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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요한 묵시록의 말씀 11,4-12
나 요한에게 이런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여기 나의 두 증인이 있다.”
4 그들은 땅의 주님 앞에 서 있는 두 올리브 나무이며 두 등잔대입니다.
5 누가 그들을 해치려고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 그 원수들을 삼켜 버립니다.
누가 그들을 해치려고 하면, 그는 반드시 이렇게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6 그들은 자기들이 예언하는 동안 비가 내리지 않게 하늘을 닫는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원할 때마다 온갖 재앙으로 이 땅을 치는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7 그러나 그들이 증언을 끝내면, 지하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싸워 이기고서는 그들을 죽일 것입니다.
8 그들의 주검은 그 큰 도성의 한길에 내버려질 것입니다.
그 도성은 영적으로 소돔이라고도 하고 이집트라고도 하는데, 그곳에서 그들의 주님도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9 모든 백성과 종족과 언어와 민족에 속한 사람들이 사흘 반 동안 그들의 주검을 바라보면서, 무덤에 묻히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10 땅의 주민들은 죽은 그들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서로 선물을 보낼 것입니다.
그 두 예언자가 땅의 주민들을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11 그러나 사흘 반이 지난 뒤에 하느님에게서 생명의 숨이 나와 그들에게 들어가니, 그들이 제 발로 일어섰습니다.
그들을 쳐다본 사람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12 그 두 예언자는 하늘에서부터, “이리 올라오너라.” 하고 외치는 큰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원수들이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20,27-40
그때에
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28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29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30 그래서 둘째가,
31 그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32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33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35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36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37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38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39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스승님, 잘 말씀하셨습니다.” 하였다.
40 사람들은 감히 그분께 더 이상 묻지 못하였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우리는 ‘사두가이들의 부활에 관한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을 통해서 우리의 부활신앙을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사두가이들의 영적 무지와 예수님의 신적 지혜가 대조를 이룹니다.
곧 영적 무지로 인한 속박을, 신적 지혜로 인한 자유와 해방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속박과 자유가 ‘믿음’에 달려 있음을 말해줍니다.
오늘 복음의 병행구절인 <마태오복음>에서,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두가이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부활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마태 22,39-40)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들의 영적 무지를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곧 ‘성경에 대한 무지’와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무지’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면서 물질만을 유일한 실체로 여긴 까닭에, 내세나 부활과 영적 존재에 대해서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합리적 사고와 이성적 판단 아래 하느님의 권위와 능력을 제한했습니다.
곧 부활케 하시는 하느님의 초월적인 권능을 무시했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25장 5-10절에 나오는 ‘수혼법’을 예로 들면서, 합리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하여 하느님의 부활의 능력을 마치 죽은 사람을 원래대로 죽기 전의 생활로 되돌려놓는 정도로 여깁니다.
그래서 부활한 상태의 초월적인 실재인 부활체를 마치 육체를 지닌 존재로 보고서 지상에서의 삶과 동일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활한 영적 존재는 “마치 천사와 같아 시집가는 일도 장가가는 일도 없고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고 하시면서, 그들이 믿고 있는 <모세오경>의 <탈출기>(3,6)를 인용하여 그들의 영적 무지를 깨우치십니다.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주었다.”
(루카 20,37)
이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이 비록 죽어 과거의 인물이 되었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살아 있는 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다.”
(루카 20,38)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산 이들의 하느님’으로서, 인간을 ‘새롭게 변화된’ 부활체로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이러한 새롭게 변화된 부활체에 대해서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인들에게 이렇게 설명해줍니다.
“우리 모두 다 죽지 않고 변화할 것입니다.
~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1코린 15,51-52)
그렇습니다.
우리는 믿는 이들입니다.
진정 믿으면, 신적 지혜가 열릴 것입니다.
그리고 자유와 해방이 올 것입니다.
불신은 우리를 끝없이 속박할 뿐이지만, 믿음은 우리를 진리에로 이끌어갈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곧 믿음이 해방을 가져올 것입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을 믿기에 부활을 믿는 우리>
'그때에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물었다.'
