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성경의 구원개념
성경으로 말씀하시는 구원의 개념에 대하여 알아보면 먼저 일반적 사회적 구원의 개념이 있습니다. 통칭으로 일반적 구원의 개념은 항상 어려운 사건이 앞섭니다. 예를 들면 물에 빠졌다거나 불 속에 있다거나 죽음 직전에 있었는데 119구조대가 와서 건져 주었다 이래야만 구원의 용어가 붙습니다. 사건이 먼저 오지 않으면 구원이 붙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우리의 구원은 영원 전, 창세 전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구원은 인간을 만들기 전, 세상을 만들기 전이었으니까 죽는 사건이고 뭐고 없는 구원입니다. 일반적인 사회적인 구원의 개념하고는 다른 뜻을 가집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리스도로 만들어진 그 실력을 가지고 하나님이 주시는 그 신령천국에서 하나님처럼 실력껏 마음대로 누림입니다.
좀 더 자세하게 말씀드리자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것은
1. 동기는 천국으로 당신이 누리시는 이 좋은 신령천국을 누구에게 줄꼬! 여기에서 사건선택이 나오고.
2. 원인은 사랑으로 나와 비슷한, 나와 같은 존재(인격성)를 만들자! 여기에서 존재선택이 나옵니다.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고’ - 사람은 사람 차원에서 완전하게 만들었습니다. 지혜 지식성이 있는 자로, 도덕성이 있는 자로, 능력성이 있는 자로, 지혜 지식, 선, 사랑, 거룩, 진실을 가진 자로 만들었습니다. 영이 있는 자로, 육이 있는 자로, 영과 육이 결합된 인간으로 지었습니다. 그러나 지음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본질에 비하면 100% 본질이 똑같은 것이 아니라 이질입니다.
여기서 이질이라는 말은 나쁘고 악하다는 의미가 아니고 하나님의 본질하고는 다르다는 말입니다. 죄에 물들여진 이질이 아니라 자연인으로서 다르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개는 개 차원에서 개는 개대로 완전하게 만들었듯이, 새는 새대로 새라는 차원에서, 고기는 고기대로 고기라는 차원에서 완전하게 만들었듯이 인간은 인간의 차원에서 영육 결합으로 인격을 가진 자로, 자유성을 가진 자로, 심판성이 있는 자로,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는 자로 완전하게 만들었습니다. 인간 외에는 다른 그 어떤 유능한 짐승에게도 이 특수성은 없습니다. 이렇게 사람을 당신의 형상대로 지었습니다.
인간이 비록 선악과를 따먹고 영이 죽었고, 육은 점차적으로 죽어가지만 시대를 초월하여 노아, 아브라함, 다윗 등등 구원 얻기로 그리스도 안에 예정되어 있는 자들은 이미 구원을 얻었으니까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앞으로 오실 구원자 메시아를 믿고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이 말은 그들이 앞으로 오실 메시아를 바라보면서 ‘예수님이 오시는 그 날, 아니면 십자가에 죽는 그 날이 딱 되면 우리가 구원될 것을 믿습니다’가 아니라 앞으로 오실 메시아를 믿었으면 그 즉시 구원을 얻었다는 말입니다.(에녹, 엘리야의 승천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구원 얻은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기로, 천국을 얻기로, 천국을 받기로, 천국을 누리기로 예정된 자는 앞으로 오실 메시아를 믿었건, 지금 우리처럼 오신 메시아를 믿고 있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모두 그리스도로 통해서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구원을 얻었다 하면 항상 기본구원을 전제로 합니다. 내용은 사죄 칭의 새 생명이 항상 전제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독권적 사역입니다.
지금 우리 인간들은 과거 현재 미래로 표현하나 하나님 당신의 입장에서는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항상 현재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이십니다. 한 눈으로 보시는 원형이십니다. 시간개념이 없습니다.
왜 복잡하게 우리 인간을 시간 속에 두어 시간개념을 주었을까? 그것은 우리가 시간 속에서 되어져야할 성화구원, 이룰 구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또 그리스도 안에 든 것입니다.
