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새 음악선생님이 부임했다. 얼굴이 희고 체격도 반듯하고 날씬하여 첫눈에
멋진 지휘자처럼 보였다. 교단에서 학생들을 향해 이야기를 하다가
돌아서서 칠판에 글씨를 쓰는 참이었다.
그때 나는 선생님의 양복바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바지 엉덩이 부분을 나선형으로 기웠는데, 기운 자국이 선명하여 마치 과녁처럼 보였다. 선생님은 그 양복밖에 없었는지 내가 볼 때마다 늘 그 양복만 입고 수업을 하고 강당 조회시간에 전교생 앞에서 애국가 지휘도 했다. 내가 감탄한 것은, 그 기운 엉덩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선생님은 늘 떳떳하고 꼿꼿했다는 것.
선생님이 새 양복을 입기 시작한 것은 부임 후 대략 한 달 후였다. 아마 첫 월급으로 장만한 것 같았다. 볼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그제야 겨우 내 마음이 놓였다.
차콜 그레이(charcoal gray)가 신사에게 멋진 색이라는 것을 나는 그 선생님이 입은 새 양복을 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새 양복이 생겼어도 선생님은 기운 양복을 번갈아 입고 다녔다. 물론 새 양복을 더 자주 입기는 했지만.
내가 그 선생님처럼 기운 바지를 입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졸업을 몇 개월 남기지 않은 중학교 3학년 가을이었다. 의자의 삐져나온 못에 교복바지 엉덩이부분이 약간 찢어진 것이다.
당시 나는 서울 집에서 누나와 함께 살고 있었기 때문에, 별수없이 누나에게 바지를 기워달라고 부탁했다. 찢어진 부분만 살짝 꿰매면 그럭저럭 무난할 것 같았다.
그런데 누나는 그것을 바느질집에 맡겨버린 모양이었다.
그 교복바지가 내게 돌아왔을 때 나는 깜작 놀랐다. 음악선생님이 첫 수업시간에 칠판을 향해 돌아섰던 때처럼. 딱 그 선생님의 기운 바지처럼 엉덩이부분에 안감을 대고 나선형으로 재봉을 해버린 것이었다. 겨우 2~3센티미터 정도 찢어졌는데 이렇게까지 전체 엉덩이부분을 박아놓았을 줄이야……. 난감했다.
창피하게 이런 바지를 입고 어떻게 학교를 다닌단 말인가? 더구나 우리학교는
옆에 여학교와 바로 붙어있기 때문에 수송동 골목길로 들어서면 여학생들이 부지기수로 지나다니는데 이를 어쩐담? 나는 누나에게 버럭 성질을 부렸다.
“아유, 이게 뭐야? 누가 이렇게 박아달랬어?”
“봐라. 바지 엉덩이 전체가 허옇게 나달나달 낡았잖아. 손으로 뜨면 금방 다시 터질 것 같아 일부러 삯 주고 바느질집에 맡긴 거야.”
“그래도 창피하게 이걸 어떻게 입고 다녀?”
“창피하면, 박은 부분 오려내고 입고 다녀라. 자!”
누나는 내게 던지다시피 가위를 내밀었다.
그때부터 나는 어기적거리는 걸음걸이가 되고 말았다. 왠지 자신이 없고, 걸을 때 온통 신경이 바지 엉덩이로 쏠리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내 곁을 지나갈 때에는 가급적 그 사람의 시선이 내 엉덩이 쪽에 닿지 않도록 동선을 잡았다.
그러나 등교시간처럼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지나가면 대책이 없었다. 마침내, 사람들이 별로 지나다니지 않는 아주 이른 시간에 등교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등교를 하면 가급적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반 아이들이 내 엉덩이를 보게 될까 봐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나는 음악선생님이 정말 대단하게 보였다. 그런 바지를 입고 보란 듯이 복도를 꼿꼿하게 걸어 다니고, 태연하게 전교생 앞에서 애국가와 교가 지휘를 하다니.
추석 때 시골집에 내려가면 아버지에게 꼭 새 교복을 사달라고 해야지……. 그렇게 마음먹기는 했지만 내 계산으로도 그것은 어려울 것 같았다. 이제 곧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어련히 새 교복이 생길 텐데, 겨울방학 할 때까지만 더 입으면 될 텐데, 기껏해야 3개월 입으려고 새 교복을 산단 말인가? 암만 생각해도 무리인 것 같았다. 그렇지만 난 창피해서 못살겠어요! 아버지, 제발 도와주세요…….
