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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 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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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자료실 스크랩 선사상(禪思想) - 성본 스님
普 行 추천 0 조회 68 10.10.22 00:51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선사상(禪思想) - 성본 스님

1. 선(禪), 선불교의 의미
 1) 선(禪)에 대한 현대의 새로운 관심
 2) 인더스 문명과 선의 풍토
 3) 요가와 선정
 4) 선불교 성립과 선사상
 5) 선불교의 사상
 6) 선불교의 정신과 목적

2. 선의 수행과 실천
 1) 선불교의 실천구조
 2) 선수행의 구조

 


1. 선(禪), 선불교의 의미

1) 선(禪)에 대한 현대의 새로운 관심
오늘날 세계적으로 선에 대한 관심이 날로 고조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현대의 과학문명과 더불어 물질 만능주의, 황금 제일주의로 치달리면서 인간성의 말살과 인간 상호간의 신뢰와 불신, 혹은 인간 소외의 현실에서 자기 존재에 대한 자각에 새롭게 눈뜨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이처럼 동양의 마음인 선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현상은 예로부터 선의 풍토적인 환경 속에 살고 있는 인도나 중국, 한국, 일본 등 선불교의 정신에 젖어 있는 동양의 여러 나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의 문화권밖에 있는 서구(西歐) 여러 나라에서 비롯된 새로운 현상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경향은 1927년부터 1934년 사이에 영문으로 출판한 스즈키다이세츠(鈴木大拙, 1870~1966)의 선학논문집(Essay in Zen Buddhism) 3권을 비롯하여 선불교 관련의 저술과 선과 문화 등, 그 밖에 그의 많은 영문 저술이 세계 각국 언어로 번역되면서 많은 독자들로부터 선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과학문명과 기계화된 산업사회의 구조 속에서 인간성이 말살되고, 신(神)중심이 종교관과 인간관의 전통 속에서 살아온 서구인들에겐 신에 의한 피조물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이러한 인간의 근원적인 마음인 선을 통하여 자아의 참된 인간관과 각자 스스로 창조적인 인간으로서의 삶의 가치관을 되찾을 수 있는 선의 정신과 선불교의 문화가 완전히 새롭고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오늘날 선의 풍토와 환경 속에 살고 있는 동양에서 선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고조된 소위 선 붐의 현상은 이처럼, 서구에서 새로운 각광을 받고 널리 주목된 선에 대한 관심이 서구의 과학문명과 함께 동양으로 다시 전래되면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임을 간과할 수는 없는 일이다.
진리가 너무 가까이 있기에 볼 수 없는 것처럼, 우리들이 선의 정신속에 살면서 매일 매일 사용하고 있기에 더욱더 그 가치를 바로 알 수 없는 것과 같은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2) 인더스 문명과 선의 풍토
세계의 고대문명을 통해서 살펴볼 때 고대 인도문명의 독창적인 문화의 하나가 일반적으로 요가(yoga)라고 불리는 사유와 명상의 문화를 개발했다는 점이다. 요가의 사유 문화는 인도에서 발생한 모든 종교나 철학, 예술 등 인도의 전문화를 배양시킨 원동력이 되고 있음은 재언을 요하지 않는다.
B.C. 3000년에서 B.C. 2500년경에 성립된 고대 인더스 무명의 유적지인 모헨조다로(Mohen-jo-Daro)나 하랍빠(Harappa) 등의 지역에서 발견된 요가의 사유 명상을 하고 있는 모습이 새겨진 인장(印章)과 성자(聖者)의 흉상(胸像)으로써 확인할 수 잇는 것처럼, 사실 요가 같은 사유의 문화는 B.C. 1500년경에 인도를 침입한 아리야(Arya) 민족에 의해서 이루어진 문화가 아니고 인도 고대 원주민(토착민)인 드라위다(Dravida)족과 문다(Munda)족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독창적인 사유 명상의 문화라는 점이다.
특히 모헨조다로나 하랍빠 등이 인더스 문명의 유적지에서 발견된 활석재(滑石製)로 만들어진 인장에는 신의 모습과 환상적인 그림, 성스러운 나무 등, 반상형(半象形) 문자와 400여 종에 달하는 음절(音節)문자와 표의(表意)문자등의 기호가 새겨져 있는데 아직 이를 해독하지 못하고 있다. 그 가운데 모헨조다로에서 출토한 3개의 인장 가운데 수주(獸主, Pasupati)의 모양과 요가 사유의 좌선하는 모습이 새겨진 문양들이 보이고 있다.
요가 사유의 좌선하는 모습이 새겨진 인장을 보면, 좌선상(坐禪狀) 위에 양쪽 다리를 편안히 벌리고 앉아 두 손을 양쪽 무릎 위에 가볍게 올려놓고 엄지손가락을 받치고 있으며, 깊은 명상의 세계에 몰입한 성자의 모습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또, 모헨조다로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실제로 요가 수행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 석제의 흉상(石製胸像)이 발견되었다. 이 흉상은 B.C. 2000년경이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오늘날 수행승들이 왼쪽 어깨에 가사를 걸치고 오른쪽 어깨의 맨살을 드러내 보이고 있는 의상을 걸치고 있으며, 눈은 반쯤 뜨고, 코는 높이, 입은 꼭 다물고 있는 표정의 용모는 바로 요가를 수행하고 있는 성자의 모습을 조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유적의 자료들을 통해서 살펴볼 때 고대 인더스 문명을 이룩한 원주민들이 요가 명상의 사유를 통한 종교적인 실천을 전개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고대 인도의 원주민들에 의해 이루어진 독창적인 요가 명상의 사유법이 인도라는 지역에서만 개발하고 발전하게 된 것일까? 다시 말해서, 요가 명상의 사유법이 인도에서 발생할 수 있었던 이유와 조건, 그 원인은 무엇일까?
필자는 그 중요한 요인이 하나를 인도가 위치하고 있는 지리적인 조건과 기후 등에 의한 풍토적인 입장에서 찾아보려고 한다.
풍토(風土)란 인간이 살고 있는 생활환경 그 모두를 말한다. 인간은 예로부터 각자가 살고 있는 생활환경 속에서 사유하고 노력하여 보다 좋은 생활의 지혜와, 정신적 육체적인 안정과 평안 그리고 행복한 삶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가라는 사유법도 고대 인도인들이 지리적. 기후 풍토적인 생활 환경속에서 생활의 지혜로 이룩한 종교 문화이기에 그러한 요가 사유의 명상이 형성될 수 있었던 환경과 조건 등을 선의 풍토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도가 위치하고 있는 곳은 지형적으로 북쪽에는 히말라야산이 우뚝 가로질러 솟아 있고, 왼쪽에는 갠지스강이 흐르고 있으며, 기후적으로는 서남 계절풍이 부는 몬순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몬순지대는 약 반년을 주기로 하여 겨울에는 대륙에서 대양으로, 여름에는 이와 반대로 대양에서 대륙으로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대륙 변방지대이다. 인도에는 이러한 계절풍이 부는 4월에서 7, 8월까지의 우기에는 거센 비바람이 불어닥치며 많은 비가 내리기 때문에 사람들이 밖에서 일을 할 수도 없고, 또한 다닐 수도 없다.
인도뿐만 아니라 동양인들은 집을 짓고 가정을 꾸미며, 농사일을 하면서 안정되고 정착된 생활을 영위하는 농경문화인이다. 따라서 대지나 흙, 산천초목은 물론, 눈. 비. 바람 등 모든 자연과 더불어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가는 생활의 지혜를 가지고 있다.
즉, 인도인들은 몬순이란 계절풍과 더불어 세차게 몰려오는 비바람에 저항하지 않고 자연의 은혜를 참고 받아들이며, 자연에 순응하는 생활을 하였다. 사막에서나 농경지대에서나 비(물)는 그야말로 생명수이며 감로수이다. 산천초목 등 대지의 모든 존재를 양육시키는 생명수이기도 하다. 때문에 인도인들은 대지의 생명수와 같은 그러한 자연의 은혜를 받아들이기 위해 몬순의 계절풍이 부는 우기에는 조용히 집안에서 요가 사유의 명상을 하며 몬순이 끝날 때까지 참고 기다렸다.
사막에서 살고 있는 유목민들은 보다 좋은 생활환경을 찾아다니기 위해 항상 끊임없이 옮겨다니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유목민들의 생활풍습에서 정신적인 안정으로 전개되는 요가 선정의 사유의 문화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고대 인도인들은 몬순이라는 거센 비바람이 부는 우기에는 외부의 출입을 자재하고 가만히 집에서 안주하여 신(神)을 사유하고, 자기 자신의 존재를 관찰하며, 괴로움의 세계인 이 사바세계에서 벗어나 해탈할 수 잇는 종교적인 깨달음을 추구하면서 요가 사유의 문화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몬순이라는 계절풍과 기후나 풍토가 인도인이 정신인 요가, 사유의 문화를 만든 것이 아니라, 인도인들이 예지와 종교적인 정신이 그러한 풍토를 이용해서 신을 사유하고 자신의 존재를 사유. 명상하며, 종교적인 인생과 삶의 지혜를 창조한 것이라는 점이다.
불교에서도 붓다 당시부터 몬순이 계절풍이 부는 우기에는 일체 수행승들이 유행을 하지 말고 사원에 머물며 안거하면서 선정(禪定)을 닦도록 하는 수행생활을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 이 기간을 하안거(夏安居)라고 한다.