성경 전체를 이 눈으로 보지 않으면 기독교는 하나의 종교적 역사가 되어버리고, 그렇게 가르치게 되고, 성령의 역사를 귀신들의 활동처럼 연상하게 되고, 예수의 활동은 일반 도덕성적으로 돌려놓는 그야말로 그 좋은 신령하고 특수한 하나님의 역사인 기독교를, 예수 그리스도를, 천국복음을 완전히 쭈그러뜨리고 망가뜨려 놓는 사망운동을 하게 돼 하나님의 대 심판을 받게 만드는 꼴이 됩니다.
성화구원에는 존재가 필요하고,(선악간에 모든 존재를 말함) 시대적인 역사가 필요합니다.(모든 사건 환난 핍박도, 인위적인 재해, 자연재해 하나님의 재앙 등)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통하여 그리스도를 입히되 진하게 실력적으로 능력적으로 입혀 부활시켜서 신령천국에서 하나님 당신처럼 실력껏 능력껏 기쁘게 즐겁게 충만케 그 행복의 극치의 누림이 영원히 계속되도록 하려는 이것이 목적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들어 있는 구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원인 동기 목적이 다 나왔습니다. 이것이 인간을 만드시게 된 목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이 선을 위해서 지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화구원은 궁극적 개념이기 때문에 선의 개념이라든지, 악의 개념이라든지 그 개념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지금 성경을 보는 개념이 거의가 일반 사회적 도덕적 개념, 일반 역사적 개념으로 보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령에 감동되어 쓰여진 성경을 성령에 감동 감화로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진리이치 생명이치, 심지어 도덕이치까지 말살되고 있습니다.
자, 이제 구원의 개념으로 돌아가서 그러면 어려운 사건을 만나 구원을 받는 그 구원이 성경에 없느냐? 많이 있습니다.
1. 베드로가 바다에 빠졌을 때 예수님께서 구원해 주셨고.
2. 병에서 나음을 받는 구원.
3. 귀신이 쫓겨나가는 구원.
4. 전쟁의 패배에서 승리를 얻는 구원.
5. 이런 구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죄와 허물에서 하나님의 선물로 얻어지는 구원.
6. 그것만 아니고 또 삭게오는 병도 안들었는데 얻는 구원. 이스라엘로서 얻는 구원.
7. 기생 라합과 온 집안이 얻는 구원도 있고.
8. 또 이런 구원도 있습니다. 너희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
9.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얻으리라.
10.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1. 신령천국에서 구원 얻은 성도들의 찬송에서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하는 구원이 있고.
12. 애굽에서의 탈출구원, 바벨론에서 70년간 포로생활 후에 고향으로 돌아오는 구원.
이처럼 성경에 보면 별별 구원이 다 있습니다.
아무리 구원이 많아도 제목을 붙인다면 첫째는 기본구원입니다.
이 기본구원에 속한 구절은 믿는 자에게 과거사로 하나님의 예정 계획안에 들어 있는 주권적이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이루어지는 단독적인 구원입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그랬는데 우리가 언제 죽었었느냐? 지금 살아 있는데! 영은 즉시 죽었고 이성과 몸은 죽어가고 필연적으로 죽을 것인데, 결국 죽었고. 이런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죄 칭의 새 생명으로 우리의 죽었던 영을 살렸고 - 예수 그리스도를 지금 믿고 있는 자는 다 살렸고 - 영을 순간적으로 살렸고. 어느 질(質)로 살렸느냐? 가사성, 가범성을 지닌 창조 당시의 영의 차원으로 살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본질을 닮은 영원히 죽지 않을 영으로, 악한 자가 만지지 못하도록, 신의 성품에 참여자로! 진리와 성령으로 거듭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입혀진 우리의 몸은 성전이라! 하나님이 죽지 않는 한 성령이 내재해 계시는 우리의 중생된 영은 영원히 죽지 않는 하나님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는 영입니다. 이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입니다.
