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설교> 피조 세계와 함께 누리는 (영광의) 자유 / 로마서 8:18-25
어제는 106주년 3.1절이었습니다. 그런데 3.1절과 같은 국경일이 되면 교회는 무엇을 기려야 할까요? 언제부턴가 저에게 이 물음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 물음이 왜 생기게 됐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반작용의 영향이 컸던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저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녔습니다. 이른바 ‘모태신앙’이지요. 그러다보니 한국 개신교의 문화를 많이 접했는데요. 그 중에는 “하나님이 우리 대한민국을 사랑하신다. 많고 많은 나라 중에서 우리를 특별히 아끼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자라온 모교회에서는 아니지만, 연합예배나 부흥회 같은 집회에서 많이 듣고 겪었습니다.
청소년 시기에 이런 설교들을 들을 때면, 왜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라는 이름으로 제한하고 가두는지 불만이었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우리만의 하나님이며, 우리나라만의 하나님인 양 말하는 것 같아, 이럴 때면 집으로 돌아와서는 부모님께 이렇게 따졌습니다.
“성경을 한 절로 요약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라고 말하는데, 왜 우리 신앙인이나 우리 대한민국만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말하냐? 목사님들이 저러면 안 되지 않냐?”
게다가 그들이 그 사랑의 근거로 소위 교회의 부흥, 특정인의 성공, 우리나라의 경제적 성장 따위를 이야기하는 날엔 부모님께 더 항변했습니다.
“그럼 교인이 늘어나지 않는 교회, 성공하지 못한 사람, 가난한 나라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지 않는 것이냐?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세상이란 그들만을 의미하는 것이냐? 그건 아니지 않냐?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을 왜곡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니냐?”
이런 반작용의 영향으로, 3.1절과 같은 국경일에 교회가 무엇을 기려야 하는지 질문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첫 번째 답은 물음 과정에서부터 나와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은 하나님을 ‘우리나라’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으로 제한하고 왜곡하지 않기입니다. 아무래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국민이고 그 나라에 살고 있기에 팔이 안으로 굽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을 ‘우리’라는 테두리 안에 가두려고 하는 것은 삼가고 경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엄하게 말하면, 이러한 행위는 내가 하나님을 내 입맛대로 지어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만들어내는 우상숭배 말이죠. 이보다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조롱하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입장과 시야로부터 하나님을 제한하지 않으면서 왜곡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일단 오늘 본문은 피조 세계를 보라고 우리에게 말을 건넵니다.(8:19-22)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자유에 대해 설명합니다. 그 자유는 성령을 따라 사는 것이고,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라면 상속자이고, 상속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영광만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도 함께 받는다고요.
고난도 함께 받는다니, 예나 지금이나 달갑지 않은 소리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곧이어 지금 겪는 고난은 장차 계시될 영광과 비견될 수 없다면서 영광을 소망하도록 독려합니다. 현재의 고난 때문에 그와는 비할 수 없는 나타날 영광을 포기하지 않도록 설명하며 동기를 부여합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신앙의 정수가 드러납니다. 그것은, 그 영광이 그리스도인만 누릴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피조물도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로 자유롭게 될 것을 소망한다며 피조 세계 전체가 함께 산고를 겪고 있다고 말합니다. 피조 세계 전체가 함께 산고를 겪고 있다는 말에는, 피조 세계 전체가 아이를 뱄고 그 결과 아이를 얻을 것을 암시합니다. 출산의 고통 뒤에는 아이가 태어나듯이요. 즉 우리만이 아니라 피조 세계 전체 역시 그 영광을 누릴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이것이 신앙의 정수라고 생각합니다.
좁고 한정적인 내 시야지만, 그래도 눈을 들어 피조 세계 전체를 바라보는 것 말입니다. 적어도 그렇게 하려고 눈을 부릅뜨고 애쓰는 몸부림이, 하나님을 그나마 나와 우리 안에 제한하고 가두는 일을 방지하게 만듭니다. 설사 그 일을 했더라도 얼른 깨닫고 뉘우치며 돌아서게 만들고, 점점 그 빈도를 줄여나가게 만듭니다.
피조 세계 전체를 내다보는 것은 우리의 육안으로는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며, 우리의 눈으로는 한눈에 다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양심과 마음의 눈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피조 세계 전체를 바라보는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과 비슷한 이치입니다. 하나님 역시 우리의 신체적인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으나 신앙과 양심과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바울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응시했고, 그 결과 모든 피조 세계 역시 그 영광을 누릴 것을 이해하며 그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렇다면, 피조 세계도 소망하는 그 영광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킬까요?
