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osun.com : 생전의 최규하 대통령의 모습 월간조선 200701월호
글 : 吳東龍 月刊朝鮮 기자〈gomsi@chosun.com〉
사진 : 李泰勳 月刊朝鮮 사진기자〈where70@chosun.com〉
[월간조선 최초공개]
崔圭夏 前 대통령의 서교동 자택
崔圭夏 대통령은 연탄보일러,
30년 된 금성 라디오, 50년 된 나쇼날 선풍기,
하얀 고무신을 남기고 떠났다! - 2006.12.29 10:38
아침 5시면 일어나 포마이카 床에서 신문을 보며 스크랩을 하는 崔圭夏 前 대통령에게 응접실은 작업실이었다. 스크랩을 마치고 7시가 되면, 비서관들에게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전화로 아침 인사를 했다. 왼쪽 선풍기는 장녀 鍾惠씨와 동갑인 1953년산 일제 나쇼날선풍기다. 오른편에는 생산연도를 알 수 없는 석유난로가 놓여 있다.
玄石 崔圭夏(현석 최규하) 前 대통령이 지난 10월22일 서거했다. 기자는 지난 12월7일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崔 前 대통령의 자택을 찾았다. 유족인 차남 崔鍾晳(최종석?56) 하나금융지주 고문이 열쇠로 대문을 열어 주었다. 崔 前 대통령이 서거한 이후 외부인의 출입을 막았다가 이날 처음으로 月刊朝鮮에 문을 열어 준 것이다. 마당에는 목련?감나무, 덩쿨 장미가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사진생략>▲ 1979년 12월21일, 10代 대통령 취임식을 마친 후 총리공관으로 돌아와 환담하는 崔대통령 부부.
朴正熙 前 대통령 특보로 일하던 1973년, 종로구 명륜동에서 마포구 서교동으로 이사한 집에는 샘물이 있었다. 이곳에 물펌프를 박아 2004년 작고한 洪基(홍기) 여사가 직접 손빨래를 했다고 한다. <사진생략>대지 108평, 건평 97평의 서교동 자택.
崔 前 대통령은 1979년 제2차 오일파동 때 만난 장성탄광 광부들에게「나만이라도 끝까지 연탄을 쓰겠다」고 약속했고, 그 약속을 지켰다.
광부들과의 약속을 평생 지켜
洪여사는 崔 前 대통령이 장관 시절에나 국무총리 시절에나 가정부를 두지 않고 직접 빨래와 다림질을 하고, 반찬을 만들어 식탁을 차렸다고 한다. 총리 시절, 총무비서관이 『세탁기를 쓰시라』고 권하자 洪여사는 『손빨래도 못 믿는데, 어떻게 기계에 맡기냐』고 했다.
서교동 집에서는 아직도 연탄을 때고 있다.
『연탄을 구하기 어렵다』고 비서관들이 이야기하면 崔 前 대통령은 『연탄, 내가 구해 줄까?』라며 연탄보일러의 불이 꺼지지 않게 했다. 그것은 「광부들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1979년 제2차 오일파동 당시 국무총리였던 崔 前 대통령은 강원도 장성탄광 시찰을 갔다. 막장까지 들어갔던 그는 광부들이 힘들게 연탄을 캐는 모습을 보고 『나만이라도 애정을 가지고 끝까지 연탄을 때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켰다.
닳아빠진 흰고무신
<사진생략>외출할 때를 제외하고 崔 前 대통령은 고무신을 즐겨 신었다. 바닥이 닳은 태화고무신과 소박한 슬리퍼가 집주인의 검소함을 말해 준다.
출입문을 열자 흰고무신과 슬리퍼가 보였다. 崔 前 대통령이 서거하기 전까지 신던 「태화고무」 제품이다. 崔 前 대통령은 뭐든 닳아 없어질 때까지 사용했다. 막 삼우제를 지낸 터라 아직 유족들이 고인의 유품을 챙기지 않았다고 한다. 대지 108평, 건평 97평 규모의 서교동 자택은 1층엔 거실.응접실.안방.건넌방이 있고, 2층엔 崔 前 대통령의 서재와 운동시설, 방이 하나 더 있다.
崔 前 대통령이 거처하던 안방에는 빈소가 차려져 있었다. 응접실엔 脫喪(탈상)을 마치지 않아 아무도 출입하지 않은 상태였다. 崔 前 대통령 生前의 체취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崔孝洵(최효순) 비서관은 『집은 살 만하면 그만이라며 못 고치게 하셔서 거의 손을 못 댔다』면서 『4~5평에 불과한 거실이 손님을 맞기에 너무 비좁아, 퇴임 5년 후 겨우 7~8평으로 늘릴 수 있었다』고 했다.
<사진생략>2005년 8월 말 낙상해 대퇴부 골절을 당하기 전까지 崔 前 대통령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신문 스크랩을 했다. 스크랩을 하다 적을 것이 있으면 달력을 오려 만든 메모지(검정색 다이어리 밑에 있는 것)에 적었다. 검정색 다이어리에는 매일매일의 일정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崔 前 대통령은 한여름을 1953년産 「나쇼날」 선풍기와 부채로 났다. 崔 前 대통령이 『기름만 잘 치면 쓸 만하다』고 말하던 이 선풍기는 장녀 鍾惠(종혜)씨 나이와 같다. 창문에 매달린 구식 에어컨은 장남(胤弘?윤홍)이 미국 근무 시절 쓰던 것을 가져와 설치한 것이다. 에어컨 소리가 너무 커서 손님이 오기 전 켰다가 오면 아예 꺼버렸다고 한다.
崔 前 대통령이 늘 앉던 응접실의 중앙 소파. 그 옆에 놓인 크리넥스 티슈는 대통령이 방금 막 뽑아쓴 듯 사람들의 움직임에 따라 너울거렸다. 다시 그 옆으로 손 지압기, 살담배를 담아 피우는 곰방대 3개가 있었다. 崔 前 대통령은 1992년 담배를 끊었다고 한다. 崔孝洵 비서관은 『담배는 끊으셨지만 손때가 묻은 곰방대를 버리기 아까우셔서 두신 것 같다』고 했다.
