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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봉사 이야기
2004년 6월 22일 저녁 6시 홍릉 로타리에 있는 침술원 사무처 앞에서 40인용 버스는 18명의 봉사요원을 태우고 손을 흔드는 가운데 서서히 출발했다. 먼 여정의 출발이었다. 앞으로 쉬지 않고 6시간을 달려야 목적지에 닿을 수 있을 것이었다. 이렇게 봉사를 위한 출발을 하려면 그동안 많은 수고와 과정을 거쳐야 가능한데 이번에는 전라남도 해남의 황산농협에서 봉사요청이 와 공문이 여러차례 오고 가고 봉사기간 이틀 동안 600명을 진료할 목적으로 계획이 짜여지면서 봉사인원이 구성되고 드디어 출발을 하게 된 것이었다. 버스에는 아흔살의 구당선생님과 뜸사랑 7명의 교수와 7명의 운영위원을 겸한 봉사요원과 나를 포함한 사무처 직원 3명이 타고 있었다. 뜸사랑 골수들이 출발을 하는 것이었다. 같은 시각인 22일 저녁 6시 전라남도 광주지부 뜸사랑에서는 교수를 포함한 22명의 봉사요원들이 해남을 향해 동시에 출발을 하였다. 서울 18명, 광주 22명 모두 40명의 봉사요원들이 2004년 6월 23일과 24일 이틀 동안의 해남봉사를 위해 드디어 시동을 건 것이었다. 5시 30분에 모여 도시락으로 간단히 저녁을 먹고 출발 하였기 때문에 오늘밤에는 무조건 달리기만 하여 목적지에 닿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버스가 출발하여 시내를 벗어나기 시작했을때 우리는 차창밖을 보며 각자 조용히 생각에 잠겼는데 우리가 지금 벗어나고 있는 서울에서는 여전히 매일의 일상이 진행되겠고 차들이 쉴 새없이 움직이겠고 밝은 불빛 아래 행복과 즐거움과 고통 슬픔 등이 범벅이 되어 있을 것이고 예식을 치루는 사람들은 열심히 진행을 할테고 그 서울을 쏙 벗어나면서 우리는 잠에서 깨듯 앞으로 이틀 동안 진행될 일들에 대해 약간의 불안과 기대로 모두 긴장되어 있는 상태였다. 나는 실제 진료하면서 봉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봉사하는 분들을 잘 챙길 임무까지 부여되어 있었다. 또한 광주팀까지 합세하기 때문에 조화를 위해 힘써야 할 부분이 많았다. 스트레스가 많이 쌓이는 일이고 부담이 많이 가는 일이다. 돌아올 때 기쁜 마음으로 돌아올 수 있어야 하는데 마음이 먼저 무거웠다. 나는 20분간 기도했다. 기쁜 마음으로 잘 돌아올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6시간을 달려야 하기 때문에 드라이브 시간은 넉넉했다. 버스가 서해안 고속도로로 진입을 하였을 때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환상적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모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앞을 쳐다보며 가는 중이었다. 얼마나 예쁜가! 순수하게 봉사를 위해 한밤중에 달리고 있는 우리들은 얼마나 예쁜가! 거인같은 남자들이 대부분이지만 얼마나 예쁜지 나는 벌떡 일어나 뒤로 한참 걸어가 드디어 빈자리에 앉아 건장한 남자 선생에게 "얼마나 예쁜지 몰라요" 라고 말하니 어이가 없는지 "뭐가요?" "이렇게 봉사 가는 모습이 얼마나 예쁜지 모른다고요" 우리는 모두 동감한다. 우리가 스스로 배워 귀중한 시간을 내어 봉사까지 가는 모습에 우리 스스로도 느끼지 못하는 귀중한 무엇이 자신 안에 존재함을 때로는 잊고 있는 것이다. 그 이후로의 대화는 정말 귀중한 말들이 오고 간다. 끈끈한 정들이 오고감에 한 공동체가 되어 지루한 줄을 모른다. 비가 오는 가운데 잠시 휴게실에 들른 것 외에 부지런히 달려 밤 12시가 되었을 때는 드디어 해남에 도착하였다. 캄캄한 밤에 해남은 고이 잠들어 있었고 우리를 태운 버스는 먼저 도착한 광주지부장의 안내를 받으며 숙소로 향했다. 숙소는 미모장 모텔로 3층 건물인데 허름한 가운데 약간 퀴퀴했지만 해남에서는 제일 높은 최고의 숙소였다. 밤 12시 30분 여자 선생들은 여자끼리 3명씩 방이 정해지고 남자선생들은 남자들끼리 3명씩 방이 정해져 짐을 푼 후 건장한 남자 선생들은 벌써 슬그머니 간절한 한잔 생각에 빠져 나가고 그냥 잘 사람은 자고 ...한밤중 해남에서는 갈 곳이 딱 한군데만 있어서 10여명은 간단히 한잔을 하며 1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눈후 드디어 내일의 봉사를 위해 각자의 방으로 가 봉사 첫날의 밤을 지내게 되었다. 바닷바람이 창문을 통해 쏟아지고 낯선 곳에서의 잠자리에서 몇시간 전의 서울이 실감이 나지 않는 가운데 내일 새벽 6시에 기상해야 하는 걱정을 하며 간신히 잠을 청했다.