아담의 범죄 전 무죄상태 즉, 의인도 아니고 악인도 아닌 - 의인은 의를 행해야 의인이고, 악인은 악을 행해야 악인입니다 - 무죄상태인 그 때도 그리스도의 구속이 필요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어떠한 모양으로서든지 그리스도의 구속이 필요한 것입니다. 무죄상태의 영은 어디까지나 이질적이지 하나님의 본질은 아니고, 아담의 육신은 물질이지 부활체는 아닙니다. 에덴동산은 시간이 가고 있고 하나님께서 6일 동안 만드신 물질세계이지 신령천국은 아닙니다. 아담의 영도 천국으로 들락날락하지 못했습니다. 계시적으로 이 세상은 타락된 천국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에덴동산에서 인간이 번성하며 영원히 살도록 만들었는데 그만 인간의 자유가 들어 범죄를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본래 목적의 계획이 틀어져 버리고 실패된 것처럼 생각들을 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된 인간을 그 상태로 다시 회복하는 것처럼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특히 계시록을 보면 에덴동산 회복이 아니고 그 이상입니다. 에덴동산 회복처럼 보이는 것은 또 다른 계시사상이 있습니다.
예수 믿은 성도의 부활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천년왕국 그 이후에 무궁세계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기본구원을 입히실 때 마귀가 기본구원을 입지 못하도록 그리스도의 주권을 방해할 수도 없습니다. 그럴만한 능력도 주권도 없습니다. 이 기본구원을 그대로 믿고 기본교리적 신앙을 확고히 갖고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성화구원이고.
세 번째는 부활구원입니다. 부활구원도 하나님의 독권적 주권적인 역사이니 사단 마귀가 자기의 주권과 능력을 가지고 ‘부활하지 마라, 부활 못 시킨다’ 하며 명령하고 가로막지 못합니다.
네 번째는 영화구원인데 신령천국에서의 영원한 누림을 말하는 것이니 이 때는 사단 마귀를 다 없이 한 후이니까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제일 크게 신경을 쓸 문제는 기본구원을 얻은 다음에 우리가 진리와 성령의 영감으로 성경을 깨닫고 유기적으로 이루고 가야할 이 성화구원이 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성화구원, 이룰 구원에서 신령계의 존재와 물질계의 존재와 사건과 환경과 시간과 모든 것이 다 동원이 됩니다. 지금 이 시간에 나도 동원되고 여러분들도 동원되고, 궁극목적의 구원을 위해서 건설적으로 동원이 되었습니다. 비상이 걸려서 동원이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앞에서도 언급을 했듯이 가난도 부요도 미움도 사랑도 권고도 명령도 전쟁도 평화도 사건도 죽음도 가정도 사회도 국가도 오각의 오감성도 희로애락의 느낌도 춤도 노래도 이적과 기사도 지연적 재앙도 인위적인 재앙도 천군 천사들의 활동도 마귀도 사단 귀신 악령도 동원 안 시키시는 것이 없습니다. 왜? 성경을 깨닫고 사람 좀 만들어지자고!
예수 믿는 그 날로 당장 천국으로 데려가지 않고 이 나그네 세상 잠깐이지만 편하게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하며 주님 닮은 사람으로 만드시는데 벌써 오늘도 하루해가 다 지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성경은
1. 예수 믿는 자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고.
2.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고.
3. 하나님의 온전을 닮은 자들이 보는 것이고.
4. 이룰 구원, 성화구원을 이룬 자들이 보는 것이고.
그래서 이 성경은 다 우리, 나에게 주는 것입니다.
