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혈갔던 여고생, 민주화 외친 고3…5·18 손해배상서 승소
박금희·전영진·차종성·정윤식·조사천 열사 유족 등 300여명 소송
참배객 이어지는 5·18민주묘지 (광주=연합뉴스) 조남수 기자 = 5·18 민주화운동 43주년을 이틀 앞둔 16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에 참배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2023.5.16 iso64@yna.co.kr
(광주=연합뉴스) 장아름 기자 =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총탄에 숨진 피해자 가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정신적 손해배상 소송에서 승소했다.
광주지법 민사14부(나경 부장판사)는 A씨 등 315명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했다고 29일 밝혔다.
소송에는 고교생이거나 갓 스물을 넘긴 나이에 숨진 박금희 양, 전영진 군, 차종성 군, 정윤식 씨 가족과 다섯 살배기 아들을 두고 세상을 떠난 조사천씨의 유족도 참여했다.
재판부는 원고 청구 금액의 50%∼89%를 인정해 정부가 각각 800만원∼1억원을 배상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일부 원고는 국가폭력 피해자와 가족의 고통을 인정하는 계기가 되길 바라며 상징적으로 10만원만 청구했다.
재판부는 "전두환 등 신군부가 헌법 질서 파괴 범죄를 자행하며 저지른 반인권적 행위로 위법성 정도가 중대하고, 고인과 가족들의 육체적·정신적 고통이 상당했을 것으로 보인다"며 "40년 이상 배상이 지연돼 물가와 통화가치도 변했다"고 밝혔다.
국립5·18민주묘지 유영봉안소 참배하는 윤석열 대통령 (광주=연합뉴스) 진성철 기자 = 윤석열 대통령이 18일 광주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제43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이 끝난 뒤 유영봉안소를 참배하고 있다. 2023.5.18 [대통령실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zjin@yna.co.kr
박금희 양은 전남여상 3학년이던 1980년 5월 21일 "피가 부족해 사람들이 죽어간다"는 차량 방송을 듣고 헌혈하러 다녀오다가 참변을 당했다.
그는 버스 창가에 앉아 귀가하던 중 계엄군이 쏜 총탄에 복부와 머리를 맞고 사망했다.
전영진 군은 대동고 3학년 재학 중이던 1980년 5월 20일 문제집을 사러 책방에 가다가 계엄군에게 곤봉으로 맞았다.
전 군은 다음날 "조국이 나를 부른다"며 옛 전남도청 앞으로 가 민주화 시위에 참여했다가 머리에 총상을 입고 숨졌다.
차종성 군은 금호고 3학년이던 1980년 5월 19일 무등경기장 인근에서 계엄군이 시민들을 구타하는 것을 목격하고 항의하다가 곤봉과 개머리판으로 폭행당했다.
차 군은 광주교도소로 끌려가 45일간 구금됐다가 석방됐으나 구타·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가 1983년 3월 5일 생을 마감했다.
정윤식 씨는 광주공원 인근 식당에서 일하던 중 5·18이 일어나자 만 20세 나이로 총기 교육을 받고 시민군으로 활동했다.
그는 옛 전남도청에서 마지막까지 항전하다가 체포돼 고문당했고 후유증을 앓다가 1982년 2월 28일 세상을 떠났다.
1980년 5월 아버지 영정사진 든 꼬마 조천호씨(오른쪽) [연합뉴스 자료사진]
조사천(사망 당시 36세)씨는 계엄군의 시민 폭행에 분노해 시위에 참여했다가 1980년 5월 21일 옛 전남도청 앞 집단 발포 현장에서 숨졌다.
당시 만 5세이던 아들 조천호 씨가 합동 장례식에서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든 모습을 외신 기자가 촬영해 후일 독일 슈피겔지에 실으면서 5·18의 상징이 됐다.
윤석열 대통령은 올해 43주년 5·18 기념식에서 전영진 군과 정윤식 씨, 그리고 무명 열사 묘역에 안장됐다가 42년 만에 신원이 확인된 김재영 군의 묘역을 참배했다.
정부는 5·18 보상법으로 이미 보상받은 사람은 '재판상 화해' 효력이 발생해 더는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고 했지만, 헌법재판소는 정신적 손해를 고려하는 내용은 없었다며 2021년 5월 위헌 결정을 했다.
이후 5·18 유공자와 유족 1천여 명이 정신적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이에 정부는 민법상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권은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 이내에 행사해야 한다며 소멸 시효가 지났다고 주장했다.
법원은 헌재 위헌 결정이 나기 전까지는 원고들이 권리를 행사하기 어려운 장애 사유가 있었다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