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의나 정사를 보면 관도대전 당시 원소의 병력은 조조의 병력보다 작게는 3~4배 크게는 10배가량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면 잘못된 정보임을 알수있습니다.
우선 중화문명의 발생지인 황하를 중심으로, 북에 위치한 기주,청주,병주,유주 4개주가 원소의 세력이고 남에 위치한 연주,예주,사주,서주 4개주가 조조의 세력입니다. 병력 동원 가능한 인구수로 볼 때는 서로 대등하다 볼수 있습니다.
실제 관도대전 이전 조조의 병력이 많음을 보여주는 대목으로,
조조가 완성의 장수를 공격할때, 장수가 싸우지도 않고 조조에게 항복했습니다. 뛰어난 군사인 가후조차도 어떻게 해볼수 없는 병력이라고 했습니다.
회남의 원술을 공격할때 너무 많은 군사를 데리고 와, 군량이 모자르자 군량담당관인 왕후까지 처형시켰습니다.
도겸이 다스리던 서주를 일거에 초토화시켰던것은 조조정규군과 더불어 악명높은 청주병(황건잔당)도 있었습니다. 청주병은 이후 곳곳에서 활약하게 됩니다.
유비가 서주에서 차주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 조조의 20만대군으로 유비의 5만대군을 그야말로 전광석화처럼 괴멸시켜버렸습니다.
관도대전 당시 공성전을 한게 아니라, 관도라는 요새를 끼고 진지전을 했습니다.(정말 조조의 병력이 원소에 비해 많이 열세에 있다면 공성전을 할수밖에 없겠죠.)
관도대전 당시 오소에 있는 원소의 군량창고를 습격함과 동시에, 원소군의 반격으로부터 본진을 지킬 군사도 충분히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더불어 조조는 군량도 매우 부족했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조조는 일찍이 둔전제를 실시해 다른 군웅보다 병량확보에 우월한 입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조조의 근거지인 허창과 가까운 관도에서 싸우는 거라서 보급로도 짧았습니다.(원소는 황하를 건너 멀리까지 보급해야 했고 때로는 황하의 범람으로 보급품을 다수 상실하는등 보급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럼 이렇게 많았던 조조의 병력이 관도대전 당시에는 갑자기 조조의 군세가 축소되었을까요?
정사는 조조중심으로 씌여졌기 때문에 조조의 뛰어남을 강조하려고 적(원소)의 병력은 부풀려지고 조조는 축소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서로 호각의 세력에서 이긴것이라면 조조가 특별히 돋보이지는 않겠죠.
조조의 뛰어남을 강조하려면, 일반인들의 상식범위에서는 도저히 이길수 없는 싸움에서 이기게 해야 조조가 특별한 사람이고 한나라(漢)를 이을수 있는 자격이 있는것처럼 보여지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관도대전 이전에 원소군는 흑산적과 공손찬군만 상대한데에 비해, 조조군은 흑산적, 청주황건적, 원술, 이각, 도겸, 유비, 여포, 장수, 유표등 여러 도적과 군웅과의 실전경험으론 원소군보다 더 정예입니다. 가후가 원소에게 항복하려는 장수를 말려서 조조에게 항복시킨것은 당시 종합적 상황판단에서 조조에게 더 유리했기때문입니다.
물론 조조의 가장 큰 위험성은 배후의 다른 적들입니다. 가장 유력한 적은 강동의 손책과 형주의 유표가 있는데, 강동의 손책은 일찍 죽어버렸고, 유표는 천하에 야심이 없는 늙은이에 불과해 조조에게 커다란 위협요소가 되지 못해 조조는 원소와의 싸움에 집중할수 있었습니다.
결국 종합해보면 조조가 원소를 이긴것은 우리가 알고있는것처럼 이기지 못할 싸움을 이긴것이 아니라 상식범위의 안이라는 것입니다.