3) 요가(yoga)와 선정(禪定)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선(禪)이란 말은 고대 인도의 사유 명상법인 요가에서 비롯된 것인데, 붓다의 깊은 사유와 정각을 통하여 불교의 실천 수행인 선정으로 체계화된 말이다. 여기서 먼저 요가나 선정(禪定)등에 대한 어원과 기본용어 그리고 그 말의 개념부터 정리해 보자.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요가의 기원은 B.C. 3000년경 인더스강 유역을 중심으로 발전된 고대 인더스 문명의 유적에서 발견된 요가 수행자의 모습이 새겨진 인장이나 성자의 흉상 등의 발굴로 입증된 것처럼, B.C. 1500년경 아리야인들이 인도를 침입하기 이전에 이미 고대 인도의 원주민들에 의해 실행된 요가 명상 사유의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요가 사유의 문화는 약 5,000년 내지 그 이상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요가란 각자의 산란된 마음을 안정시키고 정신을 통일시키는 수행 방법을 말한다.
요가란 말은 "연결시키다"라는 의미로서, yuj(연결하다)라는 어근(語根)에서 만들어진 말이다. 영어의 yoke(멍에)라는 단어도 같은 어원에서 유래된 것으로 '결합', '억제' 등의 뜻이며 또 유가라고 음역(音譯)하고 상응(相應)이라고 의역(意譯)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요가라는 말이 '사유하다', '명상하다'라는 의미로 문헌상에 최초로 기록되고 있는 곳은 B.C. 6세기경에 성립된 "카타-우빠니샤드(Katha-Upanisad)"이다. 이 책에서는 '명상 사유를 통하여 5가지 감각(感覺)을 제어하고, 산란된 마음을 정지시키는 것이며, 이와 같이 모든 감각기관이 정지되어 움직이지 않고 잘 유지해 가는 것(執持, dharana)을 요가라고 한다.'라고 요가의 정의를 내리고 있다.
"카타-우빠니샤드"에는 또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만일 항상 긴장하지 않고, 밝고 분명한 인식(認識)도 없는 지각에 대해서는, 그 지각기관은 마치 말이 주인을 대하듯 유순하지 못하다. 그러나 항상 긴장하고 밝고 분명한 인식이 있는 지각에 있어서는 모든 감각기관이 마치 잘 길들여진 말이 주인을 대하는 것처럼 유순하다.'
'카타-우빠니샤드'에서 말하는 '항상 긴장된 마음(uktena manasasada)이라고 하는 한 구절이 바로 요가의 실천 내용을 나타내고 있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밝은 인식 혹은 지각은 주인에, 마음(意)은 고삐에 비유되고 있는 것처럼, 긴장된 마음은 팽팽하게 잡아당기고 있는 고삐와 같은 상태를 말한다. 고삐를 잠시라도 늦추면 말은 다른 곳으로 달아나고 마는 것처럼, 마음을 잠시라도 놓지 말고 한 곳을 집중하여 항상 긴장하고 있는 마음의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말하자면, 요가라는 말의 의미는 '말이 제멋대로 움직일 수 없도록 말고삐를 말뚝에 꼭 묶어 두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어지러운 마음을 가라앉히고 편안하게 하는 정신통일의 수행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요가의 수행법은 인도의 모든 종교 내지 철학의 모체가 되고 있는 수행법인데, 불교의 선정(禪定)도 붓다가 처음 이러한 요가의 수행법을 받아들이고 이를 한층 더 발전시키고 독자적인 깨달음의 선정과 지혜와 인격을 형성하는 불교의 기본 수행으로 체계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또, 요가와 같은 말로 선나(禪那, dhyana)와 삼매(三昧, samadhi)라는 말도 우빠니샤드 문헌에 나타나고 있는데, 특히 불교에서는 요가라는 말보다 선나, 혹은 선정, 선이라는 말로 일반화되었으며, 지관(止觀), 선바라밀(禪波羅密, 禪定의 완성)이라고도 한다.
선, 혹은 선나라는 말은 범어 dhyana(드야나), 혹은 빨리어 jhana(즈하나)라는 말을 중국의 한자로 음사한 말이다.
한자로 선이란 글자는 원래 땅을 깨끗이 하여 천지의 신과 산천에 제사를 올리는 의미이며, 또 토지를 열고 다툼 없이 평화스럽게 왕위를 물려주는 선양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선이라는 한자에는 원래 요가나 드야나와 같은 사유나 명상의 의미는 없는데, 경전을 번역할 때 중국인들이 드야나(dhyana)혹은 즈하나(jhana)라는 말을 선나 혹은 선이라는 말로 음사하면서 새롭게 선정이 요가 사유의 의미를 나타내는 일반적인 말로 정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범어 dhyana와 빨리어 jhana는 우빠니샤드에서 yoga와 마찬가지로 사유와 명상을 의미하는 말이다. 즉 dhyana는 중성 명사인데, 이 말의 어근인 dhyai는 '깊이 생각하다', '숙고하다'라는 동사이다. 이 말을 중국에서는 '조용히 생각하다'라는 의미로 '정려(靜慮)' 혹은 '선사(禪思)'라는 말로 번역하였다. 선사는 음역과 의역의 합성어라고 할 수 있는데, 선나(禪那), 선사(禪思)의 줄인 말이 선(禪)이다.
붓다는 요가라는 전통적이고 일반적인 말을 사용하긴 했지만, 당시 브라만들이나 이교도들의 사상과 실천적 차원이 다른 입장에서 불교 선정의 내용을 지관으로 하는 dhyna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였다.
불교의 사상과 실천적인 입장에서 선정이 내용은 지(止, samadhi, samatha)와 관(觀, vipasyana)이라고 할 수 있다. 지(止, samadhi)는 '집중하다'라는 의미인데 일반적으로 삼매(三昧)라는 말로 유행되고 있다. 관(觀)은 '지혜로 사물을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불교의 선정은 고대 인도의 요가처럼 고요히 앉아 산란심을 없애는 명상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더 나아가 삼매의 경지에서 근원적인 지혜로 일체의 사물과 진리를 볼 수 있는 안목을 갖추어 지혜로운 자기의 삶을 전개하는 생활의 종교인 것이다.
선은 또 선정(禪定)이라는 술어로 사용하고 있는데, 여기의 정(定)은 samadhi(三昧)라는 말을 번역한 '집중하다'라는 의미로 만들어진 남성명사인데, 마음을 평정하게 유지하며 하나의 대상에 주력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중국에서는 등지(等持)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처럼 dhyana나 samadhi라는 말에는 모두 선정(禪定)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원시불교의 실천덕목인 팔정도의 정정(正定, samma-samadhi)은 samadhi를 번역한 말이나, 대승불교에서 보살도의 실천인 6바라밀의 하나인 선정(禪定)은 dhyana를 번역한 말이다.

