에, “너는 많은 백성과 민족과 언어와 임금들에 관하여 다시 예언해야 한다.” 하는 소리가 나에게 들려왔습니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9,45-48
그때에
45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시며,
46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47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48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도를 찾지 못하였다.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몸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맨 먼저 찾아가신 곳은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면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루카 19,46)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나의 집, 곧 당신의 집’으로 말씀하십니다.
이는 <이사야> 56장 7절의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리리라.”는 말씀을 지칭합니다.
그런데 성전이 장사와 환전이 행해지는 불결하고 부정한 곳, ‘강도의 소굴’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새롭게 정화하시는 일을 맨 먼저 하십니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는 교회 개혁의 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교회가 항상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을 드러내고, 주님의 생명과 사랑에 응답해야 함을 말해줍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쪼개시고, 성전의 장막을 두 갈래로 가르셨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물리적이고 공간적인 성전에 갇히지 않으시는 당신의 몸을 성전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하느님 현존의 성전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사실을 잘 깨우쳐줍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1코린 3,16)
참으로 그렇습니다.
우리의 몸은 주님께서 주신 거룩한 품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비록 질그릇 같은 깨지기 쉬운 몸이라 할지라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값진 보화를 간직한 거룩한 몸입니다.
당신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서 현존하시며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 안에 계시고 활동하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주님의 성전인 우리의 몸이 ‘강도의 소굴’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몸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몸으로 그분의 영광을 드러냄이란, 우리 몸을 잘 보전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우리의 몸을 다른 이들을 위해 내어주는 데 있습니다.
이를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로마 12,1)
그렇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을 때, 곧 우리 자신을 타인과 세상을 위해 내어놓을 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우리 자신은 ‘기도의 집’이 되고, 우리 안에서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루카 19,46)
주님!
기도하게 하소서
제 몸으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소서.
제 행실로 당신의 성전임을 증거하게 하소서.
제 영혼이 당신의 거룩함을 드러내게 하소서.
제가 당신이 거주하시는 당신의 집인 까닭입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성전을 지킵시다>
태국의 왕궁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발 디딜 틈도 없이 많은 관광객에 떠밀려 겉모양을 보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화려한 수공예 작품으로 꾸며진 왕궁을 보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국왕의 권위를 인정하며 존중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짧은 치마를 입은 사람은 무릎 밑으로 내리는 긴치마를 빌려 입어야 하고 슬리퍼를 신은 사람은 다른 신으로 갈아 신어야 할 정도로 국왕에 대한 예의를 챙겼습니다.
왕궁의 곳곳에 그려진 벽화는 규모나 섬세함이 대단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벽화를 복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장인 정신을 생각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들락거려 소란스러운데도 전혀 개의치 않고 온갖 정성을 들여 붓을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몇몇 한국인들이 눈에 뜨여 아주 반가웠습니다.
한국 사람은 사원이나 왕궁 등 역사적인 장소를 찾기보다는 먹고 마시고 즐기는 곳을 즐겨 찾는다는 말을 들었기에 그들이 달리 보였습니다.
국왕의 권위를 인정하는 만큼 왕궁은 보호되겠지만 관광객으로 넘쳐 나는 왕궁은 아마도 돈벌이의 장소로 전락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잘 포장된 과일바구니를 봉헌하고 있었는데, 봉헌한 사람이 자리를 비우기가 무섭게 바구니는 치워지며, 이미 판매되었던 과일 바구니를 다시 판매하는 모습을 보면서 봉헌의 의미가 무시되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왕궁의 덕분으로 백성이 사는구나 하는 마음입니다.
모쪼록 왕궁이 돈벌이의 장소가 되지 않고 백성을 살리는 곳, 곧 기도의 집이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가끔은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무엇인가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 마음에 끌리는 것과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상충할 때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이 됩니다.
마땅히 주님을 따라야 함에도 말입니다.
육적인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면 몸은 고달플지라도 마음의 자유를 누립니다.
그러나 육적인 욕망을 따르면 당장은 즐겁고 기쁘지만, 주님을 따르지 못한 안타까움에 마음이 걸립니다.
사실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지 못한 마음이 강도의 소굴입니다.