아직 예수를 안 믿고 있고, 아직 영이 죽어 있고, 예수님을 싫어하는 자들은, 말씀을 싫어하는 자들은 성경을 손에 들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는 사람은 옛 사람, 선악과 따먹은 그 정신, 그 소원 목적, 그 취미성, 그 간구성 그대로 갖고 있습니다. 물질에 소원 목적, 임시적인 세상에서 누림의 목적, 먹고 마시고 놀고 편안히 살다가 가는 것, 부피 크고 덩어리 큰 것 많이 가지는 것, 눈으로 보기에 먹음직 보암직 탐스러운 것, 짐승처럼 본능으로 사는 것 등등 이런 것을 부러워하고 좋아하고 잡으러 가고 좇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은 이 주격성으로 삽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기본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옛 사람과 새 사람이 분류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 믿는 사람 속에서 두 성분이 나타나게 되는데 새 사람 주격으로 살게 되면 영이 잘 되기를 바라고,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찾고, 진리이치의 깨달음을 찾고, 하나님의 의사성을 자기의 의사성으로, 하나님의 소원 목적을 자기의 소원 목적으로, 이 온전히 되는 일이 하나님의 일인 줄 알고 이 일에는 자신의 육신의 안일보다도 적극적으로 합력하고 동참을 하고 협력을 하여 하나님께 수종을 듭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이렇게만 사는 것이 아니라 육신적이고 세상적이고 임시적인 소원 목적을 따라 살기도 합니다. 이처럼 예수 믿는 사람이라도 옛 사람이 주격이 되어 활동을 했다가, 새 사람이 주격이 되어 활동을 했다가 합니다.
만일의 경우 옛 사람이 주격이 된 상태에서 자기가 왕이 되어 큰 종교적 단체를 조직하여 세상이 부러워할 깜짝 놀랄만한 어떤 큰 종교적 이력과 업적을 남겼고 명예 영광을 얻었다고 해도, 주의 이름으로 이적 기사를 일으키고 선지자 노릇을 했어도 이는 전부 다 사망성공 한 것이요, 그렇게 가르치고 교훈한 것은 전부는 선악과를 따 먹이는 가르침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끝 절까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가죽옷을 입은 이후 옛 사람이 주격이 된 역사의 활동과 그 결과를 보여주고, 또 새 사람이 주격이 된 그 역사의 활동과 그 결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기가 성경을 계시적인 신앙사상으로 보지 못하면 성경을 하나의 종교적인 역사로만 만들게 되고, ‘성경 역사 속에 이런 인물이 있었다. 우리도 노아를 본받자, 아브라함을 본받자, 다윗을 본받자’ 하며 열심히 가르치고, 그런 사람을 따라가자고, 그런 믿음을 갖자고 별별 행사를 치르고 느끼려고 해도 그것은 불가능입니다.
예를 들면 노아는 심판의 물아래 신앙이 아닙니다. 세상 물질을 발아래 밟은 신앙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의의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설계대로 방주를 짓는 삶이었습니다. 그 삶 자체가 계시 사상적으로 인간의 설계가 아닌 하나님의 설계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세상지식 교훈이 아닌 삶을 살아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물질선 인정선 생명선을 다 초월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전체를 죽이려 드는 블레셋의 골리앗 사상을 죽인 것이 보여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속에 있는 두 가지 성분을 모르면 자기는 예수 이름 가지고 무슨 짓을 하고 가게 되겠느냐? 아무리 사명감을 가지고 목숨 바쳐 충성 봉사를 했어도 수십 년, 평생을 믿었어도 성경 한 절 못 깨닫고 자기 하나 반듯하게 못 고치고 가는 것입니다. 불쌍하고 처절한 자입니다. 성경의 믿음의 사람의 이름을 자기 이름으로 지어 부른다고 해서 신앙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화구원에서 제일 경계해야 할 것은 예수 안 믿는 불신세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종교적인 세계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사단 마귀 귀신 악령들의 활동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중에서 옛 사람이 주격이 되어 예수 믿는 사람을 붙들고 고차원적으로 활동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예수에게서 조금 불교에서 조금, 유교에서 조금 미신에서 조금, 일반 도덕에서 조금 이렇게 혼합시키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세상이 인정을 해 주는 종교적 제도로 인정을 받고 ‘나도 기독교 복음이다, 나도 교회 인도자다’ 하며 ‘와와’ 하고 떠들고 나오는 현상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구복주의, 기독교 신비주의, 기독교 사회주의, 기독교 국가주의, 기독교 은둔주의, 기독교 현세주의, 기독교 세대주의, 귀신 좇아내자 하는 운동, 나가서 구원시킨다 하는 등등 조직화되어 나오고, 활동으로 나오고, ‘활동을 이래야 믿음이 들어간다, 기도를 이래야 성령을 받는다, 신유은사를 받는다, 목회는 이런 방식으로 해야 부흥된다, 저런 방식으로 해야 부흥된다’는 등 방법론을 아무리 쓴다 해도 전부는 옛 사람이 주격이요 전부는 육본주의요 인본주의입니다.
