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수서원(竹樹書院) = 화순군 한천면
사진 : 남도뉴스 http://cafe.daum.net/emaeil
❏소 재 지: 전라남도 화순군 한천면 모산리 산 15-3
❏문화재지정: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130호(1986.09.29지정)
정암적려지(靜庵謫廬址) -전라남도기념물 제41호(1979.08.03지정)
❏배향인물: 조광조(趙光祖) 양팽손(梁彭孫)
❏창건연도: 1570년(선조 3)
❏사액연도: 1570년(선조 3)
❏향 사 일: 음력 3월 15일
연 혁
조광조(趙光祖)와 양팽손(梁彭孫)을 배향한 서원이다. 죽수서원은 전라남도 지방에서는 순천의 옥천서원에 이어 두 번째로 1570년(선조 3)에 사액을 받은 서원이다.
조광조는 1519년(중종 14)에 기묘사화로 능성(현 화순군 능주면 일원)에 유배되었는데, 이때 조광조와 여러모로 인연이 깊었던 양팽손도 관직을 삭탈당하고 고향인 능성에 와 있었기 때문에 서로 의리를 교환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광조가 유배된 지 1개월이 못 되어 사약을 받고 숨지게 되자 양팽손은 은밀히 시신을 거두어 화순 쌍봉사 골짜기인 조대감골에 장사지내고 서운태(서원터)마을에 모옥을 짓고 봄, 가을로 제자들과 함께 제향하였다.
이후 1568년(선조 1)에 조광조는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으며 그 이듬해에는 ‘문정’이란 시호를 받았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조정에서 조광조를 향사할 서원의 건립이 논의되어 1570년(선조 3)에 다시 능성현령 조시중의 협조로 현 위치인 천일대에 서원을 짓고 ‘죽수’라는 사액을 받았다. 그 뒤 1613년(광해군 5)서원을 중수하였고 1630년(인조 8)도내 유림과 조정에서는 사계 김장생 등의 발의로 양팽손을 추배하였다.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에 의해 헐리고 단(壇)만 마련해서 제향하다가 1971년 도곡면 월곡리에 죽수서원을 복원하였다. 다시 1983년에 본래의 위치이자 죽수서원의 사액을 받은 현 위치인 모산리에 복원을 추진, 월곡리의 건물을 이건하고 신축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배향인물
1)주벽-조광조(趙光祖, 1482∼1519)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로 본관은 한양(漢陽)이고 자는 효직(孝直)이며 호는 정암(靜庵)이다. 17세때 어천 찰방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가 무오사화로 화를 입고 희천에 유배중이던 김굉필(金宏弼)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학문은 소학·근사록등을 토대로 하여 이를 경전 연구에 응용하였으며, 성리학 연구에 힘써 김종직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의 영수가 되었다. 1510년(중종 5)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였는데, 성균관 유생들의 천거와 이조판서 안당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1515년에는 조지서(造紙署) 사지(司紙)에 초임되었다. 그 해 가을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전적·감찰·예조좌랑 등을 역임하면서, 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되었는데, 그는 항상 유교로서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는 지치주의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역설하였다. 그 뒤 정언·수찬·정랑·교리·부제학·대사헌 등을 역임하면서 여씨향약(呂氏鄕約)의 실시, 소격서의 혁파, 현량과(賢良科)의 실시, 정국공신의 위훈 삭제 등과 같은 많은 개혁 정치를 단행하였다.
이 같은 급진적인 개혁은 마침내 훈구파의 강한 반발을 야기 시켜서 기묘사화의 실마리로 작용하였고, 조광조는 능주로 귀양가 사사되었다. 당시 조광조의 도학정치에 대한 주창은 대단한 것이었고 이러한 주창을 계기로 하여 당시의 학풍은 변화되어 갔으며 뒤에 이황·이이 같은 학자가 탄생될 수 있었다.
그는 선조 초 신원되어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그의 학문과 인격을 흠모하는 후학들에 의하여 사당이 세워지고 서원도 건립되었으니, 능주의 죽수서원(1570), 희천의 양현사(1576), 심곡서원(1605)등이 대표적이다. 이이는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등과 함께 그를 동방사현(東方四賢)이라 불렀다. 저서로는 정암집(靜庵集)이 있고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2)양팽손(梁彭孫, 1488∼154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대춘(大春), 호는 학포(學圃). 능성(綾城) 출신. 직장 사위(思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사복시정 담(湛)이고, 아버지는 이하(以河)이며, 어머니는 해주 최씨(海州崔氏)로 증 조위사직 최혼(崔渾)의 딸이다.
