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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창제 姜昌濟 (1898 ~ 1965)】
"1926년 말 상하이(上海)일본총영사관 폭탄 투척 참여"
1898년 4월 7일 평안북도 창성군(昌城郡) 창성면(昌城面) 평로동(坪路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이명은 정명희(鄭明熙)·강동욱(姜東旭)·여순지(呂順之)·강창선(姜昌善)·강화조(姜華祖)·강홍주(姜弘周) 등이며, 호는 창산(蒼山)이다. 부친은 강시홍(姜時洪)이다. 1919년 고향에서 3·1운동에 참여한 이후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한국노병회 회헌(1922.10.28) [판형2] |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1922년 독립신문사(獨立新聞社) 기자로서 날카로운 필봉을 휘두르다가 1923년 3월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의 특별회원으로 참여하였다. 한국노병회는 김구·이유필·여운형 등 대한민국임시정부 관계자들과 신한청년당 당원들이 중심이 되어 1922년 10월 결성한 독립운동 단체다. 일제와 독립전쟁을 치르고자 향후 10년 이내에 1만 명의 노병(勞兵)과 100만 원 이상의 전쟁 비용을 조성할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1924년 7월 14일자로 대한민국임시정부 회계검사원(會計檢事院) 검사관에 임명되었다. 회계검사원은 임시정부의 일체 회계를 검사·확정하며 감독하는 기관으로 임시정부 대통령의 직할기관이었다. 그해 11월 의열단에 참여하여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 4월 28일에는 내무부 경무국 참사로 임명되었다. 경무국은 임시정부나 그 주변, 한인 사회, 독립운동 단체에 잠입해 있는 일제의 밀정이나 주구배 등을 색출해 처단하는 것을 주요 임무로 하였다. 이 시기에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곽헌(郭憲)·최석순(崔錫淳)·문일민(文逸民) 등 의원 10명의 공동명의로 임시대통령 이승만 탄핵안을 1925년 3월 13일 자로 제안하였다. 그 결과 이승만 임시대통령은 1925년 3월 23일 자로 면직되었고, 같은 날짜로 박은식이 임시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925년 6월 13일에는 정위단(正衛團) 결성식에 참여하여 고준택(高俊澤)과 함께 심판원에 선출되었다. 정위단은 임시정부 내무차장이던 나창헌 등 8명이 신민리(新民里) 임시정부 청사에서 결성한 경무국의 외곽 단체다.
1926년 1월 병인의용대 결성 모임에 참여하여 제3대장에 선임되었다. 병인의용대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실추된 권위를 회복하고, 임시정부나 그 주변의 독립운동 단체에 침입한 일제의 밀정 혹은 주구배를 색출하여 처단함으로써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의열 투쟁 단체다. 대원들은 20~30대의 평북 출신 청년들로, 의열 투쟁의 대상은 상하이 일본 총영사관이었으며, 3차례에 걸쳐 실행되었다.
1925년에는 임시정부 내무부의 참사 겸 경무국장(警務局長) 서리에 취임하여 임정의 강화와 통일정부 유지에 진력했고 노병회의 이사로도 활동했다. 1926년에는 나창헌, 고준택(高俊澤) 등 동지와 협의하고 중화(中貨) 5,000원을 조달하여 임시정부의 강화에 힘을 보탰다. 그리고 밀정 또는 일제의 부역배 등 숙청, 난동 분자 엄중 단속, 일제의 주요 시설 파괴, 요인 제거 등을 목적으로 동지들을 규합하여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를 조직하고 그 산하 단체로 정위단(正衛團)을 두어 그 총무 겸 심판원(審判員)을 맡았다. 또한 강창제는 병인의용대원 최병선, 김광산(金光山), 장진원 등과 함께 상해 홍구 해녕로에 자리잡고 있는 일본총영사관 내산판사처를 기습하여 내산(內山)과 그 주구인 최동윤(崔東允)을 공격해 최동윤을 부상시켰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장진원이 체포되자, 강창제는 김광산, 김창근(金昌根), 이성구 등과 함께 다시 출동하여 작전을 펼쳤지만 발각되자 수류탄을 던져 일본 경찰 1명에게 중상을 입히고 귀환했다. 그는 이에 그치지 않고 동지 이덕삼(李德三) 등을 시켜 일본의 고등계 형사 판사처를 기습하여 경찰 1명을 사살하기도 했다. 이듬해인 1927년, 강창제는 김창근, 이성구와 함께 시한 폭탄을 들고 일본영사관 창고를 대파, 타격을 주고 1명의 경찰에게 중상을 입힌 뒤 2명의 밀정을 총살했다. 1928년에는 장쑤성 전장시 경찰학교의 교관을 지냈고, 그해 7월에는 한인청년동맹회(韓人靑年同盟會)의 조사부원을 지냈다. 1929년에는 안창호, 이동녕, 김 구, 조소앙, 이시영 등이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조직할 때 실무진으로 참여했고, 그해 8월 25일 병인의용대 명의로 민족 유일당 운동을 훼방놓는 가로인(假露人: 가짜 러시아인. 한국 공산주의자를 가리킴)을 숙청, 박멸하자는 글을 발표했다.