우리가 또 인도자들의 가르침을 들어보면 기준이 몇 가지가 있는데
1. 국가법을 기준하여 성경을 그 법에 끌어다가 가르치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2. 일반 도덕법을 기준하여 그 기준에 성경을 끌어다가 가르치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3. 일반양심을 기준하여 성경을 끌어다가 이용해 가르치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진리 따르는 양심이 아니면 양심도 사람마다 다 틀립니다. 양심은 지식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기준적인 지식이 정확하지 못할 때에는 그 양심도 정확하지를 못합니다. 예를 들면 진리 따르는 기독자의 양심과 불교의 도인의 양심은 다른 것입니다. 불도인의 양심은 부처를 신성시하고 그 앞에서 손을 모으고 빌고 공을 드리지만 기독교인은 성경지식의 양심대로 그걸 우상이라, 죄라고 말합니다. 제사를 하면 효자라 하지만 기독교인은 제사를 하면 우상이라! 그 지식에 의해 판단이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옳은 지식의 귀중성을 모르고 있습니다. 양심이 잘못된 지식의 지배를 받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일반 사람들의 양심은 선악과 따먹은 지식에서 나온 양심입니다.
4. 종교법을 기준하여 성경을 끌어다가 이용하여 가르치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기독교 안에서도 다릅니다. ‘예수 잘 믿어라!’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 잘 믿는 겁니까?’ ‘성수주일 잘 하고, 십일조 잘 하고, 성경 잘 보고, 전도 잘 하고, 기도 잘 하고’ 365일, 52주 이 강조 빼 놓으면 뭐가 있느냐? 이것이 믿음 좋고 신앙 좋은 잣대가 아닌가? 예수님 성육신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못해서 저주를 받았습니까?
‘너희는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했으니까 우리는 이 위에 더 올라가서 예수님의 인격, 하나님의 성품의 인격으로 만들어지는 의, 하나님의 말씀에서 진리이치 생명이치로 하나님 성품의 온전을 닮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적 내세주의 진리신앙입니다.
복음적 내세주의 신앙은 영원 궁극적 미래에서 되어질 일을 지금 현재 이 세상에서 구축을 하는 것인데 세상을 발아래 밟고, 물질을 발아래 밟고. 발아래 밟는다는 것은 물질세상은 이용물이라는 말인데 물질세상을 이용하고 활용하고 사용하여 나와 다른 사람의 성화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고, 이것이 우리가 세상에 사는 재세기간의 목적입니다. 부요이던 가난이던 환난 핍박이던 세상 물질풍조의 바람, 종교적인 유행바람이 어떻게 불던 상관이 없습니다. 사망아 오너라, 너의 쏘는 것이 무엇이냐!
우리가 이룰 구원, 성화구원을 잘 이루려면
1. 진리지식을 무시하면 안 되고.
2. 두 성분의 사람을 분별해야 되고.
3. 세상을 세상만큼 알아야 합니다.
세상은 나의 누릴 곳이 아니요 이룰 구원을 건설해 가는 곳, 신앙실력을 만드는 곳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성화구원을 이 세상에서 이루고 가게 되는데
1. 사람을 무시할 수 없고.
2. 사건을 무시할 수 없고.
3. 물질을 무시할 수 없고.
이런 것을 무시하려면 세상에서 떠야 합니다. 불가능입니다. 우선 자기 몸부터 물질이니까! 몸은 육체요 물질에 속하는 것인고로 물질과 관계를 지어야 합니다. 성화구원을 잘 이루는 것은 성경이치대로 연관관계성을 잘 갖는 것입니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