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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둥근달
아내에대한 하나님의 명령
" 여성해방은 여러가지 필요한 개혁을 가져다 주었지만, 일면 여성들에게서 여자의 권리인 안전과 보호를 앗아가는 불행한 결과를 가져다 주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여성들은 가정에서 재정적인 문제를 떠맡을 것과, 사회활동에 선두를 설 것과, 자녀의 양육권을 가질 것과 주요한 가정문제를 결정할 것과, 가정에서 정신적인 될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명령"과 상치됩니 다. 여자는 선천적으로 이러한 종류의 심리적내지 정서적 압력을 계속하면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는 준비가 정상적 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여자들이 기술적인 재능과 자격을 가지고 이러한 일들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여자와 가정과 사회에 대한 불치의 손상을 캄푸라지 할 뿐입니다."
아내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복종-사회적인 균형)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 이나 '남자나 여자'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아에서 하나이니라"(갈3:27-28).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남녀 간의 차별없는 사회적인 "평등"을 가르치는 기본 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직접 글을 쓴 바울은 이 말씀을 그런 뜻으로 쓰지는 않았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주님의 자녀로 하나님 앞에서 대등한 위치에 서 있으며 그리스도 와 영적인 친교를 나눌 때는 대등한 위치에 서 있으며 성령의 품에서도, 그리고 하나님과 더 높은 세계에 대한 관계에서도 대등한 위치에서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남녀에게 명령하신 그 어떠한 관계도 본래의 위치에서 흔들리는 일이 없습니다.
바울은 분명히 모든 인간의 정치적인 평등이나 공산주의의 관념의 세속적인 균등한 소유분배를 가르치지는 않았습니다.그는 남녀동등권을 소개하기 위한 현대적인 계획을 찬성하려는 의도로 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지위에는 하나님의 확고하고 변경할 수 없는 명령이 있습니다. 그것은 저들이 지으심을 받았을 때 확립되었으며 두 사람의 본성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에 의해 붕괴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신약에서 확립되었습니다. 그 위에 그리스도인의 결혼이 조화를 이룹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훨썬 용이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의 대부분의 부부들이 만족하게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이며 그에 대한 미해결을 부부관계 에서 많은 불행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동양사상에 의하면 아내는 남편의 노예상태에서 억압을 받는다고 합니다. 저들 이 서로 연애하던 시절에 여자는 남자의 여왕으로 승격되었습니다. 결혼 전과 결혼 후의 두 남녀의 관계는 상당히 대조적입니다. 이 두 개념은 잘못된 것입 니다. 이 두양극은 여저히 일생생활 가운데서 서로 다투고 방해합니다. 그러나 순수한 기독교 이상은 이 둘과 다릅니다.
성경은 남편에 대한 아내의 '종속'을 가르칩니다. 이에 대해 구약과 신약은 의견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이 종속은 천지창조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딤전 2:13-14). 타락 후에 각자에게 특별한 짐이 지워졌습니다. 아내의 종속이 확증되고 사실상 증가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여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습니다. "내가 내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나님은 다음에 남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창 3:16-19).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이러한 말씀에 대항하여 싸울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한번도 효력이 정지된 일이 없는 원시법률이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 입니다.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과 멀리 동떨어져 있지 않다면 이 법률에 복종 해야 합니다. 여기에서는 어떠한 분투나 어떠한 저항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 말씀은 계속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 장벽은 확고합니다. 이러한 집에 우리에게 지워지며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인간에게 통치권이 부여됩니다. 하지만 이와 더불어 저주받은 땅에 무거운 근심 과 힘든 수고가 찾아옵니다. 지상의 모든 생업에서 인간은 저주의 가혹한 현실 을 맛보아야 합니다. 만일 인간이 동시에 걱정과 책임에서 해방된다면 그는 기꺼이 통치권을 포기할 것입니다. 가장으로서의 지위를 포기한 사람들의 수는 오늘날에도 이를 입증합니다.
여자는 수고를 두려워하지 않고 통치를 희망합니다. 그녀 자신의 의지에 의한 계속적인 자기부정은 그녀에게 가장 무거운 시련이 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남자와 여자의 짐이 각자의 자연적인 체질 위에 거의 무겁게 떨어 집니다. 자연적인 상태에서 남자와 여자는 그 짐이 정말로 저주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만일 그것이 참을 수 없는 것이라면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주는 마땅히 참을 수 없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멍에는 저들 에게 몹시 무겁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그 멍에를 질 수가 없습니다. 저들은 이러한 한평새의 짐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찾아야만 합니다."
