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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안전한 감정
눈물을 모르는 눈으로는 진리를 보지 못한다.
-쇼펜하우어
‘느낌feeling’이란 단어는 ‘접촉’을 뜻하는 인도유럽어에서 나온 말입니다. ‘느낀다’는 것은 자연, 사람들, 일어나는 사건들, 그리고 <인생조건>들과 접촉하고, 그것들에 의해 움직이고, 변화하는 것입니다. 느끼고 변화하는 능력이 인생의 흐름과 발전을 만듭니다.
받아들이며 살아갈 때 우리는 평정심을 키울 수 있습니다. 평정이란 절대로 동요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평정은 감정이 불러일으킨 변화와 움직임을 느끼고 나서 다시 편안한 상태로 돌아가는 능력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누구나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들에 영향을 받습니다. 다른 사람의 행동이나 일어난 일에 무감각하거나 태연하지 않습니다. 깊게 느끼고, 자신들이 느끼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일어난 일들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우리의 인격과 자비심이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어떤 일에도 부정적으로 인생을 침해받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인생의 압박감에 의해 밀리고 짓눌리지 않고, 치우침 없이 깨어있는 마음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다음에 무엇을 해야 좋을지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일어난 일들에 대한 우리의 느낌과 반응을 바라본다는 것은 그것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황폐해지지 않는 것, 그것들 때문에 무언가를 그만두거나 무언가를 억지로 하도록 내몰리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감정을 억누르거나 감정에 의해 짓눌리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완전히 허락해서 그것이 우리를 거쳐 지나가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건들에 단순히 영향 받을 때,
⚘ 자신의 안전한 토대 위에서 움직이고 흔들립니다.
⚘ 용기있게 경험하고 동시에 건강한 도움과 후원을 찾습니다.
⚘ 잠과 식욕이 큰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 안 좋다고 느끼더라도 상황에 적합한 정도로 느낍니다.
⚘ 육체적인 건강을 유지합니다.
사건들이 침해할 때,
⚘ 감정에 압도당해 불안정해지고 황폐해집니다.
⚘ 현실을 피하기 위해 무언가 중독되기 쉬운 즉각적인 쾌락을 찾습니다.
⚘ 잠과 식욕이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 완전히 막다른 생각에 빠지거나 충격을 계속해서 느낍니다.
⚘ 몸부림치며 절망에 빠집니다.
⚘ 육체적 건강을 해칩니다.
자연이 준 선물
감정은 인생이 주는 충격을 감당하기 위해 우리가 타고난 건강한 몸의 반응입니다. 감정은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해결책을 만들어내고, 유익한 대안을 고안해내게끔 자극받을 수 있도록 자연이 우리에게 준 건강한 도구입니다. 자연은 우리가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우리로 하여금 느끼게 만든 것입니다.
목석같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 발전이고 성숙입니다. 피노키오가 되고 싶어 했던 것도 눈물을 흘리고, 맥박이 뛰고, 미소 지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상실에 슬퍼하고, 불의에 분노하며, 위험에 겁을 먹고, 행운에 기뻐할 줄 아는 것이 사람입니다. 우리는 원래 그렇게 타고났습니다.
<인생 조건>에 직면하게 되면 ‘이제 어떻게 될까?’하고 생각하기 전에 우선 자신의 감정을 먼저 허용해야 합니다. 상실을 겪으면 앞날에 대해 생각하고 걱정하기 전에 먼저 애도하고 슬픔을 느끼는 것이 순리입니다. 그 순간에 느끼는 감정보다 앞날의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감정을 억누르거나 무시하는 것은 온전한 경험을 거부하는 것이며, 온전한 경험이 없이는 다가올 앞날의 진정한 성장도 어렵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감정은 우리가 어떤 철학적인 깨달음이나, 종교적인 위안, 고무적인 금언으로 가기 전에 정차해야 하는 역입니다. 그 역에는 우리의 본성, 타고난 열정, 건강함이 있습니다. 금욕적인 가치를 강조하는 권위주의적인 전통들과 절제된 에티켓만을 강조하는 일부 문화, 그리고 남자는 강해야 한다는 식의 성 모델에 대한 그릇된 인식은 우리의 이런 건강하고 본능적인 반응을 억누르거나 무디게 만듭니다. 그런 접근은 우리의 정신 건강뿐만 아니라 인간다움을 위협합니다. 우리는 덜 인간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인간적이 됨으로써 성장하는 것입니다.