첫댓글 촉 오 합쳐도 위나라 인구 반도 안 되기에 처음부터 질 수 없는 싸움이죠
백그라운드가 달랐지만.. 유방이 정말 대단한 ㅡ;;;
촉이 있던 익주는 과거 진이 부흥했던 지역으로 여기에 +@먹은 진이 전국시대 초,위,제,한,연,조 6국을 압박할 정도였습니다....ㅡ.ㅡ 게다가 관중이 이각 곽사 때문에 갈려서 위진 시대에는 피해 복구 중이었구요..
@어리버리 그거는 과거에다가 독립된 여러 나라가 상대니 그런 거죠 제갈량이 괜히 무리해서 북벌 강행한게 아니잖아요
@매니아 삼진 지역의 절반 이상은 위가 먹고 있었고... 제갈량 본인도 먼치킨이어서 정말 질 수 밖에 없는 싸움이냐는 생각이 갈린다는 거죠..
사실 제갈량 시절에 무리해서 북벌했다고 보긴 어렵고(후대 강유가 수십년 동안 북벌을 진행한 거 보면.;;;) 촉한 정권의 숙명같은 것이라고 봐야죠.. 동오와 다르게 여긴 조조의 안티테제로서 성립한 정권이니까..
유표가 유비말대로 조조 뒤통수만 쳤어도.....ㅠ
원소가 상대한 공손찬과 조조가 상대한 여러 군웅을 비교하는건 무리입니다. 당장 조조가 상대했다는 도겸-유비-원술이 공손찬의 동맹이나 부장격 존재들이었고, 조조가 저들과 상대할 수 있었던 것도 원소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니까요. 협천자 이전의 조조 역시 원소의 부장격에 불과한 위치였습니다. 실제로 조조를 연주자사로 임명한 것이 원소였고, 조조는 그 위세를 빌어 '조정에서 임명된 정통 연주자사'였던 김상을 공격하여 쫓아내는 모습을 보입니다.
또한 전성기의 공손찬은, 원소가 자의로 조조를 연주자사에 임명한 것과 똑같이 엄강, 전해, 추단, 주앙을 각각 기주, 청주, 병주, 예주자사로 임명하며 5개주에 영향을 떨치는 대군벌이었습니다(후일의 조조도 차주와 유비를 서주, 예주 자사로 임명하는 모습을 보이죠). 그에 반해 조조와 대치했던 군벌들은 기껏해야 겨우 한개주를 점거하고 있는데 불과했죠. 총사령관격인 공손찬을 쓰러뜨린 원소가 휘하 군벌들과 아웅댔던 조조보다 정예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협천자 이후에 조조가 대장군을 칭하고 원소에게 태위직을 줬는데 원소가 크게 분개하여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쫄아서 대장군직을 양보했던 점이나, 가후가 원소 대신 조조를 택해야하는 이유로 들었던 세가지 가운데 하나가 '원소는 대세력이라 줄 대는 사람이 많아서 그리 가봐야 쩌리 취급. 그러나 조조쪽으로 가면 중용될 수 있음'이었다는 점 등을 생각해보면 관도 이전의 양자 세력비는 아무래도 원소쪽이 우위라고 봐야할겁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배후의 큰 위험 또한 조조와 원소의 차이는 심각합니다. 원소가 흑산적과 공손찬을 토벌하여 후방의 위험을 끊은데 비하여 조조는 손책과 유표의 위험이 그대로 남아있죠. 심지어 조조의 세력이라 언급하신 연-예-사-서 4개주 가운데 서주는 대학살의 여파로 반조조정세가 강했고, 예주는 본디 원가의 뿌리였던 지역이라 대전내내 미칠듯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사방이 적인데다 자세력권내도 불온한 분위기였으니 병력의 분산이 불가피했고, 때문에 설령 조조와 원소의 총전력이 비슷했다하더라도 관도에서 동원 가능한 병력은 조조측에 크게 불리했습니다.
@Draka 생각해보면 사주도 빈껍데기 아닌가요? 사주 제일의 대도시였을터인 낙양이 폐허라...
@PoKion 낙양은 폐허지만 하내, 홍농, 부풍, 평양 등 다른 동네까지 다 폐허였던건 아니었으니까요. 그리고 이때까지는 아직 장안(경조)이 사례 소속이었습니다. 아 물론 동탁부터 이각, 곽사로 이어지는 깽판 때문에 전반적으로 멀쩡한 상황이 아니었던건 확실합니다.
