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년 9월 9일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제1독서 : 1코린 9,16-19.22ㄴ-27
복 음 : 루카 6,39-42
그때에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제자들에게
39 이르셨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40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41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침묵을 강조하는 수도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수도원에 들어온 수도자들은 평상시에는 말 한마디 할 수 없고,
1년에 한 번 수도원장과의 면담 때에야 말할 수 있었습니다.
한 형제님께서 수도자로 이 수도원에 들어왔습니다.
침묵을 지키면서 열심히 수도 생활을 했지요.
그리고 드디어 1년이 지났고, 수도원장에게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침대가 너무 딱딱해서 큰 고생을 했습니다. 침대를 바꿔주세요.”
수도원장은 곧바로 침대를 바꿔주었습니다.
다시 1년이 지나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수도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음식이 부실해서 식사 때마다 고역입니다. 음식에 신경을 써주세요.”
수도원장은 최대한 그가 원하는 음식을 제공했습니다.
또다시 1년이 지나서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그는 “제가 지내는 방이 열악합니다. 햇빛이 잘 들어오는 방으로 바꿔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수도원장은 그가 원하는 방으로 바꿔주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네 번째 면담 시간이 되었습니다.
수도자는 “말 한마디 못 하니 너무 답답하고 바보가 된 느낌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수도원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까지 당신이 바꿔 달라는 대로 다 바꿔주었습니다. 이제는 당신이 바꾸어 보세요.”
우리는 늘 자기가 원하는 대로 상대가 바뀌길 원합니다.
남편이 바뀌길, 아내가 바뀌길, 자식이 바뀌길, 세상이 바뀌길….
그러나 여기서 늘 빠지는 것이 있습니다. 자신의 변화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도 이런 점을 늘 강조하셨습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 없듯이, 자신을 먼저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만 보면서,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를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간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들보를 빼내라고 하십니다.
자신의 변화는 전혀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남의 변화만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를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주님께서는 위선자라고 하셨습니다.
외적인 행동과 마음속 생각의 불일치를 이루면서
결국 하느님의 뜻과 정반대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위선자’라는 호칭이 지금을 사는 우리가 계속 듣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자기의 변화는 전혀 생각하지 않으면서, 남만 바꾸라고
성을 내면서 말하는 위선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먼저 나 자신이 바뀌면서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위선의 삶이 아닌, 진실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의 전사
-영적 훈련, 영적 전쟁-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만군의 주님, 당신 계신 곳 사랑하나이다!
행복하옵니다, 당신 집에 사는 우리들!
우리는 영원토록 당신을 찬양하리이다.
행복하옵니다, 마음속으로 순례의 길 떠날 때,
당신께 힘을 얻는 우리들!”(시편84;2,5-6)
9월 1일부터 10월 4일까지는 교회에서 정한 창조시기로
매일 끝 기도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를 바칩니다.
창조시기와 맞물려 하느님의 피조물인 까치와 까마귀의 배 피해가 심각합니다.
공동식사시간 배밭 농장 수사님과 나눈 대화입니다.
“배밭 까마귀, 까치 피해가 어느 정도입니까? 10% 정도 됩니까?
10%정도면 1/10, 하느님의 피조물들의 피해이니
십일조 정도로 알고 하느님께 봉헌한다고 생각 해야될 것 같네요.
피조물과 더불어 살라는 것 같습니다.
창조시기,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문을 바치기에 참 묘하게 됐습니다.”
“10%가 아니라 30%쯤 아니, 더 늘어날 것 같습니다.
맛있는 황금배들은 얼마 남지 않고 거의 다 쪼아 먹었습니다.
수사님, 까마귀, 까치들에게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강론 좀 해 주세요.”
대화를 나누며 웃었습니다.
배 피해가 참 심각한데도 배 농장 수사님은 크게 걱정하지 않는 듯 태평스러웠고,
나머지 수사님들 역시 크게 걱정하지 않는 듯했습니다.
이 또한 끊임없는 공동전례기도를 통한 믿음의 훈련 덕분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 덕분에 그리 크게 동요되지 않는 것이지요.
사랑뿐 아니라, 희망도 믿음도 영적 훈련에 속합니다.
제가 의도적으로 문자 메시지로 편지를 나눌 때도 가능한 마음을 담아,
이름 앞에 ‘사랑하는’이란 말마디를 붙이고 시작하는 것도, 일종의 사랑의 훈련입니다.