이승만 탁핵 관련 보도(『신한민보』 1925.5.7) [판형4] |
또한, 병인의용대원 최병선·장진원(영환(英煥))·김광산 등과 같이 상하이 홍커우(虹口) 하이닝로(海寧路)에 자리 잡고 있는 일본 영사관 우치야마판사처(內山辦事處)를 기습 공격하여 우치야마(內山)와 그 주구인 최동윤(崔東允)을 격살하였다. 이때 기습으로 최병선이 다치고 동지 장진원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동지들을 구출하고자 대원 김광산·김창근·이성구 등과 함께 다시 출동하여 일본 경찰 1명에게 중상을 입히고 전원이 무사 귀대하였다. 그 이후에도 다시금 대원 동지 이덕삼 등을 시켜 일본의 고등계 형사 판사처를 야습하여 1명의 경찰을 사살하기도 하였다. 다음해인 1927년에는 동지 김창근·이성구와 같이 이지선(李枝善)이 제조한 시한폭탄을 들고 일본 총영사관 창고를 대파, 타격을 주고 1명의 경찰에게 중상을 입힌 뒤 2명의 밀정을 총살하였다.
1928년 장쑤성(江蘇省) 경찰학교의 교관을 지내고 같은 해 7월에는 한인청년동맹회(韓人靑年同盟會)의 조사부원을 지냈다. 1929년에는 안창호·이동녕·김구·조소앙·이시영 등 민족주의 세력이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조직할 때 실무진으로 참여하였다. 같은 해 8월 25일 병인의용대 명의로 가로인(假露人) 숙청호소문을 가두에 게시하였는데, 이는 유일당 운동의 성과가 기대 이하였기 때문이다.
1930년 1월 25일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이 창당될 때 창당 멤버로 참여하였다. 이어 프랑스정보학교에 들어가 교육을 받고 2년 뒤인 1932년에 상하이 둥난대학(東南大學)을 3년 중퇴한 뒤 장쑤성 정부 민정청(民政廳) 경무고문으로 초빙되어 일을 맡아보았다. 1933년 1월 15일에 개최된 ‘상하이한국독립당대회’에서 이사로 선출되었다. 1933년 6월에는 병인의용대의 부대장으로 선출되었다.
1934년 6월에는 한국독립당 난징(南京)지부의 위원으로 선임되어, 주 활동 지역을 상하이에서 난징으로 옮겼다. 1935년 2월 15일 항저우(杭州)에서 개최된 제7차 전당대표대회에 박창세와 함께 특별구 대표로 참여하였다. 이 대회에서 최석순과 함께 감사(監事)에 선임되었다. 제7차 전당대표대회는 1932년 10월 조직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에서 추진하고 있는 민족대당인 ‘민족혁명당’ 결성 대표대회에 한국독립당이 참여하느냐의 여부를 결정하는 회의였다. 이 회의에서 이사직을 사임하였고, 감사에 선임되었다.
1945년 2월 7일에 조직된 신한민주당의 주석단과 중앙집행위원의 명단 [판형2] |
1935년 7월 5일 난징에서 민족혁명당이 결성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 후보위원 5명 중의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결성 이후 당의 이념이나 독립운동 노선, 당권 주도권 등의 문제로 통합에 참여하였던 한국독립당과 조선혁명당의 일부 인사가 탈당해 한국독립당을 재건하자, 김두봉(金枓奉)과 함께 민족혁명당으로의 복당을 추진하였다.