 

4) 선불교 성립과 선사상
선은 불교의 정신을 배우고 직접 실천하여 각자가 스스로 진리를 체득하게 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수행을 말한다. 불교의 역사적인 발전과 더불어 각각의 시대와 인도나 중국, 한국 등의 지역에 따라 다소의 차이점은 있었지만 언제, 어디서나 불교의 수행과 실천은 선이 중심이 되고 있었음에는 변함이 없다.
사실, 선은 붓다가 제시한 깨달음의 종교인 불교를 각자가 직접 실천하는 그 자체인 것이다. 따라서 선은 불교의 정신을 깨달아 자기화하고, 생활화하고, 인격화하는 구체적인 실천이며 수행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선의 수행과 실천사상도 시대의 변화와 지역적인 발전에 따라 다양화됨과 동시에 각각의 시대와 지역, 민족에 맞는 사상과 실천정신으로 발전시켰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중국에서 발전된 조사선(祖師禪)의 선불교가 형성된 점이라 하겠다.
사실, 오늘날 스즈키(鈴木)의 활약으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선불교(Zen-Buddhism)는 당나라 시대에 완성된 조사선(祖師禪)의 선사상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이나 한국, 일본 등지에서 널리 실천하고 있는 간화선(看話禪) 혹은 공안선(公案禪)도 조사선의 새로운 발전인 것이기에 우선 조사선의 선불교를 잘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즉, 말하자면 선은 인도에서 발생되었지만 선불교의 선사상은 중국에서 완성된 것이다.
선불교는 인도에서 형성된 요가 명상이나 불교의 선정법(禪定法)이 아니라, 당대의 조사들에 의해 새롭게 완성된 조사선의 선사상인 것이다.
중국에서 완성된 조사선의 선불교는 단순한 정신집중이 요가나 산란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번뇌를 퇴치시키는 좌선의 실천적인 입장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 각자의 근원적인 본래심(本來心=佛性)의 자각과 실천, 그리고 본래심의 지혜와 인격적인 덕성을 일상생활 가운데 전개하는 생활의 종교로 발전시킨 것이다.
말하자면, 인도에서 전래된 외래의 종교이며 요가 명상법인 선을 중국적인 차원에서 일상생활이 종교로 승화시킨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선불교의 정신이 형성된 사실을 돈황본 '육조단경(六祖壇經)'에서 주장하고 있는 좌선의 정의를 통해서 살펴보자. 돈황본 '육조단경'에는 다음과 같이 좌선의 새로운 정의를 주장하고 있다.
이 남종(南宗)의 법문에서는 무엇을 좌선이라고 하는가?
이 법문에서는 일체에 무애자재(無碍自在)하는 것이다. 즉, 밖으로 일체의 경계에 임하여 망념(妄念, 번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좌(座)라고 하며, 자기의 불성(佛性)을 깨닫고 산란됨이 없는 것을 선(禪)이라고 한다.
사실, 이러한 중국 선조의 새로운 좌선에 대한 주장은 인도불교이래 역사적으로 발전된 선의 실천을 종합하고 있는 종래의 북종선(北宗禪)에 대한 남종의 새로운 선사상을 밝히고 있는 유명한 일단이다.
여기서 일체의 경계에 번뇌의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좌라고 한 것은 우리들이 본래심(本來心)인 불성이 본래 청정한 그  당체(當體)를 체득하는 것을 말한다.
즉, 번뇌나 망상을 퇴치시키는 종래의 선정이나 명상 사유의 차원을 훨씬 벗어나 일체의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 근원적인 본래심을 깨닫고, 각자의 근원적인 본래심의 입장에서일상생활에 흩어지거나 망각되지 않는 주체적인 삶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선불교의 실천 정신은 '열반경' 등에서 설하고 있는 자각의 주체인 불성사상과 '금강경', '유마경', '반야경' 등에서 설하고 있는 공의 실천을 통한 반야의 지혜를 일상생활에서 무애자재하게 전개하는 반야사상을 통합하여 일상생활의 종교로 새롭게 정립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인도의 요가 명상법이 붓다의 깊은 사유와 깨달음을 통하여 불교의 자각적인 실천 수행법으로 완성되었고, 또 불교가 중국으로 전래되면서 당나라 시대의 뛰어난 선승들이 이룩한 조사선에서는 일상 생활의 종교인 선불교로 발전시켰다.
사실, 중국 선종 혹은 선불교는 수. 당대의 여러 종파불교 가운데서도 가장 후대에 성립된 수행 불교의 운동으로 성립되었다.
선의 실천 수행을 통하여 스스로 불법을 체득하는 수행자의 집단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즉, 조사선의 선불교는 종래의 전불교(全佛敎)의 역사적인 입장과 수. 당대의 여러 종파 불교에서 주장한 불교사상 및 실천적인 입장을 전부 종합하여 새롭게 자각적인 종교로서, 선불교의 사상과 실천 수행을 근본정신으로 하여 전개된 실천불교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붓다의 정신을 선의 실천으로 재정립하고 붓다의 정신으로 되돌아가려는 복고 운동임과 동시에, 이러한 정신을 중국인들의 정신과 풍토에 알맞은 새로운 현실적인 생활종교로 전개한 종교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당나라 시대에 일상생활 종교인 선불교가 완성될 수 있게 된 것은 불교가 중국으로 전래되면서 중국 고유의 노. 장자(老壯子)사상과 유교의 현실 긍정 사상과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중국인들은 현실을 절대 긍정하며 진리를 가까이에서 찾는 현실적인 사유정신과 생활풍토 등이 외래 종교인 불교의 정신을 선의 실천과 수행으로 각자 깨닫고, 새롭게 현실적인 일상샐활 종교로 재편함과 동시에 그 가운데서 불법의 참된 정신을 깨닫고 일상의 매사를 본래심으로, 진실된 삶을 자각과 지혜로 창조하는 생활불교의 선사상을 전개한 것이다.
따라서 당나라 시대에 완성된 조사선의 선불교는 단순히 번뇌나 산란심을 없애기 위한 좌선의 실천이나 선정을 닦기 위한 종파불교의 하나인 선종의 입장이 아니라, 붓다 이후 종래의 전불교를 선의 사상과 실천으로 종합한 중국불교의 새로운 입장이었기에 선불교라고 이름 붙이는 것이다.
이러한 선의 수행과 실천으로 생활종교인 선불교를 완성시킨 사람이 남종선의 육조 혜능(六祖慧能, 638 ~ 713)이며, 마조 도일(馬祖道一, 709 ~ 788)과 석두 희천(石頭希遷, 700 ~ 790), 백장 회해(百丈懷海, 749 ~ 814)등 당대의 띄어난 선승들이다.
특히 조사선의 대성자인 마조 도일선사는 이러한 생활종교인 선불교의 입장을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인간 각자 평상심으로 전개하는 것이 진실한 도)'라고하는 유명한 조사선의 새로운 도의 정의를 단적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이 역시 앞에서 살펴본 '육조단경'의 좌선의 정의를 발전시켜 일상의 종교인 선불교의 사상으로 전개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조사(祖師)는 선의 실천 수행으로 불교의 참된 정신을 깨닫고 체득한 사람이며, 또한 붓다의 정법(正法)을 계승하여 지혜와 인격으로 불법을 펼치는 당대(當代)의 교화주인 선불교의 새로운 인격을 말한다.