(루카 20,27)
사두가이들이 부활이 없다고 주장했다는 글을 읽으면서 그들은 왜 굳이 주장까지 할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요즘의 저는 제가 주장하는 것도 싫어졌지만 남이 주장하는 것은 당연히 더 싫어졌습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옛날에는 저도 주장을 많이 했다는 얘기이고, 요즘 그것이 싫어진 것이 나이 먹어 철이 든 때문인 것 같아서 이 점에 대해서는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저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주장하는 것은 아무리 좋은 내용의 주장일지라도 좋지 않다고 저는 생각하고, 주장해서는 얻는 것도 별로 없다고 또는 역효과라고 생각합니다.
주장(主張)이란 내가 주장(主將)이 돼서 주장하는 것이고, 그러니 다른 사람들을 객으로 만드는 것이며,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기가 주장이 되어 주장해대면 좋아할 사람 어디 있고 누가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리고 주장은 이런 것이기도 합니다.
곧 주장하지 않아도 받아들이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주장하지 않습니다.
주장해야지 받아들일 수 있다고 착각하는 미성숙한 사람이 주장합니다.
설득력이 있는 사람은 설득하지 주장하지 않습니다.
행동으로 설득하는 사람은 더욱 주장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사랑하게 하는 사람은 더더욱 주장하지 않습니다.
아무튼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성숙한 사람이나 좋은 사람이 못 되고, 교만하거나 공동체의 일치와 성장을 저해하는 분열주의자일 가능성이 큰데, 그런데 이들은 왜 굳이 부활이 없다고 주장해야만 할까요?
이왕이면 부활이 있다고 믿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부활을 믿고 싶지 않은 특별한 이유가 있거나 부활이 없다는 믿음이 진리에 기반한 것이기에 그러는 걸까요?
저라고 부활이 있는지 어떻게 알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죽었다가 살아나지 않았으니 본 사람처럼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실 봤기에 믿는 것이 아니고 눈으로 본 사람은 믿을 필요가 없지요.
봤기에 믿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기에 부활도 믿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신 분이시며 영원히 살아계시는 분이시니 하느님 안에 있으면 우리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것이고, 죽었어도 죽은 것이 아닐 것이며, 그러니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부활도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루카 20,38)
그러므로 저는 하느님께서 저를 이 세상에서만 살다 죽으라고 창조하지는 않으셨다고 믿기로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언제나 생명을 주시는 분>
과거, 현재, 미래가 다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미래를 더 소중히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약속해 주신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과거에 묶여 삽니다.
미래가 없는 것처럼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미래에 잘못 집착해서 오늘을 인색하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과거를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미래를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면서, 오늘을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약속된 미래가 오늘을 통해서 오기 때문에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오늘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약속된 미래는 여기서부터 완성됩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미래가 없이 오늘에 매여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현실에 밝아 자기 잇속을 챙겼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되었습니다.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습니다.”(1코린 2,9)하며 약속된 부활의 삶을 확인시켜 줍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몸소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우리에게도 새 생명에 대한 희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따라서 부활에 대한 희망 안에 있는 사람은 지금 여기서부터 부활의 생명을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부활을 믿는 이는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닥치더라도 견디어 냅니다.
그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그분의 약속을 믿기에 현세적인 것보다도 영적인 것에 더 마음을 씁니다.
잠시 스쳐 지나가는 현세적인 것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약속된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가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희망하십시오.
그리고 씨를 뿌리십시오.
눈물로 씨 뿌리면 곡식 단 들고 올 제 춤추며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것에 마음을 두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이미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고 약속에 충실하신 하느님으로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그분께서 명령하시면 뜻하시는 바가 모두 이루어지고 아무도 그분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막지 못한다.”(집회 39,18)고 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그 약속을 믿고 사는 이에게 언제나 살아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산 사람들의 하느님이라는 말은 결국 깨어 있는 이에게 능력의 하느님으로 다가오신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 의지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다만 우리의 마음이 흔들비쭉일 뿐입니다.
이 시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으로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게 되길 기도합니다.
또한 하느님을 모시듯 하느님의 피조물들을 존중하고 배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본향은 하늘이고, 지금, 이 세상 삶은 소풍입니다.