<사진생략>崔 前 대통령이 서거하기 전까지 매일 뉴스를 듣던 금성RF-745라디오. 1970년대 초에 생산된 「골동품」이지만 소리는 들을 만했다.
<사진생략>崔 前 대통령이 응접실 중앙소파에 앉아 쓰던 손지압기. 재떨이에는 곰방대가 3개가 있다. 1992년부터 담배를 끊었지만 손때가 묻은 곰방대는 곁에 두었다. 요즘 찾아보기도 힘든 플라스틱 이쑤시개는 식사 후 늘 사용하던 것이다.
재활용한 플라스틱 이쑤시개
요즘에는 찾아보기 힘든 플라스틱 이쑤시개가 곰방대 옆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 崔 前 대통령은 식사 후 이 이쑤시개를 사용하고 나서 정성스럽게 닦아 재활용했다.
응접실 바닥에는 재래시장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3만원가량의 돗자리가 깔려 있었다. 추위를 막기 위해 난로와 석유곤로 2대를 사용했다.
서거하기 전까지 매일 뉴스를 듣던 라디오는 골동품 가게에서나 볼 수 있는 「금성RF-745모델」이다. 제조사인 LG전자(前 금성사) 측에 문의해 보니 『1970년대 초에 생산된 것』이라고 했다.
崔 前 대통령은 洪여사의 발병 후 자신의 건강에 더욱 신경을 썼다고 한다. 『내가 건강해야 아내를 잘 돌봐줄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책장 아래 여백공간은 崔 前 대통령의 「약장」이었다. 혈압약?혈압계?안약?「용각산」?탈지면까지 가지런히 정렬돼 있었다. 대부분 유효기간이 지난 약들이지만 그것마저 버리지 않았다. 가족들이 청소하다 약 위치를 바꿔놓으면 제 위치를 찾아 놓았다고 한다. 한밤중에 약이 필요할 경우를 대비해서였다.
<사진생략>崔 前 대통령은 책장 아래 여백공간을「약장」으로 썼다. 혈압약?혈압계?안약?용각산?탈지면까지 가지런히 정렬돼 있었다. 대부분 유효기간이 지난 약들이다.
<사진생략>보일러실의 연탄난로. 이 연탄불로 빨래를 삶고 물을 데워 허드렛물로 썼다. 오른쪽 돌절구는 洪基 여사가 생전에 사용하던 것이다.
의사 지시대로 20년간 다이어트
崔 前 대통령은 생전에 허리와 다리가 아픈 요각통을 앓았다. 말년에는 협심증으로 「救心(구심)」을 복용했다. 2005년 8월 말 응접실에서 落傷(낙상)해 우측 대퇴부 골절상을 입었다. 서울대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후 한 달 만에 퇴원했는데 거동에 많은 불편을 겪었다고 한다.
대통령 의전비서관을 지낸 申斗淳(신두순) 前 한국가스안전공사 감사는 『각하는 원래 무병 체질』이라고 했다. 협심증으로 약을 복용했지만 당뇨 증상은 없었다고 했다.
1980년 8월 퇴임 직후, 서울대병원에서 종합건강진단을 했다. 朴正熙 前 대통령 주치의를 지낸 閔獻基(민헌기) 서울大 명예교수가 담배를 끊고 다이어트할 것을 권했다. 崔 前 대통령은 閔박사가 짜준 다이어트 식단에 따라 20년간 학생이 선생님의 말을 따르듯 다이어트를 했다.
申斗淳 비서관의 말이다.
『다이어트 식단을 짜준 閔박사도 그 사실을 잊어버렸을 텐데, 각하는 20년간 정석대로 다이어트를 하셨습니다. 영양실조에 걸릴 지경이었죠. 협심증으로 인해 미음 위주의 無鹽食(무염식)을 하다 보니 피부조직이 죽어 갔습니다. 서거 전까지 25kg 이상 몸무게가 줄었으니까요』
대통령 퇴임 직후 어느 날, 崔 前 대통령이 라이터에 담뱃불을 붙이지 못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申斗淳 비서관은 崔 前 대통령을 서울대병원으로 모시고 갔다. 尹東浩(윤동호) 안과과장이 『왼쪽눈에 백내장이 왔다』고 했다. 1980년 10월, 美 하버드의대 안과전문 병원인 MEEI의 김철(미국명 조셉 킴) 교수로부터 한국인 최초로 「인공수정체」 이식수술을 받았다. 金교수는 丁一權(정일권) 육군참모총장의 통역장교 출신이었다. 그는 崔 前 대통령 수술을 계기로 1982년 訪韓(방한)해 서울대병원에서 백내장 환자 시술 시연을 최초로 했다.
<사진생략>洪基 여사의 가계부. 표지에는 일기장으로 돼 있으나 책장을 넘기면 콩나물 등 부식을 구입한 명세가 적혀있다.
깨알처럼 메모된 洪基 여사 간병일지
<사진생략><- 2000년 무렵부터 2004년 7월 洪基 여사가 작고하기 전까지 崔 前 대통령은 洪여사가 약 먹는 시간과 양, 한방병원에서 체크한 혈압 변화를 깨알처럼 적었다.
崔 前 대통령의 아내 사랑은 지극했다. 몸이 불편해지기 전까지는 崔 前 대통령이 직접 洪여사의 약을 챙겨 주고 음식을 먹여 주었다고 한다. 2004년 7월 별세한 洪基 여사가 복용하던 「대원약국」의 조제약이 약장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崔 前 대통령은 메모지에 아내의 간병일지를 썼다. 2000년 무렵부터 작고하기 전까지 약 먹는 시간과 양, 한방병원에서 체크한 洪여사의 혈압 변화를 깨알처럼 적었다. 崔 前 대통령은 洪여사가 작고하기 전까지 가끔 아내 洪여사가 누워 있는 방을 찾아 조용히 손을 잡아 주곤 했다고 한다.