추석 전날 시골집에 내려와 추석 쇠고 다시 서울로 올라갈 때까지, 나는 벼르고 별렀지만 끝내 새 교복 사달라는 말을 입밖에 꺼내지도 못했다. 추석음식과 반찬거리를 싼 가방을 들고 역을 향해 출발하는 나를 아버지는 식구들과 함께 대문 밖에서 내다보았다. 아버지는 그때 비로소 알게 된 모양이었다. 어기적거리며 걷는 수상한 내 걸음걸이, 그리고 엉덩이부분이 과녁처럼 기워진 내 바지…….
“승하야!”
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그래요, 아버지. 제발……. 나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섰다. 나를 유심히 쳐다보는 아버지의 눈길과 내 눈이 부딪쳤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부터 서울로 올라갔기 때문에 그 동안 아버지와 마주 볼 기회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 짧은 순간 나와 마주친 아버지의 눈길은 뭐라고 형언할 수 없었다. 절반쯤은 따뜻하고 절반쯤은 엄격한 듯한, 아니 어쩌면, 절반쯤은 측은하고 절반쯤은 속상한 듯한…….
“승하야, 바르게 걸어라, 그리고 잘 다녀오너라.”
아버지는 결국 그렇게 결론을 내린 모양이었다.
“네. 다녀오겠습니다.”
바지 때문에 일찍 등교를 해서 자리에 앉아있는데 잠시 후 우리 반에서 제일 얼굴이 흰, 내 뒷줄에 앉은 녀석이 교실로 들어왔다. 마찬가지로 늘 일찍 등교를 하는 녀석이었다. 제 자리에 가방을 놓더니 녀석이 내 자리로 다가왔다.
“원래 내가 제일 일찍 왔었는데, 이제 네가 제일 일찍 나오네. 요즘 무슨 일 생겼어?”
“일은 무슨……. 우리 집 아주 가까워.”
“아냐. 너 요즘 좀 수상해졌어.”
“그런 일 없어.”
난 딱 잡아떼었다.
“가만히 보니까 너 교실에서도 꼼짝하지 않는 것 같더라고.”
나는 할 말이 없어서 녀석이 빨리 사라지기만을 기다리며 그대로 자리에 앉아있었다. 녀석은 뭐가 그리 궁금한지 계속 내 앞에 서서 빙글빙글 웃으며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쉬는 시간에 화장실도 안 가는 것 같아……. 것 봐, 진짜 이상해.”
녀석은 갑자기 뭔가 깨달은 듯 눈을 크게 뜨더니 능글맞은 표정을 지으며 말을 던졌다.
“너 혹시 남장(男裝)한 여자아이 아냐? 아무래도…….”
“이 자식이?”
순간 나는 앉은 채로 서있는 녀석의 배를 냅다 주먹으로 질렀다. 녀석은 움찔하다가 이내 반격을 가했다. 내 어깨를 잡아 내리꽂아 나를 교실바닥으로 굴러 떨어뜨리고 녀석은 나를 깔고 주먹을 날리려는 듯 팔을 번쩍 쳐들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승하야, 일어나.”
주먹 한 방이 내 얼굴로 떨어질 줄 알았는데 뜻밖에 녀석은
나를 붙잡아 일으키고 있었다.
“미안해. 싸우려고 한 거 아닌데. 내가 너 좋아하니까 걱정돼서 물어본 건데…….”
녀석은 나를 자리에 앉히고 제 자리를 향해 걸어갔다. 내가 고개를 돌려 힐끗 녀석을 쳐다보니,
“엇?”
녀석도 엉덩이를 기운 바지를 입고 있었다. 나처럼 과녁모양은 아니지만 두 군데나 재봉으로 지그재그로 휘갈겨 기워져 있었다. 그것도 새빨간 실로……. 자식!