이렇게 용기있게 ‘사랑하는’ 말마디를 쓰다 보면 상대방은 물론
제 마음도 알게 모르게 정화되고 성화되어 사랑의 사람이 되리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수사님들이 일상생활에서 한결같이 살아가는 것도 믿음의 훈련이 잘된 덕분입니다.
삶은 영적훈련이요 영적전쟁입니다. 영적훈련이자 동시에 영적전쟁입니다.
수도자들은 물론이고 참으로 믿는 이들이라면 모두가 이에 해당 됩니다.
제대가 없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들인 우리들입니다.
이것은 제가 수도생활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참 많이 강조해온 주제이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하여 제가 내심 자주 소망을 표현하곤 합니다.
“나는 주님의 전사다. 사랑의 전사, 믿음의 전사, 희망의 전사, 평화의 전사이다.
영적전쟁 중 싸우다 전사했으면 좋겠다.
사고사, 객사, 교통사, 병사가 아닌 주님의 전사戰士로서 영적전쟁 중,
즉 기도하다, 일하다, 공부하다 전사戰死했으면 좋겠다.”
구도적 열정과 순수의 주님의 전사인 수도자들 누구나의 공통적 소원일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치열한 영적 전투의 삶을 살다가 주님의 전사로 생애를 마감했으면 하는 소원입니다.
바로 우리 교회의 순교자들이 영적 전쟁의 삶을 살다가 전사한 분들입니다.
우리 역시 깨어 영적 훈련에 영적 전투에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며
순교적 삶을 살아가는 9월 순교자 성월입니다.
영적 전쟁의 핵심은 자기와의 전쟁이자, 더 구체적으로 무지와의 전쟁입니다.
여름 밭농사를 풀과의 전쟁이라 하는데, 우리의 평생 영적 전쟁은 무지와의 전쟁입니다.
무지의 악, 무지의 죄, 무지의 병과의 영적 전쟁입니다.
참 대책 없이 힘든 것이 자기를 모르는 무지의 병입니다.
참 쉬운 것이 남 판단하는 것이요, 참 어려운 것이 자기를 아는 일입니다.
그래서 “너 자신을 알라”는 자기 인식을 참 많이 강조합니다.
참으로 자기를 아는 것이 겸손이요 지혜입니다.
이래서 그렇게도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와 회개 또한 중요한 영적 훈련에 속합니다.
자기를 몰라 판단이나 심판이지 정말 자기의 한계와 단점들을 아는 겸손한 사람들은
결코 남을 판단하거나 심판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자기를 알아가는 것도 참 중요한 영적 자기 훈련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의 이해도 확연 해 집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눈먼 이가 상징하는바, 바로 무지의 사람입니다.
나라든 가정이든 그 무슨 공동체든
눈 밝은 지혜로운 자가 아닌 눈먼 무지의 사람들이 인도자가 되면
본인은 물론 공동체에도 이보다 큰 재앙도 불행도 없을 것입니다.
여기 나오는 스승은 예수님으로 바꿔도 좋습니다.
우리 제자들은 영원한 스승이신 예수님보다 높지 않습니다.
평생 주님의 학인이 되어 배움의 여정에 충실함으로
영원한 참 스승이신 예수님처럼 되면 충분합니다.
이어지는 우리의 스승, 예수님 말씀이 우리의 무지를 일깨우는 죽비 같은 말씀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편견과 선입견, 오해와 착각으로
자주 실수하는 무지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다.”
바로 문제는 나이고 답은 주님임을 아는 자가 지혜롭고 겸손한 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무지의 실체인 “자기ego”라는 눈 속에 들보를 지니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무지한 자기에 대한 유일한 처방은 하느님의 지혜이신 파스카 예수님뿐입니다.
이래서 겸손히 평생 예수님을 배워 닮아가는 배움의 여정, 예닮의 여정,
주님과 일치의 여정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무지한 우리가 문제라면 답은 예수님뿐입니다.
예닮의 여정과 참나를 알아가는 앎의 여정은 함께 갑니다.
주님을 알아가면서 참나를 알아가니 주님의 탐구와 참 나의 탐구는 함께 갑니다.