5) 선불교의 사상
불교사상 이외에 또 달리 선불교의 정신이나 사상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여기 선불교의 사상을 논하는 것은 불교 정신의 본질이 붓다의 가르침인 경전을 이해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어디까지나 선의 수행과 실천을 통해서 각자가 깨달음을 체득하여 불교의 정신을 자기화하고, 생활화하고, 인격화해야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선불교의 사상은 중국 당나라 시대의 뛰어난 선승(禪僧)들이 대승불교의 정신을 선의 수행과 실천적인 입장으로 새롭게 정립함과 동시에 이를 현실생활의 종교로 만들어 전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선불교의 사상적인 입장과 그 배경을 살펴보자.
선불교의 기본정신은 많고 다양한 대승불교의 사상 가운데서도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불성과 반야의 공사상 등 대승불교의 정신만을 선의 수행과 실천으로 전개하도록 간소화하고 있다.
즉, 앞에서도 인용한 '육조단경'의 좌선의 정의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선불교의 사상적인 골격은 대승불교의 실천적인 정신의 핵심인 불성(佛性)사상과 반야 공(空)사상의 실천이라고 하겠다. 즉, 불성을 깨닫도록 강조하고 있는 것은 만법(萬法)의 근원인 인간 각자 자각의 주체를 깨닫는 것이며, 그리고 그 자각된 각자의 불성(本來心)으로 일체의 경계에 끄달리거나 집착되지 않는 공(空)의 실천을 전개하여 반야(般若)의 지혜로 무애자재(無碍自在)하게 살아가는 생활의 종교인 것이다.
따라서 선불교의 사상적인 배경은 대승불교의 대표적 경전인 금강경, 반야경, 유마경, 열반경, 대승기신론 등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러한 대승경전에서 한결같이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일체 중생이 각자 자기의 자각의 주체인 불성을 깨닫고, 붓다와 조사들과 똑같이 공의 실천을 통한 반야의 지혜를 체득하여 일체의 경계에 걸림없는 무애자재한 지혜로 자아구명(自我究明)과 중생구제(衆生救濟)의 보살도를 전개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선불교에서는 언제나 각자의 불성을 깨닫도록 강조하고 있다. 선의 수행과 실천 방법이나 선사상도 사실 각자의 불성을 깨닫는 방법과 자각적인 지혜를 전개하는 정신을 주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선불교의 수행은 결국 각자의 불성을 깨닫기 위한 기본적인 수행인 것이다.
그러면 왜 이렇게 불성을 깨닫도록 강조하고 견성(見性)을 주장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불교에서 만법(萬法)의 근원인 연기의 법칙을 관찰하여 깨닫도록 강조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일체 만법의 근원이 각자의 마음에 있으므로 마음의 법(心法)을 깨달음으로써 일체의 만법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화엄경에서 '일체의 모든 법은 오직 마음이 조작하는 것(一切唯心造), 삼계(三界)는 허망한 것, 다만 이 마음이 짓는 것일 뿐(三界虛妄但是心作), 이라고 설하고 있으며, 또 십지경에서도 "삼계는 오직 이 마음뿐이다(所言三界 此唯是心)." 라고 설하고 있고, 대승기신론에서도 '한 마음이 일어나면 일체의 법이 일어나고, 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일체의 법이 일어나지 않는다(心生則 種種法生, 心滅則 種種法滅).'라고 설하고 있는 것은 선불교에서 각자의 불성을 깨닫도록 강조한 견성(見性)사상의 사상적인 배경이 된다고 하겠다.
열반경 제35권 가섭보살품등에서 '일체의 모든 중생이 부처님과 똑같은 불성을 구족하고 있다.'라고 한결같이 설하고 있으며, 법화경 제1권 방편품에 '일체 중생이 모두 성불할 것임에 의심이 없다'라고 설하고 있다.
화엄경 제35권 보왕여래성기품에서도 '불자여! 여래(如來)의 지혜, 무상(無相)의 지혜, 무애(無碍)의 지혜는 중생의 몸 가운데(身中)에 구족되어 있지만, 어리석은 중생은 전도(顚倒)된 망상에 뒤덮여서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신심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설하고 있다.
또 화엄경 제10권 야마천궁보살설게품에도 '마음과 부처 및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라고 설하고 있는 것처럼 중생심(衆生心)인 이 마음이 곧 부처임을 설하고 있다.
그래서 마조어록에서 마조 도일선사도 다음과 같이 설법하고 있다.

너희들은 모두 각자 자기의 마음이 바로 부처이며 이 마음이 부처임을 확신하라. 달마대사가 멀리 인도에서 일부러 중국으로 건너온 것은 오직 이 상승의 일심법을 전하여 너희들이 각자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다. (속장경 119~406, a)