1935년 9월 말 민족혁명당의 중앙대표 자격으로 광둥(廣東) 지방으로 파견되어 당원 강병학(康秉學) 등과 함께 당원 모집 등의 활동을 펼쳐 화남지부와 광둥구를 창설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7년 4월 지청천·최동오·유동열·김학규 등과 함께 민족혁명당에서 탈당하여 난징성 내 부자묘(夫子廟) 부근에서 조선혁명당을 결성하고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38년 5월 7일 창사(長沙)의 조선혁명당 본부에서 이운한(李雲漢)이 쏜 총에 맞아 현익철(玄益哲)이 사망하고, 김구·유동열(柳東說)이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되었으며, 지청천은 경상을 당한 ‘남목청사건(楠木廳事件)’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에 공모자로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석방 후 중국군사위원회 정보부 심사과장(審査課長)에 취임하였다. 1944년 3월 민족혁명당의 중앙집행위원에 이어 선전부 총무과장으로 선임되었다.
1945년 2월 7일, 충칭(重慶)에서 결성된 신한민주당(新韓民主黨)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중국군사위원회 다이리(戴笠) 장군이 한국인으로 의용군을 조직하여 인원을 초모하게 되면 중국군의 후방부대로 편성하여 훈련시킬 뿐 아니라 무장을 도와 참전케 해준다는 사실을 이연호로부터 보고받았다. 전방 인원 모집 책임자로 선정되어 중국군사위원회 시안 주재 한국 연락처장으로 활약하였다. 1945년 8월 광복이 되자 임시정부 요인과 함께 귀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1898년 4월 7일 평안북도 창성군(昌城郡) 창성면(昌城面) 평로동(坪路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이명은 정명희(鄭明熙)·강동욱(姜東旭)·여순지(呂順之)·강창선(姜昌善)·강화조(姜華祖)·강홍주(姜弘周) 등이며, 호는 창산(蒼山)이다. 부친은 강시홍(姜時洪)이다. 1919년 고향에서 3·1운동에 참여한 이후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한국노병회 회헌(1922.10.28) [판형2] |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1922년 독립신문사(獨立新聞社) 기자로서 날카로운 필봉을 휘두르다가 1923년 3월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의 특별회원으로 참여하였다. 한국노병회는 김구·이유필·여운형 등 대한민국임시정부 관계자들과 신한청년당 당원들이 중심이 되어 1922년 10월 결성한 독립운동 단체다. 일제와 독립전쟁을 치르고자 향후 10년 이내에 1만 명의 노병(勞兵)과 100만 원 이상의 전쟁 비용을 조성할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1924년 7월 14일자로 대한민국임시정부 회계검사원(會計檢事院) 검사관에 임명되었다. 회계검사원은 임시정부의 일체 회계를 검사·확정하며 감독하는 기관으로 임시정부 대통령의 직할기관이었다. 그해 11월 의열단에 참여하여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 4월 28일에는 내무부 경무국 참사로 임명되었다. 경무국은 임시정부나 그 주변, 한인 사회, 독립운동 단체에 잠입해 있는 일제의 밀정이나 주구배 등을 색출해 처단하는 것을 주요 임무로 하였다. 이 시기에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곽헌(郭憲)·최석순(崔錫淳)·문일민(文逸民) 등 의원 10명의 공동명의로 임시대통령 이승만 탄핵안을 1925년 3월 13일 자로 제안하였다. 그 결과 이승만 임시대통령은 1925년 3월 23일 자로 면직되었고, 같은 날짜로 박은식이 임시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925년 6월 13일에는 정위단(正衛團) 결성식에 참여하여 고준택(高俊澤)과 함께 심판원에 선출되었다. 정위단은 임시정부 내무차장이던 나창헌 등 8명이 신민리(新民里) 임시정부 청사에서 결성한 경무국의 외곽 단체다.
1926년 1월 병인의용대 결성 모임에 참여하여 제3대장에 선임되었다. 병인의용대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실추된 권위를 회복하고, 임시정부나 그 주변의 독립운동 단체에 침입한 일제의 밀정 혹은 주구배를 색출하여 처단함으로써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의열 투쟁 단체다. 대원들은 20~30대의 평북 출신 청년들로, 의열 투쟁의 대상은 상하이 일본 총영사관이었으며, 3차례에 걸쳐 실행되었다.