2000년 무렵, 崔 前 대통령은 음성 꽃동네 吳雄鎭(오웅진) 신부가 보내온 산삼 2뿌리를 돌려보냈다. 『꽃동네의 어려운 사람들이 캐 온 산삼을 나 하나 몸보신 하자고 먹을 수 없다』면서 『시장에 내다 팔아 꽃동네 운영에 보태면 내가 먹은 것보다 더 낫다』고 했다.
崔 前 대통령은 매일 신문 스크랩을 빠뜨리지 않았다. 2005년 8월 낙상하기 전까지 아침 5시면 일어나 신문 스크랩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崔 前 대통령은 「포마이카(내열성 합성수지)」 밥상을 놓고 스크랩을 했다. 상 위에 놓인 가위와 문방구에는 먼지가 살짝 쌓여 있었다.
당뇨병 등 건강 관련 칼럼, 강원도 원주 관련 뉴스, 2003년 2월27일자 조선일보 「김대중 前 대통령 조사받으면… 前職 대통령 5명 모두 法 심판대에」란 기사를 오려 「조선일보」라고 적어 놓았다.
* 盧武鉉 대통령 취임 직전, 축하 메시지가 눈길을 끈다. 崔 前 대통령은 이런 당부를 적었다.
<앞으로의 5년을 내다보면서 몇 마디 바라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任期 동안에 너무 많은 일을 하려고 하면, 길지 않은 기간입니다. 그런 만큼 선거기간에 말씀하신 내용 중 실천가능하고 긴요한 國政課題를 優先順位에 따라 중점적으로 시행해 나가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둘째, 이번 선거기간 중에 나타난 地域間, 世代間의 의견차이에 대한 和合 노력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國民和合이 이루어지면 전 국민의 지지와 協力 속에 국정과제 목표를 順調롭게 달성하실 것으로 기대합니다.
셋째로 外交安保와 經濟 면에서 국민들에게 安定感을 주어야 한다고 봅니다. 국민 각계 각층의 智慧를 모으고 여야 간의 協助 위에 북핵문제를 포함한 외교?안보 및 경제 문제들을 해결하시기를 바랍니다. 앞으로 대통령께서 國家發展에 큰 공헌 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 2003. 2.17. 2:30pm>
스크랩에 묻혀 있는 盧武鉉 대통령 축하메시지. 盧武鉉 대통령 취임 직전인 2003년 2월17일 작성한 것이다. 비서관들은 『작성만 하시고 보내지 않았다』고 했다. 2월27일자 조선일보「김대중 전 대통령 조사받으면… 前職 대통령 5명 모두 法 심판대에」란 기사를 스크랩하면서 崔 前 대통령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申斗淳 前 의전비서관은 『각하께서 12?12 당시 합동수사본부에서 작성한 문서에 서명한 시각이 12월13일 새벽 5시로 알려진 것도 각하께서 항상 문서 하단에 시간을 적어 놓으셨기 때문』이라고 했다.
崔 前 대통령의 기억력은 대단했다고 측근들은 말한다. 원주보통학교 시절 배웠던 1학년 교과서를 흥얼거리곤 했다고 한다.
『사람 이름은 한 번 들으면 잊지 않으셨고, 측근들의 생일까지 외웠습니다』
崔 前 대통령은 「민족사바로찾기국민회의」 명예회장이었다. 매달 이 단체에서 배달되는 「배달문화」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돋보기 밑에 성경 요한복음 3장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로 시작하는 성경말씀이 영어로 적혀 있다. 유엔개발계획(UNDP) 요원으로 동티모르에 근무 중인 손녀 恩琛(은침)씨가 할아버지에게 적어 드린 것이다.
書架에는 외교 관련 책이 많아
책장에는 외무차관 시절인 1959년부터 정리한 20여 권에 이르는 앨범이 빼곡히 정리돼 있었다. 오래 전부터 손대지 않아 앨범이 부스러질 것 같았다. 그중 하나를 뽑으려 하자 앨범 커버끼리 달라붙어 있었다. 崔 前 대통령이 공직생활 동안 받은 서적들을 보면 외교 관련 서적이 주를 이루고 있다.
<사진생략> 거실에는 洪여사가 10년 이상 사용하던 그릇장이 있고, 식당은 외교관 시절 사용하던 유리잔으로 그득했다. 나무계단을 올라가니 2층에는 서재와 방이 나왔다. 2층방에서 장남(胤弘.윤홍) 내외가 2년간 거주했다.
2층 한구석에 崔 前 대통령이 사용했던 휠체어가 놓여 있었다. 낙상해 우측 대퇴부를 다치기 전까지는 일주일에 서너 번 정도 헬스사이클에 올라 운동을 했다고 한다. 2층 온도계가 10℃를 가리키고 있었다. 보일러관이 노후돼 난방이 잘 되지 않는 원인도 있지만, 하루 중 시간을 정해 난방을 넣기 때문이라고 했다.
서울 마포구 서교동 자택 맞은편에 조그만 컨테이너 박스가 하나 있다. 비서관과 경호원들의 근무처이다. 차남 鍾晳(종철)씨를 비롯해 崔興洵(최흥순) 비서실장, 申斗淳 前 의전비서관, 崔璿圭(최선규) 강릉최씨 대종회장, 崔孝洵 비서관, 허규치 비서관, 정대성 비서 등과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2층 한구석에 崔 前 대통령이 사용했던 휠체어가 놓여 있다.
최후를 지킨 비서관들
崔 前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모신 비서관들은 異口同聲(이구동성)으로 『대통령은 겉치레 인삿말을 하지 않았고, 인내력과 끈기가 대단했던 분』이라고 했다. 곁에서 모시는 사람들도 진득하지 않으면 버텨내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申斗淳 前 의전비서관은 崔圭夏 前 대통령이 「국가원수의 격을 갖춘 분」이라고 했다.
『손님을 맞을 때 한 번도 각하께서 다리를 꼬고 계신 것을 본 일이 없습니다. 中東 순방 때 사우디 국왕과 회담할 때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시고 유창한 영어로 상대방을 설득했습니다』
서교동 자택 마당에서 崔 前 대통령의 비서관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왼쪽부터 허규치 비서관, 차남 鍾晳씨, 申斗淳 前 의전비서관, 崔孝洵 비서관, 崔璿圭 강릉최씨 대종회장.