만일 저들이 이렇게 한다면 저주 가운데서 숨겨진 축복이 나타날 것입니다. 짐의 무게는 절반으로 줄어듭니다. 그것은 심령을 깨끗게 함으로써 가능해 집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의 명령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예비와 교육입니다. 그밖에 양식을 갖춘 다른 수많은 사람들은 결혼을 그 특성과는 상반된 기능으로 강제시키려 애씁니다. 자동차가 공중으로 날을 것으로 기대하고 낭떠러지까지 운전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광경을 보여줄 것입니다. '비행'(flying)은 자동차의 특성과 전혀 상반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배우자에게 부부생활의 어떤 역할을 부여하셨습니다. 이 각자의 역할은 결혼의 기본적인 특성의 일부입니다. 이러한 역할을 무시하거나 우리가 고안한 것과 대체 할 때 우리의 결혼생활은 파국을 초래하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남편의 결정이 가정을 재난으로 이끌면 어떻게 합니까? 그와 같은 상황이 위협을 줄때 아내는 가만히 앉아만 있어야 할까요? 이렇게 끝없이 복종만 해야 합니까?" (사람들은 이러한 의문을 거의 감추지 못합니다!)
성경은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골3:18). 분명히 사도 바울은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습니다. 요컨데. 여자의 복종은 "주안에" 있어야 할 일입니다. 즉 여자는 직접적으로 죄라고 불리울 수도 있는 일에 빠져들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아내나 자녀들의 영적인 생활에 관계되는 어떤 일에 의견충돌이 생길 때 아내는 그녀의 남편에게 반항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바울은 아내는 무조건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명령을 언급하고 있습니다(엡5:24,벧전3:1). "베드로가 사라를 순종의 본보기로 세운 것은 주목할 만 하다"고 안드레 부스타노비 목사는 말했습니다. "아브라함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사라가 자기 아내라는 것을 두번이나 부정하고 그녀를 통치자 바로의 궁으로 들여보낼 것"을 허락했습니다(창12:10-20,20:1-8). 이 말은 아내가 그녀의 남편으로 하여금 그가 원하는 경우가 자기를 창녀로 팔게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바울은 복종하는 일에 변하기 쉬운 것을 예견하고 있습니다.
큰 부흥의 역사를 체험한 브라질의 어느 교회는 신앙에 적의를 품고 있는 남편 들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여성들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습니다. 어떤 남편들은 저들의 아내가 교회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교회측에서는 이러한 여성 신도들에게 남편의 명령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서 남편의 마음에 변화를 일으켜 주실 때까지 열심히 기도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마침내 수많은 남자들이 그리스도를 찾고 신앙을 얻게 되었습니다. 남편의 불성실하고 옳지 못한 명령에 당장 복종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을 위배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어려운 경우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예배는 바로 우리의 신앙의 핵심 을 움직인다는 어떤 변호를 가지고 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당합니다(행5:29).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존중할때 여러분의 가정은 큰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복종'과 '굴종'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남편의 판단이 그릇되고 어리석다는 것을 알고 있는 아내는 남편에게 그러한 것을 존경하는 자세로 그러나 자유스럽고 정직하게 말해 주어야 합니다. 사랑이 깊은 아내의 판단과 지혜와 의견은 남자의 가장 큰 재산 중 하나입니다. 그것은 여러가지 어리석은 실수로부터 남편을 구해 주며, 사랑이 깊은 아내의 슬기로운 권고를 받아들이는 것이 남편의 특혜요 책임인 것입니다. "당신의 좋을대로 하세요." 하고 나직하게 말하는 아내는 복종이 아니라 어리석은 굴종입니다. 자기 남편이 가정을 불행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을 알고도 의견을 제시하지 않는 아내는 어리석은 여자입니다. 아내는 자기의 생각을 충분히, 정직하게 그리고 겸허한 마음으로 피력해야 합니다. 그녀는 특별한 결정에 관하여 솔직한 의심을 숨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녀가 이렇게 했을때, 그녀는 자기 남편으로 하여금 결정하게 하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옳은 판단력을 주실 것으로 믿을 수 있습니다.