참으로 주님을 닮아 참나에 이르러 내 눈의 자기라는 들보가 사라질 때
비로소 이웃 형제의 지혜로운 조언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무지에 대한 유일한 해법이자 처방은
예수님을 알아가면서 참 나를 알아가는 길뿐이요, 역시 평생과제의 여정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영적 전쟁은 무지와의 전쟁이요, 예수님을 배우고 닮아가면서
참나에 이를 때 비로소 무지에서 벗어나 영적 승리의 월계관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궁극의 목표이자 희망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바오로 사도야말로 불세출의 주님의 전사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롤모델입니다.
바오로는 영적 훈련, 영적 전쟁의 주님의 전사를 경기장의 경기자로 명명합니다.
우리 삶은 영적 전쟁터이자 동시에 경주장이 되기도 합니다.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이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모릅니까?
이와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 모든 경기자는 절제를 합니다.
그들은 썩어 없어질 화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는 화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잘 달리고 있는지, 참으로 잘 싸우고 있는지 잠시 휴전하고 멈추어
자기를 살펴보며 영적 전의戰意를 새로이 하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우리의 영적 경기는 상대 평가가 아닌 절대 평가입니다.
자기 페이스대로 한결같이 목표 지점에까지 달릴 때
하나하나 모두가 1등에 썩지 않는 화관의 상을 받을 것입니다.
과연 제 페이스대로 잘 달리고 있습니까? 잘 싸우고 있습니까?
예닮의 여정, 참나를 알아가는 앎의 여정은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죽어야 끝나는 영적 훈련에 영적 전투입니다.
바오로의 말씀이 우리 모두 사기충천士氣衝天케하며, 용기백배勇氣百倍 분투의 노력을 다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목표가 없는 것처럼 달리지 않습니다.
허공을 치는 것처럼 권투를 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영혼뿐 아니라 육신도 단련하여 조복調伏시켜야 합니다.
육신의 욕망에 영혼이 끌려가지 않고, 영혼이 육신을 끌고 가야 합니다.
아니 자발적으로 육신이 영혼을 따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열렬히 한결같이 사랑하여 주님을 배우고 닮아갈 때
주님의 은총으로 육신은 저절로 영혼을 따르고 이어 영혼의 건강에 영력靈力을 선물로 받습니다.
평생 영적 훈련에, 영적 전투의 삶을 살아가는 주님의 전사들인 우리들입니다.
수도자들은 물론 믿는 모든 이가 이에 해당 됩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불퇴전不退轉의 주님의 전사로 살게 합니다.
“주 하느님은 태양이요 방패이시니,
주님은 은총과 영광을 주시나이다.
흠 없이 살아가는 우리 주님의 전사들에게, 복을 아끼지 않으시나이다.”(시편84,12).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서품 31주년 동창 모임엘 다녀왔습니다.
원래는 서품 30주년에 만나기로 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1년 연기했습니다.
동창들이 만나서 이야기하고, 걷고, 식사하는 것은 즐거움입니다.
동창 중에 한 명이 서품 10주년을 기념하면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
21년 전의 모습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그때는 다들 첫 본당 주임 사제가 되어서 열정과 꿈을 가지고 지냈습니다.
21년이 지난 지금 그때처럼 열정과 꿈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다들 가을에 감이 빨갛게 익어가듯이 여유로워졌고, 서로에 대한 배려도 깊어졌습니다.
예전에는 뭔가를 해야만 의미가 있고,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그저 머무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감사합니다.
서품 40년이 되면 모두들 사목의 일선에서는 물러나 있을 것입니다.
그때 누군가 서품 31주년 동창 모임 사진을 보여주는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 같습니다.
‘그때가 좋았지!’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썩어 없어질 화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는 화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서품 40주년을 모임에서 동창들 모두가 바오로 사도처럼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는’ 삶을 살았다고 말하면 좋겠습니다.
돌아가신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의 사목표어는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실 때 빵과 포도주를 나눠 주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해서 내어 줄 나의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해서 흘릴 나의 피다.”
신학교의 도서관 입구에도 ‘모든 이의 모든 것’이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목적은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라는 의미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너의 눈에 있는 들보를 빼내어라,
다음에 다른 사람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전에 우리 조상들은 높은 관직에 있을수록 더욱 몸가짐을 조심했다고 합니다.
가족들 또한 아버지의 관직에 누가 되지 않도록 몸가짐을 바르게 했다고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기적인 사랑에 머물러서는 하느님께로 나가기 어렵습니다.
먼저 나 자신의 몸가짐을 바르게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예수님께서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루카 6,37)는
말씀에 이어서, 제자들에게 이르셨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루카 6,41)
그런데 우리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무엇일까?