소풍 끝나는 날 하느님을 대면할 것입니다.
사랑으로 산 삶이 기억될 것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부활에 참여할 자격을 인정받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1)
사도행전 23장을 보면,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이 논쟁을 벌이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원들 가운데 일부는 사두가이들이고 일부는 바리사이들이라는 것을 알고, 바오로는 최고의회에서 이렇게 외쳤다. "형제 여러분, 나는 바리사이며 바리사이의 아들입니다.
나는 죽은 이들이 부활하리라는 희망 때문에 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바오로가 이런 말을 하자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면서 회중이 둘로 갈라졌다.
사실 사두가이들은 부활도 천사도 영도 없다고 주장하고, 바리사이들은 그것을 다 인정하였다.
그래서 큰 소란이 벌어졌는데, 바리사이파에서 율법학자 몇 사람이 일어나 강력히 항의하였다.
"우리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잘못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영이나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면 어떻게 할 셈입니까?"
(사도 23,6-9)
사두가이들도 하느님을 믿었고, 유대교에 속해 있었지만, 부활을 안 믿었고, 천사나 영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대체 무엇을 믿었던 것일까?
무엇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했던 것일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그들은 현세적인 복을 얻어 누리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했고, 현세적인 소원을 빌기 위해서 하느님께 기도했습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교 신앙인들 가운데에도 일부는 신앙생활을 그렇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세, 부활, 구원,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 갖지 않고, 현세에서 복을 얻어 누리는 것만 생각하고, 눈앞에 있는 일에 대한 소원만 빌면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이들도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1코린 15,17-19)
여기서 ‘불쌍하다’는 ‘어리석다’이기도 합니다.
현세만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2)
우리가 ‘부활’을 믿는 이유는 아주 단순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신 것이 분명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 사도들과 신자들의 증언을 믿기 때문에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다음에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아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1코린 15,3-8)
부활 신앙은 어떤 학문적인 이론도 아니고, 논리적으로 만들어 낸 것도 아니고, 아주 생생한, ‘살아 있는 체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믿고, 예수님처럼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부활 신앙’입니다.
3)
예수님 말씀에서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이라는 말씀은 ‘아무나’ 다 부활하는 것은 아니고, 자격을 인정받는 사람들만 부활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그 자격을 얻는 일입니다.
부활을 믿는 것도 중요하고, 부활 후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부활에 참여할 자격을 얻는 것, 그 자격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 자격을 얻지 못해서 부활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다면, 믿는 것과 아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밖에서 구경만 해도 되는 나라가 아니라, 안에 들어가서 살아야 하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의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은 밖에서 구경만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영원히 ‘소멸’됩니다(묵시 20,15).>
신앙생활은 구경만 해도 되는 생활이 아니라, ‘믿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신앙과 생활이(삶이) 완전히 하나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부활신앙, 부활희망 -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 삶의 시작이다>
오늘 옛 어른의 지혜도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떳떳함은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고자 매사를 삼가는 간절함에서 나온다."
<다산>
"그대가 방에 홀로 있을 때, 방구석에서도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보는 사람이 없다고 말하지 마라."
<시경>
주님 앞에서 늘 깨어 살라는 말씀입니다.
더불어 요즘 저를 계속 행복하게 하는, 만추의 불암산을 바라보며 애송하는 짧은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늘
앞에 있는 산
늘
앞에 있는 당신
이
행복에 삽니다"
<2024.10.25>
11월 위령성월, 얼마전 만추의 아름다운 단풍잎들 가득 덮인 수도원 뜨락의 황홀한 풍경을 보며 시화詩畫를 만들었고, 많은 분들과 “죽음도 축제일 수 있겠다”란 시를 나눴습니다.
“별들이 땅을 덮었다
땅이 하늘이 되었다
단풍나뭇잎들
하늘향한 사모의 정 깊어져
빨갛게 타오르다가
마침내 별들이 되어
온땅을 덮었다
땅이 하늘이 되었다
오!
