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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옛 신라의 중심부!
경주 월성지구 답사기.
월성중학교 3학년 3반 김민욱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푹푹 찌는 7월 중순. 분명 날씨는 맑은데 왜 하늘은 푸르지 않고 연한 하늘색을 띠는지 모르겠다. 몇 주 뒤, 문화교류란 목적에 따라 일본으로 출국한다. 거기서 일본 토미오중학교에 방문하는데 그때 전달할 선물을 뭐로 할까 고민하다가 직접 찍은 사진을 전달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경주를 대표하는 사진을 찍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여기 월성 입구로 왔다. 날씨가 좋아 사진이 잘 찍힐 거라는 부푼 기대를 안고 오늘도 답사를 나선다.
입구에 서 있는 거대한 유네스코 돌비석을 지나서 첨성대로 먼저 향한다. 가는 길옆에는 주춧돌과 큰 고분이 널려있는 동부사적지대가 나타난다. 옛날에는 한양의 육조거리처럼 관공서가 이 일대에 즐비했다고 한다. 그 옛날 화려했던 서라벌의 중심부를 생각하며 페달을 밟는다.
(동부사적지대.)
첨성대 가다가 못 미쳐 어느 고분 옆에 작은 건물이 하나 보인다. 여기는 '문호사'라는 곳으로 관란 이선생을 모시는 곳이다. 관란 이선생은 중종 때 살았던 효자로 여려서 부모를 모두 잃었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3년 시묘살이를 다 했고 곡소리가 얼마나 애절한지 도적도 그 소리를 듣고 애잔하여 가던 길을 돌아갔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분이 사시던 마을을 '효현' 또는 '충효'라 불렀다. 현재 우리 학교인 월성중학교가 있는 동네가 충효동인 이유가 바로 이 분 덕분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옆에는 창의비가 서 있는데 무너진 무덤의 돌무지를 담장처럼 창의비에 두른 것이 꽤 신기했다. 이제 학교 갈 때마다 이야기를 생각하며 가야겠다.
(문호사. 관란 이선생을 모시고 있다.)
(관란 이선생 창의비. 무너진 고분의 돌무지를 담장처럼 둘렀다.)
이제 진짜 첨성대로 가본다. 원래는 입장료를 내야 하지만, 경주 시민이라 무료다. 이런 점에서는 경주에 살기 잘한 것 같다. 원래는 주변에 나무가 심어져 있어서 밖에서는 첨성대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는데 요즘은 나무도 다 걷어내서 밖이나 안이나 별 차이가 없다.
첨성대는 우리가 알다시피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다. 하지만 선덕여왕 상징물설, 제단설 등 많은 추측이 일고 있어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모른다. 첨성대 돌 개수가 361개 반이어서 일년 날자 수와 같다, 밑으로 12단, 위로 12단은 일 년 열두 달을 의미한다는 등의 사실은 익히 알려진 내용이라 넘어간다. 첨성대를 돌면서 보다 보면 뭔가 어색한 느낌이 든다. 자세히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첨성대는 피사의 사탑처럼 조금 기울어져 있다. 이는 6.25전쟁 당시 옆으로 군용트럭이 많이 지나가서 그렇다고 한다. 하지만 약간 기울어진 것을 빼고는 단 한 번도 무너진 적이 없는 견고한 건축물이다. 하지만 아무리 튼튼하다 해도 세월의 무게는 견디기 힘든지라 약간씩 돌의 균형이 안 맞는 부분이 있다. 보수는 해야 하지만, 지금 기술로도 다시 둥글게 쌓는 것이 어려워 아직 손도 못 대고 있다. 현대 기술로도 어려운 첨성대의 시공술이 놀랍기만 하다.
(첨성대 입구. 외국인들도 많이 눈에 띈다.)
(정면에서 바라본 첨성대. 아름다운 곡선미와 위아래의 정방형이 멋지게 조화를 이룬다.)
(첨성대 일대 파노라마. 첨성대에 맞춰 찍으면 확실히 지면의 높이가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첨성대 뒤로 궁성인 월성이 보인다. 첨성대를 나오는데 일본어로 번역된 신라 역사 만화책이 보인다. 살까 하다가 그만둔다.
다음 목적지는 월성 앞에 있는 계림이다. 김알지 탄생설화로 유명한 계림은 기록상 나오는 가장 오래된 숲이다. 안에는 고목과 계림비각이 존재한다. 숲을 좀 더 들어가면 작은 도랑이 나오고 더 뒤에는 향교로 가는 길과 내물왕릉이 보인다. 내물왕릉의 주인, 내물 마립간은 신라 왕으로서는 처음으로 중앙 집권체제를 이룩하여 고대국가의 기틀을 잡은 왕이다. 이때부터 계속해서 김씨가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그리고 우두머리란 뜻의 '마립간'이란 칭호를 처음 사용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이찬의 아들인 '실성'을 고구려 볼모로 보내어 후에 눌지 마립간 때 왕자구출을 위한 박제상의 희생을 만들어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월성 일대. 오른쪽에 동부사적지대도 함께 보인다.)
