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다서(茶書) 3 – 이덕리(李德履. 1728-1795)의 『동다기(東茶記 1783년경)』 = 『기다’(記茶)』
한국의 다서(茶書), 세 번째로 살펴 볼 다서는 ‘이덕리(李德履)의 『동다기(東茶記)』’입니다. 이덕리(李德履)의 『동다기(東茶記)』는 한국은 물론이고 여타 다른 나라의 여러 다서들과 다른 특이한 점이 있기에 언급해 봅니다.
1776년 정조께서 즉위한 후,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선포를 합니다. 이러한 선포에 다시 사도세자의 죽음에 앞장섰던 노론파 신하들은 공포에 떨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조는 ‘하지만 추승(追崇-사후(死後)에 관위官位나 존호尊號를 올림) 하자든지, 사도세자의 죽음에 앞장 선 자들을 처벌하자든지 하면 대역죄로 책임을 물을 것이다’고 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화합하자는 점도 있겠지만, 당시 큰 세력을 갖추고 있는 노론의 눈치를 본 면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정조의 명이 본심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짐작했는지 모르지만, 이덕사(李德師)는 조재한(趙載翰), 박상로(朴相老) 등과 함께 장헌세자(莊獻世子-사도세자)를 위한 상소를 올렸고, 결국 참형에 처하게 됩니다.
동다기를 저술한 이덕리는 바로 이덕사의 친동생으로, 이 일로 인하여 진도로 유배되어 19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게 됩니다. 동다기(원 제목 = 기다記茶)는 이 때 저술한 책으로, 특이한 점은 차 무역에 대한 다서(茶書)라는데 의의가 있습니다.
동다기가 수록된 이덕리의 '강심'
이덕리는 무인집안의 출신으로 진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국방에 관련된 책을 씁니다. 그 책이 '상두지(桑土志)'입니다. 네이버 책 소개란에 상두지에 대해 이렇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상두지》는 근대 이전 조선의 국방 시스템과 안보 인프라를 구체적으로 설계한 보기 드문 실학적 저작이다. 두 차례의 왜란과 두 차례의 호란이 끝나고 전란 없이 지낸 지 약 200년, 당쟁에만 골몰한 조정과 안일에 빠진 벼슬아치들을 대신해 불운한 실학자 이덕리가 절박한 충심으로 국가에 닥쳐올 전란을 대비한다. 이덕리는 국제적인 차(茶) 무역을 통한 군비 재원 마련부터 둔전 조성, 병력수급, 방어 시설 건설, 군사 전략·전술, 무기 제조법과 사용법까지 조선을 수호할 다채로운 제도와 방책을 《상두지》 한 권에 짜임새 있게 정리했다. 다산 정약용이 감복하여 자신의 저술에 인용했을 정도로 《상두지》는 치밀한 통찰과 기발한 상상, 폭넓은 원용을 자랑한다.”
조선 초에는 기병 중심의 여진족이 주적이었다면, 임진왜란 때에는 조총을 앞세운 왜군이 주적이었기에 거기에 맞는 군제와 잔략이 필요했다면, 또 다시 병자호란으로 인하여 명나라가 철기를 앞세운 후금의 청나라에게 멸망했으니 거기에 맞춰서 군제와 전술을 바꿔야한다는 생각에 그 방법을 연구하고 저술한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군비 확충과 변화를 위한 재원마련으로, 당시 중국에서 고가로 거래되는 차를 만들어서 무역을 하면 군비를 충분히 마련할 수 있다고 방안을 제시한 것이 ’동다기(東茶記)’입니다.
그렇지만 동다기의 내용이 차 무역에 관한 내용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남과 호남에 좋은 차나무들이 많고, 이러한 차들은 중국에서 고가에 거래되고 있다는 등의 서문성격의 글을 기록한 ‘다설(茶說) 5항목, 차에 대한 여러 가지 설명과 효능등을 기록한 본문격인 ’다사(茶事) 14항목, 그리고 차 무역의 구체적 실행 계획을 정리한 ‘다조(茶條)’ 7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이 얼마나 알찬지 초의선사도 ‘동다송’에서 인용했을 뿐만 아니라, 다산 정약용님도 세 차례에 걸쳐서 소개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 내용이 방대하여 여기에 다 설명드릴 수 없지만, 네이버 지식백과에 있는 내용 중에서 ‘다사’의 몇 가지를 추려 소개해 봅니다.
동다기 내용
* 차에는 일창(一槍)과 일기(一旗)의 구별이 있다. 잎의 크기만 가지고 따질 수는 없다. 일창은 처음 싹터 나온 한 가지이고 일기는 한 가지에 달린 잎을 말한다. 그 뒤에 가지 위에 다시 가지가 나면 그 잎은 못 쓴다.
* 옥천자(玉川子) 노동(盧仝)의 칠완다가(七椀茶歌)는 엽차를 노래한 것이다. 떡차는 맛과 향이 좋을 뿐이니 중국의 방법을 본떠 만들 필요가 없다.
* 떡차는 향약을 넣어 절구에 빻아 물에 넣고 끓인 것이다. 중국차는 다른 것으로 가미하지 않았다. 차에 꿀을 타서 마시는 경우도 있는데 촌티를 벗지 못한 것이다.
* 우리나라 차는 색과 향, 기운과 맛에서 중국 것과 조금도 차이가 없다. 중국의 육우나 이찬황 같은 사람도 내 말을 인정할 것이다.
* 냉차를 마시면 가래가 끓는다. 하지만 표류해 온 사람들과 역관 서종망(徐宗望)의 경우를 보면 뜨거운 음식을 먹은 뒤에는 냉차를 마셔도 문제가 없는 듯하다.
* 차는 잠을 적게 하므로 공부하는 사람이나 길쌈하는 아낙, 또 선정(禪定)에 든 승려네들에게 꼭 필요하다.
* 차는 산 속 바위 많은 곳에서 난다. 대숲 사이에서 나는 차가 특히 좋다. 해가 들지 않아 대숲의 차는 늦게까지 딸 수 있다.
* 동복(同福)은 작은 고을인데, 한 원님이 여덟 말의 작설을 따서 이를 달여 고약으로 만들려 한 일이 있다. 이 엄청난 양을 따서 차로 만들면 수천 근은 될 테고, 이것을 따는 노력으로 수천 근의 차를 찌고 덖을 수도 있는데, 나라에 보탬이 되도록 쓸 줄 모르니 안타깝기 짝이 없다.
[출처] 한국의 다서(茶書) 3 – 이덕리(李德履. 1728-1795) 『동다기(東茶記 1783년경)』 = 『기다’(記茶)』 (보이창꼬 (보이차 상식, 문화, 정보, 친목)) | 작성자 청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