1980년 9월1일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제11대 全斗煥(전두환) 대통령 취임식장. 취임식이 끝나갈 무렵 텔레비전 카메라는 崔圭夏 前 대통령 내외를 주시하고 있었다. 式(식)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崔 前 대통령은 총무처에서 마련한 내외귀빈용 안내책자를 집어들어 洪基 여사에게 건넸다. 이때 洪여사가 崔 前 대통령이 들고 있는 봉투를 손으로 쳐버렸다. 어색한 崔 前 대통령은 경호원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12?12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강탈한 全斗煥 대통령의 취임식장에 나타난 洪基 여사가 얼마나 불편했을까 국민들은 동정했다.
申斗淳 의전비서관은 35년간 함께한 崔圭夏 前 대통령을 떠나 보내면서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하늘도 무심치 않은 듯 고인이 영영 가시는 길에 보슬비가 내렸습니다. 지난날의 다정하시고 온유하시면서도 강한 의지를 보여 주셨던 생전의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서교동에 영정을 모시고 무거운 발길로 돌아서는데, 그간 참았던 진한 통곡이 치밀어 올라 골목길 전주를 기대어 한바탕 토해 냈습니다. 그런대로 마음의 평정을 되찾았습니다.
생전에 매일 아침 주시던 전화벨 소리가 울리지 않고 조용한 아침을 맞게 되니 더더욱 마음이 허함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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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서면 월간조선 신년특집 삼광 최규하 형<2007년 1월호>
崔書勉 국제한국연구원장의 회고/三光兄 崔圭夏
공을 위해 사를 죽인 「문민판」 朴正熙
정리=吳東龍 月刊朝鮮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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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강원 原州 출생. 연희전문 文科 수료,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명예졸업. 大東新聞 기자, 고아원 「聖방지거의 집」 원장, 서울천주교총무원 사무국장, 日本 아세아大 교수, 日本 도쿄 한국연구원 원장, 韓日포럼 자문위원, 安重根 의사 숭모회 이사, 全國아리랑보존연합회한국몽골협회 초대회장 역임. 충남大 대학원 문학박사, 단국大 명예문학 박사. 現 국제한국연구원장. 저서:「安重根 사료」, 「7년전쟁(임진, 정유왜란)」, 「몽골기행」, 「새로 쓴 安重根 의사」 「安重根의 墓」 등.
祖父는 성균관 박사 崔在民
2006년 12월9일, 玄石 崔圭夏(현석 최규하) 前 대통령의 49재가 강원도 원주시 치악산국립공원에 있는 龜龍寺(구룡사)에서 열렸다. 하늘은 무겁게 내려앉았고, 쌀쌀한 날씨 때문인지 간혹 눈발이 날렸다. 이 사찰은 崔 前 대통령이 퇴임후 묵은 일이 있는 곳이다.
원주의 한 초등학교 여학생이 『崔圭夏 대통령 할아버지는 장성탄광의 막장에서 고생하는 광부들을 보시고 지금껏 연탄을 때셨으며, 자택의 조그만 응접실에 있는 50년 된 선풍기로 여름을 나셨다』며 추모사를 낭독하자 장내가 숙연해졌다.
사실, 崔圭夏 前 대통령의 재임 10개월의 평가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역사적 평가도 아직 백지 상태로 남아있다. 그러나 그는 당시 신군부의 정권 장악 과정에 대해서 論語에 나오는 「그 직위에 있지 않으면 정사를 논하지 말라(不在其位, 不謀其政)」는 말로 대신해 많은 이들에게 궁금증을 남겼다.
崔圭夏 前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많은 龜鑑(귀감)을 남긴 분이다. 그에게는 다른 대통령처럼 측근들의 부패스캔들이 없었다. 원래 검소하고 민폐를 싫어하며, 自重自愛(자중자애)하며, 사람을 아끼는 교육자적 관리였다. 서울로 향하는 차 안에서 그와의 어릴 적 일들이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제10代 대통령을 지낸 崔 前 대통령을 나는 어린 시절부터 「三光兄(삼광형)」이라고 불렀다. 崔 前 대통령의 가족은 원주시 원주군 원주면 화천리(현 원주시 봉산동)에 있는 三光(삼광) 마을이란 곳에 살았다. 兄은 1919년 7월 강원도 원주시 옥거리(현 평원동 25번지)에서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字는 瑞玉(서옥)이라 했다.
崔대통령의 할아버지는 韓末(한말) 成均館博士(성균관박사)로서 이름 높았던 漢學者(한학자) 崔在民(최재민)이다. 아버지 崔養吾(최양오:1886~1938)는 원주홍천정선 등지에서 訓導(훈도)를 지내다 평창인제 등지에서 郡屬(군속)을 거쳐, 말년에는 원주면장을 지냈다. 할아버지가 성균관박사를 지냈기 때문에 삼광마을에서 宅號(택호)를 「최박사댁」이라고 불렀다.
兄의 조부 崔在民은 갑오경장 전인 1892년 치러진 조선조 마지막 과거시험에 합격했다. 남편이 과거에 급제하고도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한양에 머무르자 兄의 祖母는 1901년 4월29일 언문편지를 보내 마음에 새겨두었던 애정을 표시한다.
<붓을 드니 하고 싶은 말이 마음속에 서려있으나 등잔불빛 아래에서 된지만지 하여 갈피를 잡을 수가 없나이다. 속히 금의환향하실 일이 잠자리에 누울 때나 아니면 앉아서 일을 하고 있을 때에도 잠시도 잊을 수가 없어 즐겁기 그지없는 바입니다. 평생 「생원」소리와 편지 봉투에 그리 쓰여지는 것이 마음에 걸리옵더니 옥황상제께서 감응하사 「최박사」 택호를 빌려주시니 그간 억울하였음을 감동하신 줄 알게 되었나 봅니다.>
兄이 家寶(가보)로 간직하고 있는 이 언문편지는 조선왕조 시대 부녀자 수준을 알 수 있는 名文이다.