1510년(중종 5)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생원시에 합격하고, 1516년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했으며, 또 현량과(賢良科)에 발탁되었다. 이후 정언(正言)·전랑·수찬(修撰)·교리(校理) 등의 관직을 역임했으며, 호당(湖堂:독서당을 고쳐 부른 이름)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하기도 하였다. 정언으로 재직할 때 이성언(李誠言)을 탄핵한 일로 인해 대신들의 의계(議啓)로써 직책이 갈렸지만, 조광조·김정(金淨) 등 신진 사류들로부터는 언론을 보호한 인물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1519년 10월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김정 등을 위해 소두(疏頭)로서 항소하였다. 이 일로 인해 삭직되어 고향인 능주로 돌아와 중조산(中條山) 아래 쌍봉리(雙鳳里)에 작은 집을 지어 학포당(學圃堂)이라 이름하고 독서로 소일하였다. 이 무렵 친교를 맺은 인물들은 기준(奇遵)·박세희(朴世熹)·최산두(崔山斗) 등의 기묘명현들이었다. 특히, 능주로 유배되어온 조광조와는 매일 경론을 탐구하며 지냈다.
1539년에 다시 관직을 제수 받았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544년 김안로(金安老)의 사사 후 용담현령(龍潭縣令)에 잠시 부임했다가 곧 사임하고 다음해에 58세로 죽었다.
13세 때 송흠(宋欽)에게 나가 공부했으며 송순(宋純)·나세찬(羅世贊) 등과 동문으로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항상 ≪소학≫·≪근사록≫ 등으로 처신의 지침을 삼았고, 당시 신진 사류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였다. 회화에도 일가견을 보여 안견(安堅)의 산수화풍을 계승하였다. 1630년(인조 8) 김장생(金長生) 등의 청으로 능주 죽수서원(竹樹書院)에 배향되었으며, 1818년(순조 18) 순천의 용강서원(龍岡書院)에 추향되었다. 작품으로는 <산수도> 1점이 전하며, 저서로는 ≪학포유집≫ 2책이 전한다. 시호는 혜강(惠康)이다.
건축물
경내는 중앙에 정명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내삼문과 좌우로 둘러진 담장에 의해 제향구역과 강학구역으로 분리되어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1989년 동재, 1994년에 관리사를 신축하였다.
중요물건(관련유적)
1)정암적려지(靜庵謫廬址)-전라남도기념물 제41호(1979.08.03지정)
조광조가 능주에 유배되어 살았던 집은 당시 관노 문후종(文厚從)의 초가 3간 집이었다고 하는데 현재 능주면 남정리 174번지 일대이다. 현재 이 초가를 복원하여 1979년 8월 3일에 전라남도 지방기념물 제41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이 적려지 초가 옆에는 조광조의 영정각과 강당도 새로 지어져 적려경내를 새로 단장하였다.
2)유허비(遺墟碑)
능주면 남정리 174번지 적려지에 유허비각이 세워져 있는데 이는 조광조 유배지의 대표 상징유적이다. 이 유허비는 1667년(현종 8)에 당시 능주목사 민여노(閔汝老)가 세운 것으로 비문은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비문글씨는 송준길(宋浚吉)이 썼으며 비액전서(碑額篆書)는 민유중(閔維重)이 썼다.
처음에는 비문만 세워져 있다가 비각은 정조대에 지어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분명치 않으며 다만 비각중수기(정암의 11세손 趙性敬 撰)에 의하면 1876년(고종 13)에 양정환(梁廷煥)이 주력하여 비각의 중수가 이루어진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3)죽수서원유지추모비(竹樹書院遺址追慕碑)
죽수서원이 사액서원이지만 대원군 때에 훼철된 것은 조광조의 고향인 경기도 용인의 심곡서원과 겹치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어떻든 1868년(고종 5)에 서원철훼령 이후에 죽수서원이 철훼되자 그 서원유지에 추모비를 세웠다. 양재경(梁在慶)의 주선으로 비문은 최익현(崔益鉉)이 짓고 음기는 송병순(宋秉珣)이 썼다.
4)重修竹樹書院記 : 趙纘韓이 撰한 중수기이다.
5)趙光祖神道碑 : 盧守愼이 찬한 정암 조광조의 신도비이다.(노수신문집 蘇齋集 참조)
6)梁彭孫神道碑 : 洪良浩가 찬한 학포 양팽손의 신도비이다.(홍양호문집 耳溪集 참조)
참고-전라남도·호남문화연구소 엮음, 전남 향토문화 백과사전,2001
목포대학교박물관. 전라남도, 전남의 서원. 사우-사액서원·사우편,198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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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원문보기 글쓴이: 기라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