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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요한 묵시록의 말씀 14,1-3.4ㄴ-5
나 요한이
1 보니 어린양이 시온산 위에 서 계셨습니다.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 명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2 그리고 큰 물 소리 같기도 하고 요란한 천둥소리 같기도 한 목소리가 하늘에서 울려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내가 들은 그 목소리는 또 수금을 타며 노래하는 이들의 목소리 같았습니다.
3 그들은 어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 노래는 땅으로부터 속량된 십사만 사천 명 말고는 아무도 배울 수 없었습니다.
4 그들은 어린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어린양을 위한 맏물로 사람들 가운데에서 속량되었습니다.
5 그들의 입에서는 거짓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흠 없는 사람들입니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21,1-4
그때에
1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
2 그러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3 이르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나는 오늘 무엇을 봉헌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신심 깊은 가난한 과부를 만납니다.
그는 비록 렙톤 두 닢을 예물로 바쳤지만, 그것은 자신이 가진 전부였습니다.
그것은 아들과 함께 먹고 죽을 작정으로 마지막 빵을 만들면서도 엘리야에게 바쳤던 사렙다의 과부(1열왕 17,12)처럼.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일이었습니다.
이토록 전부를 예물로 바침은 주님께 대한 전적인 내맡김이요 믿음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진정한 마음을 바치는 표현이요, 자신보다 주님을 앞세우는 표시였습니다.
마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여관으로 데려가서 여관 주인에게 그 사람을 돌봐달라고 내놓은 그 값진 두 데나리온과 같을 것입니다(루카 10,35).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많은 양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마음으로 바치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중히 여기고, 무엇을 앞세워야하는 지를 말해줍니다.
곧 봉헌은 자신의 계산에 따라 다 쓰고 남은 조각을 ‘나중에’ 바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먼저’ 바치는 믿음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녀는 과부의 딱한 처지인데도 불구하고, 곧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진 전부를 ‘맨 먼저’ 앞세워 바쳤던 것입니다.
대체 무엇이 이토록 그녀로 하여금 그의 전부를 바치게 하였을까?
그것은 소중하고 귀한 분을 만난 까닭이 아닐까요?
전부를 건네주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주군이신 분을 만난 까닭이 아닐까요?
바로 그러한 분을 만나면 자신의 전부를 바치지 않고는 못 배겨나기 때문이 아닐까요?
사실 우리는 그 소중하고 귀한 분을 이미 만났습니다.
그러니 여기 이 자리에 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을 향한 사랑이 더 깊어 가는지, 혹은 퇴색되거나 변하지는 않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전부를 바쳐 그분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가난하면서도 전 재산을 봉헌한 이 과부에 대해서 “교회를 나타내는 신비로운 표상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전부를 산 제물로 바쳐야 할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로마 12,1)
오늘 저는 이 가난한 과부의 봉헌을 통하여 나의 삶이 무엇을 우선하고 무엇을 앞세우는 삶인지를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하여 진정 무엇을 바치고 있는지, 혹은 전부를 바치고 있는지를 봅니다.
나는 오늘 무엇을 봉헌할 수 있을까요?
대체 무엇을 봉헌해야 할까요?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궁핍한 가운데에서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루카 21,4)
주님!
온 마음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섬기지 않았고, 온 시간과 열정을 다하여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당신보다 제 자신을 앞세우며 살아왔습니다.
기도하면서도 마음을 다하지 않았고, 먼저 바치기보다 나중에 바쳤습니다.
당신은 저의 전부이오니, 저의 전부를 바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헌금이 아니라 봉헌, 얼마가 아니라 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루카 21,4)
'얼마와 다'.
'얼마씩 넣는 자와 다 넣는 자'.
오늘 주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봉헌이 부자의 봉헌보다 많다고 하십니다.
많은 것이 많은 것이 아니고, 적은 것이 적은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니, 많고 적음과 관련한 하느님의 기준이 우리와 다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실 100억 가진 사람에게 100만 원은 많은 것이 아니고 껌값이잖아요?
그러나 없는 사람, 예를 들어 1억밖에 없는 사람에게 100만 원은 많은 거지요.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며 경험하는 것은 부자가 더 쩨쩨하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선 펑펑 쓰면서도 다른 사람에겐 조금 주는 것도 벌벌 떱니다.