드디어 봉사 첫날인 6월 23일 아침 6시!!!!
서울팀과 광주팀 모두 일어나 준비하고 7시에 지정된 식당으로 이동해 아침식사를 마친 후 조금 걸어 바로 황산농협 2층으로 향했다. 하얀가운으로 갈아입은 40명의 봉사요원들은 8시부터 진료준비에 들어갔다. 넓은 강당인 농협 2층에 건장한 남자가 누워도 손색이 없는 20개의 커다란 침상을 마련하고 그 위에 크고 훌륭한 폭신한 시트를 깔고 납작한 베게를 놓고 진료할 종합쌈지를 머리맡에 놓고 종합쌈지에는 1회용 새 침이랑 젖은솜 마른솜 알콜솜 향 쑥 라이타등 진료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전시하고 진료준비를 마친 9시에는 벌써 접수된 환자들이 50여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 9시 구당선생님의 개시인사를 20분쯤 하고 9시 30분 드디어 각 침상에 1명이나 2명 정도 선생님들이 배당되어 진료가 시작되었다. 접수하는 선생은 접수를 하고 진료하는 선생은 진료하고 나는 진료가 안정이 될 때까지 둘러보고 있다가 접수된 환자가 점점 많아지면서 나도 진료에 임하게 되었다. 환자들은 농협에서 홍보 하여 진료받으러 온 것이고 주로 65세 가량의 할아버지 할머니였고 40, 50대의 환자들도 있었다. 진료는 먼저 몇군데 뜸자리 잡은 후 엎드린 상태에서 몸 전체에 필요한 혈자리에 20개 가량의 침을 놓고 몇군데 쌀알 반만한 뜸을 뜬후 침을 뽑으면 20분 가량이 소모되고 환자를 돌아눕게 한 후 누운 상태에서 뒤처럼 20개 정도의 침을 놓은 후 몇군데 쌀알 반만한 뜸을 뜨고 침을 뽑으면 진료가 다 끝나는 것이었다. 한 환자당 옷을 벗고 입고 하는 시간까지 합쳐 40분가량 소모되는데 환자가 모두 초진이라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리는 듯 싶었다. 12시부터 점심시간이 되어 교대로 진료실 옆의 조합장 집무실에서 먹는 것인데 조합의 부녀회에서 직접 만든 김 한장에 밥만 둘둘만 후 김치랑 돼지고기 삶은 것이랑 단무지 무침, 조개탕, 고사리 나물, 야채무침 등 배 고프고 지친 가운데 허겁지겁 먹고 또 빨리 진료를 시작해야 했다. 조개탕은 잊지 못할 정도로 조개살이 크고 통통하고 달콤하고 또 다른 반찬 모두가 정성이 깃들고 맛이 있었다. 배를 든든히 채운 후 오후 진료에 들어가 그 첫날은 오후 4시까지 200명을 진료했다. 20개의 침상에서 모두 10명씩 진료한 셈이다. 오후 진료 중에 사무처 직원과 광주팀과 해남농협팀은 계속 저녁식사와 저녁스케줄에 대해 계속 의논했다. 결과는 최고로 결정이 났다. 원래는 간단한 저녁식사 예정에서 한단계 높여 회를 겸한 고급으로 바꾸게 되고 저녁식사 전 해남의 유명한 공룡발자국을 보러가는 것으로 결정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모두 농협측의 제안이었고 우리는 그것을 감사히 받아 들인 것이었다. 모두 농협측의 부담이 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우리의 모습을 하루종일 보고는 기꺼이 우리가 사양할 수 없게끔 하면서 저녁시간 동안 우리랑 동행했다.