<인생조건>들 하나하나는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슬퍼하는 것은 상실에 대한 반응입니다. 상실을 만나서 그것을 받아들이고 적응하는 과정이 슬픔입니다. 어떤 감정을 충분히 받아들이고 드러내야 그 감정을 완전히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감정을 기꺼이 삼키고 소화시켜서 그것에서 얻을 수 있는 영양분을 섭취해야만 깨끗하게 배설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미 뱃속에 들어있는 것을 거부하거나 인정하지 않으면 탈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은 친밀해지는 가장 빠른 방법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상처받기 쉽고, 연약해질 때에야 다른 사람들의 동정심도 생길 수 있습니다. 다른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 감정을 나누고 더 친밀해지고자 감정을 드러내고 그렇게 하여 타인의 연민을 받게 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며 사람과 사람을 진실로 묶어주는 행동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가장 가까운 몇몇 사람들 앞에서만 그렇게 하거나, 혹은 누구 앞에서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조금이라도 거리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더 많은 사람과 연민으로 묶이려고 하기보다는, 위장된 모습으로라도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하지만 정말로 강하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잘못된 비판에 신경쓰지 않고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무엇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 느낌이 스스로 자신은 어떤 감정이라고 이름을 밝히지는 않습니다. 감정을 추상화시키고 이성적으로만 처리하려는 태도를 버리고 이름 모를 감정들을 조건 없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감정이 방해받지 않고 우리 안에서 그 나름대로 과정을 따라 일어나게 해야 합니다. 우리 몸은 그렇게 하는 방법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면과 편견을 벗어버리고 그저 우리 몸이 느끼고 표출하고 싶어 하는 대로 허용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감정은 원래 안전하다
우리는 안전하다고 느낄 때 감정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감정을 느끼고 드러내고 싶을 때 안전한 관계나 장소를 찾습니다. 가장 편한 사람에게 가서 울거나 화를 풉니다. 이것은 방어 메커니즘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원초적 감정 네 가지, 즉 슬픔, 화, 무서움, 기쁨은 사실 ‘안전한 ’것들이며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의 기저가 되는 기본적인 감정들입니다.
감정은 <인생 조건>들을 감당하는 데 필요한 타고난 기술입니다. <인생 조건>들은 이 네 가지 기본 감정들을 불러일으킵니다. 변화와 죽음은 슬픔을 불러일으킵니다. 변화와 죽음은 슬픔을 겪음으로써 처리되고 받아들여집니다. 일이 늘 계획대로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은 무서움을 일으킵니다. 위협적인 사건들이 닥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는 사실은 우리를 화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이 화는 불공정함에 대한 불쾌감입니다. 이 화는 정의를 가져다주는 행동을 낳으며 우리가 용감한 길로 나아가게 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고통이 인생의 일부라는 사실, 사람들이 늘 충실하지는 않다는 사실은 슬픔을 불러일으키고, 치유책을 찾게 합니다.
우리는 모든 감정을 경험하고 표현할 충분한 잠재력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능력을 제대로 작동하고 사용하려면 어린 시절부터 안전하고 편안하게 감정을 느끼고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즉, 감정이 불안한 것이 아니라 안전한 것이라고 인식되어야 합니다. 어린 시절에 부모가 우리의 이런 감정들을 공감해주고,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이런 감정들에 공감해줄 때 우리의 감정은 안전한 것이 됩니다.
공감한다는 것은 감정을 다섯 가지 A(배려, 수용, 감사, 애정, 허용)로 맞이해 주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감정을 보살펴주고 이해해 주는 것입니다. 기본 감정 네 가지 하나하나는 어린 시절에 타인으로부터의 공감을 통해 우리 안에 안전하게 자리 잡아서, 커서도 뜻있고 건강한 방법으로 작동하게 됩니다. 감정이라는 모듈이 어린 시절에 제대로 설치되지 않으면 우리 몸-영혼-정신의 조절장치가 고장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에 우리는 감정들을 드러내는 것이 위험하다고 배웠을 수도 있습니다. 이미 느낀 감정을 금지당하거나 그것 때문에 조롱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우는 것을 감당할 수 없었던 부모가 우리를 놀리거나. “울 것 없어.”라고 말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이제 우리는 성인이 되어서도 슬픔을 드러내지 않고 남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입술을 꼭 깨물 수도 있습니다.