돈은 많은데 사랑이 없기 때문인데 이런 면에서 부자가 더 불쌍하고 불행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더 불쌍하고 불행한 이유는 이런 자기가 불쌍하고 불행하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부가 주는 만족보다 사랑이 주는 만족이 더 큼을 모릅니다.
사랑이 주는 만족을 체험한 적 없고 모르니 참 불행합니다.
그리고 돈이 주는 만족은 뺏길 수 있습니다.
돈을 탐내는 사람이 많으니 뺏길 수 있지요.
그러나 사랑이 주는 만족은 뺏거나 뺏기지 않습니다.
사랑은 돈처럼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기에 뺏거나 뺏길 수 없습니다.
아무튼 오늘 복음의 과부는 헌금이 아니라 봉헌을 한 것이고, 어마어마한 헌금이 아니라 얼마 안 되지만 다 봉헌한 것이며, 의기양양한 헌금이 아니라 겸손한 봉헌입니다.
그리고 겸손한 봉헌일 뿐 아니라 앞서 봤듯이 사랑의 봉헌입니다.
얼마 안 되기에 겸손하게 봉헌했지만, '다 봉헌했기에' 사랑의 봉헌입니다.
그리고 그 봉헌은 하느님의 봉헌을 닮았습니다.
왜냐면 주님께서 먼저 당신 자신 전부를 우리를 위해 내어주셨는데 걷어찬 부자와 달리 과부는 그 사랑을 고맙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며, 그래서 당신 자신 전부를 내어주신 그 사랑을 받아 되돌려 드린 것입니다.
이런 상호 봉헌을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아름답게 노래합니다.
“그분 앞에 여러분의 마음을 쏟으십시오.
그분이 여러분을 높여 주시도록 여러분도 겸손해지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당신 자신 전부를 바치시는 분이 여러분 전부를 받으실 수 있도록, 여러분의 것 그 아무것도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남겨 두지 마십시오.”
과부의 헌금에 대한 오늘 나눔을 요약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헌금이 아니라 봉헌이며, 얼마가 아니라 다이고, 겸손+사랑의 봉헌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부분은 전체보다 많을 수 없다>
오래전 일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자!’고 말하면서도 비교하였습니다.
본당 사목을 하면서 현 임지에서 최선을 다할 생각은 안 하고 전 임지와 견주었습니다.
추수 감사미사를 봉헌하면서 본당 규모가 큰 것에 비하면 감사예물과 곡물이 적게 봉헌되었다고 생각하며 서운해한 적도 있습니다.
하느님께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준비하지 못한 자신은 생각하지 않고, 물질에 마음을 빼앗긴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빈곤한 과부를 칭찬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생활비 전체를 예물로 바쳤기 때문입니다.
그에 반해 부자들은 풍족한 데서 일부만을 바쳤습니다.
부자가 바친 예물은 가난한 이의 것에 비하면 훨씬 많은 금액이었지만, 예수님은 그보다 가난한 과부의 마음을 헤아리셨습니다.
아무리 적은 돈이라도 인생 자체가 담긴 것이라면 가장 많은 돈이 됩니다.
가장 적은 것이라도 보아주시고 그 가치를 알아주시는 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먼 훗날 잘 되면 크게 돕겠다고 말하는 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는 지금 할 수 있는 만큼 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액수의 많고 적음보다 정성의 마음이 더 중합니다.
우리는 속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때는 건축 기금을 모으면서 나름대로 모금 액수를 정하고 아무개는 얼마, 아무개는 이 정도는 해 주겠지! 하며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 후 그들을 바라보는 제 마음이 힘이 들었습니다.
각자에게는 남모르는 사정이 있을 수 있으니 정성을 보고 마음을 보아야 하는데, 봉헌금의 많고 적음으로 사람을 보았습니다.
저도 별수 없이 물질에 휘둘렸습니다.
그 후로 저는 더 큰 믿음의 성장을 위해 노력하고, 물질의 봉헌 이야기를 줄이자고 다짐을 했습니다.
억지로 한다면 아무리 많은 액수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자기를 선전하고 과시하며 위신과 체면을 생각하는 헌금을 하느님께서는 결코 기뻐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이 크면 모두가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요 주님의 것이기에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감사의 마음이 솟아날 것입니다.
속마음을 헤아리시는 주님을 만나시길 희망합니다.
물질보다 주님을 선택하는 지혜로 모든 것을 차지하시길 기도합니다.
