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운에세이] 팔질 & 회춘
회춘(回春)이란 봄이 다시 돌아옴이요, 도로 젊어짐이요,
앓던 병이 낫고 건강이 회복됨이다.
병이야 났다가도 회복되기 마련이지만, 나이 든 사람이 도로 젊어진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희망 사항이요 바람일 뿐이다. 귀신 씨나락 까 먹는 소리다.
더구나 팔순 노옹에게 회춘이라, 이게 과연 가당한 일이기나 하랴.
그러나 그게 아니다.
믿기지 않을 만큼 신통한 회춘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음도
부인할 수 만은 없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우리 주변을 보라.
그런 입지전적(立志傳的) 인물들을 얼마든지 목격할 수 있다.
전수(全數) 조사라도 해보면 어떨까.
하도 많아 굳이 그들의 이름을 거명할 필요 조차도 없다.
필자야 그런 유명인 반열에 들지는 못할지언정 노익장이며 회춘을 말하라면
누구에게도 뒤질 생각이 없다.
우스갯소리로 ‘제수 없으면 나도 백세를 살지도 모르겠다.’
농담 속 진담이다.
바야흐로 우리는 백세시대를 살고 있으며 삶의 행복을 마음껏 누리고 있다.
여든 살을 팔순(八旬) 혹은 팔질(八耋)이라 한다.
팔순은 여덟이 열 번이니 팔십이다.
옛날 사람들이 한 묶음으로 싸서(勹) 계산하던 날(日)의 단위가 순(旬)이다.
열흘, 열 번, 십 년을 뜻하는 말이다.
그래서 한 달 30일을 상·중·하순으로 편리하게 나누어도 말한다.
팔질의 질(耋)은 ‘늙은이’ 혹은 ‘팔십 노인’을 뜻하는 말이다.
‘늙을 노(老)’ + ‘이를 지(至)’다.
‘지(至)’는 하늘을 날던 새가 땅(土)에 내려앉은 형상이다. 팔질이면 늙을 만큼 늙었다.
새가 공중에서 내려와 땅에 닿았으니 더 갈 곳이 없다.
끝에 이르렀다, 올 데까지 왔다는 의미다.
지금 우리는 좋은 세상 만나 그야말로 명실 공히 백세시대를 살고 있다.
예전엔 팔십 이상 산 사람은 거의 없었나 보다.
올해가 2022년 임인(壬寅)년이다. 해가 바뀌었으니 필자 나이 여든 넷이다.
장수의 대명사 삼천갑자(三千甲子) 동방삭(東方朔)의 실제 나이가 고작 61세였다고 하니,
옛날 같으면 필자는 한참 상노인이다.
그런데도 수복강녕(壽福康寧)을 누리며 건재(健在)하지 않는가.
어떻게 살고 있길래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고?
필자는 여행 마니아(mania)다.
이 나이에도 여행을 즐기는 삶이라면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지 않을까.
방랑벽이 남다르다. 역마살이 끼어도 단단히 끼었다. 집에 가만 박혀 있지 못한다.
자꾸 나돌아 다녀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살아온 팔십 한 평생을 봐도 그렇다.
필자는 대구 사람이다. 대구에서 대학을 나오고 그 곳에서 정년퇴직을 했다.
그런데 지금은 인천 국제도시, 송도신도시에 10년 넘게 살고 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가장 뜬다는 곳이란다.
역순으로 말하면 안양, 용인 수지, 분당 정자, 멀리로는 LA 샌디에고, 뉴욕 퀸즈 포리스트 힐즈,
업스테이트 뉴욕 하이드 파크 어디 안 살아본 데가 없다.
짧게는 수 개월, 길게는 수 년씩은 살아 본 곳들이다.
이사 다니면서 길바닥에 깐 돈만 해도 상당한 금액이다. 가진 게 적어 이사가 쉬웠다.
쥔 게 많지 않다. 손이 가벼워 좋다. 소유물이 많으면 그것들에 마음이 빼앗기기 마련이다.
필자는 마음이 홀가분해서 행복하다. 그래도 입고 먹고 사는 데는 어렵지 않다.
노년의 행복은 자유 플러스 건강이다. 건강만 있으면 세상이 다 내것이다.
손톱 밑에 가시만 박혀도 아픈데, 지금은 다행히 어느 부위에도 이상이 없다.
표정이 말을 하고 걸음걸이에서도 드러난다. 남이 보면 다 안다.
지금의 이 컨디션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알 수 없다. 나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을 것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건강도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니다.
현재의 건강이 필자 유일의 자랑거리다.