우리의 몸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았고, 하느님의 숨을 받았으며 주님을 모시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그 몸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상태가 강도의 소굴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루의 끝맺음에 늘 “허물로 누벼놓은 이날 하루를 주님의 자비로 지켜주소서.” 하고 기도를 하지만, 일관된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기엔 여전히 힘에 겹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혀에 감미로운 자는 기도의 집이요, 육의 욕망을 따르는 자는 강도의 소굴이거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애 버릴 방도를 모색하였습니다.
설사 그들의 계획이 성공한다 해도 진리 안에 자유를 누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끝내 ‘강도의 소굴’을 ‘기도의 집’으로 회복시키지 못한 채 죽음을 자초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오늘도 여전히 그들의 전철을 밟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기도의 집을 복구하는 날 되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신 것은 성전은 이익을 남기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을 예배하고 사람을 섬기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이 장터였다면 그들을 쫓아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밑지고 파는 장사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건을 파는 이들은 당연히 이익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셈을 하고 이권이 살아있는 곳이 세상입니다.
성당에서 운영하는 성물방이나 카페가 물질적 이익의 창구가 된다면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실까요?
우리 삶의 자리는 주님을 모시는 성전입니다.
성전을 지킵시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신앙인들에게 지금 이 시대는 분명히 ‘위기의 시대’입니다.>
1)
온 백성이 예수님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는 말은 예수님의 ‘성전 정화’를 백성들이 지지했음을 나타냅니다.
그 당시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은 서민들에게는 대단히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과 장사꾼들에게 자릿세를 받은 사제들은 사실은 한통속이었습니다.
어쩌면 사제들이 장사꾼들을 고용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 제물로 바칠 짐승이나, 여러 가지 물품들을 다른 곳에서는 사지 못하게 하고, 성전에서만 사라고 강요하면서 아주 비싼 값으로 그것들을 팔았는데, 그것은 서민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일이었고, ‘강도짓’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예수님께서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라고 꾸짖으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백성들이 예수님의 성전 정화를 지지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물론 성전 정화를 지지했다고 해서 백성들이 예수님을 지지한 것은 아니고, 또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따른 것도 아니지만, 어떻든 기득권층 사람들에게는 백성들이 성전 정화를 지지하면서 예수님의 곁을 떠나지 않은 것은 크게 부담스럽고 불편한 일이었습니다.
2)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당시 ‘최고의회 의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단순하게 말하면 서민이 아니었던 사람들, 즉 기득권층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기존의 종교 질서와 사회 질서를 뿌리째 흔들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자기들의 기득권이 위협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하느님의 일’이고 ‘선한 일’인데, 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을까?”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교 입장에서 하는 말이고, 그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과 기득권층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하느님의 일’로 생각하지도 않았고, ‘선한 일’로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자기들이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고, 예수님의 비판을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는 말씀을 듣고서 자기들이 모욕당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는 예수라는 자가 성전을 모독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 입장에서 생각하면 성전을 모독한 것은 그자들인데, 그자들은 반대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3)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할 것이다."
(요한 16,2-3)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지도자들이 자기들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기는커녕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은 자기들은 하느님 편에 서 있고, 예수님은 반대편에 서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죽이는 일은 곧 하느님께 충성하고 봉사하는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왜 그들은 어쩌다가 선과 악을 판단하지 못하고, ‘하느님의 뜻’과 ‘인간의 탐욕’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었을까?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그들은 왜 그렇게 어리석은 위선자가 되었을까?
4)
이천 년 전의 유대교와 예루살렘 성전의 모습이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이 되긴 하지만, 사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의 모습은(신앙생활은) 어떤가?”입니다.
중세 때의 교회의 모습을 보면, 예루살렘 성전보다 더 타락했었고, 더 큰 죄들을 짓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만일에 그때 훌륭한 성인 성녀들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교회는 아마도 그대로 망해 버렸을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도 우리 교회에게는 분명히 여러 가지 이유로 ‘위기의 시대’입니다.
