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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명상의 책
오쇼의 책을 많이 읽어보지 못했지만,
그의 글을 읽다보면 마음이 평온해진다.
유명한 명상가의 책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의 글에는 잔잔한 음악이 있고,
고요한 숲이 있고,
그로 인해 마음을 가라앉게 한다.
그는 쉬운 말과 글로 세상 사람들에게 이야기한다.
삶은 명상이요, 명상이 곧 삶이라고...
그의 가르침을 듣거나 읽다보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하지만, 그의 가르침을 몸으로 실천하려고 하면 쉽지 않다.
나는 그처럼 깨달은 자도 아니요, 신비가도 아니기 때문인가?
나는 세속의 교육을 수십년 받아온 한낱 범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작은 것에 욕심내고,
무엇인가 목표를 정하고,
남들과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으려고 하고,
그런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좌절감을 느끼는
오쇼가 금해야할 인간상을 내가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책에 나와 있는 20명의 사람들의 초월한 삶을 보면서도
나 자신은 그러지 못함에 또한번 좌절감을 느낀다.
이 험한 경쟁 사회에서 승자가 되고 싶기도 하고,
이 책에 나온 사람들처럼 세상일에 초월해지고 싶기도 하고,
이도 저도 아닌 나는 누구인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일이다.
1. 공간초월 시간초월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우리가 학창시절 배운 역사를 생각해보면,
전쟁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오쇼는 이 책의 들어가는 말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의 역사가 아는 것은 갈등 뿐이다.
인간의 역사가 아는 것은 악행 뿐이다.
인간의 역사가 아는 것은 악인뿐이다.
인간의 역사가 아는 것은 미친 사람뿐이다.
역사는 뭔가가 잘못되었을 때만 기록을 하기 때문이다.
물 흐르듯 모든 일이 잘 될 때 역사는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는다.
인간의 역사는 예수에 대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는다.
사실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다.
만약 성경이 없었더라면 예수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 것이다.
우리 역사에는 예수와 같은 존재들이 많았지만 역사는 그들의 이름을 남기지 않았다.
역사는 그들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너무나 온유하고 고요했으며 삶과 자연과 하나되어 살았다.
물 흐르듯, 아무런 파장도 일으키지 않았다.
그냥 왔다가 그냥 갔다.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서 말이다.
역사는 깨달은 붓다들을 기록하지 않는다.
그래서 붓다나 마하비라, 자라투스트라 등의 이름을 들으면
역사적인 인물이 아니라 신화적인 인물처럼 들린다.
실존했던 인물들이 아니라 인간의 상상력이 가공한 인물처럼 들린다.
인간의 꿈이 투사한 이상(理想)의 인물로 보일 뿐, 실존했던 인물로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아니다, 그들은 진실로 이 땅을 살다 간 인물들이다.
그들은 너무나 진실하게 산 나머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이 땅을 떠났다."
...
이 책의 제목은 "인생에 소중한 가르침을 준 스승과의 위대한 만남"
이 책의 지은이는 오쇼 라즈니쉬.
오쇼 라즈니쉬가 인생에 소중한 가르침을 준 스승 20명의 이야기이다.
직접적인 오쇼와 만남을 가진 자는 아니고,
오쇼의 영혼에 영향을 준 스무명에 관해 글이다.
그들중에는 먼 고대 사람들도 있고, 오쇼와 동시대의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서양 사람도 있고, 동양 사람도 있다.
몇몇 사람들은 처음 들어보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익히 알고 있는 유명한 사람들이다.
그런 유명한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우리는 쉽게 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을 통해 그들의 지혜를 얻기란 쉽지 않은 것 같다.
즉, 먹을 것이 온 세상에 쌓여 있지만,
그것을 제대로 먹을 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쇼는 그것을 제대로 먹을 줄 아는 사람 중에 한명이었다.
오쇼는 그들로부터 지혜를 얻었고,
그런 지혜를 통해 자신의 영혼을 보다 고차원의 영혼으로 승화시켰다.
그것으로 오쇼 또한 그들과 같은 고차원의 인물이 된 것이다.
오쇼가 세상을 떠난지 십수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을 갈구하고 있다.
그의 영적인 가르침을 배우려고 하고 있다.
그 또한 그의 위대한 스승처럼 많은 세상사람들의 스승이 되었다.