양적으로 더 많은 것을 추구하는 데 익숙한 부끄러움에서 벗어나길 바랍니다.
많고 적음의 차이는 무엇을 중심으로 바라보는가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부분은 부분입니다.
전체보다 클 수는 없습니다.
모두는 부분보다 큽니다.
먼저 하느님께 바칠 것을 떼어놓고 그다음 나를 위한 계획을 세우면 어떨지요?
물질뿐 아니라 시간이나 공간, 재능, 여행, 모두를 말입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큰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인색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봉헌은 고통스러워야 효과가 있다>
오늘 복음은 과부의 헌금입니다.
예수님은 액수로는 얼마 안 되지만 전 재산을 바친 과부를 많은 재산 가운데 일부를 봉헌하는 부자들과 비교하십니다.
봉헌의 더 큰 효과를 누가 더 받을까요?
봉헌의 효과는 무엇일까요?
사랑을 실천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결국 심판의 기준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1976년은 중국 전체가 먹을 것이 없어서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당시 중국 탕산시에는 인구 70만 명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지진이 일어나 23초 만에 24만2천 명이 죽었습니다.
가히 저주라 할 만한 대재앙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있었던 일본 대사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고 증언했습니다.
그 참사 속에서도 남의 물건을 훔치는 사람이 없었고 남을 해치는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위기에 처한 이웃의 생명과 재물을 구하러 서로 불 속에 뛰어들었으며, 자신이 먹기에도 부족한 음식을 서로 나누어 먹더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강제된 행위가 아니라 자유의사에 의한 행위였다는 데서 외국인 목격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같은 해 세계 최고의 부를 자랑하는 미국 뉴욕시에서 1977년 12시간의 정전사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국 신문, 방송에서는 그 상태를 ‘연옥’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전등이 꺼져서 자기 얼굴이 타인에 의해서 식별되지 않게 되었다는 그 이유만으로 그들은 남의 재산을 파괴하고 약탈하고 방화하고 강간하고 서로 찌르고 죽였습니다.
불만 들어오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도시를 지옥으로 만들어버렸던 것입니다.
봉헌은 나의 것 일부를 주님께 봉헌하며 나의 모든 것이 주님 것임을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왜 탕산시의 사람들은 이웃을 돌볼 줄 알았고 뉴욕 시민들은 남의 것을 약탈했을까요?
이는 봉헌이란 것이 자신의 마음을 먼저 아프게 만들지 못하면 이웃에게 시선을 돌릴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고대 일본의 전설 중 하나입니다.
이 전설은 산골 마을에 살던 한 여인이 두 아이가 있었는데, 한 명은 건강하고 잘생긴 아이였고, 다른 한 명은 장애가 있는 아이였습니다.
어느 날, 마을의 관습에 따라 강에 제물을 바치러 가야 했는데, 사람들은 여인이 장애가 있는 아이를 바칠 것으로 생각했지만, 강가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건강하고 잘생긴 아이를 제물로 바치고, 장애가 있는 아이와 함께 돌아왔다는 내용입니다.
한 선교사가 그 이유를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당신의 종교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저희는 신에게 더 좋은 것을 바쳐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더 좋은 것을 바칠 때는 더 마음이 아픕니다.
더 마음이 아플수록 내가 가진 것의 가치에 대해 더 알게 되고, 그러면 그것조차 가지지 못한 이들에 대한 연민이 커집니다.
이것이 탕산시와 뉴욕의 차이를 만든 것입니다.
봉헌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지 못하면 그 봉헌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증가시키는 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나는 자연인이다’의 MC인 방송인 윤택은 개그맨을 하기 전에 사업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가 망해서 30세가 넘어 8억의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간신히 개그맨으로 데뷔하여 돈을 다 갚았지만, 다시 침체기에 들어섰습니다.
이때 맡게 된 ‘나는 자연인이다’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그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 중의 가장 인상에 남는 분은 재개발로 300억의 돈을 벌었지만, 방탕과 사기로 모든 돈을 잃게 된 자연인이었습니다.
그가 밧줄을 사서 산에 올라 나무에 걸치고 목을 매었을 때 멀리서 석양이 지는 모습을 보고는 너무 예뻐서 하루를 더 살아보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 밧줄을 베고 자고 나서 아침에 뜨는 태양을 보고는 너무 감사해서 그 땅에서 눌러앉게 되었다는 사연입니다.