공손찬이 초반에는 원소를 압도하는 대단한 위세였다는것은 사실이지만 중반 이후에는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고 수비에만 집중하여 스스로 자멸해버렸죠. 원소군로서는 땅굴 파느라 시일만 좀 걸렸을뿐 크게 회전을 벌인적은 극히 적었습니다. 가후가 조조를 택한것도 조조군이 원소군에 비해 정예였다는 점이 작용했습니다.
@phoenix 역경에 틀어박힌 이후로는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만, 그 이전까지-대략 191년부터 195년까지는 혈전의 연속이었습니다. 계교, 거마수, 용주 등에서 회전의 기록이 있고, 193년에는 장연의 후방 기습으로 원소의 본거인 업이 함락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으니까요. 그리고 공손찬이 틀어박혔다 해도 그 휘하세력까지 모조리 틀어박힌건 아닙니다. 일례로 원담이 청주에서 공손찬 세력을 완전히 축출한게 196년이었죠.
@phoenix 장수가 조조와 원소를 저울질하고 있을 때 가후가 조조를 선택해야하는 이유로 제시한 것은 1) 협천자, 2)조조 밑에서 더 중용될 수 있음, 3)조조는 사사로운 원한을 따지지 않음의 3가지인데, 가후가 조조군이 원소군에 비해 정예라서 조조를 택했다는 것은 근거가 어떻게 되나요? 해당 대화에서 장수는 "원소는 강성하고 조조는 약하다(袁彊曹弱)"라고 하고, 가후 역시도 "조공의 무리는 약하다(曹公衆弱)"라고해서 조조가 원소에 비해 열세였음을 기본전제로 하고 있는데요.
@락테름 원소군 참모인 저수나 전풍 모두 조공(조조)군대가 날래니 정면대결 피하자고 하고 있죠.. 실제로 국지전에서 안량-문추를 잡아냈구요.. 양쪽 모두 상당히 복잡한 군기동을 통해 잡아냈는데 군대가 잘 훈련되어 있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최근 연구는 과연 원소가 이미지처럼 조조보다 우월했냐에 대해 의문이 나오고 있습니다. 저수 전풍 사례는 원소가 기주 호족들의 완전한 지지를 받은 건 아니라는 사례중 하나로 뽑힐 수 있고, 원소 생전에도 사후에도 반란이 다발했으며, 대립천자 추대 같은 흑역사도 있고 지방 호족을 포섭하기 위한 정책이나 움직임을 보이진 않았죠..
@락테름 관도 전역에서 원소가 조조보다 확실하게 우세한 병력을 동원한 것은 사실이지만 조조 또한 상당한 지역을 확보하고(장안과 낙양이 아작났지만...-_-;;;;;) 그 위에천자라는 명분을 쥐고 있어 장기적인 대전략 측면에서는 훨씬 유리했습니다(물론 천하영웅 완전무결 절대영웅 원소론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유협따위 동탁에게 추되된 찌끄레기 겠지만 말이죠..)
그 위에 원소의 본거지인 기주 자체가 어떻게 보면 정치적 협잡에 일종의 상황논리에 흘러간 거라 위험 요소가 다분했습니다.(이걸 또 절대영웅 원소의 카리스마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락테름 실제로 관도 전역이 시작하기 전에 일종의 전초전을 벌였는데 우금이 이끄는 조조군이 역관광(....)을 시전해 줍니다. 뭐. 사서에 구체적인 명기는 없지만 해석해서 실제로는 원소-조조간 회전이 있었고 절대영웅 원소가 처발라 줬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대다수 학자들은 조조가 전역에서 우세한 원소군을 잘 준비된 진지로 끌어들이는 지연전을 펴고 있었다고 해석하죠..
원소의 주공이라고 판단되는 장합 고람의 군대를 막아내면서 1만의 병력으로 호위한 순우경의 치중대에 추가로 지원된 장기의 경기병대까지 격파한 것으로 보면 조조도 10%수준의 병력이 있던 것은 아니라고 보입니다.