2. 에고
오쇼의 책을 보다보면 '에고'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이 에고(ego)란 말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이나 관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에고 때문에 나를 비롯한 세상 사람들을 자신을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에고 때문에 욕심이 생기고, 집착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오쇼는 이 에고를 떨쳐버려야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에고가 사라지고 나면 자기자신을 느끼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3. 오쇼의 스무명의 스승들
오쇼의 스승들에 대한 오쇼의 이야기를 정리해 보았다.
대부분 책에서 발췌한 내용을 토대로 하였다.
하나. 보디달마
기나긴 인류의식의 진화 과정에서 보디달마만큼 이상한 인물도 없을 것이다.
보디달마는 참으로 기이하고 독특하며 희귀한 존재다.
오쇼는 수많은 깨달은 자 중에서 보디달마를 에베레스트에 비유하고 있다.
그리고 보디달마의 존재와 삶과 표현의 방식은
어느 누구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다며 칭송하고 있다.
심지어 붓다보다도 더 우월하다고 이야기한다.
이 책에서는 보디달마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와
양무제와 만난 일화 등 여러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둘. 고타마 붓다
고타마 붓다는 종교의 정수를 상징한다.
그는 불교의 창시자가 아니다.
불교는 부산물이었을 뿐이다.
그는 완전히 새로운 종교를 시작했다.
종교를 넘어선 종교, 즉 종교를 창시한 게 아니라 종교성을 창시한 것이다.
이는 인류 의식의 역사에서 혁명적인 변화였다.
붓다 이전에도 종교는 많았지만 종교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까지만 해도 인류의식은 성숙하지 못했다.
붓다와 더불어 인류 의식은 성숙한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붓다는 완전히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문없는 문을 열어 보았다.
삶이 곧 명상이라고 하였다.
오쇼는 붓다의 흙탕물 일화를 들면서 혼란스러운 내마음을 정화시키는 방법을 알려준다.
흙탕물을 가만히 두면 진흙은 가라앉고 깨끗한 물이 되듯이
우리 마음도 그냥 그대로 두면 깨끗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 마음을 그냥 두는 것을 명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명상만이 내 마음을 평온히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밖의 붓다의 가르침으로는
"양쪽 극단으로 치우치지 말고 항상 중앙에 머물라."
"그대 자신을 비추는 등불이 되라."가 식상하지만 인상적이다.
셋. 치요노
치요노는 일본의 비구니이다.
치요노가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수행하는 자의 자세를 이야기하고 있다.
치요노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는 종교적이고, 훌륭한 사람이다. 나는 남들과 다르다"
같은 에고에 둘러싸여 있었다.
진정한 깨달음이란 에고가 완전히 비워진 상태란 것을 모르고 말이다.
결국 깨달은 구도를 그만둔 구도자에게 일어나는 것인데 말이다.
넷. 장자
장자의 유명한 나비의 꿈 일화를 들면서,
그의 범상치 않는 영혼에 대해 오쇼는 이야기한다.
'쉬운 것이 바른 것이다'라는 진리를 이야기하는 장자.
그는 깨달음 세계에서 조차 희귀한 존재라고 오쇼는 말한다.
장자는 직관을 통해 깨달았고, 특별한 명상이나 방편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냥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라고 이야기한다.
세상 사람들이 선이라고 생각했던 '문명'은 인간을 죽인다.
문명은 인간을 서서히 죽여간다.
이는 오늘날 지구온난화와 환경파괴 등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장자와 그의 스승인 노자는 문명을 싫어한다.
장자는 이미 수천년전에 이를 깨달은 것이다.
자연을 받아들여라, 자연에 어떤 목적도 부여하지 말아라.
장자는 이야기한다.
"쉬운것이 바른 것이다.
바른 것에서 시작하라. 그러면 쉬워진다.
쉬운 것을 계속하라. 그러면 바르게 된다.
쉬움의 바른 길은 바른 길을 잊는 것이다.
쉽다는 생각도 잊는 것이다."
다섯. 디오니시오스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서양철학가이자,
사도 바울에 의해 그리스도교로 회심한 아테네의 최고법원 의원을 지낸 디오니시오스.
그의 사상이 동양사상과 일맥상통하여
인도사람과 교류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고 한다.
아테네 최초 주교로서 기독교의 엄격한 조직에서 살면서 의식의 최고봉에 올랐다.