어릴 때 우리는 보살펴주는 사람과의 연결에 대한 필요성을 본능적으로 느낍니다. 이 필요성은 평생 지속됩니다. 다른 사람, 특히 부모로부터의 다섯 가지 A(배려, 수용, 감사, 애정, 허용)가 이 연결을 우리에게 가장 잘 보여줍니다. 연결이 잠시 끊어지는 것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을 고치는 것은 D.W. 위니콧(영국의 심리분석가. 그에 따르면, 어머니가 아이의 원형적이고 파괴적인 행동을 견디며 그 재능과 개성을 인정할 때 아이는 나르시스의 단계에서 벗어나 세상 속에서 다른 주체들과 더불어 독립된 인격으로 성숙할 수 있다.-역자 주)이 말한 ‘실수를 고쳐주는 분위기’속에서 언제나 가능합니다. 우리의 실수가 친절히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확신할 때 감정들은 안전해집니다.
성장하면서 친밀한 관계 속에서 우리의 감정이 잘 받아들여졌을 때 우리는 슬플 때 울고, 화났을 때 소리 지르고, 두려울 때 떨고, 기쁠 때 웃어도 안전하다고 느끼게 되고, 그것을 통해 더욱 편안한 마음과 친밀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감정들은 정당화되고, 존중받고, 환영받습니다. 우리의 감정들은 경멸받거나 창피를 당하거나 위협받지 않습니다. 금지되거나, 심판받지 않고, 조롱당하거나 처벌받지 않습니다. 누구도 우리에게 어떻게 느껴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우리가 느끼는 것을 느끼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감정에 공감해주는 사람들 속에서 성장한 사람은 상대에게 더욱 쉽게 감정을 표현하고, 상대의 감정도 더욱 쉽게 받아들입니다. 친밀함이란 편하게 감정을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공감입니다.
우리가 다섯 가지 A가 만든 사랑 안에서 감정을 느낄 때, 우리는 당황하거나 억제함이 없이 감정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충분히 눈물 흘리면서도 비참하다고 느끼지 않고 슬픔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비폭력적이면서도 분명하게 화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부끄러워하거나 초라하다고 느끼지 않고 무서움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자유분방하게 기쁨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5장에서 말했던 다섯 번째 인생조건처럼, 사람들이 언제나 한결같이 우리가 원하는 만큼 우리의 감정에 공감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만큼 다른 사람들이 주지 않을 때 결핍과 부족이 생길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때 성인으로서 우리가 취해야 하는 태도에는 두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처음 단계는 현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구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대리만족을 얻고자 무언가 다른 것으로 옮겨가지 않고 자기 자신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자신과 함께 있다는 것은 지금 있는 그 결핍과 부족의 상태에 남아 있는다는 것을 뜻하고, 다른 부정적인 방법으로 만족을 대체하려 하거나 그 상황을 피하려고 하지 않고 그저 필요를 경험하는 것을 뜻합니다.
원하는 것을 주지 않는 상대에게 부정적인 방법으로 앙갚음하거나, 술을 마시러 가거나, 텔레비전을 켜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 상황에 대해 이성적으로 이해하려고 시도하지 않고 자신이 지금 느끼는 것을 느끼도록 허락합니다. 그러면 역설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스스로 감정을 허락하면 누군가의 도움 없이도 그 감정은 생각했던 것만큼 힘들지 않으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해소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감정과 함께 머물러 있는 것은 다른 누군가가 따뜻하게 붙들어주는 것과 마찬가지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렇듯 현실을 조건 없이 받아들이는 태도는 만족에 이르는 방법을 확대시켜 줍니다.
오늘 하루도 저희들과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첫댓글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_(())_
눈물을 흘려야 진리를 볼 수 있다는 글 공감이 갑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dalma님 감사합니다 좋은 글 읽습니다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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