사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심판한다는 것은
그것을 그렇게 심판하게 하는 기준이 되는 ‘준거 틀’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 관점, 태도, 사고방식의 틀(패러다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선입관이나 편견 등 고정관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형제의 눈에서 ‘티’를 바라보게 하는
우리 눈의 ‘들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루카 6,42)
그런데 우리 눈의 ‘들보’를 어떻게 빼낼 수 있을까?
흔히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로 보고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곧 ‘보여주는 대로’, ‘들려주는 대로’를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선입관이나 편견 없이, 곧 사심 없이 받아들이는 것을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는 것은 복음정신이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그를 ‘위하여’(ùπερ), 그가 잘 되기를 바라고 구원되기를 위하여
‘호의와 자애’(헤세드)로 받아들이라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빛이 되어 상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비추어주는 빛으로 보는 일, 곧 자신 안에 심어진 사랑의 빛을 밝히는 일입니다.
결국 빛이 어둠을 몰아냅니다.
그러니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보는 일,
곧 빛으로 보는 일이 ‘들보’를 몰아냅니다.
곧 용서하는 일, 사랑하는 일이 우리 눈의 ‘들보’를 빼내고
심판하는 것으로부터 벗어 나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루가 6,37)
결국 심판에 떨어지지 않는 것은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는 것을 넘어,
그것을 '호의로 보는 것, 곧 사랑으로 바라보는 것'임을 밝혀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부어주신 은총이요 빛입니다.
결국 ‘들보’를 몰아내는 이는 내가 아니라 빛이요 사랑이신 주님이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루카 6,42)
주님!
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게 하소서!
제 눈에서 보지 못하게 하는 들보를 빼내 주소서!
보지 못하고 있는 제 자신을 보게 하시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보게 하소서!
저를 보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아멘.
이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
주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 하신다.
주님의 제자들은 정확하게 구원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눈먼 이를 이끄는 눈먼 이가 되지 않아야 한다.
무지의 어둠에 묻혀있는 자가 똑같이 어둠에 묻혀있는 자를 진리로 이끌 수 없다.
주님께서는 남을 심판하는 것이 얼마나 악하고 위험한 일인지 말씀하셨다.
남을 심판하려는 마음조차 먹지 말라고, 주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우리의 잘못들과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는 길에서
먼저 나 자신을 벗어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다음 작은 죄를 지은 사람을 바로 잡을 자격이 있는 것이다.
사실 인간에게는 어느 한 사람 완전한 사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남을 비판하며,
그 비판이 도를 지나서 냉혹하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일은 우리 신자들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항상 접하고 생활한다고 자부하고 있는 신자들 가운데도
남보다 자신이 잘났다는 우월감과 색안경을 통해서 남을 쳐다보고 비판함으로써
남의 결점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잡아내어 몰아세우는 일들이 있다.
내가 그보다 무엇이 잘났기 때문에 충고하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 인간은 언제나 실수할 수 있으며, 상대방의 처지가 될 수도 있고
그보다 더 나쁜 상황에 부닥칠 수도 있다.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상대에게는 엄격한 위선적인 것보다,
자신에게 더 엄격하고 상대에게는 관대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신앙인들은 모든 인류를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하느님께로 인도해야 할 의무가 있으므로
개개인은 모두 사회 스승의 표양을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 표양은 예수께서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간음하다 들킨 여인(요한 8,1-11)을 용서하신 것,
또 일흔일곱 번 용서하라(마태 18,21-22) 하신 말씀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이 모범들은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으로
오늘 복음을 통하여 말씀하고 계시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역사 이래로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다.
우리가 사회에 표양을 보여야 할 본분이 있으므로
관대함으로써 모든 사람을 대하고 엄격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다스리라고 하신다.
우리가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듯이,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우리 이웃을 대함으로써
진정으로 형제적 사랑 안에 하나가 되는 삶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며
기쁘게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현대인의 이기적 ‘10죄종’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은 형제에 대한 비판과 선입견을 금지하는 가르침으로
어제 복음의 마지막 부분(37-38절)과 연결된다.
‘남으로부터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비판하지 말라.’는 가르침은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31절)는 황금률의 범주 안에서 이미 언급되었다.