『얼굴이 길어 面長인가』
1920년대 원주 치악산 아래 삼광마을에는 강릉최씨 31세손인 崔在民(최재민), 崔在謨(최재모), 崔在鎬(최재호), 崔在武(최재무), 崔在建(최재건), 崔在弼(최재필) 등 여섯 가족이 사촌보다 가깝게 지냈다. 내 조부는 崔在謨(최재모)이고 父는 강원도에 잘 알려진 嘉善大夫(가선대부)을 지낸 崔養浩(최양호)다.
崔在鎬의 아들 崔良洵(최양순)은 원주향교의 典校(전교)를 지냈고, 崔在弼은 中樞院議官(중추원 의관)으로 동아학원을 경영했다. 崔在建의 아들 崔養玉(최양옥)은 韓末의 독립운동가로 횡성에서 3․1운동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나는 崔圭夏의 아버지를 「삼광아저씨」, 최규하를 「삼광형」, 그 누이인 崔敬夏(최경하)를 「삼광누나」라고 불렀다.
兄의 아버지는 兄처럼 키가 크고 얼굴이 길었다. 原州橋(원주교)를 지나 출퇴근할 때면 누구나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할 만큼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일본인들은 삼광아저씨를 두고 『얼굴이 길어 面長(면장)이냐, 면장이라서 面長이냐』고 했다.
삼광누나는 兄보다 열살 위로 원주에서 드물게 이화여중(이화여고 전신)에 입학해 유관순 열사와 함께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兄이 1932년 경성제일고보(경기고 전신)에 입학할 때 삼광누나가 서류를 가지러 원주까지 한달음에 뛰어왔다. 삼광누나는 外家인 국어학자 李崇寧(이숭녕) 선생을 보증인으로 세워주었다.
兄의 모친인 전주이씨가 삼광누나를 낳고 10년간 後嗣(후사)가 없다가 치악산에서 치성을 드려 낳은 게 삼광형이다. 兄의 모친은 늘그막에 본 아들이라 누가 삼광형에게 험담이나 할까 전전긍긍할 만큼 兄을 끔찍이 생각했다.
兄은 내게 원주공립보통학교 시절, 尹心德(윤심덕:1897~1926) 선생에게 음악을 배웠다고 하면서, 「死의 찬미」만 흘러나오면 흥얼거리곤 했다. 경성여고보 사범과를 졸업한 윤심덕은 조선총독부의 관비생으로 일본 도쿄음악학교에 유학, 성악을 전공하고 귀국해 土月會(토월회) 배우로 활약하다가 유행가수로 전향했다. 1926년 레코드취입을 위해 오사카에 있는 닛토(日東)레코드社에 갔다가 귀국길에 배 위에서 애인 金祐鎭(김우진)과 함께 현해탄에 투신, 情死(정사)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兄은 경성제일고보에 진학하면서 서울 종로구 봉익동에 있는 崔在武의 손자(崔鳳夏)댁에서 공부했다. 삼광형은 스무살이나 손위인 봉하형을 「봉익동형」이라고 깍듯하게 부르며 따랐다.
학비 무료인 東京高師로 진학
兄은 경성제일고보 5학년때인 1935년, 兄보다 세살 위인 형수 洪基(홍기) 여사와 혼례를 치렀다.
19세 되던 이듬해, 경성제일고보를 졸업한 兄은 동경고등사범학교 영문학과에 진학한다. 兄은 경성제대 예과와 동경고등사범 두 학교를 모두 합격했으나, 학비면제였던 동경고등사범을 선택했다. 당시 농사를 지었던 삼광형 집은 가세가 기울어 가고 있었다.
兄이 동경에 유학하고 있을 때, 형수는 남편에게 시집온 여자라기보다 시부모를 모시기 위해 온 사람처럼 살았다. 결혼한 지 이태만에 시아버지(崔養吾)가 돌아가셨는데, 죽기 전까지 극진하게 대했다. 그 누구도 孝婦(효부)라고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어릴 적 붉은 댕기를 매고 시집온 형수를 보고 참 미인이라고 생각했었다. 몇 해 전 영결식때 본 형수의 모습은 세월에 바래 다른 사람으로 착각할 만큼 얼굴이 상해 있었다.
원주보통학교 학생이던 나는, 남편은 동경에 유학 보내고 시아버지와 밭만 가는 형수에게 『남편이 도망갔다』고 놀려댔다. 그럴 때마다 형수는 『도련님은 왜 날 못 살게 구세요』라며 눈을 흘겼다. 내가 장성해 아내를 데리고 서교동 兄댁을 찾아갔던 일이 있다. 짓궂은 兄이 내 아내 앞에서 『너는 코를 중학교 때까지 흘리더니, 언제 코를 안 흘리게 됐니?』라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웃고 넘길 이야기지만, 어린 시절 최고의 아킬레스건을 들춰내 스타일 구기게 하는 소리를 하는데 대해 부아가 치밀었다. 그래서 옆에서 반기던 洪基 여사쪽으로 화살을 돌렸다. 『(파마 머리를 하고 있던 형수에게) 아주머니는 언제 쪽을 잘랐수?』라고 응수했다.
동경고등사범학교 재학시절, 방학때 원주에 내려온 兄은 한참 아래인 나를 붙들고, 일본여성에 대한 느낌을 들려주었다. 兄은 동경고등사범 수재니까 여자들이 관심을 갖더라고 했다. 한번은 귤을 씹다가 실수로 물이 여학생 얼굴에 튀었다고 한다. 그 여학생은 전혀 내색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兄이 다른 곳에 시선이 간 틈을 타서 서둘러 닦더라는 것이다. 兄은 일본여자는 감추는 아름다움이 있더라고 했다. 兄이 여자 이야기를 하길래 『일본에서 연애를 하냐』고 했더니 『예끼, 장가를 갔으면 부인에 대한 禮를 지켜야지』라고 했다.
兄은 동경고등사범에 다니면서 방학 때면 선물을 한아름 사들고 왔다. 돈이 어디서 났느냐고 물으면 『프랑스말 번역도 하고 통역도 해서 벌었지』라고 했다. 그가 전공인 영어는 잘하는 줄 알았지만 프랑스어까지 하는 줄은 몰랐었다. 물론 兄은 일어도 능통하다. 朴正熙(박정희) 대통령 외교특보 시절, 일본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강연하는 것을 들었는데, 격식에 맞는 일어를 구사했다.