복종이란 단순히 외적인 태도가 아니라 진지한 내적 태도입니다. 아내는 남편을 존경하고 남편이 마지막 결정을하여 이를 실행하도록 도와준다면, 그녀에 대한 남편의 태도도 건실해지고 결정도 현명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한 아내는 남편에게 강하고 솔직한 의견을 말할 수 있으며 남편의 권위에 계속 복종할 수 있습니다. 한편 자기 의견을 좀처럼 말하지 않는 아내는 남편의 결정을 문제시 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결국 남편의 모든 결정은 불행하고 후회스러운 것을 자초하고 맙니다. 복종은 사랑이며 사랑은 남편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복종은 진실하고 애정에 가득찬 내적인 자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적인 태도보다 도 마음의 상태에 관심을 두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남편에 대한 아내의 진정한 복종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영적인 일에서, 현명한 남편은 자기 아내의 권고와 의견을 환영할 것 입니다. 종종 여성들의 남성들보다 영적인 실재를 더 직접적이고도 더 지관적 으로 파악합니다. 독일 루터교회의 클라우스 헤쓰 목사는 "영적생활에서 여자는 새로운 비젼을 보고, 새로운 차원의 영적 실재를 봅니다. 인내를 가지고 영적 생활을 간직해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예를 들어, 만일 아내가 가정이 가족 및 개인기도를 소홀히 하고 교회예배에 빠지며 다른 외부적인 활동에 너무 탐닉하는 등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녀는 자기 남편과 이러한 통찰력을 자유스럽게 나누어 가져야 합니다. 이것을 "보는"것은 성령의 계시입니다. 행하지 않는 죄(소극적인 죄)는 사람을 특별히 현혹시키기 때문에 남편은 그러한 암시를 진정으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일을 남편에게 말하고, 다시 일을 올바르게 하도록 권고한다고 해서 복종을 어기는 것이 아닙니다. 실로,만일 아내가 침묵을 지킨다면 그것은 그릇된 자세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그녀가 성령께서 특별한 일로 자기에게 이해력과 지식을 주셨다고 느낀다면 그녀는 남편이 잘 고려해 볼 수 있도록 이것을 남편과 나누어 가질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정의 정신적인 건강과 방향은 남편의 권위와 보호에서와 같이 아내의 통찰력과 관심에서도 완전히 독립적입니다.
복종은 경건하게 침묵을 지키고 '모든 것을 남편의 손에 맡긴다"는 뜻이 아닙 니다. 권위에 대한 복종은 여러분 자신을 여러분 위에 있는 사람의 뜻에 온전히 맡긴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에 대한 복종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6:13). 이것이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형성되는 복종입니다. 만일 아내가 어떤 일에 대한 그녀의 지식과 감정을 보류해 둔다면, 이러한 것을 자기 남편의 뜻에 맡겨 두지 않기 때문에 그녀는 덜 복종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녀가 자기 생각을 충분히 알렸을 때, 그녀는 남편과 하나님에게 결정을 맡길 수 있습니다. 그녀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자기 자신의 지식과 의견을 강요 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할 수 있는한 마땅히 자기 생각을 충분히 그리고 자유롭게 표현하도록 하십시요. 그렇지 않을 때, 가정은 그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보내주실 바로 그 축복이 허락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아내의 부수적인 역할은 그녀의 인격을 억누르지 않습니다. 그와 반대로 그것은 건전한 방법으로 자기 생각을 표현할 그녀의 창의성과 개성에 가장 좋은 환경을 제공해 줍니다 . 동시에 그녀에게 결정권과 결정할 책임을 부담시키지 않고 그녀에게 지성과 통찰력과 판단력의 재능을 끌어올려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아내의 부수적인 역할은 그녀 자신의 행복에도 필요할 뿐 아니라 가정과 사회 전반에 균형을 유지시켜 주는 원인이되기도 합니다.