모든 것을 잃었을 때, 그렇게 마음이 아플 때, 비로소 모든 것은 주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가질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형식적인 봉헌이라면 그 봉헌이 나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조금은 아프더라도 십일조를 봉헌하며 자아를 매번 밟아주고 이웃 사랑을 키워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께서는 우리의 지극히 작은 봉헌과 희생을 기쁘게 받아주십니다>
언젠가 한 무리의 아이들이 자원봉사 활동을 왔을 때가 기억납니다.
사실 아이들이 자원 봉사 활동을 하러 오면,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성가시고 번거로울 때가 있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적절한 봉사 활동거리도 찾아야 되고, 주의 사항을 잘 설명해야 되고, 옆에 붙어서 관리도 해야 하고 복잡합니다.
그래도 아이들이 뭔가 도와보겠다는 그 마음이 가상하고 기특해서 기쁘게 함께 하며, 큰 도움이 되지 않았더라도 잘 했다, 고생했다고 칭찬하며, 아이들이 좋아하는 간식을 함께 나누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우리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시선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우리 인간이 그분을 돕겠다고 나름대로 팔을 걷어붙이고, 열심히 뛰어다닌다 할지라도, 사실 그분 보시기에 웃기는 일이거나 아무 것도 아닐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엄청 대단한 것처럼 여겨질지 모르겠지만, 주님 보시기에 별 도움도 안되고, 오히려 방해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도 우리의 그 작은 마음, 그 작은 봉헌, 그 작은 노력을 눈여겨보시고, 기뻐하십니다.
감격스러워하시고 행복해하실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헌금함에 렙톤 두 닢을 넣은 가난한 과부를 크게 칭찬하십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루카 21, 3-4)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그 렙톤 두 닢은 일생에 도움이 안되는 금액입니다.
렙톤은 당대 통용되던 화폐들 가운데 가장 가치가 낮은 그리스 동전이었습니다.
한 렙톤은 당시 노동자들 하루 품삯의 144분의 1가치를 지닌다고 하니, 우리나라 돈으로 5~600백원 정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한 렙톤으로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겨우 자판기 커피 한잔 뽑아 마실 수 있는 금액입니다.
성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려면 적어도 5만원권이나 10만원, 100만원짜리 수표 정도는 넣어줘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딸랑 동전 두 개를 봉헌한 과부를 칭찬하십니다.
금액의 크기보다는 마음을 보시는 주님, 겉으로 드러나는 것보다는 내면을 중요시 여기시는 주님이심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어 참으로 기쁩니다.
오늘 우리의 보잘것없는 봉헌, 오늘 우리의 아주 작은 희생, 오늘 우리의 티끌만한 봉사도 크게 어여삐 여기시고, 기쁘게 받으시는 주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그분께 드릴 작은 봉헌을 준비해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받고 있으니 사랑하여라.”가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1)
‘사랑’에 관해서 말할 때, 사람들은 흔히 “주는 것이 곧 받는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받았으니 주어라.”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1요한 3,16)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1요한 4,19)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요한 4,9-11)
요한 1서에 있는 이 말들은 사실상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 대한 설명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요한 15,9-10.12-14)
하느님(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그 사랑에 응답하기 위해서 우리도 사랑을 실천합니다.
신앙생활은 주님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생활입니다.
2)
가난한 과부가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모두 봉헌한 일은 하느님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한 일입니다.
그 헌금은 아마도 불우이웃 돕기에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과부의 봉헌에 대해서 묵상할 때,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다는 것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온 마음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한, 그 ‘사랑’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바치는 행위와 온 마음을 다 바치는 사랑은 따로 구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에 따라서, 어떤 사정 때문에, 마음으로는 다 바치고 싶어도 그렇게 못하고 일부만 바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속마음은 그렇지 않은데도 자신의 봉헌을 과시하고 자랑하려고 가진 것을 다 바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습니다.
가지고 있던 돈을 다 넣은 것은 눈에 보이는 겉모습일 뿐인데, 예수님께서는 겉으로 보이는 그 모습이 아니라, 과부의 마음속을 보셨습니다.
3)
예수님 말씀에서,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이라는 말씀은 부자들이 마음을 다 바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온 마음이 아니라, 약간의 선심 정도.
어쩌면 부자들 가운데 일부는 그날의 생활비를 전부 다 바친 경우가 있었을지도 모르고, 있었다면 그 액수는 상당히 큰 액수였을 텐데, 그들은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바쳐도 풍족함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계속 부유하고 풍족한 생활을 할 것입니다.