아서라, ‘자랑 끝에 쉬 슨다’ 했다. 필자는 이 말을 명심하고 산다.
너무 자랑하면 그 끝에는 반드시 말썽이나 화가 생김을 이르는 경계의 말이다.
필자는 여행광이다. 원근 불문이요, 계절에 구애되지 않는다. 변덕이 발동하면 행동으로 옮긴다.
혼자만의 자유여행이다. 필자의 애창곡 ‘백년설의 나그네 설움’이 필자의 정서에 맞을까.
‘오늘도 걷는다 마는 정처없는 이 발길’이다. 그러나 ‘지나 온 자욱마다 눈물이 고인 건 아니다.
설렘과 기쁨과 행복이 고였다.
오래 전 이야기다.
2006년인가 필자가 정년퇴임을 하고 곧장 미국으로 날아가
한 때 뉴욕 포리스트 힐즈에 머문 적이 있다.
그때 KBS 진품명품 팀이 뉴욕에 와서 동포사회 현지로케이션 촬영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
마침 그날 필자도 방청객으로 갔다가 막간의 노래자랑 시간이 있어
거기에 깜짝 출연하여 불렀던 노래가 ’나그네 설움’이었다.
당시 필자의 TV 출연 장면을 보았다는 소식을 고국의 친지들로부터 들은 바도 있었다.
여행은 영하 10도의 혹한이라도 좋고 눈이 내려도 개의치 않는다.
걸림돌이 하나 있다. 그게 신종 코로나가 아니고 미세먼지다.
요즘은 자고 나면 폰을 열어 제일 먼저 습관적으로 책크하는 게 미세먼지다.
필자의 유랑은 계절도 없다. 산도 좋고 바다도 좋다.
좀 과장을 하면 현대판 김삿갓이요 홍길동이다. 오늘은 동에 번쩍 내일은 서에 번쩍이다.
올해 첫날 일출은 부산 해운대에서 맞았다. 열흘 뒤에는 울산을 갔다.
태화강역에서 동대구까지의 무궁화 열차 여행이 좋았다. 주마간산(走馬看山)도 안 된다 했다.
KTX는 빠른 이동 수단이지 여행에는 제격이 아니다. 무궁화 열차 여행을 권장하는 바이다.
이 모두를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 팔질의 건강이요 회춘이다.
내 나이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 나 자신도 모르겠다. 내가 흘려보낸 세월이 아니다.
노력하여 얻은 것도 아니다. 살면서 그냥 받은 선물이다.
선물이 영어로 ‘present’이다.
pre-는 전, 앞, 미리 등의 뜻을 지닌 접두사다. pre + sent의 sent는 send의 변형이다.
Present는 미리 보내진 선물이요 현재다. 현재가 곧 선물이다. 현재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다.
현재가 없으면 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는 역사(history)요, 미래는 미스터리(mystery)요 불가사의(不可思議)다.
현재라는 선물을 즐길 자유가 내게 주어져 있다.
필자는 목하 회춘으로 제2의 청춘을 살고 있다.
일찍이 미국의 정치가요 독립운동가인 페트릭 헨리(Patrick Henry)는
“나에게 자유를 달라, 아니면 죽음을 달라(Give me liberty, or give me death!) 했다.
자유는 소중하다. 목숨보다 더 귀한 건 사랑이 아니라 자유다.
그런데 우리 자유가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이 요즘의 세태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
목숨을 걸고 자유를 지켜내야 한다. 자유 빼앗기면 노예가 된다. 노예로 사느니 죽는 게 낫다.
수즉다욕(壽則多辱)의 의미를 다시 해석해야 할 세상이 됐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잊고 살아야 할 것은 나이이고, 유념해야 할 것은 노년의 건강이다.
나이 이야기가 나온 김에 언젠가 유튜브에서 한두번 들은 적이 있는 나이 타령 노래가 생각난다.
얼핏 들었는데 끌리는 데가 있는 노래다. 제목이 “내 나이 황혼이 오면”이다.
가사도 가사려니와 곡이 너무 구슬프고 애절하여 가슴에 와 닿는다.
스마트폰으로 검색하면 쉽게 찾을 수 있다. 한 번 들어볼 만한 노래다.
여자 가수의 이름은 모르겠다.
