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빠진 사기그릇과 최소한의 예의
처음 스테인리스 밥공기가 나왔을 때, 무척 편리하고 경제적이다 여겨 각 가정의 그릇이 죄다 바뀌었더랬습니다. 그 후 플라스틱 재질이 나오자, 우리 밥상에서 사기나 그릇들이 사라졌습니다. 세상 참 편해졌다 하시는 어르신도 계셨지요. 아무리 부딪치고 던져도 소리만 요란할 뿐, 깨지지 않는 그릇이 참 신통했지요.
이젠 이 빠진 그릇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 바쁘고 빠른 세상에 그런 것들을 조심스럽게 다루는 것이 비합리적이라 느껴졌던 것도 사실입니다. 요리 시간을 줄여주는 패스트푸드와 반가공 식품, 영원히 변치 않는 플라스틱 식기들, 한 번 쓰고 버리면 그만인 온갖 일회용품들이 문명의 선물인 줄 알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거리에 촛불 행진이 이어지고, 순박한 눈망울이 떠오르는 추억 속의 소가 ‘미친소’가 되어 있는 요즘, 문명의 선물인 줄 알았던 그 모든 이기적인 물품과 그것을 선호했던 우리의 마음이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린 친구들은 정육점에 매달린 쇠고기가 어떤 과정을 통해 생산되는 장난감 같은 물건쯤으로 생각한다는 제레미 리프킨의 말이 떠오릅니다(관련 기사 74쪽). 요즘 아이들은 쌀을 대할 때도, 애완견을 대할 때도 그런 듯합니다. 어른들은 더합니다.
인간의 욕망과 이윤을 위해 송아지를 거세하고, 좀 더 높은 생산성과 이윤을 위해 물을 먹이고 항생제를 놓는가 하면 초식동물에게 동물성 사료를 먹이고, 식물의 유전자를 변형하고…. 나열하자면 끝이 없는 잔혹사가 이어집니다. 가짐을 갖고 그 어떤 생명체도 이내 ‘자원’으로 전락시키는 인간의 오만함을 두고 ‘인간이 감히 신의 자리에 올라서서 피조물에게 끼친 해악’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예의가 사람이 살아가는 도리라면 이는 사람에 대해서만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생명체를 아끼고 존중할 줄 모르는 사람은 사람도 공경할 줄 모릅니다. 하물며 하늘을 두려워하고 섬길 수 있을까요. 국민을 섬길 줄 모르는 무례한 정부가 어떻게 세상의 순리를 따를까요.
비효율적이라 여겼던 사기그릇 덕분에 공손하고 조심스런 손길로 사람을 대접할 수 있었고, 시간이 걸리는 음식을 만들며 사랑과 정성을 기울일 수 있었으며, 땀과 생명의 소중함을 알아야, 필요와 가짐을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생명을 살아 있게 하는 힘은 어질고 너그러운 마음이며, 이 인(仁)을 실천하는 것이 예(禮)라 했습니다. 그래서 예는 따스한 사랑이고 배려이며,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이며, 나를 버리고 우리를 위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진실한 마음이 하늘에 닿아야 비로소 인간이 인간다움을 회복하겠지요. 마음의 촛불을 켜고 혼란의 시대, 삶의 방향을 찾아줄 최소한의 예의를 찾아봅니다. |
첫댓글 최초한의예의 ~!~! 월간 마음수련 짱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