반대로, ‘궁핍한 가운데에서’ 라는 말씀은 가난한 과부가 온 마음을 다 바쳤음을 나타냅니다.
동전 두 닢을 바친 다음에 그 과부는 가진 것이 하나도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다 바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고, 믿음이 있었으니까 ‘내일 일’을 걱정하지 않았습니다(마태 6,34).
그 믿음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이 모든 것의 출발점입니다.
어떤 체험을 통해서든지 묵상이나 기도를 통해서든지 간에, “하느님께서는 정말로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라고 깨닫고, 감격하고, 기뻐하게 되면, 사람이 변하게 되고, 인생이 바뀌게 됩니다.
4)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마다 다르게 반응하는 것일까?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믿고, 그래서 변화되고, 사랑으로 응답하는 사람도 있고, “나는 한 번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적 없다.” 라고 불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차이가 생기는 것인지?
이 질문에 대해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받고 있는 사랑을 깨달아 알게 된다.” 라고 말하면서 ‘사랑 실천’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상투적인 대답이고, 위선자들의 경우에는 전혀 적용되지 않는 말입니다.
그 차이는 ‘믿음’의 차이일 수도 있고, ‘성품’의 차이일 수도 있고, 부족한 것이 없어서 하느님을 별로 아쉬워하지 않는 ‘풍족함’과 하느님 말고는 의지할 데가 없는 ‘궁핍함’이라는 각 개인의 ‘처지’의 차이일 수도 있습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지상(地上)에서 천상(天上)의 삶을 사는 사람 - 존엄한 품위의 가난한 과부>
“주님의 산으로 오를 이 누구인고?
거룩한 그곳에 서 있을 이 누구인고?
그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헛된 것에 정신을 팔지 않는 이라네.”
(시편 24,3-4ㄱㄴ)
오늘 복음을 묵상하던 중 성녀 아빌라 데레사의 기도문을 바탕한 ‘아무것도 너를’이라는,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성가 내용이 생각났습니다.
“아무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오 하느님은 불변하시니
인내함은 다 이기느니라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그대로 오늘 복음의 가난한 과부의 마음을 대변한다 싶습니다.
마태복음의 진복팔단을 연상케 하는 참행복한 가난한 과부요 자기를 다 비운 주님을 닮은 분입니다.
가진 것이 많아 부자가 아니라 필요한 것이 적은 자가 참으로 부자라 하는데, 하느님만으로 부유한 가난한 과부가 바로 그러합니다.
동병상련, 가난한 과부의 봉헌을 통해 자신의 가난한 비움의 삶을 확인한 주님이심이 분명합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시편 23,1)
시편의 고백처럼, 가난하나 살아있는 참보물 주님을 모시고 사는 내적으로는 부자요 자유로우며 행복한 과부입니다.
참으로 소유욕의 집착에서 벗어난 초연한 사랑, 초연한 자유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참행복 선언 중 다음 둘에 그대로 해당되는 가난한 과부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5,3)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마태5,8)
진복팔단의 참행복 선언은 예수님의 자화상입니다.
예수님의 삶에 고스란히 적용될 정도로 참행복을 사셨던 예수님이셨고, 바로 주님을 닮은 가난한 과부가 그러합니다.
하늘나라가 그의 것이요, 하느님을 볼 것이라 했으니 이보다 더 큰 행복도 부요함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가난한 과부의 내면도 이처럼 풍요로웠을 것입니다.
오늘 읽은 옛 현자 다산의 지혜입니다.
“술에 취하는 것은 하룻밤이면 끝나지만, 뜻에 충실하지 않으면 평생을 취해서 산다.”
가난한 과부처럼 초지일관 봉헌의 삶에 충실하며 주님의 뜻을 따라 맑은 정신으로 살아야 함을 배웁니다.
부자의 내면은 텅빈허무이겠지만 이런 빈자인 가난한 과부의 내면은 텅빈충만의 행복이요 자유로움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인정한 예수님을 감동케한 가난한 과부의 헌금입니다.
이런 봉헌이야말로 주님께 대한 전적 신뢰와 사랑, 그리고 희망의 표현입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얼마씩을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루카 21,3-4)
하느님 사랑으로 가득한 텅빈 충만의 내면임을 봅니다.