지성이 뛰어난 사람 신비의 세계 꿰뚫음
그의 사상이 당시 그리스 사상과 맞지 않어 저작도 생전에 출간 안했다고 한다.
여섯. 칼릴 지브란
오쇼는 칼릴 지브란을 통해 시인과 깨달은 자의 차이점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칼릴 지브란을 순수음악 그 자체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시를 통해 신비를 노래하였다.
그를 인간의 가슴과 미지의 세계를 꿰뚫어볼 수 있는 형안을 지닌 사람이라고 오쇼는 이야기한다.
칼릴 지브란은 신비한 미지 세계의 단편들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해 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그가 21살때 쓴 <예언자> 이후의 작품들은 모두 변변치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잘 쓰려고 했기 때문이다.
<예언자>는 노력의 산물이 아닌 저절로 나온 것이라는 점을 그는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일곱. 구르지예프
구르지예프는 그리스계 아르메니아인으로,
인도와 티벳을 여행하면서 동양의 신비주의를 배웠으면 후에 서양에 널리 소개하였다.
"당신은 감옥에서 살고 있다" "당신 자신이 바로 감옥이다."
라고 이야기하면서
감옥에서 나오고 싶으면, 정확히 말해 그대가 감옥이고 싶지 않다면
먼저 그대가 감옥에 있음을, 그대가 감옥임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한다.
이런 감옥에 대한 비유를 이해하기에는 나는 역부족인 듯 싶었다.
여덟. 헤라클레이토스
"같은 강물에 두번 발을 담글 수 없다."란 말로 유명한 철학자.
그리스에서 태어나서 인정 받지 못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왈, 헤라클레이토스는 철학자가 아니라고 하였다.
왜?
헤라클레이토스는 그리스와 어울리지 않는 존재이다.
그가 동양에서 태어났다면, 무수한 사람들이 그의 은혜를 입고 길을 찾아 나섰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에게 헤라클레이스토스는 너무나 이상하고 기이하고 이질적이라고 한다.
동양사상과 서양사상의 차이점이 무엇이길래?
한가지 예로 서양사상에서는 삶과 죽음은 별개로 생각하고,
동양사상에서는 삶과 죽음을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
아홉. 예수
오쇼는 예수를 통해
종교를 이용한 장사꾼들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종교를 비꼬면서 이야기한다.
"만약 예수가 다시 돌아오면 교황이 먼저 나서서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라고 외칠 것이다.
교황이 하는 장사를 예수가 망쳐 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체의 장사를 망쳐 놓는 것, 그것이 2000년 전 예수가 한 일이다.
왜 랍비들은 예수에게 분통을 터뜨렸는가?
랍비의 장사는 아주 잘 되고 있었다. 모두가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예수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예수는 인생을 묵상하라고, 진리를 탐구하라고 외쳤다.
기존 사회는 그럼 사람을 가만 두지 않는다.
진리를 찾고 탐구하면 기존 사회가 주검 위에 서 있는 허상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사이비 종교는 장사다. 종교를 가장한 장사다.
종교적인 언어를 늘어놓지만, 그들에게는 체험이 없다.
사제들이 그를 이용해 장사를 해 먹는다."
열. 까비르
'다행히도' 잘 알려지지 않은 인도의 시인이라고 오쇼는 이야기한다.
이슬람 가정에서 태어나 힌두 가정에서 자란 그는
죽은 후 까비르의 시신을 놓고 힌두 제자와 히슬람 사이에서 분쟁이 일어난 일화 소개하였다.
까비르의 노래는 더 없이 아름답다. 그는 시인이다.
철학자가 아니다. 그는 학설을 세우지 않는다.
그래서 이론가도 신학자도 아니다. 교리에도 경전에도 관심이 없다.
그의 관심은 모두 어떻게 피어나느냐, 어떻게 신이 되느냐에 모아져 있다.
그래서 사람들을 보다 사랑스럽고 깨어 있는 존재로 만드는데 모든 노력을 경주한다.
이는 배움의 문제가 아니라 배움을 버리는 문제이다.
까비르는 아주 평범하게 태어나 아주 평범하게 살다 갔다.
특별한 사람이 되려는 욕망을 버리지 않는 한 그대는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없다.
평범한 자신의 모습에 편해하지 않으면 결코 안식을 얻을 수 없다.
