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자유의 종교이다. 이 사실은 기독교 경전의 해석과 세계사를 통해 입증돼 왔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 8:32) 이 성구는 기독교와 자유의 관계를 압축적으로 표현한다. 기독교의 진리는 자유에 있으며 자유는 진리를 깨달을 때 달성된다는 의미이다.
기독교의 가르침, 진리, 자유, 이 셋은 분리할 수 없다. 기독교의 가르침이 자유로 귀결된다는 사실 때문에 자유에 반하는 현실은 비판을 피할 수 없었으며 역사적 계기마다 자유를 향한 투쟁과 맞닥뜨렸다. 서양사와 기독교를 떼서 생각할 수 없다면 서양사의 전개와 기독교의 자유 정신도 분리할 수 없다.
최신한 한남대 명예교수(철학)는 “기독교의 자유이든 헌법에 명기된 자유이든 그 의미가 고정돼 버린다면 자유의 힘도 멈춘다. 자유의 원천이 현실이 아니라 반사실적 지평에 있다는 것은 그 개념이 늘 새로운 모습으로 발견되고 다르게 해석될 수 있음을 뜻한다”라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자유의 세속화는 이미 완성됐어야 할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사진=네이버문화재단
기독교 정신은 세속화 과정에서 세계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종교적 의미의 자유는 종교 언어와 일반 언어 사이에 간격이 좁아지면서 세속적 의미의 자유로 전이됐다. 1517년에 시작된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은 가톨릭 교회에 대한 저항이자 그 지배에 맞서는 개신교의 자유 쟁취 사건이다.
프로테스탄트를 가톨릭 교회와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지점은 신앙인 개인의 신 의식, 즉 개인의 자기 의식 가운데 구원자가 내재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신앙인의 내면성 가운데 자기의식과 신 의식이 교차하고 있다.
가톨릭 교회에서 신앙인은 오로지 교회를 통해서만 신과 접촉할 수 있으며 교회의 매개 없이 신과 관계 맺는 것은 불가능하다. 반면에 프로테스탄트 신앙인은 교회를 통하지 않고 내면 가운데서 신과 직접 만날 수 있다. 종교개혁 이후의 신앙인은 교회에 대한 복종과 사제의 매개없이 신과 직접 대면할 수 있게 됐다.
정신의 확장은 종교개혁의 사고방식이다. 개인의 내적 체험이 표현됨으로써 먼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의사 소통이 이뤄지고, 이것은 국가와 사회의 소통과 정화로 이어진다. 개인의 사고와 사회적 의사 소통은 같은 뿌리를 갖는다. 개인의 신-관계(Gottesverhältnis)가 사회적 관계로 이어지면서 종교적 자유는 사회적으로 확장된다.
종교적 근본 형식은 자기와 결합한 사회 관계와 세계 관계를 상징화한다. 종교개혁을 통해 개방된 종교적 주관성은 가족과 직업이라는 세속적 삶의 형식으로 확대되고, 종교적 주관성의 자유는 사회적 자유로 이어지면서 새로운 문화를 형성한다.
프로테스탄티즘은 개인의 신앙에서 출발하여 개인 간의 상호 전달을 거치면서 종교적 보편에 토대를 둔 문화를 만들어낸다. 개인이 신과 맺는 관계는 사회적 관계로 확대되고 가족, 경제, 정치에 대한 책임으로 이어진다. 종교적 의사 소통은 세속적 세계 안에 내재하는 타자, 즉 세속을 정화하고 성화(聖化)하는 타자로 기능한다.
타자는 세속 가운데 비 세속적인 것, 즉 성스러운 것을 작동하게 하는 힘이다. 상호주관적 삶의 규범적 가치는 성스러움에 달려있다. 프로테스탄트 신앙은 신에게 용서받고 인정받았다는 감정, 즉 죄와 고통에서 해방되고 자유를 얻었다는 감정에서 출발한다. 신앙인은 내면 가운데 직접적으로 느끼는 신에 대한 의존감정에 토대를 두고 세상에서 자유의 존재로 살아간다.
신에 대한 의존감정과 신뢰는 세상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원동력이다. 신앙인이 홀로 독자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의 내면에는 신과 통일돼 있다는 확신이 존재한다. 종교적 자유의 근거는 신앙인의 자기의식 가운데 내재하는 구원자이다.