(계림. 고즈넉한 숲의 모습이 편안하게 다가온다.)
(계림비각.)
(내물왕릉. 신라 역사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인물이다.)
계림을 나와서 월성으로 들어간다. 월성은 서울로 치면 경복궁과 같은 곳으로 본궐이다. 위에서 보면 반달모양을 닮아서 '반월성'이라고도 하며 초승달을 닮아서 '신월성'이라고도 한다. 토성이지만, 중간중간 돌을 섞어 쌓아 견고하게 만들어졌다. 안에는 화려한 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던 터가 자리 잡고 있다. 꽤 많은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가 석빙고만 보고 나와서 그런지 좁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둘레만 쭉 걸어도 꽤 넓다는 생각이 든다. 원래 맞은편에 있는 월지(안압지)와 이어져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길이 뚫려서 지금은 나뉘게 되었다.
(월성 입구. 옛날에는 여기 앞에 거대한 문루가 있었겠지?)
(입구에 있는 토성과 석성을 섞은 흔적.)
지금은 흔적조차 알기 어려운 궁성 터지만, 예쁜 꽃밭과 솔밭이 있어서 화사한 분위기는 가지고 있다. 길을 거다가 왼쪽을 보면 아직 남아있는 석성의 흔적이 약간 보인다. 길을 따라 쭉 걸으면 정체모를 건물터가 나오고 더 가면 월성의 가장 주된 곳이라 할 수 있는 석빙고가 나온다. 이제는 대체로 알려진 사실이지만, 석빙고는 신라시대 것이 아닌 조선 영조 때 만들어진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다른 석빙고들 역시 대부분 조선시대 것.)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석빙고 중 가장 보존이 잘 되어있다. 작년에 개봉한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나온 서빙고 역시 경주 석빙고를 적절히 합성한 것이라 한다. 지금은 잠겨있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면 시원한 기운이 느껴진다. 바닥을 깊게 하여 찬 기운은 가라앉아 냉기를 유지하고 뜨거운 기운은 위에 있는 굴뚝으로 빠져나가도록 설계한 것이 특징이다. 보면 볼수록 놀라운 조상님들의 지혜이다.
석빙고 앞에서 사진도 찍을 겸 잠시 더위를 피하고 있는데 서울에서 오셨다는 두 분과 대화를 나눴다. 선생님 같았다. 뉴스 보니까 서울은 홍수나고 난리 났다던데 정말 그렇다 하니 여기 경주의 땅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답사 다닐 때마다 이런 분들을 만나서 항상 기분이 좋다.
(아직 조금 남아있는 성벽 흔적.)
(정체모를 건물 터.)
(석빙고. 조선 영조 때 만들어진 조선판 냉동고 되시겠다.)
(석빙고 안. 둥근 아치형 건물은 꼭 석굴암을 보는 것 같다.)
월성을 나와 동궁과 월지로 가기 전, 코스모스밭과 연꽃단지를 둘러본다. 코스모스는 원래 가을에 피는 꽃인데 어이해서인지 여름에 활짝 폈다. 코스모스밭을 지나면 연꽃단지가 나온다. 흰색과 분홍색의 연꽃은 조화와는 비교되지 않는 아름다운 빛깔은 사람들의 마음을 즐겁게 한다. 월성 건너편에 있는 연꽃단지는 절정을 이루고 있다. 초록색 연잎들이 넘실거리는 가운데 서 있는 정자는 운치가 더해진다. 연꽃들 사이로 오리가족이 줄지어 산책하기도 한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이다.
(생태터널. 코스모스밭 한쪽에 만들어져 있다.)
(생태터널 안. 조롱박이 주렁주렁 열려있다.)
(코스모스밭. 코스모스들 뒤로 첨성대가 작게 보인다.)
(연꽃단지. 푸른 연잎 사이로 정자가 배처럼 떠있는 듯하다.)
(연꽃단지를 유유히 산책 중인 오리가족.)
연꽃단지에서 또 길을 건너 다시 월성 쪽으로 간다. 이쪽 월성에는 인공으로 만든 해자가 놓여있다. 해자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방어용 연못이다. 월성은 이런 해자가 여러 개 있으며 현재 발굴 중이다. 앞에는 해자가 방어하고 뒤로는 문천(남천)이 해자 노릇을 하니 방어 하나는 믿을만 하다. 해자 앞에는 새로 세워진 영상관이 있다. 웅장한 영상도 멋지지만, 시원한 에어컨 덕분에 더위를 식힐 수 있어서 좋았다.