저명한 심리학자요 작가이며 신경증 아동들을 위한 오토제닉센터'(Orthgenic Center)의 소장인 브루노 베틀하임 박사는 상당수의 남편들이 저들의 가정에서 '보조 어머니'가 되고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아이를 돌보는 문제에서, 아버지가 다만 어머니의 종속적인 협조자라는 사실이 수많은 가정에서 입증되고 있습니다.아내는 남편에게 '아기의 옷을 왜 갈아 입히지 않으세요?' '장보고 올테이까 애에게 우유 좀 먹여요.' '난 바쁘니까 당신이 옷을 입혀주도록 하세요.'하고 권합니다. 많은 가정 전문가들은 그의 주장을 너그럽게 보아주고 있습니다. 저들은 오늘날의 아버지가 아이 보는 시간제 유모가 되어 어머니처럼 '정서적으로 풍요한 사람'이 되어 주기를 요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리석은 충고입니다. 남성 생리학자들과 심리학자들은 이런 충고를 할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만일 상황이 그것을 필요로 한다거 나 그일에 재미를 느끼고 있다면 아버지가 때때로 아기에게 우유병을 물리는 것이 그릇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릇된 것은 그일이 어버지의 신분에 추가되어 있다는 생각입니다. 남자가 어머니와 같은 행동을 함으로써 '더 훌륭한 아버지 가 되려고 할때, 그는 아버지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못할 뿐 아니라 남자로서의 의무도 다하지 못합니다. 父子관계는 주로 아이를 돌보는 경험으로 세워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경우, 그는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의 대리자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와 같은 "여인천하"에서 만일 피곤한 아버지가 부엌보조원과 잡역부로 봉사하도록 위협당한다면 아버지의 신분도 역시 보강되지 못할 것 입니다. 사실상 집안에서 여자가 하는 불유쾌한 자질구레한 일을 자기 남편에게 맡기는 아내는 결과적으로 자녀들의 눈 앞에서 자신의 행동을 격하시키는 꼴이 되고 맙니다.
"대부분 선의적인 아버지들은 저들의 아내에게 월급봉투를 갖다 바칩니다. 아내 는 자녀들에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남편에게 용돈을 줍니다. 이러한 어머니는 남편이 자기 아내를 크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아이들에게 아빠도 가정에서는 자기들과 똑같이 어리석은 남자아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암시해 줄 뿐입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간직해야 할 역할의 불투명성은 자녀에게 해로운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현재도 많은 아버지들이 접시를 닦고 아기를 목욕시키는 등 전통적으로 여성이 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남자 아이들은 남자가 무슨 뜻인지를 알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동일한 허드렛 일을 하는 경우, 아이들은 선명한 아버지나 어머니의 이미지를 간직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멀지 않아 남녀아이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저들도 대부분 불투명한 어버이들의 역할을 그대로 이어받을 것이 분명합니다.
남편과 아내의 역할이 서로 혼동되지 않도록 유의하는 것이 결혼생활 주에두 배우자가 간직해야 할 책임입니다. 남자들은 가장의 역할을 포기하는 죄를 범했으며 여자들은 가장의 역할을 빼앗는 죄를 범했습니다. 여자에게 책임을 안겨주고 가정일에 주도권을 잡기 싫어하는 남자에게 복종하기는 용이 한 일이 아닙니다.
여성해방은 여러가지 필요한 개혁을 가져다 주었지만, 일면 여성들에게서 여자의 권리인 안전과 보호를 앗아가는 불행한 결과를 가져다 주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여성들은 가정에서 재정적인 문제를 떠맡을 것과, 사회활동에 선두를 설 것과, 자녀의 양육권을 가질 것과 주요한 가정문제를 결정할 것과, 가정에서 정신적인 될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명령"과 상치 됩니다. 여자는 선천적으로 이러한 종류의 심리적 내지 정서적 압력을 계속 하면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는 준비가 정상적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여자들이 기술적인 재능과 자격을 가지고 이러한 일들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여자와 가정과 사회에 대한 불치의 손상을 캄푸라지 할 뿐입니다.
교회는 우리 문화의 여성화를 위한 이러한 추세로부터 적지 않은 고통을 받아 오고 있습니다. 남성들이 저드르이 가정에서 정신적인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포기했을 때, 교회에서는 더많은 책임이 여성들에게 돌아갔습니다. 여성들은 주일학교 반사일을 봅니다. 저들은 부인회를 운영하며 빈번한 심장을 합니다. 저들은 심지어 교회당 관리와 유지까지도 맡고 있으며 기도와 성경공부를 지도합니다.