까비르는 미래를 알리는 선구자요 선각자이며, 새 봄을 알리는 꽃이다.
종교사에서 더없이 뛰어난 시인이다. 까비르는 신학자가 아니다 그에게는 종교가 없다.
그러면서도 그 안에는 모든 종교가 있다.
까비르는 모든 종교를 담을 수 있을 만큼 거대하다.
그는 더없는 아름다움이요, 시요, 교향악이다.
까비르는 보니, 간디가 이야기한 '평범한 삶 고차원의 생각'이 떠오른다.
열하나. 크리슈나
크리슈나는 더없는 깊이와 더없는 높이를 성취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전혀 심각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보통 종교적인 사람의 특징은 심각하고 어두우며 슬픈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장의 패배자처럼. 힌생의 낙오자처럼 말이다.
하지만 크리슈나는 웃으며 춤추고 노래 부른다.
크리슈나의 삶은 한계를 모른다.
그의 삶은 어떤 도덕에도 매이지 않으며 광대무변하다.
크리슈나는 자유롭다. 어떤 제한도 없이 자유롭다. 밟지 못할 땅이 없다.
말하지 못할 사항이 없다. 초월하지 못할 한계가 없다.
이런 자유와 광대함은 크리슈나가 참 나를 체험한 데서 오며
크리슈나의 깨달음이 맺는 궁극의 열매이다.
열둘. 크리슈나무르티
크리슈나무르티는 오쇼와 동시대 사람으로 오쇼와 크리슈나무르티는 많은 교류를 하였다.
크리슈나무르티의 가르침은 참으로 훌륭하지만 너무 심각하다고 오쇼는 이야기한다.
그 심각함 때문에 사람들의 머리(지식)에 다가갔을 뿐
사람들의 가슴(지혜)을 건드리지 못했고 그 때문에 실패했다고 오쇼는 이야기한다.
오쇼가 평하길, 그는 위대한 철학자였지 위대한 스승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는 사람들을 돕지 못했다.
사람들이 새로운 삶을 살고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돕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철학자 같은 삶을 살면서도 신비가의 길을 가장 가까이 다가갔다는 점에서
그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열셋. 노자
전에 김용옥의 <노자와 21세기>를 읽으면서
노자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졌는데,
이 책을 통해 그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오쇼 역시 노자에 대해 높이 칭송하고,
오쇼 자신과 노자를 동일시하였다.
노자의 가르침을 노자의 말로 정리해 본다.
"이 세상에서 살아 남으려면 이 나무처럼 전혀 쓸모없는 나무가 되라는 말이다.
그러면 아무도 너희들을 해치지 않을 것이다.
너희들이 반듯하면 잘려서 어느 집 가구가 된다.
이 나무처럼 전혀 쓸모없는 사람이 되라.
그러면 아무도 너희들을 해치지 않는다.
그렇게 쓸모없는 나무로 크게 자라면 수많은 사람들이 너희들의 그늘에 와서 쉴 것이다.
꼴찌가 되어라. 없는 듯이 살아라. 무명인으로 살아라.
일등이 되려고 애쓰지 말아라.
경쟁하지도 말고 자신의 능력을 보여 주려고도 하지 말아라.
그럴 필요가 없다. 쓸모없는 사람으로 살며 이를 즐겨라. 비현실적인 사람이 되라.
비현실적인 사람이야말로 깊은 차원에서 보면 가장 현실적인 사람이다.
진정한 삶은 즐기고 참미하는 것이지 실용을 따지는 것이 아니다.
삶은 시장의 상품같은 것이라기보다는 시와 같은 것이다.
삶은 시가 되고 노래가 되고 춤이 되어야 한다.
바람에 향기를 날리는 길가의 꽃이 되어야 한다.
아무런 대상 없이 스스로 존재하고 스스로 즐기는 꽃이 되어야 한다.
영리한 사람, 쓸모 있는 사람이 되면 이용당하게 되어 있다."
이는 지금까지 학교나 사회에서 배운 가르침과 정반대되는 가르침이다.
하지만, 그의 말이 틀린 것은 하나도 없다.
이 험난한 경쟁사회에서 치고박고 경쟁하면서 내 손에 들어오는 것은 무엇인가?
빈손이다.
무엇을 위한 경쟁이었나?
노자의 가르침은 나를 너무 작게 만들었다.