통계표를 보지 않아도, 성소자 수가 줄어들고, 새 영세자 수도 줄어들고, 냉담자 수는 급격히 증가하고 있고, 사회에서 교회의 영향력은 점점 줄어들고, 그만큼 ‘복음화의 힘’은 약해지고 ‘세속화의 힘’은 강해지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교회가 심각하게 타락했을 때 성인 성녀들이 나타나서 교회를 쇄신하고 개혁하면서, 사람들을 회개시키고, 무너지는 교회를 다시 세운 것은 분명히 ‘성령의 도우심과 보호’입니다.
주님께서는 변함없이 성령을 통해서 교회와 신앙인들을 보호해 주시고 지켜 주신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이 성실하게 응답하고 회개하는 생활을 할 때에만 그 보호와 도우심이 ‘살아 있는 힘’이 됩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성전정화 - 교회공동체는 물론 개인 성전 정화가 우선이다>
“당신 말씀 제 혀에 얼마나 달콤한지!
그 말씀 제 입에 꿀보다 다옵니다.”
(시편119,103)
참으로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는 이들은 세상맛, 밥맛, 돈맛이 아닌, 말씀맛, 기도맛, 하느님맛으로 살아갑니다.
오늘 옛 어른의 지혜도 교회 공동체에 속한 이들의 성전 정화가 우선임을 깨닫게 합니다.
아무리 성전 건물이 좋고 화려해도 그 안에 좋은 사람들 공동체가 없으면 헛되고 공허할 뿐입니다.
참 좋은 사람들이 세상의 보물이요 희망입니다.
“내 마음이 삐뚫어지면 세상도 어그러진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나의 마음부터 바꾸어라.”
<다산>
바로 사람이, 나 자신의 성전 정화가 우선임을 깨우쳐줍니다.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가지런하게 하며,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안하게 한다.”(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대학>
역시 나부터의 수양이, 수행인 성전 정화가 우선임을 밝혀주는 동양의 지혜입니다.
오늘은 3세기 순교한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가톨릭교회 역사 교육 차원에서 순교 성녀의 감동적 일화를 공부해 봅시다.
이런 일련의 교육도 우리의 회개와 더불어 각자의 성전 정화에 좋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어제는 뜻밖에도 교황의 교육에 대한 귀한 언급이 많아 나눕니다.
“교회 역사는 단지 연대기적 사실로 환원될 수 없다.”
그래서 순교성인들의 감동적 일화를 살펴보며 배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오늘날 신자들이 더 잘 살 수 있도록 자신의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
“교육의 실패는 미래의 아이들을 탈취해 가는 ‘문화적 집단학살(cultural genocide)이다.”
문화적 집단학살이라 표현이 아주 자극적이지만 역사 교육의 중요성이 그토록 지대함을 새삼 깨닫습니다.
우리나라 학생들의 역사 교육이 얼마나 부실한지 개탄합니다.
이래서 신자들의 평생교육에 가톨릭교회의 매일미사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저 역시 공부하는 마음으로 날마다 쓰는 강론입니다.
“선교사들은 교회의 사랑의 언어로 말해야 한다.”
“교육에의 열쇠는 학교와 가정 간의 좋은 협력에 있다.”
금과옥조의 지혜 가득한 교황의 메시지를 공부하는 마음으로 자세히 읽어보려 합니다.
성녀 체칠리아의 순교에 이르기까지의 감동적 과정을 살펴봅니다.
성녀의 이름은 ‘천상의 백합’을 뜻합니다.
흔히 성녀는 비올라나 작은 오르간을 연주하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체칠리아는 로마제국의 명문 귀족의 규수로 어린시절부터 독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합니다.
자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강권에 의해 발레리아누스와 결혼하였고, 이교도인 그에게 종신 동정 서약한 사실을 밝혔고 도움을 청합니다.
그런 사실을 알리는 성녀의 수호천사와의 만남을 통해 남편은 적극적 협조자로 바뀌었고 마침내 교리를 공부하여 가톨릭으로 개종합니다.
발레리아누스는 함께 개종한 동생 티부르시우스와 신자생활에 열심하였고, 이들 형제의 삶에 감동한 막시모라는 젊은이는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이 셋은 이교도 신전에 희생제물을 바치라는 강요를 거절함으로 같은 날 순교합니다.
체칠리아 역시 체포되었으며, 한치의 흐트러짐없이 당당하게 자신의 신앙을 밝히고, 온갖 회유와 감언이설에도 신앙을 지키다가 모진 고문으로 고통을 겪다가 참수형으로 순교합니다.