오늘 복음은 남을 비판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3개의 아주 짧은 비유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주는 대로 받는다는 지극히 당연한 원리는 현세에서 행하는 만큼 내세에서 보상받을 것이라는
종말론적 동태보상률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비유를 들어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심으로써
종말론적 인과율을 지금 현재의 상황에 적용시키신다.
즉 현재의 시점에서 행하는 하나의 원인은
반드시 현세 안에서 원인에 따른 결과가 밝혀진다는 것이다.
이 관점으로 오늘 복음의 비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복음의 비유는 세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첫째는 소경이 길잡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과는 둘 다 구덩이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39절)
마태오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소경에 국한 시켜 비유하였지만
루카는 이를 보편적으로 확대 시키고 있다.
둘째는 제자가 스승보다 더 높을 수 없고,
제자가 스승으로부터 배울 것을 배웠다 하더라도
스승을 능가할 수 없고 스승만큼만 될 수 있다는 것이다.(40절)
참으로 의미심장한 비유가 아닐 수 없다.
이는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는 제자들 중 누구도
하느님께서 아들에게 요구하는 그 이상으로 요구받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자비로운 분이시라면 제자들도 그만큼이면 된다.
그러나 분에 넘치거나 인색해서는 안 된다.
그분께서 십자가 죽음의 길을 가셨다면,
제자들도 그만큼까지 요구받는다. 그 이상은 아니다.
셋째는 타인의 눈 속에 있는 티와 자신의 눈 속에 들보의 비유이다.
자기 눈 속에 들어있는 들보를 제거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타인의 눈 속에 있는 티를 꺼내주기는커녕 제대로 볼 수도 없다.(42절)
자신이 허물을 지닌 채 타인의 허물을 논한다면 위선자가 된다.
만약 어떠한 허물도 없는 자라면
그는 타인의 허물을 탓할 그런 小人輩는 아닐 것이다.
우리 인간의 일상은 오늘 비유 말씀과 크게 다르다.
자기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무자비한 사람들이 우리가 아닌가?
자신이 소경이면서도 소경의 길잡이가 되려 하고,
스승보다 더 나은 제자가 되려고 안간힘을 다 쓰며,
자신이 비록 허물을 가졌다 하더라도 남의 허물을 탓하는 우리들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처지가 용이 하지 않다고 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소극적으로 살아가는 것보다는 善意의 비판과 판단,
부단한 노력과 용기는 필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적극적이고 진취적이며 창조적인 삶의 태도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不義에 대한 최종적인 응징은 하느님의 몫이다.
자신에겐 한없이 관대하고 남에게는 꼼꼼하게 무자비한 현대인들의
‘이기적 10 죄종’이란 글이 있어 소개하겠다.
1.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스캔들이고,
2. 내가 하면 창조적이고, 남이 하면 거짓말이고,
3. 내가 침묵하면 그만큼 생각이 깊은 것이고,
남이 침묵하면 원래 생각이 없는 것이고,
4. 내가 화를 내면 그만큼 소신이 뚜렷한 것이고,
남이 화를 내면 그릇이 작은 것이고,
5. 내가 자리를 비우면 바쁜 만큼 유능한 것이고,
남이 자리를 비우면 또 어디서 노는 것이고,
6. 내가 통화 중이면 업무상 긴급한 것이고,
남이 통화 중이면 사적인 일이 너무 많은 것이고,
7. 내가 아프면 아픈 만큼 쉬어야 하고,
남이 아프면 기본적인 체력마저 의심스러운 것이고,
8. 내가 가족사진을 걸어 놓으면 가정의 화목이 자랑스러운 것이고,
남이 가족사진을 걸어 놓으면 직장에서도 집 생각만 하는 것이고,
9. 내가 회의 중이면 남은 잠깐 기다려야 하고,
남이 회의 중이면 나는 잠깐 만나야 하고,
10. 내가 약속을 어기면 사람이 그럴 수도 있는 것이고,
남이 약속을 어기면 사람이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지적질로 사람이 바뀔 수 있다고 착각한다면?
전삼용 요셉 신부
'금쪽같은 내 새끼' 78회 ‘가족 앞에 서면 숨이 턱 막히는 아들’에서는
내가 통제하고 지적하고 잔소리하면 상대가 변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할머니 한 분이 나오십니다.
60년간 오직 자녀교육을 잘 시키려 갖은 고생하신 할머니께는 죄송하지만,
아들조차도 엄마에게
“엄마는 항상 강압적, 지시적, 명령적이었어요, 항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머니처럼 아들도 자신이 어머니를 비난하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합니다.