우리가 타고 온 버스를 타고 5분쯤 가 공룡발자국이 있는 곳에서 버스를 내려 그때부터 약 3km를 걷는데 공룡발자국을 보는 것은 좋지만 하루종일 서 있어서 다리도 아프고 발에서는 불이 나는것 같은데 공룡발자국을 다 보았을 때는 정말 녹초가 되어 걸을 힘조차 없게 되었다. 그래도 8만년전의 공룡발자국을 보면서 그 바닷가에 공룡들이 뛰어 다녔을 것을 상상하니 기쁘기도 하고 즐거웠다. 잘 보존하고 있는 해남이 자랑스러웠다. 기운을 겨우 차려 다시 차에 올라 20분 정도 달려 드디어 저녁 정각 7시 해남에서 제일 근사한 음식점에 도착해 우리는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잘 차려져 있는 상 앞으로 돌진했다. 어스름한 저녁 회색빛 바다를 멀리 보며 먹는 푸짐한 저녁식사 시간은 천국의 시간일 것이다.식사시간때 구당선생님 옆에 앉는 것은 곧 희생제물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신경도 많이 써야 하고 이야기도 해야 하고 제맛을 느끼지 못하고 먹게 되는 것이다. 화장실에 잠깐 들려 손을 씻고 온 나는 조금 늦게 들어간 죄로 그날 저녁때 희생제물이 되는 상황을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 벌써 저쪽 다른 상에는 푸짐하게 마음 놓고 먹으려고 고급 봉사요원들이 싹 자리를 차지했고 먹는 것에 만큼은 조금도 양보가 없는 듯 싶었다. 딱 한자리 희생제물의 자리만 하나 달랑 비워 놓고는 "여기 자리 남겨 놨어" 하면서 잡아 이끄는 데에는 나도 희생 제물이 되기 싫다고 하기에는 너무 늦은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내가 희생하자 하는 마음이 들고 맛있는 저녁을 포기하는 맘까지 먹고 다른 사람들 가슴 쓸어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드디어 저녁식사가 시작되었다. 며칠 후면 구당선생님의 90회 생신이라 광주지부에서는 케익과 찬란한 고깔모자와 샴페인을 준비해 간단한 생신축하를 해 드린 후 모두 하루 종일 지친 고단한 몸에 영양을 공급하기에 바빴다. 맛있는 저녁을 그렇게 푸짐히 먹고 버스에 올라 진도대교를 지나 다시 황산농협 근처의 숙소로 와 쉴 사람은 쉬고 일부는 빠져 나와 한군데 모여 광주지부와 어울려 몇곡의 노래를 부른 후 일찍이 방에 들어가 내일의 봉사를 꿈꾸며 고된 몸을 편히 쉬게 했다.
2004년 6월 24일 두번째 날인 마지막 봉사일!
아침 7시에 식당으로 이동해 이른 아침을 먹고 바로 농협2층으로 이동하니 7시 40분에 벌써 환자들은 10여명 와 있었다. 곧바로 가운으로 갈아 입고 진료준비를 하고 간단한 구당선생님의 말씀을 들은 후 정각 8시에 진료가 시작 되었다. 20분 사이 벌써 환자들은 50명으로 늘어났고 8시 10분에 속도를 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것은 한 환자당 40분 소요되던 것을 30분으로 줄이라는 것이다. 속도전이 시작된 것이다. 그렇다고 치료할 곳을 빼먹는 것은 아니다. 어제처럼 할 것은 다 하되 속도를 내라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부터는 정신이 없는 것이다. 8시 30분에 100명이 접수되었다는 소식이 오고 조금 더 속도전이 되어 한 환자당 25분 소요되는 진료가 시작 되었다. 그것은 초고속이다. 뜸자리 잡고 엎드려 병에 맞는 침 놓고 뜸 뜨고 또 돌아누워 똑같이 침 놓고 뜸 뜨고 나도 침상 하나에 붙어 정신없는 진료를 하는데 사실은 즐거웠다. 이렇게 빨리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스스로 놀라 특별한 에너지가 나오는듯 싶었다. 구당 선생님은 실제로 하지 않고 감독을 하는데 잘못하나 잘하나 또는 너무 늦게 하나 침상 사이를 돌면서 감독을 하는데 채찍만 안 들었을 뿐 우리를 잠시도 쉬지 못하게 하는 데는 충분했다. 진료받고 가는 환자들에게 미리 준비한 뜸쑥을 나눠주어 집에서 계속 뜸 뜰 것을 권유했다. 주로 허리와 무릎, 어깨가 아프고 가끔 당뇨, 고혈압, 중풍 또는 위장이 아픈 환자들이 왔다. 병원에 오래 다녔다면서 울먹이는 환자도 있고 40대이면서도 들에서 일하느라 햇빛에 많이 노출되 실제로 보기에는 50대 후반으로 보일 정도여서 마음이 아프고 이렇게 마음 아픈 일들이 계속 이어졌다. 어떤 할아버지 등에 혹이 있어 살짝 누르니 그때부터 살 썩은 고름이 솟아 나와 한참을 짜내는데 엄청난 냄새가 나고 진정한 의료의 길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체험하는 계기가 되었다.오전에 잠시도 짬이 없이 진료한 우리들은 우리가 서서히 환자가 되어갔다. 진땀을 흘리고 눈에 촛점이 없고 서서히 주저 앉았다. 어제처럼 점심을 교대로 먹는데 점심시간을 이용해 기운을 회복하려고 모두 애를 썼다. 김 한장에 밥을 둘둘말아 어제처럼 맛있는 조개탕과 반찬을 먹은 후 커피로 무장하고 오후 진료에 들어간 우리는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를 들었다.