열넷.미라
미라는 크리슈나와 함깨 했던 고피(크리슈나의 피리에 맞춰 춤추고 유희하던 여인) 중에 하나였다.
이는 미라 자신이 한 말이다. 학자들은 무시해 버렸다.
후에 미라는 크리슈나 신상과 하나가 되었지만,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오쇼는 미라의 삶을 통해 배려하고 이해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라고 이야기한다.
엿다섯. 니체
니체의 철학은 머리뿐 아니라 가슴에도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때때로 존재 자체에 뿌리를 내리기도 한다.
그의 유일한 불행은 서양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니체는 신비학교에 들어갈 수 없었다.
심오하게 사색을 했지만 명상의 세계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때로 명상가의 깊이를 보여주기도 하고 때로 고타마 붓다처럼 비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그가 의도했서 일어났다기보다는 저절로 일어난 것처럼 보인다.
니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 의식의 절정에 대해 사색한 유일한 철학자다.
그는 의식의 절정을 체험해 보지 못했을 것이다.
니체에게는 무의식적으로 전생에서 물려받았을지 모르는 붓다의 자질과 조르바의 자질이 있었다.
니체는 보기 드문 천재라고 오쇼는 평가하였다.
너무나 고차원의 영혼을 소유한 자라서
그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 뿐만 아니라 그의 사상을 잘못 해석하여 큰 재난도 일어났다고 한다.
바로 세계이차대전.
니체의 철학을 잘못 해석한 히틀러는 세계2차대전을 니체의 철학을 이용하여 합리화하였다고 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리고 니체는 말년에 정신병원에 가게 되는데,
이또한 일반 사람들이 그의 영혼과 사상을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라고 한다.
오늘날 니체의 사상이 다시 연구되고 있지만,
아직 그의 철학을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열여섯. 피타고라스
그는 알렉산드리아에 몇년동안 거주하면서 아틀란티스의 비밀을 배웠고,
이집트의 신비학교에 입문하여 헤르메스의 신비를 배웠다.
인도에 가서 고대 브라만의 세계에 입문하여 내면의 지혜를 배웠고,
티베트와 중국을 순례하면서 도를 구하고 철학을 찾아다녔다.
진정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동양과 서양을 통합한 최초의 인물이라고 오쇼는 평하고 있다.
피타고라스는 서양의 정신만큼이나 깊게 동양의 정신을 알았다.
오쇼는 피타고라스를 통해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과학은 객관의 세계에서 진리를 찾는 것이요,
종교는 주관의 세계에서 진리를 찾는 것이다. 그리고 철학은 궁극의 진리를 찾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과 종교는 두 손 혹은 두 날개와 같다.
과학과 종교의 관계는 서로 충동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보완하는 관계다.
우리가 이 점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세계는 한층 좋아질 것이다.
서양은 과학을 선택하여 세상의 부를 모두 긁어 모았지만
인간 자체가 실종된 채 허무한 삶을 살고 있다.
서양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공허함과 허무뿐이다. 서양의 내면은 정말로 빈곤하다.
동양에서는 반대의 일이 일어났다.
동양은 과학을 버리고 종교를 택했기 때문에 동양의 내면은 조용하고 고요하며 풍요롭다.
하지만 식량도 의약도 없어 굶어 죽어가고 있다.
인간은 유물론자이면서 동시에 유심론자여야 한다. 한쪽을 선택하면 큰일난다.
진작에 피타고라스의 말을 따라야 했다고 오쇼는 이야기하고 있다.
열일곱. 라비아 알아다비야
라비아 알아다비야는 대단히 기이한 행동으로 알려진 수피 여성이다.
그녀의 기이한 행동에는 위대한 직관이 숨겨져 있다.
오쇼는 몇가지 일화를 들어 그녀의 고귀한 영혼을 설명하였다.
열여덟. 잘랄루딘 루미
안으로 들어가라. 하지만 두려움 때문에 들어가지는 말라
사랑의 길로 들어가라. 기쁨의 길로 들어가라.
두려움 때문에 들어가지 말라. 세상 종교는 모두 두려움이란 땅위에 서 있다.
그들의 신은 공포의 대상이다.
그들이 말하는 온갖 천국과 지옥 역시 두려움과 탐욕의 투사물에 지나지 않는다.
루미의 말은 대단히 혁명적이다.
수피의 세계에서 루미는 황제다.