이와 같이 불교의 경전이나 어록에서 한결같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일체의 모든 법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선불교에서 각자의 불성을 자각하는 견성의 주장은, 각자 스스로 만법의 근원을 자기의 마음(佛性)으로 깨달아 한 법(法)도 일어나지 않는 근원적인 본래심(本來心)을 깨달아 각자 부처님과 똑같은 지혜를 구족하여 참된 진리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선불교에서는 경전이 주장을 문자상의 이해로 끝나지 않고 직접 선의 수행으로 깨달아 자기의 것으로 만들도록 하는 것이 선사상인 것이다. 즉, 각자의 불성을 깨닫는 견성은 각자의 마음에 구족되어 있는 붓다의 지혜와 덕성을 개발하여 각자의 생활상에 그대로 구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선불교를 생활의 종교라고 말하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마조 도일이 '이 마음이 바로 부처이다.' '평상심이 그대로 도(道)'라고 단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설법은 조사선의 선불교가 일상생활의 종교로 전개된 사실을 잘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평상심은 몰자각적이고 경계에 집착하여 차별과 분별을 일으키는 범부심, 중생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선이 수행과 깨달음의 철저한 체험을 통하여 자각된 근원적인 마음이며, 일체의 번뇌나 분별. 차별심의 미혹이 없는 본래심인 불성을 말하고 있다.
즉, 일체의 경계나 주위의 분위기에 매몰되어 자기를 잃어버린 범부심(凡夫心, 衆生心)이 아니라, 자각된 주체인 본래심(本來心, 불성)으로 일체의 경계에 끄달리거나 매몰(埋沒)되지 않고 또 걸림 없으며, 일체의 번뇌나 망념이 없는 근원적인 마음이며, 일상의 평범한 생활을 영위하는 일상심(日常心)인 것이다.
이러한 평상심(平常心)이 그대로 부처이며, 평상심으로 전개하는 그 모든 일상생활의 매사가 그대로 진실된 도(道)의 삶이 된다. 각자의 자각된 평상심(본래심, 불성)으로 지혜로운 삶을, 진실에 계합된 평상의 매사를 전개하는 이것이 선의 수행이며 선사상인 것이다.
자각된 평상심(平常心)에서 전개되는 지혜가 붓다와 똑같은 반야의 지혜인 것이며, 이러한 반야의 지혜로 인간의 평범한 일상의 모든 일을 걸림 없이 무애자재하게 살아가는 생활의 종교가 다름 아닌 평상심이 도인 조사선의 선사상인 것이다.


6) 선불교의 정신과 목적
선불교는 지난날 붓다나 조사들이 깨닫고 설한 경전과 어록의 기본 정신을 지금 우리들 각자가 붓다와 조사들과 똑같이 선의 수행과 실천으로 만법이 근원을 스스로 체득하고, 각자 자신의 진실되고 올바른 인생관과 삶의 가치관을 확립하여 일체이 불안과 불편함이 없이 평안하고 안락하게 전개하는 일상생활의 종교이다.
이러한 선불교의 정신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각자의 인생관의 혁신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일체의 권위나 형식 등 피상적인 가치관이나 관념에서 탈피하여 각자 인간 본래이 자연 그대로의 존재인 참된 자아인 본래심(佛性)을 깨닫고 언제나 지금 여기에서 자기를 깨달음의 주체인 주인이 되어 생생하게 살아가는 현실성의 재확인이라고 할 수 있다.
선은 남의 일이나 외부적인 문제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문제로 하고 있다. 철저히 '지금 여기의 자신'의 존재를 깨닫고, 참된 자기 자신을 바로 보고, 아는 일이 전부인 것이다.
임제 의현(? ~ 866)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언제나 '지금 여기의 자기'가 주위나 경계 환경의 분위기에 끄달리고 매몰되어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자신의 본래심이 주인이 되어 지혜롭게 살아가도록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임제는 이러한 선불교의 정신을 '언제, 어디서나 곳에 따라 자각된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살아간다면, 자기 자신이 있는 곳이 모두 그대로 진실된 세계가 된다.(隨處作主 立處皆眞)라고 설한다.'라고 설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선불교의 정신을 요약해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선불교는 지난날 붓다나 조사들의 수행과 깨달음인 정각(正覺)을 모범으로 하여 우리들 각자가 성스러운 인격의 주체인 본래심(佛性)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각된 자기가 붓다와 더불어 여러 조사들과 똑 같이 진실을 바로 볼 수 있는 정법(正法)이 안목(眼目)을 구족하며, 붓다와 조사들과 똑같이 진리의 세계에 손잡고 우리들 각자의 일상생활속에서 중생구제의 보살도를 전개하는 유희삼매(游 三昧)의 생활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즉, 선의 수행과 실천생활로 근원적인 각자의 본래심을 자각하여 붓다와 여러 조사들과 똑같이 반야의 지혜로 각자의 인생관과 종교관을 확립하여 일체의 망념(妄念)과 근심 걱정, 초조 등의 불안에서 벗어나 편안하고 여유있게 각자의 인생과 삶을 유희적인 일상생활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선불교의 정신은 선의 수행을 통해서 각자의 피와 땀으로 전신(全身)을 투쟁하며 사유하고 실천 연마하여 체득한 철저한 확신과 자기 확립에서 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선불교는 남이 대신해 줄 수도 없고, 기도와 바람만으로도 이룰 수 없는 것으로 본인이 직접 스스로 선의 수행과 실천으로 확립하지 않으며 안 되는 자각의 종교, 깨달음의 종교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2. 선의 수행과 실천

1) 선불교의 실천구조
선불교의 본질은 불교의 정신을 선의 실천 수행과 자각을 통한 체험으로 자기화시키고, 구체적인 생생한 생활의 지혜로 전개하는 것이다.
따라서 선의 실천과 수행은 선불교의 기본이며 본질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선의 실천과 수행이라고 해서 불교 이외에 달리 선의 실천과 수행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불교의 실천과 수행이 바로 선(禪)이기 때문이다. 선불교는 이러한 불교의 실천 정신을 선의 수행으로 재정립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일반적으로 자각의 종교인 불교의 실천 구조를 신. 해. 행. 증(信解行證)의 4단계로 나누어서 체계 있게 정리해 볼 수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信)이란 일신교에서 주장하는 창조자인 유일신을 믿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전불교(全佛敎)의 가르침과 실천방법을 철저히 믿는 것이다. 즉, 불법승(佛法僧)의 삼보(三寶)와 그리고 우리들 각자도 부처가 될 수 있는 불성을 구족하고 있기에 필경 성불할 수 있다는 그 사실을 철저히 믿는 것이다.
달마의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에 '일체 중생이 법부나 성인이나 모두 동일한 진여자성(眞如自性)을 구족하고 있음을 깊이 확신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심신(深信)은 유마경, 관무량수경, 대승기신론 등에서 불교의 실천적인 입장에서 중요한 과제로 제시되고 있는 말이기도 하다.
이입사행론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선불교의 참된 수행과 실천은 범부나 성인이 모두 동일한 진여자성(眞如自性)을 구족하고 있음을 깊이 믿는 것이며, 이것이 선불교에서 말하는 종지(宗旨)인 것이다. 선불교이 실천은 스스로 심원(深遠)하고도 올바른 신념의 실천인 것이다.
이러한 불교의 믿음(信)은 반드시 불교의 올바른 이해(解)와 실천(行) 그리고 깨달음(證)으로 이어지는 바탕이 되며, 자기의 종교적인 삶의 근본이 되고 출발점이 된다.
그래서 화엄경 현수품에 믿음은 도의 근원이며 일체의 공덕을 낳는 어머니(信爲道元功德母)'라고 강조하고 있으며, 대지도록 권1에서 진리의 세계인 불법(佛法)의 큰 바다는 믿음(信)으로서만이 능히 들어갈 수 있으며, 지혜로서 능히 건너갈 수가 있다. 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올바른 이해(解)는 불법의 정신과 사상, 실천방법 등에 대한 바른 이해이며, 이러한 확실한 신심과 실천 방법을 토대로 한 올바른 수행(行)은 불교에서 설하고 있는 진리의 세계, 깨달음이 경지를 각자가 체득하기 위한 직접적인 수행을 말한다.
진리에 대한 철저한 믿음과 그 진리의 세계로 가는 올바른 길을 확실히 알게 될 때 우리는 더 이상 머뭇거리거나 주저하지 않고 곧바로 자기의 갈 길과 목적지를 향해 수행해 갈 수가 있는 것이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은 각자가 오로지 좌선의 수행에 전념하며 좌선의 한 가지를 실참(實參)해 가는 것이다. 이러한 좌선 한 가지를 중심으로 닦는 수행을 일행삼매(一行三昧)라고도 하며, 혹은 각자의 몸으로 직접 연마하고 수행하는 것이기에 임제선사는 체구연마(體究硏磨)라고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일행삼매의 좌선 수행과 깨달음의 직접적인 체험을 통하여 붓다나 조사들이 설한 불법의 세계를 자각하여 붓다의 말씀을 직접 확인하고 더 이상 추호의 의심도 없는 확신을 갖게 된 자각을 깨달음(證)이라고 한다.
깨달음은 지금까지 경전이나 조사의 어록을 통해서 알고 있던 지식적인 불교의 이해와 한계성을 각자의 수행과 체험으로 확신을 얻고, 그러한 불법의 사실을 확인하고 확신을 얻음으로써 각자가 자기의 생활종교로 만들고 확립한 것을 말한다. 즉, 불교정신을 직접 몸으로 갈고 닦아 깨닫고 익힌 불법(佛法)을 자기화한 것이며 혈육화(血肉化)한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깨달음은 관념적인 이해나 사고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몸으로 연마하고 익힌 것이기에, 철저한 확신으로 불법의 정신이 자기의 인격과 일상적인 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승화되고 전개되는 것이다.
즉, 불법의 정신이 생활의 지혜와 인격으로 이루어진 삶이 전개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신. 행. 행. 증은 불교의 가르침을 각자가 직접 믿고 수행하여 깨달아 자기의 종교로 확립하게 하는 자각적인 종교의 수행구조를 체계 있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불법을 배우는 것은 불법을 알기 위한 것이며, 불법을 수행하고 실천하기 위한 것이다.
일본의 유명한 선사 도우겐(도원, 1201 ~ 1253)은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기고 있다.