저들의 지위를 포기한 남자들은 현재 교회에서 소외를 당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저들은 가정예배, 교회활동 및 자녀들에 대한 영적 지도와 같은 일을 저들의 아내에게 넘겨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악순환이 됩니다. 영적인 생활과 관계가 있는 것은 모두 여성적인 이미지를 드러냈습니다. 어머니들이 교회를 지배할 때, 딸아이들은 교회의 청소년클럽을 지배합니다. 딸은 어머니의 발자취를 따라 큰 그릇이 되고 아들은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 작은 그릇이 됩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명령과 상치되는 현상입니다.
이것은 또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신약의 기독교와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입 니다. 남자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저들이 하던 일을 중지했습니다. 저들은 저들에게 최대한의 충성과 사랑을 명령하신 주님을 찾았기 때문에 오해와 고통과, 핍박을 받았으며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당했습니다.
여러분은 산헤드린(Sanhedrin:유대인의 최고평의회 및 최고 재판소, 공회)의 법정에서 그리스도인의 법도를 변호하기 위해 베드로가 자기 아내를 성저으로 보낸 사실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또는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불우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모금한 헌금을 자기 누이로 하여금 취급하게 한 사실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분명히 알아두십시오. 여자들은 초대교회에서 아주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여성운동"은 저들의 충실하고 신실한 행위와 증거에 크게 의존하여 파급되었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행정"은 남자들의 수중에 있었습니다. 저들은 이러한 책임을 여성들에게 넘겨주지 않았습니다.
남성들이 리더십을 다시 찾아 취할 때, 교회는 정비례로 능력과 영적인 권위를 다시 얻게 될 것입니다. 남자들이 새벽 기도회에 참석하고, 남자들이 주일학교 상급반을 가르치고, 남자들이 자기 교회 교인들은 물론 비교인들까지도 심방하고, 남자들이 각종 모임이나 프로그램에 참석하거나 이를 지도하고 교회 살림에도 관심을 가지고 목사님을 도와 교회발전에 심혈을 기울이는 교회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온전한 "그리스도의 몸"으로 회복되어 많은 축복을 받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이를 매우 기뻐할 사람들은 여성일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에 남성의 권위와 지배력이 결핍되어 있다는 것은 어떤 점에서 가정에서의 결핍보다도 훨썬 더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남편을 집에 남겨두고 아이들만 데리고 교회예배에 참석하는 여자는 아마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여성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녀가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을 확립해 주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영적인 머리"를 아주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곳은 교회를 빼놓고는 아마 아무 데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자에게 큰 재능과 능력을 주셨습니다. 저들의 지성은 남성과 동등하며 저들의 능력과 정서적인 인내력은 종종 더 클 때도 있습니다. 주님 께서는 여자들이 저들의 능력을 감추거나 묻어두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주님은 저들을 사용하고 싶어 하십니다.
아내의 기본적인 책임은 자신과 자신의 시간과 자신의 정력을 남편과 자녀와 가정을 위해 바치는 일입니다. 이 말은 여자들이 책임있는 리더십을 가지고 하나님의 계획에 종사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여자들 을 특별히 존중하시는 것 같습니다. 저들은 십자가 밑에 마지막까지 머물러 있었습니다. 저들은 무덤을 먼저 찾아갔습니다. 예수님의 부활후에 먼저 모습을 나타내신 것은 막달라 마리아에게였습니다. 갓난아기 때의 모세의 생명을 구해준 사람은 미리암이었습니다. 여성으로 선지자와 사사로서의 이스라엘 백성을 통솔한 사람은 드보라였습니다. 백성을 죽음에서 구해낸 사람은 용기있는 왕비 에스더였습니다. 신약에도 역시 안나(과부)와 빌립의 딸들 (미혼)과 같은 여성 선지자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의 전도여행시에 일찍 개종하여 크리스챤이 된 루디아는 여성사업가였습니다. 그러나 "여성 중에서 가장 큰 축복을 받은 여자"곧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여자는 우리 주님의 어머니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하나님께서 그녀를 세우신 가정에서 아내와 어머니의 역할을 완전히 이행한 평범한 여자에 불과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