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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 읍성 김 현 옥
시간이 멈춰 버린듯한 성벽과 크고 작게 쌓인 돌들 저마다의 지나온 역사와 조선시대 선조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인 해미읍성은 바다가 아름답다는 해미(海美)또는 적들의 접근을 어렵게 하기 위해서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를 섬 주변에 둘러 심었기 떄문에 탱자성이라고도 했다.
1416년 태종때 서산 도비 산에서 조선시대 왕의 친림 하에 거행 된 군사훈련을 겸한 수렵대회인 강무를 하다가 해미에서 하루를 머물면서 주변지역을 둘러보게 되었는데 당시 해안지방에 출몰하는 왜구를 효과적으로 방어하기에 적당한 장소라고 판단하여 덕산에 있던 충청병영을 이설하기 위한 대상지로 정해 1417년 (태종17년)에 시작하여 1421년(세종3년)축성을 완료했다.
읍성(邑城)은 지방의 관청과 사람들이 사는 곳을 둘러쌓은 섬으로 읍이라는 말은 성으로 둘러 쌓인 마을을 의미하며 읍성은 평상시에는 행정 중심지로 비상시에는 방어기지가 되었다.
해미읍성은 조선시대 읍성 중 가장 잘 보존 된 평성으로 조선 초 병영성으로 축조 되었으며 해미는 충정지역 육군의 최고 지휘기관인 충청병영이 위치하며 병마절도사가 배치되어 육군을 총 지휘하였고 1651년 청주로 이전하여 충청 병마절도사의 병영성으로서의 역할이 끝나게 되었으며 이후 충청도 5진영 중에 하나인 호서좌영이 들어서게 되고 영장(營張)으로 파견해 호서이성의좌영장과 해미현감을 겸직하게 되면서 읍성의(邑城)역활을 하게 되었다.
해미읍성에는 객관으로 지방을 여행하는 관리나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었으며 조례에 참석하지 못하는 지방 관리들은 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객사에 모시고 초하루와 보름에 왕궁을 향해 절을 올리는 망궐례를 행하는 객사와 동헌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방관과 그의 가족들이 거주하던 생활 처소인 내아가 위치하고 있다.
해미읍성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읍성의 하나로 가장 완벽한 형태의 성곽을 자랑하는 읍성으로 성 안쪽을 향해 4~5단 정도의 계단식 석축을 쌓고 그 위를 흙으로 덮어 경사지게 하여 성 내벽을 만들었고 다듬은 성 돌로 수직이 되게 성 외벽을 쌓았으며 성 외벽을 살펴보면 공주, 청주, 임천등의 각 고을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고을별로 일정구간의 성벽을 나누어 쌓으면서 그 구간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하여 부실공사를 막는 공사 책임제의 증거로 보이고 있는 각자석과 읍성의 남쪽으로 통하는 성의 정문으로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성 안쪽의 문루 아래를 가로지른 받침돌 중앙에는 황명홍치사년신해조(皇眀弘治四年辛該趙)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황명홍치는 명나라 효종의 연호인 홍치를 의미하는1491년 (성종22년)중수된 진남문과 1790년부터 100여 년간 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규정하여 투옥했었던“해미순교자약사”를 토대로 복원한 옥사와 “맑고 욕심 없이 다스리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곳으로 병사들의 휴식을 취하거나 활을 쏘며 무예를 익히고 문객들은 시를 짓고 글을 남겼던 청허정
(淸虛亭)이 있으며 현재 읍성 북쪽에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밖을 둘러 파서 만든 것으로
읍성전체를 둘러싸고 있었던 석축해자는 복원되어있다.