놀랍고 반가운 것은 아무도 못보고 모르는 것 같지만 주님은 가난한 과부를 그대로 보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시편 121장입니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그분은,
졸지도 잠들지도 않으시리라.
하느님을 너를 지키시는 분,
네 오른쪽의 그늘이시어라.
낮이며 해도 너를 해치지 못하고,
밤이면 달도 너를 해치지 못하리라.
주께서 너를 지켜 모든 액을 막으시고,
당신이 네 영혼을 지켜주시리라.”
(시편 121,4-7)
바로 이런 가난한 과부의 안식처가 되는 주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오늘 말씀의 배치가 참 절묘합니다.
루카복음이 지상에서의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다뤘다면, 제1독서 묵시록은 ‘어린양이신 파스카의 예수님과 그의 백성’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대로 가난한 과부의 미래의 현실을 보여준다 싶습니다.
새삼 가난한 과부가 궁극의 희망을 둔 것은 천상의 삶이었음을 봅니다.
말 그대로 지상에서 천상의 삶을 산, 존엄한 품위의 가난한 과부입니다.
어린양과 함게 서있는 십사만 사천명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하는데, 세례성사를 받아 인호를 받은 우리의 미래를 엿보는 듯 합니다.
이들에 대한 묘사가 평생 날마다 제대 주변에서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기도를 바치는 우리 믿는 이들의 삶에 신선한 자극이 됩니다.
“그들은 어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앞에서 새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노래는 땅으로부터 속량된 십사만 사천명 말고는 아무도 배울 수 없었습니다.
... 그들은 어린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는 이들입니다.
... 그들의 입에서는 거짓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흠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대로 지상에서의 거짓없는, 흠없는 삶을 반영하는 성인들의 천상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가난한 과부처럼 자기를 온전히 비우며 일편단심 주님을 사랑하여 따랐던 거짓없는, 흠없는 삶을 반영합니다.
이런 천상적 삶에 희망을 뒀던 가난한 과부임이 분명합니다.
이런 천상의 희망을 능가할 수 있는 희망은 없습니다.
바로 이를 노래한, 오늘 제1독서 묵시록에 근거한 11월1일 모든 성인의 대축일 저녁 성무일도 시 마리아의 노래 후렴입니다.
위령성월, 희망성월, 성인성월 11월마다 제가 끊임없이 애송하여 바치는 기도입니다.
“성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기뻐하는 그 나라가,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흰옷을 입고 어린양을 따라가는도다.”
어제부터 시작된 연중 마지막 34주간은 성서주간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을 사랑하듯 성서를 충실히 공부하며 주님을 잘 따를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깨어 준비하고 있어라.
생각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오리라.”
(마태 24,42.44 참조)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순수한 의탁과 신뢰로 그분께 온전히 자신을 던지는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봉헌에 대해 들려줍니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루카 21,3)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헌금함에 넣습니다.
당시에는 통 속에 돈이 떨어지는 소리로 봉헌의 수량을 가늠할 수 있었다고 하지요.
앞서 부자들이 냈던 소리와 그 과부의 소리는 사뭇 달랐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녀의 봉헌을 크게 치하하십니다.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루카 21,4)
그녀는 가진 것이 별로 없이 빈곤하고 가난하고 궁핍한 데다, 과부였으니 약자 중의 약자인 셈입니다.
생활비를 주님께 다 드릴 수 있는 건, 그녀가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의탁하는 사람이었기에 가능했을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의 봉헌을 다른 부자들의 그것보다 더 귀하게 보시는 이유는, 예물을 받으시는 주님이 숫자가 아니라 마음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이 과부는 전 재산인 동전 두 닢과 함께 주님께 자신의 생사를 던진 것입니다.
자기 살림을 주님 손에 오롯이 되돌려 드린 것이지요.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고, 저도 당신의 것이니 죽이든 살리든 당신 뜻대로 하십시오. 저를 당신께 맡겨 드립니다.' 하는 온전한 의탁과 신뢰의 마음이 읽힙니다.
이 온전한 의탁을 보시고 하느님은 가만히 계실 수는 없으시지요.
그분께서 친히 나서실 겁니다.
반드시 그럴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어린양을 모시고 선 십사만 사천 명의 거룩한 영혼들이 보입니다.
그들은 어떤 이들일까요?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묵시 14,1)
그들은 주님만 생각하는 이들입니다.