그는 한편으로 자기의식을 가지며 다른 한편으로 그와 동반하는 신 의식을 가진다. 신과 통일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세상 속에서 자유롭게 살며 늘 새롭게 산다. 그러나 자기 마음대로 행하는 자의적 삶은 새로운 삶이 아니다.
기독교인의 자유가 인정받으려면 세상의 기준과 구별되는 삶을 보여줘야 한다. 세상과 구별되는 삶의 기준은 반사실적이다. 반사실적인 모티프가 없는 자유는 세속적 삶과 구별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종교의 빛깔을 잃거나 사이비로 전락한다. 기독교의 자유가 세속세계와 다른 지평을 지향하려면 부분이 아닌 전체를 아울러야 한다.
부분의 자유도 자유이긴 하지만 그것은 지속할 힘을 잃을 때 금방 사라져버린다. 자유는 전체로 나타나야 하며, 전체와 자유는 서로에게 스며들어야 한다. ‘신 앞에서 만인은 평등하다’, ‘만인은 양심의 자유를 갖는다’에서 보이는 전체의 자유는 초월적 자유를 알고 실천하는 신앙인에 의해 실질적인 현실이 될 수 있다.
신앙인이 획득한 자유 의식은 개인의 자유로 그칠 수 없다. 자유가 개인적인 차원에 머문다는 것은 자유의 속성에 모순된다. 나의 자유는 불가피하게 우리의 자유로 전개된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자유도 존속할 수 없다. 나는 나의 자유가 다른 사람의 자유로 인해 제한된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므로 정신의 법칙은 모든 사람의 자유가 상호작용한다는 것이다.
자유의 자기의식은 결코 홀로 존립할 수 없으므로 자유는 개인이 아닌 전체의 정신을 대변한다. 이것은 기독교 사상뿐 아니라 그와 뗄 수 없는 근대철학의 근간으로서 결국 자유의 이념으로 연결된다. 기독교 자유 개념의 세속화는 현실 가운데 반사실성을 실현하고 있다. 초월적인 것이 현실 가운데 실현될 때 문제의 현실은 새로운 현실로 개선되었다.
세속화(secularization)는 번역어의 부정적 뉘앙스와 달리 현실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성스러움의 활동이다. 이것은 성스러움을 속되게 만들어버리는 세속주의(secularism)와 구별된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자유 개념의 세속화는 개인과 공동체의 인간화를 가능하게 했다. 자연과 자유가 대비된다면 기독교는 자연적 인간의 본능적 상태를 자유롭고 인격적인 상태로 변화시켰다. 그리고 기독교 내적인 언어를 일반적인 언어로 세속화했다.
세속화된 자유 개념은 성스러움과 무관한 현실을 변화시키고 보편적 가치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이 마무리되지 않았으므로 자유 개념의 세속화는 지속돼야 한다. 이것은 종교개혁의 지속이 요구되는 것과 같다. 기독교의 자유이든 헌법에 명기된 자유이든 그 의미가 고정돼 버린다면 자유의 힘도 멈춘다.
자유의 원천이 현실이 아니라 반사실적 지평에 있다는 것은 그 개념이 늘 새로운 모습으로 발견되고 다르게 해석될 수 있음을 뜻한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자유의 세속화는 이미 완성됐어야 할 것이다.
오히려 세속화는 확정된 의미의 분화(슐라이어마허/루만)로 이어지며 그때마다 새로운 자유의 의미가 드러나야 한다. 세속화는 종교적 내면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이를 세상에 실현하는 것이다.
고유한 의미는 기존의 것에서 분화된 것이거나 개인이 처음으로 사용한 의미이다. 의미 발생과 실천에 개인이 직접 관여한 세속화는 바깥에서 주입된 것이나 강압적인 것이 아니다. 분화로서의 세속화는 규정적이며 구체적이다. 나로부터 규정적이고 구체적인 자유가 발생하는 종교가 있다면 그 종교는 여전히 존속해야 한다. 이러한 분화는 기존의 가르침을 반 복하거나 번역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종교와 확실히 구별된다.
출처 : 교수신문(http://www.kyosu.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