한국관광100선 (2015년~2018년) 야간관광 100선 (2020년)에 선정된 해미읍성은 매년10월 서산시 대표축제인 서산 해미읍성 축제가 개최되고 있으며 충남 서산해미읍성 축제가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와 한국관광공사에서 추진하는 K-컬처 관광이벤트는 ‘2023~ 2024 한국방문의 해’동안 외국인 관광객들이 문화, 예술, 콘텐츠 등 다양한 분야의 매력적인 K-컬처를 즐길 수 있도록 민간 전문가의 추천을 받아 1차 요건의 부합여부와 2차 최종 심의위원회를 거쳐 선정되었으며 K-컬처 관광이벤트 100선을 해외 주요 도시에서 열리는 ‘K-로드쇼’와 연계해 체험행사를 개최하고, 현지 여행업계와 공동으로 방한 상품 개발, 누리집을 통한 다국어 서비스 지원, 관광객 환영 캠페인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예정이며 서산 해미읍성 축제는 2000년부터 시작됐으며, 문체부 지정 7년(2013년~2019년) 연속 유망축제를 거쳐 문화관광 축제(2020년~2022년)로 선정되는 등 대한민국 대표 축제로 발전해왔으며 축성 600년의 역사를 지닌 해미읍성은 조선시대 해미 지역뿐만 아니라 공주, 부여, 서천, 청주 등 충청권 도민이 힘을 모아 함께 쌓아 올린 충청도 공동의 문화유산이다.
사적: 제116호
규모: 성곽길이 1,500m.
높이: 5m
성내면적 : 196,381 제곱미터
위치: 서산시 해미면 남문 2로 143 <참고 : 서산시청 홈페이지>
해 미 순 교 성 지 김 현 옥
천주교와 해미읍성
천주교는 천주를 믿는 종교라는 뜻으로 가톨릭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에는 약 200여년전 조선후기에 전래되어 초기에는 서학이라는 학문의 일종으로 연구되었으나 후에 종교화 되면서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었으며1790년대 정조 때부터 시작된 천주교 박해는 병인양요(1866년 흥선대원군의 천주교도 학살 탄압에 대항하여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침입한 사건)와 1868년 오페르트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 묘를 도굴한 사건 이후 더욱 극심해지며 이때 해미진영의 겸영장은 내포지방 13개 군현의 군사권을 쥐고 있었으므로 해당 지역의 교도들을 모두 잡아들여 해미읍성에서 처형하였는데 그 수가 무려 1,000여명 이상이었다고 전해지며 순교자들을 고문하고 처형했던 해미 읍성에는 교우들이 갇혀 있던 감옥 터가 있고 그 옆에는 고문대로 쓰던 회화나무가 남아 있는데 일명 호야나무라고 불리며 충청남도 지정기념물 제172호로 수령이 300년 이상 추정되는 나무로 1866년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을 이 나무에 매달아 고문했다고 전해지며 서문 밖 순교지에는 1956년에 서산 성당으로 이전 보존되었던 자리개 돌다리가 1986년에 원위치를 찾아 보존되다가 2009년 1월에 여숫골에 옮겨 보존하고 있다.
1935년에는 서산 본당 범 베드로 신부에 의해 순교자들의 유해와 유품들이 발굴돼 30리 밖 상홍리 공소에 임시 안장돼 있었는데 최근 1995년 순교자대축일에 원래의 순교 터인 생매장 순교지 순교탑 앞으로 이장하였다.
해미성지
교회법전이 말하는 성지의 종류는 세 가지다.
첫째 교구장이 승인하는 교구 성지
둘째 주교회의가 승인하는 국가 성지
셋째 교황청이 승인하는 국제 성지로 2020년 11월 29일 대림 제1주일에 ‘해미순교성지’가 교황청이 승인한 국제 성지로 선포되었으며 국제성지가 되었고 2018년 9월 14일 서울대교구의 순례길이 교황청 승인 국제순례지로 선포된 바 있다.
성지역사적인 장소 3곳 성모 발현지 20곳 성인관련 순례자 5곳이 이미 국제성지로 선포가 된 곳으로 해미 성지는 다른 어떤 순교지보다도 당시 참혹했던 핍박의 흔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곳으로 1백 년의 박해 기간 동안 단 한 차례도 그 서슬이 무뎌지지 않았던 수천 명의 이름 모를 순교자들이 웅덩이와 구덩이로 내몰린 채 생매장 당한 기막힌 사연을 갖고 있으며 박해 기간 동안 해미 진영에 있었던 두 채의 큰 감옥은 잡혀 온 교우들로 가득했고 그들은 매일 서문 밖으로 끌려 나와 교수형참수, 몰매질, 석형, 백지사형, 동사형 등으로 죽어 갔으며 또 더욱 잔인하게 돌다리 위에서 팔다리를 잡고 들어서 돌에 메어치
는 자리개질이 고안되기도 했고 여러명을 눕혀 두고 돌기둥을 떨어뜨려 한꺼번에 죽이기
도 했으며 혹시라도 숨이 끊어지지 않아 꿈틀거리는 몸뚱이를 발견하면 횃불로 눈을 지지
기도 했다고 하며 해미 진영의 서문 밖은 항상 천주학쟁이들의 시체로 산을 이루고 그 피로 내를 이루었다고 전해졌으며 한 명씩 처형하는 데 지친 관헌들에 의해 해미천 좌우 주변에서 1866년부터 1872년 사이에 신자들이 생매장을 당하였으며 이순교자들의 유해는 대부분 홍수로 유실이 되고 1935년에 그 일부를 발굴하였다.