@어리버리 사세삼공의 강대한 세력을 자랑하던 원씨 일족이 원술에게 몰빵했다 쫄딱 망한 까닭에 그 기반의 도움을 받지 못한 원소는 의외로 정치적 입지가 불안했죠. 말 그대로 원소의 정치력과 카리스마에만 의존해야하는 상황.. 그러나 어쨌든 관도대전 시점에서는 이게 아직 '잠재적인 위험'에 불과한 상황이었던지라 배후에 손책 유표를 두고 내부에서 반란이 미칠듯이 터지는 '실재적 위험'에 직면한 조조보다 원소가 한결 유리한 조건이었던건 확실합니다.
@Draka 게다가 원소 세력의 입지가 친위 세력 없이 원소 개인에 의해 유지된다는 단점이 있다면, 조조 세력은 외척을 비롯한 '근황파'의 반격에 노출된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실제 동승과 복완의 모의가 있었고, 관도대전 시점은 동승의 반란이 터진 직후라 유비를 맞아들인 원소측에서 거꾸로 조조에게 '역적'이라며 정치적인 역공을 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까요. 결국 나중에 조조가 직접 국구가 되어 이런 문제를 원천 봉쇄하려 들게 되죠.
@Draka 다만 원소측에서도 장기적으로 협천자를 한 조조가 유리해질 가능성이 있다는 점(조조가 학살로 서주를 결딴내고 여포와 항쟁하며 연주가, 주씨 형제와 항쟁하며 예주가 피폐해졌지만 하북도 구력거-장순의 난 이래 공손찬과 원소의 대전이 이어지며 유-기-청주가 멀쩡한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내부의 잠재적 위험이 언제 표면화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원소가 기주 호족이 주장하는 지연전 대신 영천 파벌이 주장하는 전격전에 힘을 실어줬다고 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동승의 친위쿠데타라는 호재의 파급력도 줄어들테니까요.
@Draka 절대영웅 원소론은 말그대로 개그..고(본문이나 댓글에 딱히 원소님 하앍하앍하는 내용이 없는데 왜 절대영웅이라는 과격한 언급을 하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실상 관도대전은 조조의 미칠 듯한 하드캐리라고 봐도 될만큼 조조의 활약이 빛났던 전투였죠. 원소군의 기동을 보면 딱히 원소측의 무리수나 뻘짓이 안 보이는데-병력이 우위에 선 자가 보일 수 있는 정석적인 기동을 펼치고 있죠-이걸 말씀대로 '복잡한 군기동'으로 격파해내고 있으니까요. 특히 문추 잡는 모습은 전술가로서의 역량이 만렙 찍고 있습니다.
@Draka 다만 조조가 승리한 전투만 언급하셨는데 대전중 원소군이 내내 패전하기만 했던건 아닙니다. 사서에는 직접적인 언급이 없지만 양무에서 원소와 조조가 대치한 이후 '합전에서 불리하였다'는 언급이 있고, 이후 별다른 묘사 없이 갑자기 관도 농성전이 '많은 부상병과 함께' 이어집니다. 배송지는 '병력이 너무 심하게 줄었잖아!'라고 깝니다만, 어쨌든 정황상 회전이든, 게릴라전이든, 조조가 본대간의 대치에서 전선을 유지하지 못하고 무너져내린건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불리하여 철퇴하였다'는 기술은 여양과 적벽에서도 동일하게 이어지죠.
@Draka 원소의 절대 영웅론을 주장하는 사람이 그런 내용으로 나무위키를 온통 도배질을 해놔서요...(....)
어쨌건 원소 본대가 조조군을 관도까지 밀어 붙인 건 확실하고, 그 과정에서 원소의 역량이 돋보이죠.
@어리버리 글쎄.. 과거에는 어땠는지 모르겠는데, 지금의 나무위키 내용은 딱히 원소 절대영웅론으로 보이지 않는군요. 원소는 장점만큼이나 단점도 워낙 극명한 인물인지라..