땅의 영광
황홀한 기쁨
죽음도 축제일수 있겠다”
<2024.11.20.>
또 11월 위령성월에 자주 불러보는 11월1일 모든 성인의 대축일 저녁 성무일도 시 마리아의 노래 후렴도 생각납니다.
“성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기뻐하는 그 나라가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흰옷을 입고 어린양을 따라가는도다.”
부활신앙이, 부활희망이 우리를 살게 하는 궁극의 힘입니다.
죽음이 결코 끝이 아니라 새 삶의 시작이라는 고백입니다.
누구에게나 피할 수 없는 죽음입니다.
위령성월 11월 곳곳에서 죽음 소식도 계속 들려옵니다.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는 사부 성 베네딕도 말씀도 자주 생각이 납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부활의 새 생명을 이야기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부활 희망의 기쁨보다는 두려움과 불안중에 죽음을 맞이합니다.
죽음을 체험할 수도 없거니와 죽어서 살아 온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새삼 부활의 희망과 기쁨중에 선종의 죽음을 맞이한다면 남은 이웃에 이보다 더 좋은 선물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오늘 복음은 ‘부활논쟁’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두가이들은 부활을 믿지 않으나 예수님과 바리사이들은 부활을 믿습니다.
부활이 아니라 죽음이 끝임을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은 예수님께 어려운 문제를 제시하며 답을 요구합니다.
일곱 형제가 한 여자를 아내로 삼아 살다가 모두 후사를 남기지 않고 죽었다 부활한 후 이 여자는 일곱 형제 중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는 거의 있을 수 없는 가상적 질문을 합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그들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니 순전히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부활이 답임을 분명히 천명하십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 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이미 현세에서 세례성사로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살아나 파스카의 부활의 삶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이미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의 천상의 삶을 미리 앞당겨 살고 있는 셈이 됩니다.
주님은 탈출기 3장6절을 인용하여 사두가이들에게 부활의 타당성을 확인시켜 줍니다.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가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사람 눈에 죽음이지 하느님께는 모두가 살아있다는 것이니 바로 부활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제1독서 묵시록의 순교자들을 상징하는 두 증인도 부활로 이어집니다.
“이리 올라오너라.”하고 외치자 그들은 원수들이 쳐다보고 있는 중에 구름을 타고 올라갔으니 죽음이 끝이 아닌 부활의 새생명이 시작됐음을 보여줍니다.
교회는 미사경문을 통해 부활을 명백히 고백합니다.
“부활의 희망 속에 고이 잠든 교우들과 세상을 떠난 다른 이들도 모두 생각하시어 그들이 주님의 빛나는 얼굴을 뵈옵게 하소서.”
<감사기도 2양식>
“성자께서 죽은 이들의 육신을 다시 일으키실 때에
저희의 비천한 몸도 성자의 빛나는 몸을 닮게 하소서.
세상을 떠난 교우들과 주님의 뜻대로 살다가 떠난 이들을
모두 주님의 나라에 받아들이시며
저희도 거기서 주님의 영광을 영원히 누리게 하소서.
저희 눈에서 눈물을 다 씻어 주실 그때에 하느님을 바로 뵈오며
주님을 닮고 끝없이 주님을 찬미하리이다.”
<감사기도 3양식 중 위령미사 시>
미사 중 위령감사송 1양식 중 다음 대목도 은혜롭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복된 부활의 희망을 주셨기에
저희는 죽어야 할 운명을 슬퍼하면서도
다가오는 영생의 약속으로 위로를 받나이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이 우리에게 부활신앙을, 부활희망을 선사하며 우리를 위로하고 치유하며 이미 지상에서 천상의 부활을 앞당겨 영원한 삶을 살게 합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도 천상탄일의 축제일 수 있겠습니다.
여러번 나눴습니다만, 저는 그래서 장차 있을 저의 장례미사 축제 중 입당성가는 “오 아름다워라”(성가 402장)로, 퇴장성가는 성 프란치스코의 “오 감미로워라”를 내심 생각하며 부탁할 마음입니다.
강론 대신에 ‘하루하루살았습니다’라는 제 좌우명 자작 고백기도시를 읽어달라 부탁하려 합니다.
