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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백제라 하면 중국에 백제가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①咸安二年(372년) 六月 遣使 拜百濟王餘句 爲鎭東將軍. 領樂浪太守.(晉書 권9 帝紀第9 簡文帝 注)
372년 6월에 사신을 파견하여 백제왕 여구(근초고왕)에게 벼슬을 주어 진동장군으로 삼고 낙랑태수로 봉한다는 구절은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해 주는 문장입니다. <진동장군>이란 동쪽을 다스리는 장군이란 뜻으로 보이고, <령낙랑태수>란 낙랑태수로 삼았다는 뜻인 거 같습니다. 여기서 <낙랑>이란 요동의 낙랑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며, <진동>이란 백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근초고왕은 344년에 즉위하여 20년 뒤인 364년에 삼국사기 기록에 나온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즉위후 20년은 요동에 있었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 364년에 한양으로 와서 375년에 붕하였다고 보여집니다.
결론을 내리기엔 조심스러운 부분이기는 하지만 314년, 고구려에 의한 대방 공격에서 알려지지 않은 대방세력의 실체가 구태백제인 고이왕계통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는 비록 기록에 의한 시간적인 격차가 있기는 하지만 372년에 백제왕이 낙랑태수로 제수되고 있는 것과 밀접한 연관을 지닌 것으로 보여집니다. 自置百濟郡.晉太元(376~396년)中,王須,義熙(405~418년)中,王餘映,宋元嘉(424~454년)中,王餘毗,並遣獻生口.(梁書/列傳/卷五十四 列傳第四十八/諸夷/東夷/百濟) 2. 진나라때 (고)구려는 결국 요동(의 낙랑)을 약탈하여 점유하자, 백제 역시 요서(의 진평군 진평현)을 점유했다. 스스로 백제군을 다스리고, (동)진 태원 치세에 왕 수, 의희중 왕 여영, 송나라 원가중 왕 여비, 모두 사신을 파견하여 생구를 받쳤다.
이로 보면 백제는 당시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기록이 晉太元(376~396년)의 앞에 나열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梁職貢圖 百濟國使條]에서는 [양직공도 백제국사조] 晉末 駒驪略有遼東樂浪 赤 有遼西晉平縣’ 진말 구려약유요동낙랑 역 유요서진평현 에서 ‘晉末’이라고 하여 4세기 초 이후가 다 이에 해당되는 애매한 표현을 쓰고 있지만, 어쨌든 4세기 초를 전후한 시점에서는 백제가 대륙백제를 경영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로써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구(餘句) 즉, 근초고왕이 낙랑태수를 겸하고 있었다는 것은 한반도의 백제왕이 대륙백제 지역(낙랑 또는 대방)에까지 영유권 또는 연고권을 인정받고 있었다는 것인데, 같은 시기에 등장하는 여울과 여구라는 이름의 상관관계와 지금까지의 추론에 의해 볼 때,
여울은 부여② 즉, 대륙백제(낙랑과 대방지역)의 부여왕이었고, 여구는 낙랑태수로 각각 그 시기를 달리하면서 등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같은 시기에 생존하였고 같은 지역에 대한 연고권을 가진 두 사람이지만 그 지역에 대한 지배권은 시기를 달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정이기는 하지만, 여구는 여울이 그러하듯이 대륙백제 출신의 왕족, 가능하게는 왕자의 신분으로 이해해 볼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추론의 근거는 여울이 왕자로 있다가 후연에 의해 부여왕에 봉해지는 기간, 그 사이에 여구라는 또 하나의 인물이 부여②가 멸망하는 그 시기에 백제왕으로 재위에 오르면서 동진에 의해 낙랑태수로 봉해지는 것을 과연 우연으로만 돌릴 수 있는가 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즉 여구(餘句)는 여울이 부여의 왕자이듯이, 그 또한 부여② 지역에 있었던 또 다른 지배세력, 또는 왕자 신분으로 있다가 모종의 과정을 거쳐 한반도의 백제와 세력을 합하여 통합된 왕으로 등장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설령 그렇지가 않고 여구가 한반도의 백제왕으로 재위에 올랐다고 하더라도 전체적인 상황에 있어서는 크게 달라질 것은 없어 보입니다.
