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로 응축된 핵의 미학
⸻서정춘 시집 『하류』 / 장순금
시 공부 10여 년에 쌓인 책 이희승 국어사전 빼고
나머지 한 도라꾸 판 돈으로 한 여자 모셔와 서울 청계천
판자촌에 세 들어 살면서 나는 모과할게 너는 능금해라
언약하며 니뇨 나뇨 살아온 지 오늘로 50년 오매 징한
사랑아!
⸻서정춘,「기념일 –유정숙에게」 전문
보기에도 좋은, 한 손에 딱 쥐어지는 예쁜 시집 『하류』를 상재한 서정춘 시인의 시는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이 단정하고 겨울 싸늘한 아침 공기 같은 시편들이다. 표지에 올린 시인의 말,
“하류가 좋다 멀리 보고 오래 참고 끝까지 가는 거다.”
서정춘 시인의 시집 의미심장한 제목 『하류』의 표지를 넘기면, 도톰한, 뽀득뽀득 소리가 날 것 같은 종이에 짧은 시 31편이 알짜배기로 들어앉아 있다.
서정춘 시인의 시력 52년 인생을 음미하는 여섯 번째 시집이다.
전래 서정시 전통을 고도로 절제된 형식으로 구축해온 시인이 팔순을 맞이해 출간한 시집이다. 이 시집은 결혼 50주년을 맞이하여 시인이 아내에게 하고 싶은 말 전부를 무구하고 여지없는 사랑시로 진하게 답을 했다.
『하류』라는 시집 제목에서 느껴지듯, 높은 골짜기에서 물 한 방울로 시작하여 낮은 곳을 향해 굽이굽이 내를 이루고 강으로 흘러 이제 드넓은 바다로 나아가기 직전의 하류에 당도한 한 삶의 이력을 느낄 수 있다. 하류에 도달한 인생에서만 희열을 느낄 수 있는 시들이다.
1968년 신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오래 침묵을 지키다 28년 만에 문단에 복귀하여 첫 시집을 상재했고 2018년에는 등단 50주년 기념집 『서정춘이라는 시인』을 펴낸 바 있다.
그동안 한국 시단에서 박용래문학상, 최계락문학상 등 굵직한 문학상을 여러 차례 수상한 그는 높은 문단적 평가를 받는 원로시인으로 보기 드문 과작의 시인이다.
서정춘 시인의 시에는 아시다시피 군더더기가 없다. 혹독할 정도로 언어를 엄격하게 다루는 시인으로 절제된 시어 안에 연륜 깊은 치열한 시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번다한 수사도 없고 말의 군더더기도 떼어내고 감정의 불순물을 침전시키는 시인의 장인정신에 경외감마저 느낀다.
시집 『하류』에는 흔한 해설이나 표지 추천사도 없이 짤막한 시편만 단아하게 실려 있다. 종이 위에 사리 몇 알, 보석 몇 알 뿌려놓은 듯 순도 100%, 고도로 응축된 핵의 미학이다.
짧은 몇 줄의 시 안에 내장된 에너지가 가히 폭탄 급이다. 그의 시에는 무한으로 이어지는 여운과 긴 파장이 있다. 생략과 압축을 통해 시를 겹겹의 무늬로 구조화한 편편의 시들이 거느리고 있는 매혹에 마음을 맡겨보면 화롯불 같은 시의 뭉근함에 온몸이 따스해질 것이다.
“박용래의 따뜻한 서정(내용)과 김종삼의 언어경제(형식)가 하나의 몸을 이루어 발뒤꿈치를 들어 올릴 때 서정춘의 가장 빼어난 시 몇 편이 태어난다”고 평단은 말했다. 이야말로 최고의 찬사가 아닌가. 어떤 장황한 설명보다 참다운 교감의 몸가짐을 감동적으로 보여주어 이 시대 유난히 할 말이 많아 번잡하고 요란하고 알쏭달쏭한, 너무 길어 읽다가 지쳐버리는 시들을 보다 정신의 경쾌함과 청량감을 주어 머리가 맑아지는 듯하다.
시인의 시를 반복해 읽으면 슬픔이 뚜렷해지는 순간을 느낀다. 짧고 울림 있는 시로써 아늑하고 정겹고 슬프고 아름다운 언어에 더운 숨결과 서늘한 손길이 동시에 스쳐 적은 수의 말로 하나의 이미지로 꽉 채운 시들은 팔순에 이르러서도 시밭 일구기에 긴장과 탄력이 넘치고 있다.
시 「기념일」은 가난한 옛 시절, 한 여인을 모셔와 곁에 두면서 청계천 판자촌에 살며 나는 못 생긴 모과니 너는 어여쁜 능금이니, 알콩달콩 사랑에 가난이 무어 대수로울까 하던 아름답고 설레던 시절에서 질풍노도의 세월을 거쳐 하마 오십 년을 서로 기대고 살아온 오늘날 삶의 끈질긴 사랑 이야기다.
“오매 징한 사랑아!”
아내 유정숙 님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 짧은 한 말씀으로 제 몫을 다한 것 같다.
서정춘 시인께 신작 시집을 보내면 답으로 그 독특하고 개성 있는 필체의 손글씨로 엽서보다 멋지게 써서 답을 주신다. 시인의 따뜻한 온기가 정성어린 필체에서 전해온다. 여럿 모인 자리에선 멋지게 한 곡조 시원히 뽑으시며 좌중을 흥겹고 즐겁게 하시는 서정춘 시인은 “시를 쓰기 위해 시인이 되어야지, 시인이 되기 위해 시를 써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는 천생 시인으로 시와 더불어 어린이 같은 천진한 눈이 무섭도록 아름답다.
⸻계간 《문학과 창작》 2021년 봄호
장순금(시인)
첫댓글 “시를 쓰기 위해 시인이 되어야지, 시인이 되기 위해 시를 써서는 안 된다”(서정춘)
“박용래의 따뜻한 서정(내용)과 김종삼의 언어경제(형식)가 하나의 몸을 이루어 발뒤꿈치를 들어 올릴 때 서정춘의 가장 빼어난 시 몇 편이 태어난다”고 평단은 말했다(장순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