이승만 탁핵 관련 보도(『신한민보』 1925.5.7) [판형4] |
또한, 병인의용대원 최병선·장진원(영환(英煥))·김광산 등과 같이 상하이 홍커우(虹口) 하이닝로(海寧路)에 자리 잡고 있는 일본 영사관 우치야마판사처(內山辦事處)를 기습 공격하여 우치야마(內山)와 그 주구인 최동윤(崔東允)을 격살하였다. 이때 기습으로 최병선이 다치고 동지 장진원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동지들을 구출하고자 대원 김광산·김창근·이성구 등과 함께 다시 출동하여 일본 경찰 1명에게 중상을 입히고 전원이 무사 귀대하였다. 그 이후에도 다시금 대원 동지 이덕삼 등을 시켜 일본의 고등계 형사 판사처를 야습하여 1명의 경찰을 사살하기도 하였다. 다음해인 1927년에는 동지 김창근·이성구와 같이 이지선(李枝善)이 제조한 시한폭탄을 들고 일본 총영사관 창고를 대파, 타격을 주고 1명의 경찰에게 중상을 입힌 뒤 2명의 밀정을 총살하였다.
1928년 장쑤성(江蘇省) 경찰학교의 교관을 지내고 같은 해 7월에는 한인청년동맹회(韓人靑年同盟會)의 조사부원을 지냈다. 1929년에는 안창호·이동녕·김구·조소앙·이시영 등 민족주의 세력이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조직할 때 실무진으로 참여하였다. 같은 해 8월 25일 병인의용대 명의로 가로인(假露人) 숙청호소문을 가두에 게시하였는데, 이는 유일당 운동의 성과가 기대 이하였기 때문이다.
1930년 1월 25일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이 창당될 때 창당 멤버로 참여하였다. 이어 프랑스정보학교에 들어가 교육을 받고 2년 뒤인 1932년에 상하이 둥난대학(東南大學)을 3년 중퇴한 뒤 장쑤성 정부 민정청(民政廳) 경무고문으로 초빙되어 일을 맡아보았다. 1933년 1월 15일에 개최된 ‘상하이한국독립당대회’에서 이사로 선출되었다. 1933년 6월에는 병인의용대의 부대장으로 선출되었다.
1934년 6월에는 한국독립당 난징(南京)지부의 위원으로 선임되어, 주 활동 지역을 상하이에서 난징으로 옮겼다. 1935년 2월 15일 항저우(杭州)에서 개최된 제7차 전당대표대회에 박창세와 함께 특별구 대표로 참여하였다. 이 대회에서 최석순과 함께 감사(監事)에 선임되었다. 제7차 전당대표대회는 1932년 10월 조직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에서 추진하고 있는 민족대당인 ‘민족혁명당’ 결성 대표대회에 한국독립당이 참여하느냐의 여부를 결정하는 회의였다. 이 회의에서 이사직을 사임하였고, 감사에 선임되었다.
1945년 2월 7일에 조직된 신한민주당의 주석단과 중앙집행위원의 명단 [판형2] |
1935년 7월 5일 난징에서 민족혁명당이 결성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 후보위원 5명 중의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결성 이후 당의 이념이나 독립운동 노선, 당권 주도권 등의 문제로 통합에 참여하였던 한국독립당과 조선혁명당의 일부 인사가 탈당해 한국독립당을 재건하자, 김두봉(金枓奉)과 함께 민족혁명당으로의 복당을 추진하였다.
1935년 9월 말 민족혁명당의 중앙대표 자격으로 광둥(廣東) 지방으로 파견되어 당원 강병학(康秉學) 등과 함께 당원 모집 등의 활동을 펼쳐 화남지부와 광둥구를 창설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7년 4월 지청천·최동오·유동열·김학규 등과 함께 민족혁명당에서 탈당하여 난징성 내 부자묘(夫子廟) 부근에서 조선혁명당을 결성하고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38년 5월 7일 창사(長沙)의 조선혁명당 본부에서 이운한(李雲漢)이 쏜 총에 맞아 현익철(玄益哲)이 사망하고, 김구·유동열(柳東說)이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되었으며, 지청천은 경상을 당한 ‘남목청사건(楠木廳事件)’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에 공모자로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석방 후 중국군사위원회 정보부 심사과장(審査課長)에 취임하였다. 1944년 3월 민족혁명당의 중앙집행위원에 이어 선전부 총무과장으로 선임되었다.