그의 말은 단순히 언어로 이해할 게 아니라 깊은 침묵의 근원으로, 가장 깊은 내면에서 울려 나오는
노래의 메아리로 이해해야 한다.
열아홉. 하킴 사나이
하킴 사나이는 수피 세계에서 독특하고도 독특한 인물이다.
다른 어떤 수피도 하킴 사나이만큼 표현의 높이와 통찰의 깊이에 도달하지 못했다.
<하디카 툴 하키카트>를 저술하였는데, 이는 울타리가 있는 진리의 정원이란 뜻이다.
<하디카>라고도 부르는데, 오쇼는 이 <하디카>를 사랑의 길의 정수요, 향기라 평했다.
수피즘의 골수를 포착한 것으로
인간의 마음 쓴 책이 아니라 마음 너머의 세계에서 온 책이라 하였다.
스물. 소크라테스
아테네가 소크라테스에게 독배를 내리던 날 그리스 정신도 사망했다.
그 증거로 소크라테스 사망 이후 황금 시대를 다시는 구가하지 못한 점을 들었다.
소크라테스가 위대한 점은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접근했다는 점이다.
그는 말한다.
"아무것도 그냥 믿지 말라"
그는 "신"의 존재 또는 "죽음 뒤의 삶"또한 과학적으로 접근하였다.
심지어 독배를 먹고 죽는 순간까지도
그는 제자들에게 독배를 마시고 죽기 전까지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알려주었다.
자신의 죽음을 체험해보고 소크라테스는 죽음 뒤의 삶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정말 훌륭한 과학정신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삶을 완전히 안 사람이다.
소크라테스는 진정 삶을 통달한 사람이었다.
4. 맺는말.
오쇼는 다음과 같이 핵심을 이야기하면서 책을 맺는다.
"삶의 양식에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시간 안에서 사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시간을 넘어서 사는
것이다. 역사는 시간 안에서 사는 삶의 기록이다. 이런 삶의 양식은 시간의 흐름에 자취를 남긴다.
하지만 또 다른 삶의 양식이 있으니, 바로 시간을 넘어서 사는 것이 그것이다.
이런 삶의 양식은 어디에도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예수의 역사적 실존이 의심받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크리슈나와 노자, 자라투스트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왜 그들의 역사적 실존이 의심을 받는
가? 그들은 시간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면의 삶을 살다 갔다. 자기 안
에서 살다 갔다. 그들의 삶은 도드라지게 외부로 나타나지 않으면서도 인류의 의식을 변화시켰다.
그들은 의식 속에서 살면서 인간의 의식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역사는 그런 사람들을 기록하지 않는다. 인간의 역사는 히틀러나 칭기즈 칸, 티무르 같은 사
람들을 주목한다. 시간 안에서 시간의 모래 위에 흔적을 남긴 사람들을 주목하는 것이다. 그러나 붓
다나 예수와 같은 사람들은 거의 없는 듯 지나간다. 역사를 넘어서라는 말은 바로 그런 뜻이다. 역
사 속에서 살지 말라. 각성 속에서 살라."
5. Let it be
이 책에서 가장 강조하고 있는 것이 '그대로 두어라'는 가르침이다.
꽃이 이쁘다고 꽃을 만지면 꽃은 더 일찍 시들고 만다.
그냥 가만히 두어야 한다.
지금까지 지구를 괴롭힌 지구인들.
마지막 발악인가? 지구를 살리겠다고 지구를 계속 건들인다.
지구를 살리는 유일한 방법은 지구를 그냥 두는 것이다.
40억 나이의 지구난 한낱 100년도 못사는 인간들보다 못하겠는가?
국회의원들이 백성들 잘 살게 해준다고 이거해준다 저거해준다고 난리다.
백성들이 더 일찍 망할까 두렵다.
제발 그냥 두어라.
멀쩡한 우리국토 그냥 두어라.
괜시리 운하만든다고 칼집내지 마라.
갑자기 비틀즈의 Let it be가 듣고 싶어진다.
책제목 : 인생에 소중한 가르침을 준 스승과의 위대한 만남
지은이 : 오쇼 라즈니쉬
펴낸곳 : 비전코리아
펴낸날 : 2006년 1월 6일
정가 : 12.000
독서기간: 2008.04.09 - 2008.04.14
페이지: 368 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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