이 또한 좋은 죽음 준비라 믿습니다.
날마다 이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고해인생을 축제인생으로 만들어 주며 이미 지상에서 천상의 부활의 삶을 앞당겨 살게 하십니다.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네.”
(2티모 1,10)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현세의 삶을 더 적극적으로 사랑하며 살도록 만들어 줄 때만 올바른 부활신앙>
여러분은 결혼하셨나요?
아님, 미혼이신가요?
결혼은 했지만 사별이든 이혼이든 홀로이신가요?
결혼하셨다면 다음 세상이 있다면 또 결혼하시겠어요?
또 지금의 배우자와 살고싶나요?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릴 하냐구요?
저는 결혼을 안 해 봤지만 다시 태어나도 꼭 결혼을 하고싶다는 생각은 없어요.
아마 그런 인연이 맺어질 수도 있겠지요?
사실 이런 이야기들이 모두 부질없는 이야기인 줄 잘 알지만, 죽어서 다른 세상이 있다면 지금과는 다른 더 멋진 삶을 살고싶다는 작은 꿈들이 있기에 해 보는 소리일 겁니다.
내가 살아 온 삶이 멋지다 하여도 누구나 아쉬움과 미련은 있기에, 저 세상이 있다면 더 멋지게 아름답게 사랑하며 살고싶다는 내면의 갈증이 그런 환상을 그리게 하는지도 모릅니다.
꿈을 깨야 합니다.
환상을 깨뜨려야 합니다.
미완의 현실에서 도망치며 죽음 이후의 새 세상만 꿈꾸는 것이 부활신앙이 아닙니다.
미래의 완성된 삶으로서의 하느님 나라는 현세에서 도망치면서 다다를 수는 없습니다.
부활신앙은 현세의 삶을 더 적극적으로 사랑하며 살도록 만들어 줄 때만 올바른 부활신앙입니다.
그러니 지금 나의 처지와 신분 안에서 더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사람이 진정 부활신앙을 사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죽은 이둘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나 자신의 삶을 치열하게 사랑합시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서 인연을 맺어주신 이들을 더 치열하게 사랑하는 날 되시길 축원합니다.
그리하여 내세의 부활과 천국의 삶을 벌써 지금 여기에서 맛보는 기쁨을 누리시길 두손 모읍니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기억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같은 내용이지만 이름에 따라서 의미가 무척 다르게 다가옵니다.
같은 사람인데 ‘개똥이’라고 부르면 왠지 가볍게 느껴집니다.
흔하게 느껴집니다.
같은 사람인데 ‘우주’라고 부르면 왠지 귀하게 느껴집니다.
크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예전에 어른들은 아이의 이름을 정할 때 신중하였습니다.
기업에서도 제품의 이름을 정할 때 막대한 비용을 기꺼이 지출합니다.
그만큼 이름이 매출에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도요타는 성능과 품질에 비해서 저렴하게 취급받았습니다.
도요타는 자동차의 브랜드를 아예 ‘렉서스’로 바꾸었습니다.
같은 도요타의 자동차이지만 렉서스는 미국에서 성능과 품질은 물론 가격에서도 충분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이름을 바꾸었을 뿐인데 인식이 바뀐 겁니다.
미국에서 현대도 성능과 품질에 비해서 저렴하게 취급받았습니다.
현대는 자동차의 브랜드를 아예 ‘제네시스’로 바꾸었습니다.
같은 현대의 자동차이지만 제네시스는 미국에서 성능과 품질은 물론 가격에서도 충분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이름을 바꾸었을 뿐인데 인식이 바뀐 겁니다.
본당 설정 50주년을 준비하면서 ‘건축위원회’가 발족했습니다.
다양한 의견이 나왔습니다.
‘사제관과 수녀원 건축, 체육관 건축, 교리실 확장, 축구장 설치, 납골당 건축’과 같은 의견이 제시되었습니다.
건축위원회는 ‘왜’라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50주년을 맞이해서 필요한 시설을 만드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왜’ 시설을 만드느냐였습니다.
건축위원회는 두 가지를 제시하였습니다.