1945년 2월 7일, 충칭(重慶)에서 결성된 신한민주당(新韓民主黨)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중국군사위원회 다이리(戴笠) 장군이 한국인으로 의용군을 조직하여 인원을 초모하게 되면 중국군의 후방부대로 편성하여 훈련시킬 뿐 아니라 무장을 도와 참전케 해준다는 사실을 이연호로부터 보고받았다. 전방 인원 모집 책임자로 선정되어 중국군사위원회 시안 주재 한국 연락처장으로 활약하였다. 1945년 8월 광복이 되자 임시정부 요인과 함께 귀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1898년 4월 7일 평안북도 창성군(昌城郡) 창성면(昌城面) 평로동(坪路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이명은 정명희(鄭明熙)·강동욱(姜東旭)·여순지(呂順之)·강창선(姜昌善)·강화조(姜華祖)·강홍주(姜弘周) 등이며, 호는 창산(蒼山)이다. 부친은 강시홍(姜時洪)이다. 1919년 고향에서 3·1운동에 참여한 이후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한국노병회 회헌(1922.10.28) [판형2] |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1922년 독립신문사(獨立新聞社) 기자로서 날카로운 필봉을 휘두르다가 1923년 3월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의 특별회원으로 참여하였다. 한국노병회는 김구·이유필·여운형 등 대한민국임시정부 관계자들과 신한청년당 당원들이 중심이 되어 1922년 10월 결성한 독립운동 단체다. 일제와 독립전쟁을 치르고자 향후 10년 이내에 1만 명의 노병(勞兵)과 100만 원 이상의 전쟁 비용을 조성할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1924년 7월 14일자로 대한민국임시정부 회계검사원(會計檢事院) 검사관에 임명되었다. 회계검사원은 임시정부의 일체 회계를 검사·확정하며 감독하는 기관으로 임시정부 대통령의 직할기관이었다. 그해 11월 의열단에 참여하여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 4월 28일에는 내무부 경무국 참사로 임명되었다. 경무국은 임시정부나 그 주변, 한인 사회, 독립운동 단체에 잠입해 있는 일제의 밀정이나 주구배 등을 색출해 처단하는 것을 주요 임무로 하였다. 이 시기에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곽헌(郭憲)·최석순(崔錫淳)·문일민(文逸民) 등 의원 10명의 공동명의로 임시대통령 이승만 탄핵안을 1925년 3월 13일 자로 제안하였다. 그 결과 이승만 임시대통령은 1925년 3월 23일 자로 면직되었고, 같은 날짜로 박은식이 임시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925년 6월 13일에는 정위단(正衛團) 결성식에 참여하여 고준택(高俊澤)과 함께 심판원에 선출되었다. 정위단은 임시정부 내무차장이던 나창헌 등 8명이 신민리(新民里) 임시정부 청사에서 결성한 경무국의 외곽 단체다.
1926년 1월 병인의용대 결성 모임에 참여하여 제3대장에 선임되었다. 병인의용대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실추된 권위를 회복하고, 임시정부나 그 주변의 독립운동 단체에 침입한 일제의 밀정 혹은 주구배를 색출하여 처단함으로써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의열 투쟁 단체다. 대원들은 20~30대의 평북 출신 청년들로, 의열 투쟁의 대상은 상하이 일본 총영사관이었으며, 3차례에 걸쳐 실행되었다.
이승만 탁핵 관련 보도(『신한민보』 1925.5.7) [판형4] |
또한, 병인의용대원 최병선·장진원(영환(英煥))·김광산 등과 같이 상하이 홍커우(虹口) 하이닝로(海寧路)에 자리 잡고 있는 일본 영사관 우치야마판사처(內山辦事處)를 기습 공격하여 우치야마(內山)와 그 주구인 최동윤(崔東允)을 격살하였다. 이때 기습으로 최병선이 다치고 동지 장진원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동지들을 구출하고자 대원 김광산·김창근·이성구 등과 함께 다시 출동하여 일본 경찰 1명에게 중상을 입히고 전원이 무사 귀대하였다. 그 이후에도 다시금 대원 동지 이덕삼 등을 시켜 일본의 고등계 형사 판사처를 야습하여 1명의 경찰을 사살하기도 하였다. 다음해인 1927년에는 동지 김창근·이성구와 같이 이지선(李枝善)이 제조한 시한폭탄을 들고 일본 총영사관 창고를 대파, 타격을 주고 1명의 경찰에게 중상을 입힌 뒤 2명의 밀정을 총살하였다.