원소의 역량이 돋보이는 점은 관도까지 조조군을 밀어붙인게 아니라, 관도대전 판국을 짜놓은 전략적인 부분에서였겠죠. 저는 오히려 열세한 병력으로 그 정도까지 선방한 조조의 전술적 역량이 돋보인다고 봅니다. 사실 언급하신 우금의 두씨진전투, 관우의 백마전투, 조조의 연진전투 모두 조조가 빛나는 부분이고, 원소측의 승전으로 보이는 양무전투 같은건 기록이 부실하기도 해서 대전 돌입 후 원소의 역량이 돋보일만한 점을 찾기는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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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 생각나네요.
조조가 전선이 길어서 가용 병력이 부족한 거 아니었나요 당장 남쪽의 손책도 큰 위협이고 말이죠
원소가 전략적인 올인 승부를 한 거고 그 사전 준비를 훌륭하게 해냈다고 봐야죠.. 물론 조조가 적이 많고 전선이 길다는 약점도 있지만 그걸 활용해 내는게 지휘관의 역량이죠..
이 내용은 과거에 파성이랑 어디 삼국지 관련 카페 흥할 때 엄청 많이 했었던 논쟁 중 하나인데 ㅋㅋㅋ
선비욜롱님이 이쪽에서 많은 자료를 만들고 계시죠. 나무위키 등지에서 삼국지 인물들 열전 수정에도 기여중이시고요.
그런 의미에서 선비욜롱님을 소환한다!!
@_Arondite_ 오 ㅋㅋㅋ 주의깊게 기다려봐야겠군요 ㅋㅋㅋ
병력도 병력이지만 병력 질에서도 원소가 월등히 앞섰습니다. 기록에 정병 10만을 이끌고 남하했다고 하는데 정사 기록에 '정병' 이라 쓸 정도면 정말 엄청난 정예병력임을 의미합니다. 원소군의 정예함에 조조가 보고 매우 두려워했었던것도 기록에 있을겁니다. 반면 조조가 대응하느라 동원한 병력엔 '정병' 이라는 표현이 없죠.
원소의 참모진이 대놓고 "조공의 군대가 날래니 단기 결전을 피하자"고 하고 있고, 실제로 관도 전역 이전에도 조조는 꾸준하게 군웅들과 투닥거리면서 거의 다 이기고 있었습니다...
관도 전역에서도 원소의 본대에서 떨어져 나온 우회 기동했던 별동대(한순, 유비등)나 선발대(안량 문추 등)는 조조군에게 모두 격파당했죠.. 질적인 측면에서 원소가 앞었다고 보긴 힘듭니다. 단지 원소의 군대가 수만 채워넣은 군대가 아니라 제대로 훈련과 장비를 갖춘 정예 부대였다는 의미겠죠..
@어리버리 원소 참모들의 주장은 내부의 알력다툼이 좀 있었던 부분이고, 원소가 서서히 밀어붙이는 전략을 취한 것은 실제로 조조군에 비해 전반적인 역량이 앞서니 굳이 기책이나 복잡한 전술을 펼칠 필요가 적었다는 방증이죠. 별동대를 운용한 것도, 상대의 주전력과 동등하거나 더 우세한 전력을 유지하면서 다수의 우회병력을 분리할 수 있을 만큼 전력의 여유가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_Arondite_ 숫적 우위와 질적 우위는 다른 이야기죠.. 원소가 숫적으로 앞서고 있긴 했지만 과연 질적으로도 말씀하시는 것처럼 조조보다 우월했느냐면 그건 물음표라는 겁니다. 국지전에서 조조가 따낸 승리가 많고, 그 과정에서 보여준 복잡한 전략 기동은 군이 정예화 되어 있지 않으면 불가능하거든요..
그리고 원소 참모들의 알력 때문에 조조의 군대를 과대 평가했다는 것은 억측이라고 생각됩니다(나무 위키 같은 곳은 당연한 진리처럼 써놨지만..) 실적으로도 조조군은 많은 걸 보여줬고 전초전에서도 만만치 않다는 것도 입증해 보였구요..