하나는 찾아오고 싶은 성당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40년을 광야에서 지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향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땅은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땅이었습니다.
50주년을 맞이해서 만들어지는 시설은 교우들이 언제나 다시 찾고 싶은 성당이 되게 하자는 의미를 담자고 하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후손들에게 물려 줄 수 있는 성당입니다.
타주로 이사를 갔어도, 한국으로 갔어도 다시 올 수 있는 성당이 되게 하자는 의미를 담자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가는 이유는 그곳에 예수님의 발자취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서 십자가를 지셨고, 그곳에 예수님의 무덤이 있고, 그곳에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취지에서 ‘납골당’에 대한 의견이 있었습니다.
저는 납골당이라는 이름 대신에 ‘추모관’이라고 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납골당이라고 하면 뼈를 모아 놓은 곳처럼 느껴집니다.
추모관이라고 하면 기억이 담겨 있는 곳처럼 느껴집니다.
저를 지탱하는 건 61년 동안 살아온 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를 지탱하는 건 몸이라는 육체와 더불어 61년간의 기억입니다.
기억은 가족과의 관계, 친구와의 관계, 사랑하는 이와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를 연결해 줍니다.
기억은 절망 중에도 희망을 줍니다.
기억은 두려움 속에서도 담대함을 줍니다.
기억은 슬픔 속에서도 위로를 줍니다.
기억은 어쩌면 존재의 근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의 기록과 나의 작업이 삭제된 컴퓨터는 그냥 컴퓨터이지 나의 컴퓨터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식사를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해서 내어 줄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성체성사는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기억입니다.
성체성사는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오늘 독서는 구약의 두 인물을 기억해 냅니다.
율법의 상징인 모세와 예언의 상징인 엘리야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율법과 예언으로 시작되었지만, 우리의 신앙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완성된다고 이야기합니다.
‘부활’은 상태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부활의 상태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저는 부활의 상태도 중요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기억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한다면 바로 지금이 부활의 때입니다.
부활의 진정한 의미는 절망에서 희망으로,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다시 일어서는 겁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세상의 기준으로 하느님을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I를 인간의 새로운 지배자라고도 부릅니다.
어디에 살든 불가해한 알고리즘으로 짜인 거미줄 속에 갇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알고리즘들이 우리의 삶을 관리하고, 우리의 정치와 문화를 재편하며, 심지어 우리의 몸과 마음까지 재설계하면서 힘을 잃게 만듭니다.
이 말을 이해하기 힘들다면, 유튜브를 생각하면 됩니다.
만약 스포츠 관련 영상을 찾다 보면 계속 첫 화면에 스포츠 영상만 나옵니다.
‘보수’ 정치 관련 영상만을 찾으면, ‘진보’ 정치 관련 영상은 전혀 볼 수 없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스포츠만 좋아하고, 보수 정치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이 과정 안에서 스포츠 싫어하는 사람과 충돌을 일으키고, 진보 정치에 관심이 있는 사람과 다투게 됩니다.
이렇게 AI가 우리의 생각을 다스릴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본 것이 진실이라 생각하지만, 현실을 온전히 담아낸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AI에 의지해서 사는 삶이 아닌 진실로 나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AI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자기가 보고 들은 것만이 진실이라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족한 자기의 머리에서 나오는 생각으로 함부로 판단하고 단죄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야 다양한 방법으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일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 뜻에 맞게, 또 하느님과 함께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몇 사람의 질문이 이어집니다.
질문은 이 세상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어른이 되면, 짝을 만나 혼인을 하는데, 이 복잡한 인연의 고리가 저세상에서 어떻게 정리될 수 있는지를 예수님께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복잡한 인연의 고리는 정리될 수 없기에, 예수님이나 바리사이들이 말하는 부활은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관점으로 하느님을 이해하려고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가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는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고 하시지요.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십니다.
결국 그 나라는 온전한 기쁨만이 가득한 세상입니다.
단순히 이 세상의 연장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하느님을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기준만을 따르다 보면 하느님을 제대로 알 수 없고, 존재하지 않는 하느님을 만들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뜻인 사랑에 중심을 맞췄을 때, 우리와 늘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제대로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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