1928년 장쑤성(江蘇省) 경찰학교의 교관을 지내고 같은 해 7월에는 한인청년동맹회(韓人靑年同盟會)의 조사부원을 지냈다. 1929년에는 안창호·이동녕·김구·조소앙·이시영 등 민족주의 세력이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조직할 때 실무진으로 참여하였다. 같은 해 8월 25일 병인의용대 명의로 가로인(假露人) 숙청호소문을 가두에 게시하였는데, 이는 유일당 운동의 성과가 기대 이하였기 때문이다.
1930년 1월 25일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이 창당될 때 창당 멤버로 참여하였다. 이어 프랑스정보학교에 들어가 교육을 받고 2년 뒤인 1932년에 상하이 둥난대학(東南大學)을 3년 중퇴한 뒤 장쑤성 정부 민정청(民政廳) 경무고문으로 초빙되어 일을 맡아보았다. 1933년 1월 15일에 개최된 ‘상하이한국독립당대회’에서 이사로 선출되었다. 1933년 6월에는 병인의용대의 부대장으로 선출되었다.
1934년 6월에는 한국독립당 난징(南京)지부의 위원으로 선임되어, 주 활동 지역을 상하이에서 난징으로 옮겼다. 1935년 2월 15일 항저우(杭州)에서 개최된 제7차 전당대표대회에 박창세와 함께 특별구 대표로 참여하였다. 이 대회에서 최석순과 함께 감사(監事)에 선임되었다. 제7차 전당대표대회는 1932년 10월 조직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에서 추진하고 있는 민족대당인 ‘민족혁명당’ 결성 대표대회에 한국독립당이 참여하느냐의 여부를 결정하는 회의였다. 이 회의에서 이사직을 사임하였고, 감사에 선임되었다.
1945년 2월 7일에 조직된 신한민주당의 주석단과 중앙집행위원의 명단 [판형2] |
1935년 7월 5일 난징에서 민족혁명당이 결성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 후보위원 5명 중의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결성 이후 당의 이념이나 독립운동 노선, 당권 주도권 등의 문제로 통합에 참여하였던 한국독립당과 조선혁명당의 일부 인사가 탈당해 한국독립당을 재건하자, 김두봉(金枓奉)과 함께 민족혁명당으로의 복당을 추진하였다.
1935년 9월 말 민족혁명당의 중앙대표 자격으로 광둥(廣東) 지방으로 파견되어 당원 강병학(康秉學) 등과 함께 당원 모집 등의 활동을 펼쳐 화남지부와 광둥구를 창설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7년 4월 지청천·최동오·유동열·김학규 등과 함께 민족혁명당에서 탈당하여 난징성 내 부자묘(夫子廟) 부근에서 조선혁명당을 결성하고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38년 5월 7일 창사(長沙)의 조선혁명당 본부에서 이운한(李雲漢)이 쏜 총에 맞아 현익철(玄益哲)이 사망하고, 김구·유동열(柳東說)이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되었으며, 지청천은 경상을 당한 ‘남목청사건(楠木廳事件)’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에 공모자로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석방 후 중국군사위원회 정보부 심사과장(審査課長)에 취임하였다. 1944년 3월 민족혁명당의 중앙집행위원에 이어 선전부 총무과장으로 선임되었다.
1945년 2월 7일, 충칭(重慶)에서 결성된 신한민주당(新韓民主黨)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중국군사위원회 다이리(戴笠) 장군이 한국인으로 의용군을 조직하여 인원을 초모하게 되면 중국군의 후방부대로 편성하여 훈련시킬 뿐 아니라 무장을 도와 참전케 해준다는 사실을 이연호로부터 보고받았다. 전방 인원 모집 책임자로 선정되어 중국군사위원회 시안 주재 한국 연락처장으로 활약하였다. 1945년 8월 광복이 되자 임시정부 요인과 함께 귀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