해미성지는 한국에서 유일하게 생매장 순교 터와 그 순교자의 유해가 확인 발굴되고 보존되어 왔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2015년12월 8일에 원죄없이 잉태되신 동정녀 마리아대축일부터 2016년11월20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 까지를 자비의 특별희년으로 선포 대전교구 김종수아우그스티노 주교님은 12월3일 해미성지를 방문 자비의문 개문행사를 하셨다.
해미성지 건축
해미성지의 성전 건축의 기본 의미는 순교자들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되는 것이기 때문에 순교로써 그분들의 영원한 안식 편히 쉬고 계심을 나타내고자 했으며 또한 생매장 구덩이 근처에 건립하기 때문에 구덩이를 상징하는 원형의 성전을 중심으로 많은 유해를 모시고 있어 신자들이 유해 참배를 할 수 있도록 유해 참배실을 곁에 건립하도록 하여 생매장 구덩이를 상징하는 원형이며 순교자들이 생매장을 당하시어 천국복락을 누리시게 됨을 나타내기 위해 편히 쉼의 가장 좋은 장소를 나타내기 위해 고가 형태의 내부 디자인을 하였으며 제대 뒷벽은 불에 구운 도자기 조각으로 모자이크를 하여 수 많은 무명 순교자들을 나타내고 있는 대성당과 대성당을 축소한 형태의 소성당은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 주님을 바라보며 순교자들을 본받아 기쁨의 삶을 살아가도록 천정의 십자가와 함께 밝은 톤의 문창살로 벽을 꾸며 환한 집 안을 나타내고 있으며 팔각의 탑은 종탑이 아니며 세상 끝날 때 까지 교회와 함께 하시면서 지켜주고 계시는 주님 진복팔단을 말씀하신 주님을 상징하는 팔각 모양의 탑으로 파수대를 표현하고 있으며 이는 교회를 상징하는 대성전과 다리(브리지)로 연결되어 있으며 유해 발굴실은 발굴된 유해가 성홍리 공소 쪽에 모셔져 있다가 유해는 순교탑에 모시고 부식되지 않은 치아와 유골은 눈으로 직접 뵙고 참배할 수 있도록 아크릴 진공 포장해 따로 모셨으며 전체적으로 성전동은 12사도를 기초를 삼아 교회가 세워졌듯이 12기둥에 새겨진 은인들의 힘으로 이성전이 세워졌음을 나타내고 있으며 교회를 천주님이 함께하며 지켜주심을 과거와 현재 미래를 통해 나타내고 있으며 해미 성지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성지는 한티 고개이며 이 고개는 당시 죽음의 길로 악명 높던 순교자들의 압송로로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에도 그 기록이 나온다.
해미읍성의 역사적배경
1801년 신유박해 이전 해미에서는 인언민(마르티노)과 이보현(프란치스코)이 순교하였고 1811~1839년의 기해박해 이전에는 김진후(비오)가 1814년에 옥사한 것을 비롯하여 모두 8명이 순교하였다. 또 1866년 이후의 병인박해 때에는 122명에 이르는 순교자가 이곳에서 탄생하였으며 해미의 유명 순교자는 모두 132명에 이르는데 여기에 무명 순교자 47명 이상의 수를 더하면 기록으로 확인되는 박해기의 순교자 총수는 179명 이상이 된다.