< 내 나이 황혼이 오면 >
내 나이 황혼이 오면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인생의 참맛을 다 보고 살아 온 지금 내 나이가 제일 좋더라
살기 바빠 가는 세월 모르고 살아 왔는데
내 나이 언제 벌써 여기까지 왔는지 언제 벌써 여기까지 왔는지
내 나이 황혼이 오면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인생의 참맛을 다 보고 살아 온 지금 내 나이가 제일 좋더라
가는 세월 막을 수 없고 지는 해 잡을 수 없어
내 나이 언제 벌써 여기까지 왔는지 언제 벌써 여기까지 왔는지
살기 바빠 가는 세월 모르고 살아왔는데
내 나이 언제 벌써 여기까지 왔는지
언제 벌써 여기까지 왔는지 언제 벌써 여기까지 왔는지
곱게 나이 먹어 가야 한다는 게 가장 큰 바람이다.
얼마나 아쉽고 한이 맺혔으면 마지막에 “언제 벌써 여기까지 왔는지”를
연거푸 세 번이나 하소연 하듯 반복하고 있을까.
남은 세월 곱게 예쁘게 단정하게 차려 입고 예쁜 마음으로
존경 받는 품위 있는 어르신으로 살아 볼까요~~~ ㅎㅎㅎㅎ
비슷한 정서가 담긴 최희준의 노래 < 길 > 가사도 여기 옮겨 본다.
팔질 노옹 필자에게 이 노래가 어쩜 이렇게도 가슴에 와 닿을까.
자갈밭 같은 내 가슴을 촉촉이 적셔준다.
최희준의 육성으로 노래를 들어보면 감동이 사뭇 크다.
“세월 따라 걸어온 길 멀지는 않았어도
돌아보니 자국마다 사연도 많았다오
진달래 피던 길에 첫사랑 불태웠고
지난여름 그 사랑엔 궂은비 내렸다오
종달새 노래 따라 한세월 흘러가고
뭉게구름 쳐다보며 한 시절 보냈다오
잃어버린 지난세월 그래도 후회는 없다
겨울로 간 저 길에는 흰 눈이 내리겠지—”
나잇값이란 말이 있다. 나이가 들면 나잇값을 해야 한다.
해 놓은 일이 있어야 함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렇지가 못한 게 늘 아쉽다. 후회된다. 속이 찜찜하다.
주자십회훈(朱子十悔訓)을 생각한다.
‘소불근학노후회(少不勤學老後悔)’요, 춘불경종추후회(春不耕種秋後悔)’다.
젊어 부지런히 배우지 않으면 늙어서 뉘우친다.
봄에 밭 갈고 씨 뿌리지 않으면, 가을이 되어 추수할 것이 없어 후회하게 된다.
젊음은 오래 가지 않고 배우기는 어렵다.
젊을 때 부지런히 배워야 한다는 ‘소년이로 학난성(少年易老學難成)’과 같은 말이다.
이럴 땐 편리한 게 ‘자기 정당화’라는 요술이다.
사람은 저마다 변명의 귀재(鬼才)들이다. 세상에 말 못해 죽은 놈은 없다.
속된 말, 가시내가 아이를 낳고도 할 말이 있다 했거늘.
제 잘난 멋에 사는 존재가 사람이다.
대통령 하겠다는 인간 막나니가 뱉은 동영상의 쌍욕을 들어보았는가.
말세가 따로 없다. 우리나라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
정신 차리자.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했다.
공이 있는 사람에게는 상을 주고, 죄가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벌을 준다는 뜻으로,
상벌을 공정하고 엄중히 함을 이르는 말, 신상필벌(信賞必罰)이 있다.
언감생심(焉敢生心) 어찌 상이야 바라겠냐만,
그래도 벌은 피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겠다.
후회 없는 인생은 없으리라.
아무리 성실히 살았다 해도 마지막 성적표를 받아 들 때면 후회는 있기 마련이다.
품위 있는 유머로 자신의 죽음을 장식하는 사람도 드물지만 있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렇게 될 줄 알았지”.
영국의 극작가 겸 소설가이자 비평가로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 1859~1950)가 그의 묘비명(墓碑銘)으로 남긴 말이다.
요즘이야 묘비 세울 거창한 무덤도 없다만, 필자의 종말도 그 꼴이 되고 말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회춘,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민태원은 그의 수필 <청춘예찬>에서,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로 글을 시작하고 있다.
필자는 오늘 청춘이 아니라 팔질의 나이에 제2의 청춘, 회춘을 노래하고 싶다.
주책이라 해도 좋다.
회춘 없이는 아름다운 노년도 품위도 사랑도 바랄 수 없다.
행복은 결국 건강에 있다. (Happiness lies, first of all, in health.)
Jan. 21. 2022
仁松齋/草雲
(옮긴 글)
가수 윤정아 언제 벌써-가요가 좋다
최희준 :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