성녀의 사후, 821년 교황 파스칼 1세가 성녀의 무덤을 열어보니 시신은 썩지 않고 살아 생전 그대로의 모습이었고, 이에 감복한 교황은 정중히 예식을 갖춰 그녀를 성녀로 인정하고 그녀에게 봉헌된 성 체칠리아 대성당의 지하묘소에 안치합니다.
전설적 일화지만 생명보다 강한 주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이 우리에게 깊은 감동과 더불어 우리의 왜소한 신앙생활에도 큰 자극과 충격이 되니 저절로 성전 정화가 되는 느낌입니다.
어느날 갑작스런 신망애信望愛의 성장은 없습니다.
부단한 주님을 향한 신망애의 수행과 더불어 정화되고 튼튼해지는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형제들의 성전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이 우리에게는 영원한 화두가 됩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너희는 이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있다.”
세상을 성화해야 할, 세상의 마지막 보루와 같은 청정해야 할 기도의 집인 성전이, 수도원이 속화되어 강도의 소굴이, 영적 조폭들이나 영적 무뢰한들, 영적 사기꾼들의 소굴이 된다면 이보다 큰 재앙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주위의 위험에 아랑곳 없이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고 온 백성은 주님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음으로써 주님과 혼연일치의 공동체를 이루니 적대자들도 어쩌지 못합니다.
말 그대로 주님께서 교회공동체 형제들의 성전 정화에 온힘을 다하는 모습입니다.
새삼 공동체의 성전 정화에 날마다 봉헌되는 성체성사 은총의 영향이 얼마나 지대한지 깨닫습니다.
오늘 묵시록의 요한이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 삼킨 체험을 우리는 미사를 통해 합니다.
“이것을 받아 삼켜라.
이것이 네 배를 쓰리게 하겠지만 입에는 꿀같이 달 것이다.”
그대로 이뤄지는 사도 요한 개인의 성전 정화요 이어 예언하라는 선교 사명이 부여됩니다.
흡사 성찬전례 중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먹어라.’ 또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라는 말마디를 연상하게 합니다.
주님의 성체와 성혈을 받아 모심으로 주님과 하나되는 미사은총보다 교회공동체의 성전 정화에, 교회의 선교 활동에 좋은 수행은 없을 것입니다.
“너희는 보고 맛들여라.
주님께서 얼마나 좋으신지!
행복하여라, 그분께 피신하는 사람!”
(시편 34,9)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성전의 고유한 모습>
보름달이 주는 상징은 ‘충만하다’라는 의미와 ‘풍요롭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충만하고 풍요로운 건 이웃에게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의 추석과 미국의 추수 감사절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풍요롭게 해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겁니다.
충만하게 해 주셨으니, 이웃에게 나누는 겁니다.
저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충만하고, 풍요로웠던 날이 있었습니다.
수요일에는 암 환자를 위해서 집으로 찾아가서 세례를 주었습니다.
형제님은 건강을 많이 회복했습니다.
암을 치료하면서 지난날들을 돌아 볼 수 있어서 감사했다고 말했습니다.
세례명을 레오라고 정했습니다.
사자처럼 용맹하게 암도 이겨내고,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목요일에는 교통사고로 크게 다친 아이를 위해서 집으로 찾아가서 세례를 주었습니다.
4달 전에 중환자실에 있을 때는 의식이 없었습니다.
찾아가서 기도하니, 발가락이 조금 움직였습니다.
아직 말은 못하지만, 지금은 이야기를 듣고 빙그레 웃기도 합니다.
그날 세례를 주면서 함께 했던 분들 모두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이는 요셉으로 세례명을 정했습니다.
아이의 생일이 3월 19일이라서 제가 그렇게 정해 주었습니다.
금요일에는 장례미사가 있었습니다.
4살된 아들과 임신 중인 아내를 남겨 두고 하느님의 품으로 떠났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전날, 아버지가 끓여준 된장찌개를 맛있게 먹었다고 합니다.
어머니와 산책하러 나갔다가 상태가 좋지 않아서 병원으로 갔다고 합니다.