해미에서 순교자들의 순교 형식은 교회 순교록을 통해서만 67명이 확인되는데 그 중에서 교수형이 33명으로 가장 많았으며 참수와 옥사가 각각 5명, 병사가 4명, 생매장이 3명, 장사가 3명, 미상이 14명으로 나타나며 해미읍성 안의 진영 동헌 앞은 순교자들이 갖은 문초와 형벌 속에서도 신앙을 증거한 장소가 되며 읍성의 옥은 신앙 증거 장소요 중요한 순교의 터가 된다.
서문 밖의 교수형(혹은 참수형) 터와 문 마리아, 박 요한, 방 마리아 등이 생매장으로 순교한 조산리의 생매장(교수형 포함) 터도 교회사는 물론 지역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해미는 한국에서 유일하게 생매장 순교 터와 그 순교자의 유해가 확인 발굴되고 보존되어 왔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1801년(순조1)신유박해 (신유사옥)
1801년(순조 1) 천주교도를 박해한 사건. 신유사옥(辛酉邪獄)이라고도 한다.
중국에서 들어온 천주교는 당시 성리학적 지배원리의 한계성을 깨닫고 새로운 원리를 추구한 일부 진보적 사상가와, 부패하고 무기력한 봉건 지배체제에 반발한 민중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면서, 18세기 말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특히 1794년 청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국내에 들어오고 천주교도에 대한 정조의 관대한 정책은 교세 확대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가부장적 권위와 유교적 의례 ·의식을 거부하는 천주교의 확대는 유교사회 일반에 대한 도전이자 지배체제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었다.
정조가 죽고 이른바 세도 정권기에 들어서면서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되었다. 1801년 정월 나이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게 된 정순대비(貞純大妃)는 사교(邪敎) ·서교(西敎)를 엄금 ·근절하라는 금압령을 내렸다.
이 박해로 이승훈·이가환·정약용 등 천주교도와 진보적 사상가가 처형 또는 유배되고, 주문모를 비롯한 교도 약 100명이 처형되고 약 400명이 유배되었다. 이 신유박해는 급격히 확대된 천주교세에 위협을 느낀 지배세력의 종교탄압이자 또한 이를 구실로 노론(老論) 등 집권 보수세력이 당시 정치적 반대세력인 남인을 비롯한 진보적 사상가와 정치세력을 탄압한 권력다툼의 일환이었다.
1839년 기해박해 (기해사옥)
1839년(헌종5)에 일어난 제2차 천주교 박해사건으로 기해사옥(己亥邪獄)이라고도 한다.
이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천주교를 박해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실제에서는 시파(時派)인 안동김씨로 부터 권력을 탈취하려는 벽파(僻派) 풍양조씨가 일으킨 것으로 1834년(헌종 즉위년) 헌종이 8세에 즉위하자 순조의 비(妃)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수렴 청정하였으며, 왕대비를 적극 보필한 사람은 오빠 김유근(金?根)으로 1836년부터 병으로 말조차 못하던 그는 1839년 유진길(劉進吉)의 권유를 받고 세례까지 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동김씨의 천주교에 대한 태도는 관용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김유근의 은퇴로 천주교를 적대시하던 우의정 이지연(李止淵)이 정권을 잡으면서 상황은 변하였고 형조판서 조병현(趙秉鉉)으로부터 그 동안의 천주교 전파 상황을 보고받은 그는 1839년 3월 입궐하여 천주교인은 무부무군(無父無君)으로 역적이니 근절하여야 한다는 천주교에 대한 대책을 상소하였고 이어 사헌부집의 정기화(鄭琦和)도 천주교의 근절을 위하여 그 원흉을 잡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따라 포도청에서 형조로 이송된 천주교인은 43명이었으며 그 중 대부분이 배교하여 석방되었으나 남명혁(南明赫)·박희순(朴喜順) 등 9명은 끝내 불복 사형되었다.
5월 25일에는 대왕대비의 척사윤음(斥邪綸音)이 내렸으며 천주교 박해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며 이때 정하상(丁夏祥)·유진길·조신철(趙信喆) 등 중요인물이 붙잡혔으며 당시 주교 앵베르는 교인이 고초 받는 것을 막기 위하여 모방과 샤스탕에게도 자현(自現)할 것을 권고한 쪽지를 보내고 자현함으로써 조선 교회 재건운동은 큰 타격을 입었으며 이때 정하상은 척사윤음에 대하여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올려 천주교를 변호하였다.