즉, 근초고왕은 한반도와 대륙을 통괄하는 백제왕으로 있었을 가능성인 것입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면, 그의 사후에 이 통합된 세력은 다시 분열하여 별개의 세력으로 나누어지는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 이유로는 근초고왕의 다음 왕인 근구수왕의 이름이 여수(餘須)가 아니라, 수(須)로만 드러나며(한반도계), 다시 침류왕이 재위에 오르는 같은 해에 대륙에서 활약하고 있는 여울이 별도로 모용수에 의해 부여왕에 임명되고 있으며, 같은 여씨계 부여세력인 건절장군 여암(餘巖)이 이때에(385년), 모용수에 반란을 일으켜 독립정권을 수립했다가 진압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는 진사왕이 근구수왕의 둘째아들이며, 침류왕의 아우라는 것 외에는 진사왕의 이름 등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다만 근구수왕의 둘째아들이며, 선왕인 침류왕의 아우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진사왕은 태자로 있었던 적이 없습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는 침류왕이 돌아가자 태자가 나이가 어리므로 숙부 진사가 즉위하였다고 했습니다. 진사왕은 세자(태자) 신분에서 즉위한 것이 아니라, 전왕의 동생으로 있다가 위 인용문보다 한 해 전인 385년에, 일본서기 전거에 의하면 왕위를 찬탈하여 즉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서(晉書)의 백제왕세자 여휘(餘暉)에 대한 설명은 삼국사기에 보이는 진사왕에 대한 것으로는 보기 어렵습니다. 진서(晉書)에서는 백제왕이 아니라 백제왕세자 여휘를 백제왕으로 책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백제는 근초고왕 사후 정세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일시 통합이 된 한반도와 대륙의 백제가 다시 분열하여 각각 따로 왕이 서는 형세를 보인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름은 ‘백제’로 하나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독자적인 건국 이래 완전히 다른 지역에서 각각 오랜기간 동안 별도로 지내온 양 세력간의 통합은 그렇게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를테면 384년에 한반도에서는 침류왕이 재위에 오르고, 대륙에서는 여울이 간난신고 끝에 모용수에 협력하여 부여왕에 봉해지면서 다시 갈라진 양 세력은, 한반도에서는 1년 후 진사왕이 재위에 오르고, 다시 1년 후, 대륙에서는 여울이 자신의 지위를 여휘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계속 모용수 정권에서 관직에 있는 것으로 정리가 가능합니다.
예컨대 永初元年 七月(420년 7월), 景平二年(424년), 元嘉二年(425년)에도 백제왕의 이름으로 여영(餘映)이 산견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현재 뚜렷한 해석을 할 길이 없으므로 후일의 과제로 돌립니다. 4세기말 이후의 대륙백제에 대해서는 중국의 [梁書 百濟傳] 등에서 언급하고 있으며, 대륙백제설을 주창하는 학자들의 주된 논거로 되고 있으므로 일단 여기서는 생략하며, 통시적인 관점에서 다시 이 시기로 넘어올 때에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가장 먼저 언급되어야 했지만, 지나쳐온 대륙백제의 초기사 즉, 언제 대륙백제가 성립되었으며, 그 주체는 과연 누구이며, 그 위치는 과연 어디인가 하는 문제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앞서 잠깐 언급한대로 우리의 고대사 최대의 관심사항으로 있는 낙랑군 등 한사군의 위치문제를 비롯하여 고구려 초기 왕성의 위치, 패수의 위치 등 결코 쉽게 지나칠 수 없는 문제들이 얽혀 있습니다.
이들 모두는 결코 한 번의 언급으로 끝나거나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들이 아니므로 일단은 대륙백제와 관련된 사항들만 중점적으로 언급하는 선에서 그치도록 하겠습니다. |
http://cafe.daum.net/alhc/ALGC/344
첫댓글 자료를 한 곳에 모으니 과연 가설을 낼만한 상황이 되는군요. 자이수님의 견해제시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