솟대
긴 장대 위의 새 한 마리
너무 오래
한 자리에 앉아 있다
나는 것을 잊어버렸나
날지 못하고 퍼덕이기만 하는
딸
한 번쯤 솟구쳐 나는 것 보시려고
……
아차 그대로 굳어 버린 내 어머니
구절초
무주구천동 오르는 계곡
구절초 한마당
가락으로 흐르고 있네요
하필이면 그 음절이
꼭 울 엄마 가슴 에던
그 곡조 같아서
나 바람 속에 취해 흥얼거리는
구절초 한 송이 꺾어
입술에 대니 그렇구나
울 엄마 낮술에 취해 있던
그 내음 그 노래라
어머니 가슴
땅을 파서 땀 흘린 적 단 한 번 없고
오직
어머니 가슴만 갈아엎은 불충
제 업적의 모두입니다
그 가슴 썩을 대로 썩어
거름 한 번 억세게 좋았던 건지
지나가는 바람이나
죽은 가지까지
속 모르게 거친 싹을 틔웠던 거라
어머니 가슴은
무성한 잡초밭이었습니다
느티나무
혼자 되고
첫 고향길
큰길 두고
외곽길 고요히 돌아
어릴 적 업히고 업어 주던
느티나무 앞에 서다
아무 말 않고
서로 삭은 등을 바라본다
엄마 보듯 뜨거워지는 목줄기
고향에서
땅이 내려앉아 있었다
나 어릴 적 살던 집
유독 앞마당이 푹 꺼진
그 자리에
어머니 긴긴 한숨
아직 선명히 울리고 있었다
가을 무 널어 말리는
햇살 모이는 마당
꼬드득 꼬드득
어머니 애 말리던 곳
달빛은 속없이 휘영청
쏟아져 내리는 날
죄 없이도 그날
마당 한쪽이 무시로 푹 꺼지던 날
어머니의 글씨
일생 단 한 번
내게 주신 편지 한 장
삐뚤삐뚤한 글씨로
삐뚤삐뚤 살지 말라고
삐뚤삐뚤한 못으로
내 가슴을 박으셨다
이미 삐뚤삐뚤한 길로
들어선
이 딸의
삐뚤삐뚤한 인생을
어머니
제 죽음으로나 지울 수 있을까요
잃어버린 날들
- 아, 어머니 · 2
내 십대는 어머니가 부끄러웠고
내 이십대는 어머니가 억세게 싫었고요
내 삼십 대는 어머니가 거추장스러웠고
어머니가 보이는
내 사십대에
나는 어머니를 잃어버렸습니다
긴긴 밤
- 아, 어머니 · 4
아버지는 바람으로 떠다시니고
바람으로 어쩌다 스쳐 지나가면
어머닌 또 딸 하나 낳고
긴긴 밤을 홀로 울어 새우셨습니다
먼 산 위에
- 아, 어머니 · 6
내 양식은 아직도
먼 산 위에 두는 그리움입니다
기다릴 것이 없는
세상이라는 것을 잘 알아서
여기저기 손에 잡히는
절망이나 갖고 놀며 정을 붙입니다
그러나 어머니
가끔씩은 문을 열고 인기척을 살핍니다
달빛
- 아, 어머니 · 7
아직 그 가슴에 불길 남았던
어머니 사십대 그 중반 가을밤
오줌 마려워 일어나 바라본 어머니
달빛으로 온몸을 애무하고 계셨습니다
그 시절
- 아, 어머니 · 12
손 까딱 않고
잠옷이나 질질 끌며
집 안 돌고
황후의 멋을 내며 입맛 까다로워
무진장 속 끓이던 이 딸년
엄마 지금은
내 집 든 쥐도 내 손으로 잡아요
어머니!
어머니의 가르마
- 아, 어머니 · 14
어머니의 흰 앞가르마는
수줍은 오솔길같이 정답다가도
무섭도록
당당한 자존심의 의지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보았어요
달빛 내리는 밤에는
열면 열리는 문 같기도 했었습니다
달빛 받는 고무신
- 어머니의 거울 · 7
그 눈 밑에는 출렁거리는 바다가 있었고
그 가슴에는 날로 커지는 바위가 있었거늘
누구도 몰랐어라
어머니 앞에 태산도 몰랐어라
달빛 받는 고무신만
하얗게 떨며 어머니 밤을 지켰습니다
매화주
- 어머니의 거울 · 9
어머니!
봄밤 홀로 매화주를 마셔요
은근히 취기 돌아 얼굴 붉어질 때
무슨 병인지 가슴 뭉클 내려앉아요
불현듯 내 인생 참 막막하여
두어 잔 더 입 안에 들어부었습니다
한 사흘만
- 어머니의 거울 · 12
한 사흘만 아니 한 세 시간만 어머니
우리 마주 앉아 이야기할 수 없을까요
그래요 그 많은 이야기 그 시간에
아예 어림없다면
저 봄 동산으로 후다닥 날려보내고
어머니 무릎 위에 얼굴이나 묻은 채
살 벗겨지도록 억세게 비비고나 싶어요
어머니
문학수첩시집
『어머니, 그 삐뚤삐뚤한 글씨』
- 지은이 / 신달자
- 펴낸 곳 / (주)문학수첩
- 펴낸 때 / 2001년 6월
신 달 자
- 1943년 경상남도 거창 출생.
- 숙명여자대학교 국문과 졸. 동대학원 박사.
- 1964년 『여상』 에서 여류신인문학상 수상으로 등단.
- 시집으로 『봉헌문자』, 『겨울축제』, 『고향의 물』, 『모순의 방』, 『아가(雅歌)』, 『새를 보면서』, 『시간과의 동행』, 『아버지의 빛』, 『어머니, 그 삐뚤삐뚤한 글씨』, 『오래 말하는 사이』, 『열애』, 『종이』, 『살흐르다』, 『간절함』 등이 있음.
- 대한민국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현대불교문학상, 영랑시문학상, 대산문학상, 정지용문학상, 김달진문학상, 석정시문학상 수상.
- 평택대 국문과 교수,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
- 한국시인협회 회장.
[출처] 619. 신달자 -『어머니, 그 삐뚤삐뚤한 글씨』|작성자 느티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