금쪽이는 아빠, 할머니의 지나친 통제와 지적질에 숨이 막히고
그래서 가끔은 소변을 지리기도 합니다.
엄마가 이혼한 상태라 빈자리가 큰 금쪽이는 할머니와 아빠를 화해시키려 노력하다가
혼자 방에 들어와 숨죽여 웁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루카 6,40)라고 하십니다.
스승은 제자들의 잘못을 바로잡아 성장시켜주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시는 방식과 다르게 하려는 제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을 눈먼 인도자라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눈먼 인도자들이 하는 행태를 나무라십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루카 6,41-42)
곧 눈먼 인도자들은 자신들 제자들의 잘못을 고쳐주기 위해
그들 눈의 티를 빼내려는 이들입니다.
이것은 비난, 지적질, 혹은 나무람, 잔소리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것으로 자신을 고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발합니다.
자유가 있어서 통제받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자아는 자신을 통제하려는 이를 오히려 비난함으로써 자신을 보호합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 데모가 한창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어떠한 이슈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각자의 이슈보다는 감정싸움이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학생들은 학생들 나름대로 전경에게 매 맞고 돌아온 선후배들을 볼 때 화가 나고
전경들은 학생들이 던진 화염병과 돌에 맞아 상처를 입은 동료를 보며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누군가의 잘못을 지적할 때 그 사람은 그 잘못을 인정하기보다는
“그래서 너는 뭐가 잘났는데?”로 나옵니다. 방어기제가 작동되는 것입니다.
방어기제는 자아가 양심 때문에 알게 된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감추려는 시도입니다.
그렇게 죄는 사라지고 서로 간의 비방만 남습니다.
미국에서 한 아버지가 아들이 마약을 한다며 상담을 신청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매우 화가 나 있었습니다. 의사는 역할극을 시켜보았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뭘 못 해줘서 그렇게까지 아이가 망가졌는지 답답해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 앞에서 주눅 들어 있었습니다. 의사가 이제 역할을 바꿔보라고 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가 되고 아버지가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때 아버지가 “내가 마약 중독자입니까? 나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며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습니다.
아버지는 이런 식의 비난을 감당할 수 없었고 감당하기 싫었던 것입니다.
그 역할을 하면 자기 잘못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자신의 진짜 죄가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잘못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상태를 더 악화시킬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잘못을 드러내는 방식은 당신이 우리 죄 때문에 칼에 찔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죄를 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 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루카 2,34)
한 소매치기 청년이 어떤 병원 앞에서 담배만 피우다 지하철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한 여인의 가방에서 돈 냄새를 맡아 소매치기하여 달아납니다.
얼마 뒤 그 소매치기의 남동생에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전화가 옵니다.
형은 어머니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한 번 보려고 병원에 왔었던 것입니다.
수술비를 마련하지 못하여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동생의 말에
형은 돈 없으면 다 죽어야 하느냐고 분개합니다.
세상이 이 모양이니 자신이 그렇게밖에 살 수 없는 것이라고 한탄합니다.
동생은 어머니 수술비로 자신의 결혼자금까지 찾아오던 애인이
소매치기만 당하지 않았어도 어머니는 살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소매치기당한 시간과 장소는 정확히 자신이 소매치기 한 시간과 장소와 일치했습니다.
소매치기 형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철환 작가의 「연탄길」에 ‘유리조각’이란 제목으로 소개된 일화입니다.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우리 죄의 칼에 찔리심을 통해
우리 죄를 드러나게 하시고 우리가 회개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타인의 잘못을 고치려 할 때는
그들의 죄를 들추어내고 지적질하고 나무라면서 고치려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방식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잘못을 지적하지 않으실까요?
하십니다. 그러나 당신 들보, 곧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 하십니다.
베드로의 예를 봅시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지적받은 베드로는 변했을까요? 안 변합니다.
언제 변했을까요?
정말 사람의 일만 생각하고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다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하고 찌르면서 변합니다.
어떤 죄도 그 죄 때문에 찔려 피를 흘린 누군가를 보지 않으면 사라지지 않습니다.
결코 드러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스승이 되려면 제자들의 죄 때문에 칼에 찔리는 사람이 됩시다.
그러면 들보가 사라집니다. 그제야 그들의 티를 빼내 줄 수 있게 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