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범벅
김여정
봄이 가까워지는지 입맛이 떨어져 무엇을 해먹을까. 궁리 끝에 오랜만에 제 입맛
을 찾아 주었던 작년 봄 호박범벅이 생각났다. 퇴원을 하던 날 집에 들어오니 횡
하니 쓸쓸하게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약 처방이나 받을 줄 알고 갔는데 갑자
기 그 날로 입원을 하고 9일만에 돌아왔으니 집안이 어수선하고 서글프기만 했다.
점심때는 되고 입맛이 없어 밥상이 부담스러워 짜증이 나는데 Y여사가 따끈한
호박범벅과 맛깔스런 햇 깍두기까지 통에 담아들고 찾아왔다. 호박범벅은 옛날부
터 별미로 모두들 선호하지만 나는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런데 정성이 가득 잠긴 오렌지색 호박범벅은 식욕이 땅긴다 달착지근하고 구
수한 맛에 심심한 깍두기와 곁 드려 먹으니 진미였다. 그 맛은 단순한 호박범벅의
맛이 아니었다. Y여사가 배려한 깊은 애정에 내 마음을 감동케 했다.
오랜만에 입에 맞는 음식을 제대로 먹고 포만감으로 즐거웠다. 그 후 입맛이 돌
아났던 기억이 나서 오늘 호박범벅을 직접 만들어 보고 싶었다.
작년에 부모님 산소 옆 밭둑에 호박을 두어 구덩이 심어놓고 가끔 가보면 하루
가 다르게 호박넝쿨이 고개를 번쩍 들고 줄기차게 쭉쭉 잘도 뻗어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호박과 인생에 얽힌 속담이 생각났다.
한참 잘 나가는 오만 방자한 사람에게 항상 ‘호박넝쿨 뻗을 적 같은 줄 아냐’
하는 말이 있다. 흥할 때라고 함부로 오만을 부릴 것 없다는 경계의 말이 렸다. 왕
성할 때를 조심하지 못하고 승승장구하는 사람처럼 호박넝쿨은 빠른 시간에 두려
움 없이 밭둑으로 하나가득 흐드러지게 환한 황금 꽃을 피웠다. 호박꽃 향은 수많
은 벌들을 유혹하더니 호박이 주렁주렁 참 많이도 달렸었다.
애호박을 따다 얇게 저며 채를 썰어 부침 이도 부쳐먹고 반찬도 해먹고 많이도
따먹었건만 이렇게 번성하던 호박넝쿨도 어김없는 자연의 순리를 빗겨가지 못하
고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줄기와 잎이 후줄근해지고 추색해진 잎 사이로 늙는
줄 모르게 잎에 가려있던 늙은 호박들이 나 여기 있소 하고 얼굴을 내민다,
마치 기복이 심한 인생사를 보는 것 같아 늙은 호박의 얼굴을 가만히 보듬어보
니 꺼칠꺼칠하고 울퉁불퉁 두껍게 골이 패여, 세상 풍파와 서릿바람에 시달린 인
고의 세월을 말하는 듯 하다. 몇 개의 천둥호박을 따다가 국을 끓여먹고 그중 제
일 큰 맷돌짝처럼 넓적하고 둥그러운 호박을 장식품으로 포개놓고 겨울을 났다.
위에 있던 한 개를 칼로 쪼개려하니 어찌나 야무진지 칼도 들어가지 않아 망치로 때
려가며 간신히 쪼개지는 순간 앗!! 이게 무엇인가? 소스라치게 놀래어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놀부 집 박을 타는 장면이 생각나서 덜컥 겁도 나고 가슴이 쿵닥쿵닥 뛰었다.
쪼개진 호박 속에는 구더기 같은 벌레가 버글거리고 이미 갈색번데기가 되어있
는 것도 있었다. 벌레들은 호박이 쪼개지는 동시에 밖의 세상을 기다렸다는 듯이
테라스에 기어 나와 감당할 수없이 득시글거리니 징그럽고 무섭기까지 했다.
허겁지겁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갖다 큰 비닐봉투에 호박과 함께 쓸어 담아 버리
고 나서도 온 집안에 벌레가 남아 있는 것만 같아 살피게되고 생각만 해도 끔찍했
다. 힘차게 뻗어나가던 호박넝쿨의 과한 욕심이 호박 속에 뭉쳐 있다가 그 많은
벌레로 환생되었는가. 호박속도 썩지 않았고 물기도 없이 말라 있으며 겉은 더욱
멀쩡한데 호박 속에 벌레가 왜 생겼을까?
마치 겉은 번드레하게 잘 포장된 사람이 속은 텅 비고 정신은 병들어 물욕으로
가득 차서 도덕이 땅에 떨어져 추해진 사람의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아무튼 그 날밤은 호박벌레가 득실대던 것이 눈에 선해서 잠도 오지 않았다.
이튿날 아무래도 남은 호박에도 벌레가 들어있을 것만 같아 남편에게 쪼개 달라
고 했더니 하는 말, 이번에는 예쁜 선녀들이 나와서 나를 반길 것이라며 쪼개는데,
정말 저속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두려움에 멀찌감치 서서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은이다”하는 남편의 말에 어깨
너머로 넘겨다보니 하얀 호박씨가 통통하게 잘 여물어 윤기가 흐르며 속이 깨끗하
고, 두껍게 살찐 호박이 맛있게 생겼다. 어제오늘 호박두개로 마치 호박 속의 천당
과 지옥을 본 듯 하였다.
호박을 삶아 으깨고 팥을 삶아 넣고 찹쌀가루 등 재료를 갖추어 호박범벅을 만
들다보니 오후 내내 호박과 씨름을 하였다. 이렇게 껍질 까기도 너무 힘들고 번거
로움을 겪으면서 남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기우려 만들었을 Y여사를 생각
하니 오늘따라 더욱 고마운 마음이 정겨웁게 느껴진다.
뽀글뽀글 폭폭 동그라미를 그리며 뒤섞여 끓고 있는 호박범벅을 주걱으로 저으며
구수한 냄새와 톡톡 터지면서 배틀했던 팥 맛을 생각하니 벌써 군침이 돈다.
2006년/24집
첫댓글 이렇게 껍질 까기도 너무 힘들고 번거
로움을 겪으면서 남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기우려 만들었을 Y여사를 생각
하니 오늘따라 더욱 고마운 마음이 정겨웁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