400명으로 접수 마감하겠다는 접수담당 선생과 그래도 진료를 받아야겠다는 할아버지들의 톤이 높은 대화였다. 우리는 우울한 마음으로 그곳을 지나쳐 진료실로 들어가면서 씁쓸했다. 다 진료해 드리면 얼마나 좋을까... 오후 2시쯤에는 체격이 건장한 선생들부터 녹초가 되면서 의자에 털썩 앉아 일어나질 못했다. 그날의 진료는 잊지 못할 진료였다. 의자에 죽 앉아 기다리는 환자를 보면서 우리는 숨이 턱에 찼다. 오후 3시 30분에 350명의 진료를 마쳤을 때는 서울팀이 먼저 출발을 해야 할 상황이어서 마음이 더 급했다. 오후 4시에 출발을 해야 오늘 밤으로 집에 갈 수 있기 때문에 오후 4시에 서둘러 출발했다. 뒷 마무리를 광주팀에 맡기고 가는 우리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으나 미안한 마음을 간직한채 얼른 잘 마무리 해 주기를 바라며 서울팀 18명은 각자의 짐을 싣고 거의 탈진한 몸을 털썩 버스의자에 앉히고는 출발 하자마자 모두 쥐죽은 듯 고요히 잠들었다. 비가 오는 도로를 달리는데 참으로 착잡했다. 뜸만 뜨면 지금 저 병들은 많이 나을 수 있는 것인데 안타까왔다. 1시간쯤 재운 후 뒤 돌아 보니 또 다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앉아 있다. 이제 다시 살아난 것이다. 오후 5시 10분에 광주지부가 진료 다 끝내고 마무리 하고 광주로 출발했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모두 이틀 동안 613명을 진료했노라고 덧붙였다. 어제 200명, 오늘 413명 모두 613명 진료! 많은 인원은 아니지만 오늘 한꺼번에 몰려왔기 때문에 힘들었던 것이다. 접수되는 대로 다 진료했다면 아마도 오늘 하루만 600명을 넘었을 것이다. 뜸 뜨는 것이 일반화 되면 참 좋을 것이다. 이번 봉사에 참여한 봉사요원들은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상당히 지명도가 남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이 사람들이 왜 이러한 봉사에 참여하겠는가! 우리는 돌아오는 버스속에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빨리 뜸 뜨는 일이 일반화 되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다. 이번 7월초에는 완도에서 봉사가 이루어질 계획이다. 완도에서 오늘 두명이 나와 실제로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하나 견학을 하고 갔다. 우리는 봉사요청이 오면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다 해줄 요량이다. 다른 어떠한 봉사보다도 병 고쳐주는 봉사가 그래도 신이 난다. 돌아오는 길에는 그래도 기뻤다. 환자들이 좋아해서 기뻤고 한 마음되어 열심히 진료하는 모습이 보기 좋고 기뻤다. 이 기쁨은 실제로 체험하지 않으면 느끼기 어려운 기쁨이다.
2004.6.28
후궁
첫댓글 고된봉사활동과 열악한 환경을 그래도 기쁨으로 여기시는 님의 마음에 감격합니다.50세 이하는 뜸 받을 자격이 없나요? 그리고 왜 술 마실땐 기도를 안하세요?ㅎㅎ(농담)...잘 다녀 오셨지요?..구당선생의 정열은 뜸의 영향인가보지요,바로 올라온 따끈한 소식이라 반갑기 그지 없습니다.
네. 잘 다녀왔습니다. 구당선생님의 건강과 열정은 뜸이라 생각듭니다. 젊은 우리는 지쳐도 그분은 지치지 않습니다. 여행끝이라 피곤하실텐데 제일 먼저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후궁님, 칸 좀 뛰어서 올려주셨으면,,, 눈이 아퍼요~
침 맞아 본 경험이 없어 궁금합니다. 침 맞을 때 정말 안 아픈가요? 전 무서워서 주사도 잘 못맞는 편이라, 그 긴 침이 혈을 파고 들어가도 아프지 않다는게 신기할 따름입니다. 제 자신 하나도 추스리지 못해 힘겨워하는 저를 돌아보게 하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수고 하셨습니다.봉사활동 다녀오시고 26일 보고(?)까지 해주시고...님의 봉사활동 이야기는 모던분의 귀감이 될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