불도를 닦는 것은 자기를 수행하는 것이며, 자기를 수행한다는 것은 자기를 무아로 만드는 것이다. 자기를 무아로 하는 것은 자기가 만법(萬法)으로 실증되는 것이며, 자기가 만법(萬法)으로 실증(實證)된다는 것은 자기의 신심(身心) 및 타인의 신심까지도 모두 함께 탈락(脫落)해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수행해 갈 때 깨달음의 자취도 없어지며 그 없어진 깨달음의 자취로 오래오래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선불교는 진리에 대한 단순한 관념론이나 인식론에서 주장된 것이 아니라, 우리들 각자가 수행과 실천을 통한 체험으로 자각하여 생활의 체험과 지혜로 되살리는 것이다.
실천수행이란 몸과 마음이 일체가 되어 불교의 사상을 심화하는 바로 그것이며, 불교의 정신을 각자가 자기의 일상생활의 삶 속에서 나타나 주객(主客) 등 일체의 상대적이고 대립적인 차별심이 모두 탈락된 망념이 없는 무심(無心)의 행동으로 구현하는 구체적인 지혜의 생활이며 참된 삶을 전개하는 사실인 것이다.

 

2) 선수행의 구조
선수행은 지극히 정신적인 자기 훈련의 방법이다.
인간 사회 문명의 형태에서 벗어나 철저한 자기 자유의 탐구라고도 말할 수가 있다. 그런데 형체가 없는 마음과 정신적인 자기 훈련의 문제이기 때문에 도리어 매일매일 구체적인 생활이 형체를 벗어날 수 없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선 수행의 기본은 좌선(坐禪)과 선문답(禪問答)이다. 좌선을 통한 자기 조명과 선지식(善知識)과의 선문답으로 진실을 깨달아 확인하고, 진리인 정법(正法)을 바로 볼 수 있는 안목을 확립해 나가는 것이다. 또 좌선을 통한 본래심의 자기 생활로 되돌아가는 것이며, 선 수행의 문제인 공안 참구를 통한 선문답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여러 부처들과 조사들과의 진실한 대화를 전개하는 것이다.
좌선은 신체적인 수행의 형태이고 선문답은 언어(말)를 통한 구체적인 실천 형태로 볼 수가 있다. 원래 정신적으로 인간 존재의 최후의 조건을 추궁해 가 볼 때 신체와 언어의 문제에 봉착되는데 선의 수행은 이러한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실천 수행의 문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선 수행의 기본적인 구조를 대략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나누어서 살펴볼 수가 있다.

① 실천적 행위의 규범을 준수
선 수행의 목적은 각자가 일체 만법의 근원인 불성을 자각하고 일체의 차별적인 관념과 개념에서 해탈하고 대자유를 얻는 것이다. 이처럼 선은 각 개인의 자유와 주체성의 확립을 강조하면서도 그 수행에 있어서는 결코 자의적이거나 방종적인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다.
언제나 일정한 수행 방법의 체계와 행위규범을 엄수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실천적 행위의 규범으로는 첫째, 불교정신에 따른 출가 수행자의 교단 규범인 대소승의 계율이 있고, 선원에는 선원 청규(淸規)가 있다.
그리고 좌선 수행의 좌선법이 있으며, 훌륭한 어느 스승의 문하에 들어가 엄격한 지도와 편달을 받아야 하는 기본적인 규범과 수행의 방법이 있다. 선의 수행은 먼저 이러한 실천의 행위와 규범을을 준수해야 한다.
종교적인 수행의 출발점이 선각자의 수행과 체험을 통한 말씀을 믿고 올바른 수행으로 그러한 사실과 경지를 추체험(追體驗)을 통하여 확인하고 확신을 얻어 자기의 구체적인 생활의 지혜로 살리며 인격으로 전개하는 것이기에 교주나 종조(宗祖)의 수행 방법과 실천이 똑같은 일정한 규범과 형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마치 화살로 과녁을 겨냥하는 것처럼, 누구나가 한결같이 똑같은 방법과 행동으로 불법의 목적지인 성불이라는 과녁에 맞추어야 한다. 성불이라는 과녁에서 조금이라도 빗나가게 되면 불교가 아닌 것이며, 외도로 전락되는 것이기에 불법의 수행으로는 의미없는 일이 되고 만다. 선 수행자의 한결같은 목적으로 강조되는 견성성불(見性成佛)은 화살의 목표물인 과녁과 같은 구조인 것이다.
이러한 출가 수행의 규범을 원칙으로 한 선수행은 먼저 올바른 스승(선지식)의 문하에 들어가 여법(如法)한 좌선과 수행의 지도를 받으며 자기 자신을 수행해 나가지 않으면 않된다.
선불교에서는 이러한 수행구조를 법문(法門), 관문(關門), 무문(無門), 입문(入門), 입격출격(入格出格)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훌륭한 스승의 문하(門下)에 들어가 스승의 지시와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것을 입문(入門)이라고 하며, 불법을 깨달아 진리의 세계이 문을 깨달음의 체험으로 통과해야 하는 것을 관문(關門)이라고 한다.
조당집 제5권 운암선사전에 '문(門)으로부터 들어온 것은 참된 보물이 아니다'라는 설법을 하고 있다. 이 말을 벽암록 제5칙에서는 '종문입자 불시가진(從門入者 不是家珍)'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외부에서 들어온 것은 어떤 보물이나 정신사상, 혹은 아름다운 말이라도 참된 자기의 보물이나 살림살이가 될 수 없다.
인연 따라 얻고 배우고 익힌 것은 결국 때가 되고 인연이 다하면 나가고 없어지게 마련이다. 참되고 다함이 없는 무진장(無盡藏)한 무가보(無價寶)의 보물은 자기의 불성으로 철저한 수행을 통한 체험으로 깨달아야 한다는 말인데, 이러한 선 수행의 구조를 무문(無門) 혹은 무문관(無門關)이라고 한다. 그래서 선종의 공안집(公案集)인 무문관에서는 '대도에는 문이 없다(大道無門)'라고 강조하고 있다.
불법의 수행은 철저한 스승이 지시에 따른 수행 방법을 이수해야 한다.
이러한 수행구조를 입격(入格)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격(格)은 틀이나 격식(格式)을 기준으로 실천 수행의 구조적인 규칙이나 규범, 혹은 틀을 말한다. 규범과 규칙을 원칙으로 한 실천 수행은 올바른 스승(正史)에게 나아가는 것처럼, 여법(如法)한 선 수행을 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다.
모든 교육이나 기술, 예술이 배움에는 먼저 그 어떤 기준이 되는 격식에 자기의 모두를 투입시켜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체구연마(體究硏磨)시켜서 익히고 숙달시켜야 한다.
즉, 자기 개인의 제 마음의 제 마음대로의 자유와 방종을 모두 버리고 비좁고 부자유스러운 수행의 틀(格式) 속에 뛰어들어가 그 격식과 규칙을 몸으로 익히고 배워, 그 부자유스러운 규칙과 격식의 틀이 몸에 익어서 자유스럽게 될 때 마침내 격식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된다. 이를 출격(出格) 혹은 파격(破格)이라고 한다. 격식에서 벗어나 자유를 체득한 사람을 임제는 출격견해인(出格見解人)이라고 하며, 원오심요(圓悟心要)에서는 출격대도인(出格大道人)이라고 한다.
선에 있어서의 자유는 이러한 기본적인 수행규범을 익히고 몸에 푹배게 하여 그 수행의 규범을 자유 자재롭게 사용하고 구사하며 자기의 평범한 일상생활로 되어 버리게 되었을 때 비로소 무애(無碍) 자재롭게 진리의 세계인 법계(法界)에 유희(遊戱)할 수가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경지는 규범이나 법규가 있어도 없는 것처럼 되어 버린 경지에서 마음에 내맡긴 채로 자유롭게 거니는 임운자재(任運自在)로 해탈 자재인으로 살 수가 있는 것이다.