광복 후 영어를 잘하는 3인방이 兄을 비롯, 金溶植(김용식) 전 외무부 장관, 金東祚(김동조) 전 외무부 장관이었다.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은 세사람의 젊은이들을 登用(등용)했다. 兄은 성격처럼 발음 하나, 액센트 하나에도 조심스러웠다. 바리톤 음색으로 영어연설을 하면 외국인들도 숨소리를 죽였다.
1979년 4월, 兄은 총리 자격으로 호주뉴질랜드인도네시아 3국을 공식 방문했다. 兄이 호주 의회에서 연설했을 때다. 연설을 마치고 말콤 프레이저 호주 총리가 단상에 올라 『崔圭夏 총리께서 킹스잉글리쉬(영국식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하시니 내가 주눅이 들어 답사를 할 수 없겠다』고 조크했다. 유창하면서도 격식 있는 영어는 세세한 뉘앙스까지 살펴야 하는 외교관에게 커다란 무기였을 것이다.
崔圭夏가 만주로 간 까닭
동경고등사범을 1941년 졸업한 兄은 일본인만 다니는 대구중학 교사로 부임한다. 조선인은 동경고등사범을 졸업하면 조선인 중학교에 가는 게 상례였다. 하지만 兄이 일본인학교에 보내진 것으로 보아 월등한 실력의 소유자임을 짐작케 한다. 대구는 집안 어른인 독립운동가인 秋岡 崔養玉(추강 최양옥) 선생이 복역하던 곳이다.
동경고등사범을 졸업하고 동경에서 귀국한 兄은 원주보통학교 나가누마(長沼) 교장을 인사차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일본인들은 원주의 유력자 집안이나 사범학교 출신자들을 우대했었다. 兄은 교장 선생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센세이(선생)」가 아닌 「상(씨)」이라고 호칭을 했노라고 했다. 당시 일본인 교장에게 조선인으로서 「센세이」라고 호칭하지 않은 것은 「혁명적」 발언이었을 것이다. 兄이 이런 이야기를 하길래 나는 兄의 稚氣(치기)가 발동했다고 생각했다.
兄은 조선총독부 고등문관시험을 보는 대신, 1942년 만주국 고등문관시험에 응시, 합격한다. 兄은 率家(솔가)해 新京(신경, 현 장춘)으로 떠나 대동학원에서 연수를 받았다. 대동학원은 만주국 고급관료 연수기관이었다.
兄이 대구중학 교사로 근무한 것은 지금껏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대구중학을 그만둔 이유는 일본인 사회에서의 차별을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여겨진다. 洪基 여사가 쪽을 찌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여성들과 금방 구별이 됐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형수가 언제 쪽을 잘랐는지 알지 못한다.
兄의 어머니 李여사는 남편과 사별하고 딸(敬夏)을 시집 보내자, 아들을 따라 만주로 移住(이주)할 요량으로 집과 땅을 팔았다. 그런데 그만 그 돈 전부를 집안 사람에게 사기를 당하고 말았다. 이때 兄의 생가와 땅은 남의 손에 넘어갔다. 그럼에도 兄은 『그 사기 당한 이야기를 하면 한이 없다』며 말문을 닫았다. 일전에 원주市에서 「崔圭夏 生家」를 복원한다고 하길래 兄에게 이야기하니 『우리집은 초가집인데 기와집으로 만들어 놓았더라』고 했다. 兄은 솔직하고 청빈한 사람이었다.
兄은 광복 직전 만주에서 장남(胤弘)을 얻었다. 광복이 되자 귀국해 우리집을 찾아 우리 모친께 인사를 했는데, 갓난아이를 안고 있던 洪基 여사는 자손이 귀한집에 아들을 낳아선지 얼굴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兄은 서울大 사범대학에서 교편을 잡는다. 이때 사범대 교육학과에 다니던 金大中(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李姬鎬(이희호) 여사가 兄의 강의를 들었다. 李여사가 내게 『선생님께서 어찌나 영어를 잘 가르치시는지 몰라요』라고 했다. 이 말을 兄에게 전하니 『그래?』하고 심드렁하게 한마디 했던 기억이 난다.
금시계와 리어카를 교환
광복 직후, 정부수립 전까지 李承晩 대통령은 부족한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 영어가 뛰어난 인재들을 대거 발탁했다. 외국의 식량원조를 받느냐 못 받느냐에 따라 국가의 存亡이 좌지우지되던 시기였다.
兄은 美 軍政廳의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으로 발탁됐다. 兄은 이때 죽을 뻔한 고비도 넘겼다고 한다. 대구에서 열린 양정과장 회의에 참석하려고 서류를 챙기다가 그만 여의도비행장에서 이륙하는 연락기(세스나機)를 놓쳤다. 兄은 비행기를 놓치는 바람에 할수없이 서울역에서 기차로 대구엘 갔다. 몇 시간후 대구의 경북도청에 도착하니 도청 사람들이 『죽었다는 崔圭夏가 어떻게 살아왔냐』고 했다. 세스나機는 추풍령을 넘다 제트기류를 만나 추락해 전원이 사망했으니까 말이다.
한국전쟁 때 兄의 가족은 한강을 건너지 못했다. 인민군들이 장악한 서울을 빠져나가 洪基 여사와 함께 고향인 원주로 피난길에 올랐다. 광나루를 건너는데 여섯살난 장남을 업고 피난 보따리까지 머리에 인 洪여사가 몹시 힘들어했다. 이때 짐을 헐렁하게 실은 리어카를 끌고 가는 젊은이가 눈에 띄었다. 兄은 동경고등사범 입학기념으로 아버지가 선물한 금시계를 풀었다. 한참을 흥정한 끝에 리어카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짐을 풀고 장남까지 태웠다. 장남은 기분이 좋은지 애국가를 불러댔고, 兄은 아들의 입을 틀어막았다고 한다.
