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달리는 연습
소설가 천선란의 <천개의 파랑>은 2019년 한국과학문학상 장편소설 부문 대상 수상작입니다.
2035년, 경마 기수는 인간에서 휴머노이드로 교체되는데요.
C-27이라고 불리던 휴머노이드 기수는 투데이라는 흑마와 호흡을 맞춰 경기에 나섭니다.
둘 다 뛰어난 실력을 지닌데다 호흡이 잘 맞아서 기록을 경신하며 우승을 하게 되죠.
문제는 시속 100km를 넘는 이 기록이 지속 가능한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데 있었습니다.
투데이의 관절에 문제가 생기고, C-27은 낙마하여 폐기 위기에 처합니다.
로봇에 관심이 있는 연재는 C-27을 집으로 가져와 수리하고, 브로콜리 색을 한 그에게 콜리라는 이름을 붙여줍니다.
소설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비범한 말과 휴머노이드가 처할 결말을 우리는 알 수 있게 됩니다.
연재와 연재의 언니 은혜, 그리고 자매의 어머니인 보경과 돌아가신 아버지인 소방관의 사연이 차례로 소개되는데요.
연재는 몰랐지만 어머니 보경은 원래 배우였습니다. 데뷔를 하고 단편 영화를 꾸준히 찍으며 좋은 평가를 받았죠.
<천개의 파랑>은 무척 재미있는 소설이고, 캐릭터 하나하나의 생동감이 인상적인데,
이 작품에는 일에 대해 생각할 만한 잊지 못할 대목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 보경의 과거이야기입니다. 보경은 배우로 활동하던 때, 필모그래피 관리에 처음부터 신중했습니다.
이도 저도 아닌 작품을 끼워 넣지 않기 위해, 미래에 배우로 자리 잡은 뒤 과거 경력이 아름다울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였죠.
그런데 스물넷의 어느 날 연습실에 불이 났고, 화상을 입었고, 배우 일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생존이 위태로운 시간을 견뎠으니 많은 이들은 그 사고를 두고 천만다행이었다고 할 것입니다.
보경의 마음이 남의 얘기 같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신중하게 발걸음을 내디뎌서, 미래의 누구에게도 책잡히지 않을 길을 닦으려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겠죠.
하지만 계획대로 모든 일이 흘러가지는 않습니다.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서 실패한 인생이 되지도 않죠.
보경은 큰 사고에서 살아남았습니다.
커리어가 이어지고 이어지지 않고 하는 사실보다, 계속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 귀합니다.
계획대로 되었는지, 얼마나 창대하게 발전했는지를 주목하느라 우리는 종종 중요한 사실을 잊고 살아갑니다.
두 번째, 휴머노이드 콜리와 말 투데이. 둘은 호흡이 잘 맞습니다.
시속 100km가 넘는 속도를 기록한 것도 투데이의 기분을 콜리가 읽을 수 있기 때문이었죠.
문제는 더 더 빠르게 달리고 싶은 말의 기분을 끝까지 착실히 따르면 둘이 함께할 시간이 짧아지고,
투데이의 생명도 짧아진다는 데 있습니다.
타고난 실력이 뛰어난데다 팀웤이 좋아서 둘의 호흡이 능률을 극대화할 때,
눈부신 성과가 나지만 그 결과는 지속 가능한 성질의 것은 아닐테죠.
영원히 가속할 수 있는 생명은 없습니다.
극한으로 가속한 상태를 영원히 유지할 수 있는 생명도 없죠.
속도에 취하지 않을 도리가 없기 때문에 이 일은 더 위험해 집니다.
‘우리는 모두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해야한다'는 대목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합니다.
원하는 만큼 속도가 나지 않는 일을 근심하지 말고, 오래 달릴 일을 마음에 두기로 합시다.
나에게도, 내 사랑하는 이들에게도 들려주고 싶은 말입니다.
-행복한가에서 옮겨 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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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서 세계로 뻗어가는 K-문화는 참 경이로울 정도입니다
BTS열풍 이전에도 잠시 싸이의 말춤 열풍이 있었고, 오징어게임 열풍이 식지 않았습니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더하여 자수 제시의 '아파트' 노래에 음악애호가들이 들썩입니다
그 언저리에 "빨리빨리" 민족적 성격 특성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됩니다
올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은 우리나라 발전상을 모델로 제시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입니다
1948년 GNP 48$에 불과했던 나라가 2023년 37.000$를 달성한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으니
빨라도 이건 아주 빠른 발전이었으므로 경제학자들이 연구할 가치가 있었겠지요
그렇지만, 서양의 민주주의적 생활방식을 빠르게 수용하면서 해결하지 못한 부작용도 많습니다
근면성실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던 마음자세에 '한탕주의'가 들어서버렸고
각자의 자아실현으로 성공을 추구하던 삶의 끝자락에 국회의원 배지달기가 마지막 목표로 바뀌었습니다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법관, 경영자, 스포츠 스타, 예술인에 교수까지도 선거에 나섭니다
현실의 문제를 짚어 미래를 준비하는 정치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작금의 정치인들이 보여주는 언행은 미래세대들에게 본이 되지 못하니 문제라는 것이지요
300명의 국회의원들이 모두 최고속도에 기어를 맞추고 엑셀러레이터를 꽉 밟고 있습니다
천천히 달리려는 연습이 없으니 모든 기관이 자연스레 작동하지 못하고 불협화음을 쏟아냅니다
기계에 기름칠할 여유가 없으니 쇠끼리 부딪히고 마찰하여 불꽃마저 튀고 있습니다
원하는 만큼 속도가 나지 않는다고 차를 바꾸겠다고 야단법석을 떠니 온 세상이 시끄럽네요
생활화된 마라톤 애호가들처럼 천천히 오래 달리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모두가 기록경신을 위한 선수가 될 필요도 없으며
외려 건강을 해질 수도 있는 '빨리빨리'는 재고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다시 사작하는 월요일 하룻길도 천천히 걸으며 자주 웃으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