② 선 수행의 간결성과 단순성
선 수행이 실천은 무엇보다도 간결하고 단순한 실천행이 되지 않으면 실행하기 어렵다.
그래서 선 수행은 일행삼매의 좌선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단순한 좌선이라는 한 각지 수행으로 실천하는 곳에 다른 불교의 전사상과 정신을 포용하고 응집한 실천이다. 그것은 단순한 좌선이라는 한 가지 수행(一行)이지만 불교의 근원인 진리의 세계를 깨달음의 자각으로 전향시키는 질적심화(質的深化)의 수행인 것이다.
즉, 한 가지의 실천 수행을 꾸준히 닦아야만 깊이 있는 깨달음이 경지를 체득할 수가 있다. 단순한 좌선 한 가지만의 실천 수행이라고 해서 폭이 좁고 천박하며 단조로운 것이 아니라 전불교의 정신과 사상을 모두 섭렵하고 충분히 소화한 뒤에 부차적인 것은 모두 제쳐두고 가장 본질적인 것만을 응집하고 집약하여 좌선의 실천으로 불법의 궁극적인 진리를 직접 체득하도록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단순한 한 가지의 수행인 일행(一行)의 좌선은 결국 불법의 궁극적인 경지를 자기가 추구하고 있는 것이며 좌선의 일행으로 모든 불법의 정신을 자기화하는 가장 구체적인 수행이며 실천법인 것이다.
좌선의 실천 방법을 적은 지남서(指南書)로는 송대(宋代) 종색(宗 )이 지은 좌선의(坐禪儀)가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하겠다. 좌선의 기본은 신체를 조절하는 조신(調身), 안정된 호흡을 유지하는 조식(調息), 그리고 번뇌가 없는 자각된 마음을 갖는 조심(調心)에 있다.
이처럼 좌선 수행의 기본적인 행위 그 자체는 지극히 간결하며 누구나가 직접 좌선을 참구할 수가 있다. 좌선이 일행삼매를 선 수행의 기본으로 하고 있음은  단순함과 간결함이 복잡하게 일어나는 번뇌나 두뇌적인 사고를 물리치고, 반대로 전신심(全身心)을 직접 단적으로 부딪쳐 실행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주관과 객관, 자기 자신과 주위의 경계와의 구분과 차별심이 모두 없어져 그야말로 하나가 되어 버린 삼매의 경지는 이러한 좌선의 실천에서만이 가능한 것이다.
사실 인간은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살기는 쉬워도 단순한 한 가지 일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일행삼매의 좌선을 수행이라고 한다. 과학자가 연구와 실험에 몰두하는 것이나, 예술가가 창작활동에 전념하고, 자기의 하는 일에 몰두하는 것도 일종이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가가 좌선의 한 가지 일에 전력투구하는 것이 선 수행이다. 이러한 좌선의 수행을 통해서 진리의 자각과 지혜가 체득되는 것이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나 행위라고 할지라도 그 일과 행위에 전심전력하여 주관과 객관이 끊어지고 대상이 끊어진 절대적인 경지가 되도록 하는 행위가 일행삼매인 것이다.
선에서는 이를 한 가지 일에 절대적인 수행으로 행한다(一事에 絶對를 行함). 라고 말한다. 즉, 지금 행하고 있는 한 가지 일에 자기 자신의 힘을 다 쏟는 수행을 말한다. 선에서는 대나무잎 하나하나가 시원한 바람을 일으킨다.' 혹은 우리들 '인간의 생활에 있어 행동 하나하나, 행위 한 걸음 한 걸음에 청풍을 일으킨다.'라는 의미이다.
즉 본래심(本來心)의 자기가 지금, 여기에서 하고 있는 일에 그대로 본래심의 전체가 그대로 작용되어 구현되는 삶이 바로 선의 수행 생활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③ 언어나 문자의 매개(媒介)에 의존하지 않는 직접 체험주의
진리의 세계는 각자의 깨달음을 통한 체험으로 알 수 있는 것이지 언어나 문자로서는 보여 주거나 전해 줄 수가 없다라는 의미의 불립문자(不立文字)나 교외별전(敎外別傳)이란 주장은 잘 알려져 있는 선불교의 슬로건이다.
이를 언어나 문자의 설명으로는 할 수 없다는 의미로 언전불급(言詮不及)이라고도 하며, 물의 차고 더운 맛은 물을 마셔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는 의미로 냉난자지(冷暖自知)라고도 말하고 있다.
즉, 불법은 자기의 몸으로 직접 수행하여 체험을 통해서 각자가 깨달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사실, 선의 문헌은 조사들의 이러한 생생한 수행과 체험이 사실들을 기록하고 있다.
예를 들면, 임제록에 임제 선사는 자기의 수행생활과 경력을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여러분! 출가 수행자는 먼저 도를 배우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예를 들면 산승(山僧)도 지난날 일찍이 율장 공부에 전심하기도 하고 경전이나 논서(論書)의 연구에 전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률론 삼장이 모두 세상의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한 약과 같은 것이며, 언어 문자에 지나지 않는 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단번에 경전을 뿌리치고 곧바로 선의 수행을 하게 되었다. 다행히도 훌륭한 스승과 도반들을 만나게 되어 비로서 도의 안목을 분명히 할 수 있게 되어 이제 천하 선사들의 견해를 바로 볼 수 있고 그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것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면서부터 곧 알 수 잇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몸으로 참구하고 연마하여(體究硏磨) 수없이 많은 좌선의 수행을 반복하여 어느 날 갑자기 깨닫고 알 게 된 것이다.