1952년 외무부는 兄을 통상국장으로 데려가더니 그해 7월 주일한국대표부 총영사로 내보냈다. 4.19로 잠시 공직에서 물러난 兄은 崔世璜(최세황) 前 국방부 차관, 金貞烈(김정렬) 前 국무총리 등과 어울렸다. 바둑을 두지 못했던 兄은 두 사람이 바둑 두는 것을 구경하다가 팔베개를 한 채 잠이 들곤 했다고 한다. 兄은 식사때 金貞烈 총리 부인이 국수를 말아오면 두그릇을 에누리 없이 비운 「大食家」다. 이는 兄을 가까이 모시던 申斗淳(신두순) 비서관에게 들은 이야기다.
두가지 출세 이유
1972년 李厚洛(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金英柱(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이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한 7.4남북공동성명이 일본에 전달되자 일본은 경악했다. 5.16군사혁명 당시, 「朴正熙가 공산주의자가 아닌가」하고 혁명정부를 의심한 일이 있었던 일본인들은 朴正熙 대통령이 드디어 공산주의자로서 본성을 드러낸 것이 아닌가 의심했었다.
당시 兄은 말레이지사 대사를 거쳐 1967년 외무부 장관에 올랐고, 1971년 대통령 외교담당 특보로 자리를 옮겼을 때였다.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前 일본 총리를 비롯한 정계 거물들이 그들의 지도자격인 가야 오키노리(賀屋興宣) 대장상이 『일본이 한국에 경제원조를 적극적으로 하고 있는 터에 이런 소문이 나면 곤란하다』면서 『朴正熙 대통령의 철학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 줄 사람을 일본에 보내달라』고 나를 통해 한국측에 요청했다.
이러한 일본 정가의 사실을 朴正熙 대통령을 만나 이야기했더니 『아직 주일한국대사관으로부터 보고도 받지 못했다』며 깜짝 놀랐다. 동석했던 공화당 陸寅修(육인수) 의원은 朴正熙 대통령의 철학을 대변할 수 있는 사람은 白南檍(백남억) 공화당의장일 것이라 생각하고 이에 대한 준비를 하라고 전했다. 동경에 있던 나는 朴대통령이 白南檍씨를 보낼 것으로 알았는데, 정작 온 것은 崔圭夏 대통령 외교특보였다.
나는 어린 시절에 본 兄이 어떻게 朴正熙 대통령의 정치철학을 대변할 수 있을까 의아하게 생각했다. 兄은 일본 국회의원 모임에서 총리를 비롯한, 일본 정계인사들을 상대로 남북공동성명에 대한 의미를 심도 있게 설명하고 이해를 구했다. 결과에 만족한 兄은 한턱내겠다며 나를 「타카무라(篁)」란 日食 요정에 데리고 갔다. 쿠사무라 음식점 자리에 앉자마자 『兄은 기껏 잘해야 학교 교장 정도나 할 줄 알았는데, 어떻게 외무장관을 거쳐서 대통령 외교특보라는 중책을 맡게 됐냐』고 물었다. 兄은 주저하지 않고 『장가를 잘 갔고, 비서를 잘 둔 게 이유』라고 했다.
兄이 외무차관 시절의 일이다. 외무부 과장이 兄집으로 과자상자를 들고 왔다. 영문을 몰랐던 형수는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이 배가 고프다고 하자 과자를 먹였다. 과자를 다 먹고 나자 바닥에서 돈 봉투가 발견됐다. 퇴근한 兄에게 형수가 자초지종을 설명하니까, 『지금 진급심사 철인데, 난 도와줄 수 없으니 당신이 도와줄 수 있으면 도와줘 봐』라고 했다. 형수는 그 길로 총무과장을 불러 돈 봉투를 돌려주었다. 兄은 이후로 집으로 돈 봉투가 들어온 일도, 나간 일도 없다고 했다. 『관직에 있으면서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이 돈인데, 집안에서 내조를 잘해주니 아무 걱정이 없더라』고 했다.
兄은 독립운동가 후손을 비서로 두고 있는 것도 내게는 행운이라고 했다. 나는 놀라서 그 비서관이 한국에 있는 줄 알고 『이름이 뭐냐?』고 했더니, 『曺晩植(조만식) 선생의 외손자인 鄭東烈(정동렬)군』이라며 『정신과 몸가짐이 훌륭하다』고 했다. 밖으로 나와 鄭東烈군에게 『상관이 부하를 칭찬하는데 이보다 더한 게 있겠느냐』며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더니 鄭東烈군이 눈물을 떨구었다.
鄭東烈<고당 조만식 선생 외손>, 申斗淳<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백범 김구) 판공실장 일연 신현상의 차남> 두 전직 비서관은 兄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35~40년간 한길을 걸어온 사람들이다. 兄은 매일 아침 7시만 되면 비서관들에게 전화로 아침 인사를 했다. 金泳三(김영삼) 대통령이 부친 金洪祚(김홍조)옹에게 매일 문안인사를 드리는 것도 국민들에게 큰 교육거리이지만, 나라의 최고 어른이 비서관들에게 매일 아침 전화로 아침인사를 하는 것도 드문 일이다.
兄의 49재 날, 鄭東烈 비서관이 앰뷸런스에 실려 서울대병원에 입원했다고 하길래 밤 늦은 시각에 서울대병원으로 달려갔다. 兄이 성미가 급한지 49재가 되기도 전에 그의 비서관들을 지하에서 부르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崔興洵(최흥순) 비서실장, 申斗淳(신두순) 전 의전수석도 모두 건강이 위태롭다.
사돈, 서울市 교육감 후보에서 탈락
兄은 재임중 강릉최씨 門中 사람들을 측근에 두질 않았다. 아마 강릉 최씨라면 실력이 있어도 역차별을 받을 판이었다. 청탁을 해도 도리어 하지 않는 것만 못했다고 한다. 퇴임후 崔興洵(최흥순)씨를 비서실장으로 두었지만, 재임중에는 他姓(타성)인 鄭씨와 申씨를 곁에 두었다. 兄이 공직에 있는 동안 兄으로 인해 덕을 본 일가 친척은 눈을 씻고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국무총리시절, 사돈인 徐章錫(서장석) 전 경기고 교장(徐大源 대사의 부친)이 서울市 교육감 후보 1순위로 올라있었다. 兄은 『사돈이 교육감이 되면 총리가 사돈이라 뽑았을 것이라고 사람들이 오해할 것』이라면서 2순위자가 뽑히도록 했다고 들었다.