오매불망 하느님과 예수님을 그리워하는, 그래서 정결한 이들이지요.
그들은 마음에 다른 우상을 품지 않습니다.
모든 사물과 사람에 앞서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 새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묵시 14,3)
그들은 언제나 주님을 찬양하는 이들입니다.
찬양이 그들이 일상으로 올려 드리는 목소리이고, 감사와 찬미는 그 내용입니다.
"그들은 어린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는 이들입니다."
(묵시 14,4)
그들은 주님만을 따릅니다.
세속의 화려한 명예와 재물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고, 그곳이 어디이든 주님이 가시는 것이면 어디라도 그분 뒤를 따라 걸어온 이들입니다.
"그들의 입에서는 거짓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묵시 14,5)
그들은 말씀을 품고 진리를 말하는 이들입니다.
말씀이 그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지배하는 유일한 원리입니다.
그들이 사랑하는 말씀은 그들 입을 맴돌고 적시다가 세상으로 흘러나와 어둠과 더러움, 탐욕과 증오를 정화합니다.
진리가 그들을 그렇게 만듭니다.
이들이 세상에서 잘나고 부유한 권세가들이었을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만, 오늘 복음 속 과부처럼 모든 것을 주님께 바친 이들이었던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주님과 사이에 지상 삶에서부터 차곡차곡 사연과 추억을 쌓아온 이들일 것이고, 세상 풍파에 휘청이다 쓰러지면서도 세상 힘이 아닌, 그분 가슴에 기대어 신뢰를 쏟아내던 이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흠 없는 사람들입니다."
(묵시 14,5)
한갓 피조물인 사람에게 흠이 없을 수 없지만, 이들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이들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의 믿음과 사랑을 보시고 그들의 영혼을 사랑의 불로 말끔히 태워 흠 없게 해 주셨습니다.
삶의 파도가 묻힌 때와 오염과 얼룩은 어린양의 피와 뜨거운 사랑의 불로 희어집니다.
온전히 바친 이는 온전히 거룩합니다.
오늘 복음 속 과부에게서 예수님의 온전한 봉헌을 마주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종의 모습을 취하심으로써 가난하게 되셨고, 사형수가 되어 생명마저 아버지께 올려드리셨으니까요.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아버지 향한 온전한 의탁과 신뢰가 그 어느 누구의 예물보다 귀한 건 믿음과 사랑으로, 전부를, 온전히 다 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허락하신 육적 영적 자원은 다 다릅니다.
재산이나 지식, 신분과 권력의 정도도 다 다르지요.
그러니 우리가 주님께 바치는 영육의 예물을 외적으로 비교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다만, 더 드릴 수 없는 안타까움에 동동거리는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서 아시니 위로가 됩니다.
주님은 수량이 아니라 마음을 보시니까요.
순수한 의탁과 신뢰로 그분께 온전히 자신을 던지는 사랑을 그분은 아십니다.
부족한 우리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며 주님께 한걸음 더 나아가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가난한 과부의 봉헌을 이어가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을 향한 우리들의 마음>
1982년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당시 정부는 ‘졸업정원제’를 채택했습니다.
입학 정원보다 더 많은 학생을 선발했습니다.
정부의 방침에 따라서 입학 정원의 30%를 더 선발했습니다.
신학생 정원이 80명이었는데 30%를 더 선발해서 104명이 입학했습니다.
입학 정원에 따랐으면 24명은 신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에 저를 포함해서 신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은 ‘성소(聖召)’가 있었다고 하느님께 감사했습니다.
졸업정원제는 문제가 있어서 폐지되었습니다.
졸업정원제가 있는 경우 학생들은 졸업에 필요한 성적을 유지하기 위해 과도한 경쟁과 스트레스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학업에 대한 부담을 가중하고 정신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었습니다.
졸업 여부가 학문적 성취도나 역량보다는 정원에 따라 결정되는 경우, 실력과 상관없이 졸업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생길 수 있어 불공정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습니다.
남학생들은 졸업정원에 해당하지 못하면 군대에 갈 수 있었지만, 여학생들은 졸업정원에 해당하지 못하면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신학생들은 공부에 대한 부담이나, 졸업정원에 들지 못할 걱정은 없었습니다.
졸업할 때 이미 입학 정원이었던 80명에 미달했기 때문입니다.