임제가 주장하고 있는 체구연마(體究硏磨)는 경률론(經律論)으로 표현된 언어 문자에서 벗어나 각자가 직접 선 수행을 통하여 불법을 깨닫게 된 사실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처럼 선의 본질은 언어 문자의 경전이나 과학적인 지식, 대상적인 인식이나 분석적인 판단에 의하지 않고 직접 체험적인 직관지(直觀智), 반야(般若)의 지혜로 살아가도록 하고 있다. 직관적인 지혜나 반야의 지혜는 임제가 주장하는 불법을 바로 볼 수 있는 안목(眼目)이며 진정한 견해인 것이다.
상대적이고 분별. 차별의 2원론적인 인식에서 벗어나, 근원적이며 직관적인 지혜로 자기를 전개하도록 하는 것이다.
직관적인 지혜는 우리들 각자의 불성에 구족되어 있는 붓다와 똑 같은 지혜를 선의 수행과 실천을 통해서 자각과 깨달음으로 개발하는 것이다.
즉, 이성에 대한 인식을 지식이라고 한다면 좌선의 실천으로 체득한 직관(直觀)은 믿음(信)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 둘은 똑같은 차원에서 서로 상대를 공격하는 관계가 아니다. 믿음은 지식의 한계성을 보완하고, 지식은 믿음의 독단을 수정(修正)하는 것으로 양자는 상호 보완의 기능을 갖는다.
선의 수행을 통한 깨달음은 사실 진리에 대한 의심 없는 확인이며 철저한 확신인 것이다. 따라서 '신(信)은 힘이다.' 라고 강조하고 있으며, 한편 신(信)은 맹목(盲目)이기도 하다.
이러한 양의성(兩義性)은 충분히 자각하고 스스로 경계하지 않으면 안되지만 체험적이고 직관적인 지혜는 구체적인 우리들의 일상생활의 지혜로 작용되고 있는 것이다. 선의 직접체험주의는 이러한 확신의 기반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④ 실천이 반복과 수행의 지속
선 수행의 실천은 일정한 수행 방법과 양식인 규범이나 좌선법, 청규 등 격식에 규정되어 있는 점은 앞에서도 언급했다. 그리고 수행도 일행삼매의 좌선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자 그러한 기본적인 좌선 수행의 격식과 규범의 생활로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선 수행은 사실 구체적으로 이러한 단순한 일행삼매(一行三昧)의 좌선 실천을 반복하고 지속하는 구조로 성립되어 있다. 단기간의 선 수행은 형태상으로는 있을 수 있지만, 실제로 수행의 의미와 효과를 얻기 이해서는 어떤 일정기간의 수행과 지속을 필요로 하게 된다.
지속(持續)이란 수행생활의 끊임없는 연속을 말한다. 즉 좌선이라는 단순한 실천행을 반복하고 반복하여 계속해 가는 것이며, 마치 나사 모양으로 나아가는 것이 선 수행의 기본이 된다.
이것은 출가나 재가를 막론하고 선을 수행하고자 하는 사람은 이러한 좌선의 수행을 계속적으로 지속해야 한다. 이렇게 좌선의 수행의 반복과 끊임없는 지속은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지극히 단순화된 행위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며, 이성적인 사유의 지배를 벗어나 신체가 거의 기계적으로 규범과 격식 속에서 행위 양식에 반응할 수가 있다. 그리고 그 반복의 과정에 서서히 행위 양식을 안으로 정착시킬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좌선(행위) 규범을 무조건 받아들여 기계적으로 박복하여 이론을 제거하고 지속하는 것이 선 수행인 것이며, 이러한 단순한 일행삼매의 실천만이 언어나 문자로 표현할 수 없는 깨달음이 경지에 나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선불교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동양의 종교에서 추구하는 길을 도(道)라고 말하면서 그 도를 체득하는 수행은 먼저 어떤 형식과 격식에 자기를 집어넣는 일부터 출발하고 있다. 일종의 신체적인 조건을 붙임은 계층적인 구조를 갖춘 인격의 바탕에 습관화한 행위의 여러 특성과 행동 경향을 배양하는 것이 된다.
서경에 '배워서 성(性)이 되도록 한다.'는 습성(習性)이란 말처럼, 선 수행도 좌선의 실천으로 습성화한 자기를 구체적인 생활의 지혜와 인격으로 그대로 전개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선에서는 이를 체구연마(體究硏磨), 숙달(熟達), 순숙(純熟)이라고 하며, 장자에서는 많은 연습과 반복된 훈련으로 단련하고 익혀서 자연이 경지에 도달하게 하는 연달자연(練達自然)의 이야기를 많이 전하고 있다.

⑤ 수행(修行)의 어려움
선의 수행은 불법을 각자가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선불교는 수행과 실천의 종교라고도 할 수 있으며, 실천과 수행이 없는 선은 선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불법의 수행과 실천이란 어디가지나 개인적인 것이며 개개인이 각자 충분히 납득되지 않으면 실천 수행은 될 수가 없다.
적어도 종교적인 실천은 깊은 진리의 자각을 수반하고 있다. 선의 문헌들은 모두가 고차원의 실천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선이 수행과 실천은 행하기 어려운 것이다.
조당집 제3권 조과화상전에 조과화상과 백낙천과의 다음과 같은 유명한 대화는 그러한 사실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이야기다.
백낙천이 조과화상에게 질문했다.
"하루 24시간을 어떻게 수행해야 도(道)와 상응할 수 있습니까?
조과화상이 대답했다.
"모든 악한 일을 하지 말고, 모든 선한 일을 받들어 행(行)하시오(諸惡莫作 衆善奉行)"
백낙천이 말했다.
그 정도의 말씀은 세 살 난 아이라도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조과화상이 말했다.
세 살 난 아이가 이 말을 잘 알고 있을지 모르나, 팔순 노인이라고 할지라도 이 말을 실행하기란 어려운 것이오."

이처럼 선이 실천과 수행이란 불교의 정신이나 실천방법을 알고 있고 외우고 있는 그 지식적인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의 정신과 실천 방법을 지금 여기에서 자기 자신의 인격과 정신으로 만들어 실천하고 생활화하는 삶인 것이다.
경전이나 선지식의 지시를 받는 등, 비록 간접 경험을 통해서 어떤 사실을 지식으로 알고 있다고해서 자기가 몸으로 직접 실천하고, 또 지혜롭게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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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0.10.23 21:57

    첫댓글 감사합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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