나도 兄 못지 않았다. 3공화국 시절, 朴正熙 대통령의 초청으로 청와대를 자주 드나들었다. 당시 외교특보로 청와대에 근무하고 있던 兄이 자신의 방에 들르지 않는다고 섭섭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집안의 내력은 신하는 임금에게 私(사)를 보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나중에 洪基 여사가 『서방님 너무 하신다』고 하더라.
兄은 公을 위해 私를 죽인 모범적 국가공무원이다. 兄은 朴正熙 대통령의 「문민판」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能吏(능리)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농림부 양정과장으로 발탁된 것은 영어를 잘해서 간 것뿐이지, 그는 교육자로 남고자 했을 것이다. 그는 관직에 있을 때, 사람 차별을 하지 않았고, 선생이 제자를 대하는 것처럼 교육적이었다.
삼광누나 崔敬夏(1909년생)씨가 올케 洪基 여사를 만나러 총리 공관에 찾아왔다. 때마침 올케가 당대 최고의 명의인 沈浩燮(심호섭) 박사의 치료를 받고 있었다. 沈浩燮 박사가 명의인 것을 알고 있던 누나가 兄에게 『나도 치료받을 수 있게 해 달라』고 했다. 그러자 兄이 『그러시지요』하면서 옆방으로 가더니 봉투를 하나 들고 나왔다. 兄은 『누님, 沈박사는 국무총리 담당 의사로 총리와 그 아내만이 치료를 받을 수 있으니 다른 병원을 가시는 게 좋겠다』고 했다.
『내가 어떻게 해서 지를 경성제일고보를 집어넣었는데 이럴 수 있느냐」며 봉투를 열어본 삼광누나는 다시 한번 분통을 터트렸다. 봉투 안에는 6만원이 들어있었는데, 건강보험증이 없었던 삼광누나는 이 돈으로 제대로 치료를 받을 수 없었다.
삼광누나는 나를 찾아와 병원비로 받은 6만원을 내 책상에 놓으며 『너하고는 살아도 그놈하고는 못산다』고 하소연을 했다. 가톨릭의과대학 설립자의 한사람이었던 나는 당시 성모병원으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 원장 金學仲(김학중) 가톨릭의대 교수에게 『나를 업어주신 누님』이라고 소개하며 진찰을 부탁했다. 성모병원 金원장은 몸소 삼광누나를 모시고 각과를 돌며 진찰을 받게 해주었다. 진찰을 받고 돌아온 누나는 『역시 너밖에 없어』하고는 사진을 한장 보여주었다.
兄이 총리가 되자 신문사에서 崔圭夏의 어릴적 사진을 달라고 해서 나누어주었는데 네 사진이 있더라는 것이었다. 사진을 보니 나도 본 적이 없던 사진이었다. 사진에는 어머니(洪榮鎭)와 일찌기 죽은 형 崔鍾夏(최종하), 그리고 작은누나(崔正夏), 나, 그리고 낯선 여자 한분이 찍혀 있었다. 『이 여자는 누구냐』고 했더니 『그게 나 아니니』라고 했다. 내 아버지 제삿날 묘앞에서 찍은 사진인데, 삼광누나는 우리집에서 살다시피 했기 때문에 묘소도 함께 갔었던 것이다.
그러나 兄이 인간미가 아주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兄이 총리 시절, 중앙청 식당에서 閔寬植(민관식) 당시 문교부 장관과 식사를 하고 있었을 때다. 兄과 閔寬植씨는 경성제일고보 동기동창이다. 먼발치에서 兄이 우리들에게 다가와 내게 『崔원장 오셨구먼』이라고 했다. 갑자기 존대말을 하자 閔寬植씨가 놀래 『도대체 어떻게 되는 사이냐』고 했다. 兄은 공적인 자리에서는 절대로 집안식구들에게도 「해라」를 하지 않았다.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려니까 특보께서 이미 계산을 하셨다고 여직원이 말하는 것이었다.
「王은 臣下의 허물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강릉 최씨 매창공파는 중시조가 崔世節(최세절)이다. 매창공 묘가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도농면을 지날 때마다 우리는 달리는 열차에서도 절을 했다. 兄과 함께 기차를 타고 가다 도농면에서 내가 절을 하니까 兄이 놀라면서 『무슨 일이냐』고 했다. 『매창공 할아버지가 창밖에 잠들어 계신다』고 하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兄은 대통령 퇴임후 譜學에 열심을 냈다. 내가 서교동을 찾아가면, 집안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내 손을 꼭 잡았다. 매창공 산소를 도시 변화에 따라 양수리로 이장한 兄은 후에 나를 불러놓고 선조들의 위업을 자랑했다. 학창시절 매창공 산소가 어디에 있던지도 모르고 지내던 兄이 이렇게 변했는가, 하고 兄의 인간적 성숙에 고개를 숙였다.
매창공묘가 灰(회)를 두껍게 사용한 탓에 시신과 부장품이 그대로 발굴됐다. 현장에서 발굴한 朝鮮朝의 壽衣(수의)는 복식연구를 위해 민속박물관에 기증했다.
兄은 왜 5공화국 재판 증언대에 서지 않았을까. 성균관박사인 崔在民 선생의 손자로서 兄이 절대로 증언에 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내가 아는 兄은 유교적 가르침에 따라 「王은 臣下의 허물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켰다고 본다. 兄은 아마도 한때 부하였던 全斗煥 당시 보안사령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게 합당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兄이 저 세상으로 떠나던 날, 경복궁에는 과거 그를 총칼로 위협했던 政敵(정적)들도 함께 자리를 했다. 그는 세상의 和合(화합)을 이루고 떠났다. 이제 삼광형의 8형제, 그 직계 후손들은 인간 崔圭夏의 참모습을 계승해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이제 兄에 대한 역사적 평가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三光兄, 편히 잠드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