신학생들은 다른 이유로 사제 성소를 포기했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 요한이 보니 어린양이 시온산 위에서 계셨습니다.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 명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요한이 이야기하는 숫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입학 정원은 아닐 겁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졸업정원도 아닐 겁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이야기하는 숫자는 어떤 뜻이 있을까요?
이 숫자는 문자 그대로의 인원수를 의미하기보다는 구원받은 사람들의 충만함과 완전함을 나타내는 상징적 의미로 받아들여집니다.
144,000은 12(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와 12(사도들), 그리고 1,000(큰 무리를 의미하는 상징적 숫자)의 곱으로, 구약과 신약의 모든 믿는 자들, 즉 모든 시대와 모든 민족에 걸친 하느님 백성의 완전한 수를 상징한다고 해석됩니다.
144,000명은 어린양 예수와 함께 서 있는 자들로 묘사됩니다.
그들은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들’로서, 영적으로 순결하고 하느님께 봉헌된 자들을 나타냅니다.
이는 하느님 앞에서 정결하고 신실한 믿음을 가진 자들의 모습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144,000명은 우상 숭배와 세속적 유혹에 저항하고, 하느님과 예수님께 충성 약속을 지킨 이들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이들은 세상의 혼란과 박해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신앙을 지킨 자들을 나타냅니다.
144,000명은 문자적인 인원수라기보다 하느님께 선택되고 구원받은 모든 신자의 완전성과 충만함을 상징하는 숫자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십니다.
예수님 시대에 과부는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누군가로부터 보호받아야 했습니다.
그런 과부가 아주 작은 돈이지만 정성껏 봉헌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과부를 칭찬하신 겁니다.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 재물, 학식, 직업이 아닙니다.
능력, 재물, 학식, 직업은 우리의 인격을 감싸주는 옷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겉모습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들의 마음을 보십니다.
그 마음을 이웃과 세상을 향해 나누는 우리들의 정성을 보십니다.
새로운 한 주간을 시작하는 월요일입니다.
일주일은 168시간입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시간, 이웃을 사랑하는 시간, 성서를 읽고 묵상하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
16시간을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서 사용한다면 그것이 바로 신앙의 십일조입니다.
예전에 선배 신부님께서 ‘인생은 흑자’라는 강론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루를 살아도, 순간을 살아도 우리 인생은 흑자라는 신부님의 말씀을 다시 생각합니다.
걱정과 근심, 두려움과 절망은 모두 날려버리고, 희망의 날개를 펴고 주님께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들의 입에서는 거짓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흠 없는 사람들입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께 인정받는 삶>
어느 책에서 미국에 이민하여서 아이들을 잘 키우고, 30년간 부부싸움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는 노부부의 행복한 결혼 생활 비결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민 오면서 이 부부는 서로 약속했습니다.
남편은 화가 나고 섭섭한 마음이 들면 말없이 산책하러 나가고, 아내는 화가 나고 기분이 좋지 않으면 앞치마를 거꾸로 걸쳐서 설거지를 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보고서 상대방의 마음 상태를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 보이지 않는 마음까지 알아채기란 불가능합니다.
“몇 년을 같이 살았는데, 척하면 알아야지.”라고 말하지만, 상대방은 또 이렇게 항변하지요.
“말해야 알지.”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알아주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더구나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그렇다면 더 큰 믿음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나약한 인간이기에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서 위 노부부의 노하우를 따르면 어떨까요?
지혜의 삶을 사는 분을 많음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그 지혜를 볼 수 있고, 그 지혜를 배워서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지혜를 보려고 하지 않고, 또 보더라도 부러움만을 가지면서 ‘내 배우자는 왜 그럴까?’라며 원망하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조금더 관심갖는 삶을 살았으면 합니다.
자기 멋대로 생각하고 판단하면서 또 쉽게 단죄하는 어리석은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지혜를 나누고 사랑을 나누며 살라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런 가운데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헌금함에 넣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적은 헌금을 한 이 과부를 우습게 봤을 것입니다.
이 헌금함은 공개되어 있는 곳으로, 주로 부자들만 헌금하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과부의 정성 어린 마음만을 보십니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생활비 전체를 넣은 과부의 그날 저녁은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에게 하느님이 먼저였고, 그래서 가지고 있는 모두를 헌금함에 넣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께 인정받습니다.
우리도 이 지혜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에게 인정받는 삶이 아닌, 하느님께 인정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여인이야말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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