(월성 해자.)
(신라왕궁영상관.)
이제 마지막 답사처인 동궁과 월지로 간다. 원래 명칭은 안압지였으나 조선시대 때 선비들이 '멸망한 신라의 궁터에 있는 연못에는 기러기와 오리만 노닌다'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이라 원래 신라시대 때 쓰이던 동궁과 월지로 바뀌었다. 하지만 안압지란 말이 거의 굳어져 있어서 제대로 사용되려면 시간이 더 걸릴 것 같다. 이번에도 경주 시민 혜택을 받고 안으로 들어간다.
(동궁과 월지.)
옛날에는 수많은 건물이 있었던 화려한 궁궐터지만, 지금은 세 채만 복원되었고 나머지는 빈터에 주춧돌만 남아 옛날 영광을 증명해주고 있다. 제일 먼저 만나는 누각은 원래 안에 월정교 모형을 전시했지만, 복원함에 따라 없어지고 문이 닫혔다. 이어서 두 번재 누각으로 가본다. 두 번째 누각에는 월지에서 출토된 유물 복제품과 그 옛날 동궁 모형을 전시하고 있다. 모형을 보면 얼마나 화려한 곳이었는지 알 수 있다. 세 번째 누각은 가장 작다. 그래서 그런지 정자라는 이미지가 가장 맞는 것 같다.
(동궁의 복원된 두 번째 누각.)
(두 번째 누각에서 바라본 월지.)
누각을 지나서 숲이 있는 쪽으로 가본다. 여기 월지는 어느 방향에서 바라봐도 전체가 보이지 않도록 설계해서 굉장히 넓게 느껴지도록 했다. 마치 바다같이. 실제 월지를 위에서 보면 신라 주변지도와 비슷하다고 한다. 누각이 있는 쪽은 각지게 해서 인공미를 더하고 반대쪽은 해안선처럼 꼬불꼬불하게 해서 자연미가 느껴지도록 하여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가히 동아시아 최고의 정원건축이라 할 만하다.
길을 따라가니 누각 셋이 한 번에 보이는 곳이 나타난다. 연못에 비쳐서 정말 아름답다. 경주를 잘 나타낼만한 곳으로 여기만 한 곳이 더 있겠는가?
(세 누각이 한 번에 보이는 곳. 진정 신라의 아름다움이다.)
(숲 안에 있는 길.)
숲을 따라 걸으면 마지막으로 나오는 것이 여기 월지의 물을 공급하는 곳이 나온다. 폭포처럼 효과를 두어 물소리가 들린다. 위쪽으로 가면 욕조같이 조각된 장소가 나온다. 이런 곳 하나하나에도 멋들어지게 조각해 놓았다. 사진을 찍고 돌아가려 하는데 한 할아버지께서 오셔서 사진을 찍어주신다고 하셨다. 목걸이에 '사진촬영봉사단'이라고 적혀 있었다. 정말 멋진 봉사활동이다. (사진 찍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물이 흘러들어가는 배수구. 조각이 참 멋지다.)
(월지에서. - 사진촬영봉사단 할아버지 사진제공.)
날씨가 더워서 조금 피곤하기는 했지만, 절대 아쉽지는 않았다. 언제나 와볼 수 있고 유명해서 그런지 잘 찾지를 않았던 곳이어서 익숙하지만, 낯설게 다가온 답사였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유적지 곳곳에 있는 수많은 외국인 관광객들. 우리나라도 이제 외국인 관광객 1,000만 시대라는 것이 절로 실감 난다. 앞으로도 많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경주에 많이 찾아와줬으면 한다.
찬란 신라의 중심지, 월성지구! 비록 터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그 기상은 언제나 이 땅에서 살아 숨 쉴 것이다.
-여정- (2013. 7. 19. 金)
월성지구 입구→ 문호사→ 첨성대→ 계림→ 내물왕릉→ 월성(석빙고)→ 코스모스밭과 연꽃단지→ 신라왕궁영상관→ 동궁과 월지
새롭게 펼쳐라!
羅新
첫댓글 월성지구 답사를 하고 사진과 상세한 설명까지 곁들여 놓아서 참 보기가 좋구나.
수고 많이 했다.
이제 문화재 보는 안목이 일취월장한 것 같구나.
그리고 물이 흘러들어가는 곳은 입수구이니, 배수구를 입수구로 수정을 해야 될 것 같구나.
내일 새벽에 일본으로 가는 구나.
일본 학생들과 교류 잘하고 오도록 해라.
아마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배워 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