@어리버리 질적인 차이가 그렇게 심합니까? 뭘 보고 그렇게 생각하시죠? 조조군이 뽀대나는 전술기동을 보여줬으니 더 정예다? 글쎄요. 조조군의 전술기동은 조조군이 많은 훈련과 실전을 경험한 군대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이긴 합니다만 원소군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할 근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어리버리님 말씀대로 조조군이 좀더 잘 훈련되어 있었을 수도 있으나, 원소군 역시 많은 전투를 경험한 군대임을 고려하면 그 격차는 그리 크지 않다고 보는 게 타당하죠.
@어리버리 참모진간의 정치적인 알력 때문에 상대편의 진언에 반박하는 경우는 매우 흔합니다. 심배측과 전풍측은 출신도 다르고 원소군에 귀순한 이유도 다르고 같은 세력 내에 있더라도 세력 내에서는 서로 이익이 상충하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그러니 상대방의 진언에 반대되는 주장을 할 이유가 충분하죠. 게다가 우월한 군세를 바탕으로 적극적으로 공세에 나서는 것이나, 상대의 자멸을 유도하기 위해 서서히 조여가는 것이나 전사상 많은 전례를 가진 정론이니 어느 한쪽이 무리한 주장을 펼친 것도 아닙니다. 조조군처럼 혈연 등으로 강하게 뭉친 조직도 아니고 출신기반이 다른 두 계파가 한 사람의 정치력에 의존해 결합해 있는 상황
@어리버리 이고, 그 둘을 충분히 화합시킬만큼 오랜 내정기간을 가지지 못한 상태이니 그 둘 사이의 알력을 부정할 수도 없죠.
@어리버리 그리고 정사를 보면, 원소 사후 원담과의 내전을 벌이는 와중에도 원상군은 공격해온 조조군을 몇 차례나 격퇴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원소가 조조군에 비해 질적으로 많이 낮아서 관도대전에서 패배하는 게 정상인 수준이었다면, 그보다 세력이 약해진 원상은 뭐 한신의 재림 수준의 군재를 가지고 있었던 걸까요.조조군에 비해 질적으로 꿀리지 않는 군대를 물려받았으니 조조군을 여러 차례 격퇴할 수 있었던 거라고 보는 게 타당합니다.
@_Arondite_ 원소군은 "정병"이라고 쓰고 조조가 두려워 했는데 조조는 그런게 없다고 하신 건 님인데요?....ㅡ.ㅡ;;
질적으로 조조가 우위라고 했나요? 원소군이 숫적으로 우위인 것은 확실하지만(이건 사서에 있으니..) 질적으로도 원소가 우위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는 겁니다.
언급했듯 원소군도 제대로 된 훈련과 장비를 갖춘 정예군대라고 언급했습니다. 단지 질적으로도 조조의 군대보다 앞섰다고 보긴 어렵다는 겁니다. 판단할 근거가 부족하니까..
전 오히려 관도대전 이후에도 여전히 원소의 세력이 많이 우위지 않을까 합니다.
2222 관도대전 후에도 조조는 원소를 밀어내지 못하고 원소 사후 자식들 내전 때에도 밀어붙이다가 데이기도 했죠.
연주, 예주에서 여포랑 2년간 치고받은지 5년 지났고 서주는 조조 본인이 초토화시켰던 데다가, 사주는 낙양, 장안 황폐화 등으로 전력만 잡아먹는 실정. 거기다 후방엔 손책과 유표가 대기.
원소라고 모든게 완벽하진 않지만 조조의 사정은 상대적으로 훨씬 더 안 좋죠.
원소군이 오합지졸의 군사란것은 절대 아닙니다. 원소는 일찍이 천하에 대한 야심이 컸던 인물이었던 만큼 백성들의 통치에도 만전을 기했습니다.(원소의 사후 하북이 조조에 의해 평정되자 하북의 백성들은 원소의 통치를 그리워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자가 군사훈련이나 장비를 소홀히 하지 않겠죠. 다만 조조군이 원소군보다 실전경험이 풍부한 전투 베테랑들이 좀더 많았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군대는 위기상황에서도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