그럭저럭 중학교시절이 끝나가고 있었다. 조개탄을 타러 가면 졸업반학생들에게는 수위아저씨가 양동이 가득 조개탄을 담아주었다. 졸업반학생들은 가끔 만용을 부려 기물을 부숴 난롯불을 피우기도 했기 때문에 아예 탄 배급을 넉넉하게 주었다. 덕분에 우리는 12월 끝자락을 따뜻하게, 그리고 난롯가 도시락들을 하도 태워먹어 구수하게 보낼 수 있었다. 그 무렵에는 우리 반의 몇 명이 더 나처럼 엉덩이를 기워 입었다. 검정 염색을 한 목면 교복바지는 어지간히 곱게 입지 않으면 사실 졸업 때까지 온전하게 버티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12월 24일, 겨울방학을 하는 날이지만 졸업반에게는 종업식이나 마찬가지였다. 선생님들은 대충대충 수업을 끝냈다. 그날 음악시간도 있었다. 음악선생님은 우리들에게 ‘화이트 크리스마스’ 노래를 영어가사로 가르쳐주었다. 선생님이 영어가사를 칠판에 적을 때 나는 다시 한번 그 과녁모양으로 기운 바지를 볼 수 있었다. 이젠 기운 바지를 보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마지막 종례시간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진학과 졸업을 앞두고 할 일이 태산 같은 담임선생님을 기다리는 짬이 지루했었나? 하여튼 나와 내 옆자리의 ‘W군’이 어찌어찌 교단에 서게 되었다. 짝짝짝짝……박수소리. 하필 왜 나와 ‘W군’─소설에서 흔히 쓰는 제3인칭 ‘아Q’ ‘K씨’등을 본떠서 옆자리 친구를 나는 그렇게 불렀다─이 뽑혔는지는 모르지만 둘이 노래를 하게 되었다. 바로 전 음악시간에 배운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불렀다. 와~와~앙코르! 반 아이들이 박수치고 함성을 지르는 사이 나와 ‘W군’은 교모를 가지고 교실을 한 바퀴 돌았다. 내가 기운 바지를 입고 이렇게 교단에 서고 또 교실 한 바퀴까지 돌게 되다니……. 아이들이 모자 속에 동전이나 지폐를 던져 넣었다. 모자 두 개에 든 돈을 합쳐보니 액수가 꽤 되었다.
그 돈의 절반으로는 한 아이가 잽싸게 달려나가 엿을 한 무더기 사왔다. 고등학교 시험에 모두 엿처럼 딱 붙으라는 뜻이었는지, 어쨌든 우리는 다같이 엿을 먹으며 마지막 ‘쫑’파티를 했다.
나머지 돈은 구세군자선냄비로 들어갔다.
종례를 마친 후 반을 대표하여 ‘W군’과 내가 함께 종로 화신백화점 앞까지 걸어가서 돈을 넣었다. 숙명여중고교의 여학생들이 쏟아져 나오는 수송동 골목을 지나 크리스마스 이브의 번잡한 화신백화점까지, 거기서 다시 덕성 풍문 창덕 휘문 중앙중고교의 학생들이 쏟아져 나오는 안국동 재동 가회동 거리를 지나 계동의 우리 집까지, 나는 과녁처럼 엉덩이를 기운 바지를 입은 채 씩씩하게 걸어갔던 것이다.
집으로 걸어갈 때, 음악선생님 모습이 떠올랐다. 추석날 시골집 문 밖에서
나를 전송하던 아버지 모습도 떠올랐다.
싸움을 멈추고 제 자리로 돌아가던 내 뒷줄의 얼굴 하얀 그 녀석의 모습도…….
첫댓글 이름도 얼굴도 잘 모르는 후배님의 <호주의 새해맞이>라는 <새해시작 이야기>와 수필가 이승하라는 후배님의 <엉덩이를 깁다>라는 글이 너무 정겹군요.
고국을 떠나 외국에서 살면서도 <서울사대부고 미주동창회>라는 까페에 글을 올리는 그 후배님들의 마음이 고맙고 반가워요. 이글을 옮겨주신 리안, 감사해요..
선후배님이 올리신 아름다운 음악과 좋은 글 만나러 부고 USA에 가끔 드나들다 우리 동문과 함께 보려고 가져왔어요.
14회에도 글 잘 쓰는 동문이 많은데....글 좀 올려주시기를~
사진은 도라지꽃 입니다. 우리 카페 활성화 위해 자상한 댓글로 봉사해 주심에 감사해요.
그러게 말입니다. 14회 작가님들이 전부 단체 여행가셨나 봅니다. 여행갔다 돌아오시면 여행기라도
올려주시겠지요. 기다릴게요..
한 달에 한 번씩이라도 돌아가며 올리면 좋을 텐데요.
Eskei 님이 사진작품과 고운 음악 올려주셔서 잘 감상하고 있어요. 감사해요.
카페에 좋은글 올리려고 수고가 많구나.. 고맙다..
이곳은 이제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하는지.. 눈오고 춥고 그렇다..
추운날이 지나면 또 꽃피는 봄이 성큼 닥아 오겠지? 잘지내..
그래, 추운 겨울이 가면 꽃피는 봄이.... 생각만 해도 좋다.
네가 바쁜 시간 틈내서 친목광장 빛 내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