온 가족이 모여서 고인의 임종을 지켜보았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떠나보내야 하는 부모님의 심정도, 사랑하는 남편을 떠나보내야 하는 아내의 심정도 무척이나 가슴 아팠을 겁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4살 아들과 아직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는 태중의 아이를 생각하니 저도 마음이 아팠습니다.
장례미사가 있던 날은 ‘모든 성인 대축일’이었습니다.
모든 성인이 세상을 떠난 안드레아를 천국으로 인도하리라 생각하며 장례미사를 봉헌했습니다.
토요일에는 ‘유아세례’가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아기를 위해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동부에서 왔습니다.
아기의 대부는 휴스턴에서 왔습니다.
아이의 세례명은 ‘노엘’이었습니다.
아이의 부모님이 정했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충만한 날이었습니다.
마침 부주임 신부님이 성지순례 중이어서 제가 충만함을 온전히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관해서 이야기합니다.
성전의 고유한 모습은 ‘기도하는 집’입니다.
더불어서 성전은 복음을 전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믿는 형제와 자매들이 친교를 나누는 곳입니다.
성전은 이제 예수님께서 당부하셨던 것처럼 나눔이 이루어지는 곳이어야 합니다.
특히 가장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 외로운 이들이 머물 수 있는 위로와 치유의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곳에서 희망의 빛이 퍼져나가야 합니다.
우리들 또한 거룩한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를 만나는 사람들이 지친 삶에서 위로를 얻는다면, 우리를 만나는 사람들이 복음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면, 우리를 만나는 사람들이 절망 중에서도 희망의 빛을 볼 수 있다면, 세상의 어떤 성전보다도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전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미사를 통해서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바로 우리들의 몸이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모시는 나의 몸과 마음이 주님의 뜻에 따라 충실하게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 너그러운 마음으로 가진 것을 나누는 사람들이 있는 곳, 그곳이 진정한 성전이고 그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분열과 갈등이 있는 곳, 욕심과 분노가 있는 곳은 아무리 화려하고 아름답게 보여도 주님께서 원하는 성전이 아닙니다.
2024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면 좋겠습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내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의 몸은 기도의 집이 되어야>
사람이 암에 걸리는 이유는 첫째, 유전, 두 번째로는 환경, 세 번째는 음식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 가장 중요한 것이 스트레스라고 하지요.
하고 싶은 말 참고, 하고 싶은 행동을 참으면서 스트레스가 더해져 병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회생활 하면서 어떻게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하고 싶은 행동 다 하면서 살 수 있느냐고 하지만, 이해하려 하고 또 삶 안에서 의미를 찾아가면서 본인에게 닥친 문제들을 풀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의 인상 깊은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최후에 웃는 사람이 승자가 아니라, 자주 웃는 사람이 승자더라.’
이를 위해 자주 감동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참는 사람은 감동도 참게 됩니다.
그래서 아무리 재미있는 상황에서도 뚱한 표정을 짓습니다.
어쩌면 감정이 메말라 있는 상태가 아닐까요?
참다 보니 자기감정을 참는 것도 습관이 되었고, 이로써 어떤 상황에서도 감동을 잘 받지 못하게 됩니다.
스트레스만 자기 안에 쌓이는 것입니다.
통증 완화에 도움을 주는 엔도르핀은 모르핀의 약 48배 효과가 있고, ‘감동 호르몬’이라 하는 다이돌핀(didorphin)은 모르핀의 약 200배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미국의 인디애나주 메모리얼 병원 연구팀에 의하면, 15초 동안 하하호호 웃기만 해도 엔도르핀이 증가해 수명이 이틀 정도 연장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더 효과가 큰 다이돌핀의 효과는 어떠할까요?
따라서 이 효과를 위해 일상의 작은 순간에서도 감동하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면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우리 각자는 하느님의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몸은 기도의 집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자리는 보이지 않고 세상의 자리만이 가득합니다.
하느님의 자리가 강도들의 소굴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평화가 있을 수 있을까요?
하느님의 자리가 없으니 하느님의 일을 통해 작은 순간에서도 감동하고 깨달음을 얻을 수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서로 공감하고 감동받을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내 마음에 하느님의 자리를 만들어 기도의 집을 만들어야 합니다.
세상의 스트레스를 날려 버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평화와 위로를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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