조정에서는 6월에는 이광열(李光烈) 이하 8명을 8월에는 앵베르·모방과 샤스탕을 군문효수(軍門梟首)하고 정하상과 유진길도 참형에 처하였으며 이때 피해를 입은 교도수는 《헌종실록》에 따르면 배교하여 석방된 자가 48명 옥사한 자 1명 사형된 자가 18명 등이었다.
그러나 현석문(玄錫文)이 쓴 《기해일기》에 따르면 참수된 자가 54명 교수형 장하(杖下)에 죽은 자와 병사한 자가 60여 명으로 이 사건으로 세도가문은 안동김씨에서 풍양조씨 가문으로 옮겨졌다.
1866년(고종1)병인박해 (병인양요)
조선 후기 대원군이 가톨릭 교도를 대량 학살한 사건의 원인(遠因)은 당시 시베리아를 건너온 러시아의 남하(南下) 정책에서 비롯되었으며 1864년(고종 1)러시아인이 함경도 경흥부(慶興府)에 와서 통상하기를 요구하였을 때 대원군 이하 정부요인들의 놀람과 당황은 대단하였으나 이에 대한 대책은 속수무책이었다. 이때 조선에 와 있던 몇몇 가톨릭 교도들은 대원군에게 건의하기를 한·불·영 3국동맹을 체결하게 되면 나폴레옹 3세의 위력으로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을 수 있다 하여 대원군으로부터 프랑스 선교사를 만나게 해달라는 요청이 있었으나 이들은 그 시기를 놓치고 당시 포교하고 있던 다블뤼 주교와 베르뇌 주교가 서울에 돌아왔을 때는 조정에서 이미 러시아인의 월경과 통상요구가 시일이 경과하여 한낱 기우(杞憂)에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하였을 때였으며 그리하여 3국동맹이 체결되면 포교의 자유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선교사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오히려 그들은 지둔(遲鈍)과 무책임한 주선(周旋)의 발설로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가톨릭교를 서학(西學)·사학(邪學)이라 하여 배척하던 당시 "운현궁(雲峴宮)에도 천주학(天主學)쟁이가 출입한다"는 소문이 퍼졌고 조대비(趙大妃) 이하 정부 대관들이 가톨릭 교도의 책동을 비난하자 대원군은 가톨릭 교도를 탄압하기로 결심하여1866년 가톨릭교 탄압의 교령(敎令)이
포고되자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이 학살당한 것을 필두로 불과 수개월 사이에 국내
신도 8,000여 명이 학살되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아직도 체포되지 않은 3명의 프랑스 신부의 행방을 찾고 있었고 이 사건으로 산속에 피신하여 쫒겨 다니다가 병으로 죽고 굶주려 죽는 부녀자와 어린이가 부지기수였으며 이때 탈출에 성공한 리델 신부가 톈진[天津]에 있는 프랑스 해군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이 사실을 알림으로써 병인양요가 일어나게 되었다.
* 해미국제성지는 독특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명한 성인이 있거나 특별한 기적이 있었던 것도 아니며 기록으로 이름이나 행적을 남긴 분들도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해미는 기록을 남기지 못했지만 1000명이 넘는 분으로 추정되는 많은 순교자들의 체취와 흔적이 남아있는 곳으로 비록 가난했지만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하느님 안에서 기쁘게 살다가 기꺼이 죽음까지 맞이하고 묻힌 곳이 무명 순교자들의 고향인 해미국제성지입니다.
그래서 이곳은 슬픈 역사의 땅이라기보다 기쁨과 생명의 현재를 묵상하는 곳이라 할 수 있으며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비참하게 생매장까지 당했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는 그 누구보다 빛나는 이름을 받았을 무명 순교자들을 가톨릭교회가 신앙의 모범으로 인정하고, 자랑스럽게 전 세계에 알린 영광스러운 사건이 ‘해미 국제 성지로 성지(순례지)는 많은 신자들이 교구 직권자의 승인 아래 특별한 신심 때문에 빈번히 순례하는 성당이나 그 밖의 거룩한 장소를 뜻한다(제 1230조)
(참고: 해미국제성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