21절에서 바울은, 피조 세계도 썩어짐의 노예살이에서 자유롭게 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로 이르게 될 것을 소망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8장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성령을 따르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8:1-17) 그런데 성령을 가리켜 생명의 성령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이라고요. 이 생명의 성령이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성령을 따를 때 해방되고 자유롭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 성령은 우리로 생명의 길을 걷게 한다는 것입니다.(8:2) 죄와 죽음, 사멸과 파멸, 공멸과 멸망의 길이 아닌 생명의 길을요. 아울러 이 성령는 평화의 길을 궁리합니다.(8:6), 그 길을 모색하고 도모하고 그 길을 걷게 합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란 죄와 죽음, 폭력과 거짓 평화에서 해방되어 생명과 평화의 길을 걷게 되는 자유를 의미합니다. 그 억눌림에서 자유롭게 되어 생명과 평화를 선택하며 살아갈 수 있는 자유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의 자유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자유를 영광의 자유라고 칭송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상상만으로도 참으로 아름답고 영광스럽지 않습니까?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따듯해지고 훈훈해지지 않습니까? 이런 자유를 일평생 누리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지 않으십니까? 제발 억압과 폭력, 힘겨루기와 거짓 평화, 파멸과 공멸의 멸망의 길에서 해방되어 진정한 생명과 평화가 이뤄졌으면 생각이 드시지요? 우리가 진정 그 길을 걸었으면 좋겠다 싶으시지요?
가히 영광의 자유라고 칭송할 만합니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이렇게 되기를 바라는 게 비단 신앙인뿐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사람들만, 인류만 바란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창조된 모든 것들이, 온 피조물들이 이 자유를 소망한다고, 피조 세계 전체가 이렇게 되기를 간절히 기대하고 있다고 말합니다.하나님의 사랑과 구원, 그 영광을 사람들에게만 향하는 것으로 국한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과 그 영광은 피조 세계 전체를 향한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자유는 영광스럽습니다. 피조 세계 전체가 간절히 기대하고 소망할 정도로요. 그리고 함께 누릴 수 있을 정도로요.
그렇다면, 이 땅에서 이 자유를 누리는 이들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영광의 자유이니, 이 땅에서의 온갖 영광을 누리는 모습일까요?
오늘 주일예배를 우리는 <3.1절 기념예배>로 드리고 있습니다. 3.1운동에 참여한 수많은 사람이 독립을 외쳤지요. 자유와 해방을 목놓아 부르짖은 것입니다.
그런데 겉으로 볼 때 이들이 누린 것은 무엇입니까? 고문과 옥고를 겪었으며 그로 인해 병들어 죽거나 처형당했습니다. 설사 풀려나더라도 삼엄한 감시를 받으며 살아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종일관 독립운동을 포기하고 전향하라며 위협하고 협박하고 유혹하며 회유했습니다. 한마디로 영광보다는 고난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반문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그들은 자유를 누린 게 아니라 자유를 요구한 것이 아니냐, 자유를 누리지 못했기에 자유를 외친 것 아니냐, 그러니 같이 놓고 비교하는 것은 맞지 않다.’라고요.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는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령을 따르는 자유입니다. 그리고 그 성령은 생명과 평화의 성령입니다. 억압과 폭력, 착취와 수탈, 군림과 강탈, 파멸과 멸망, 사망과 죽음 위에서 살아갈 것을 궁리하고 계획하고 도모하고 고안하는 성령이 아닌 상호존중과 비폭력, 나눔과 섬김, 상생과 공존, 자비와 자기 비움을 궁리하고 도모하고 창안하는 성령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령을 따르는 자유란, 전자의 것들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여 후자를 따르게 하는 자유입니다.
그리고 이 자유야말로 3.1운동 당시 수많은 사람이 외친 ‘독립’의 진정한 의미이자 내용입니다. “서로를 파멸하고 멸망시키는 힘겨루기와 지배를 이제는 거두자, 이제는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면서 힘으로 제압한다거나 짓누르지 말고 함께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앞서 말한 평화와 생명의 성령이 인도하는 자유를 누리는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비록 겉으로 볼 때 그들은 고초와 고난을 겪으며 초라하고 볼품없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들 안에는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거룩하고 숭고한 영광이 자리잡고 있었음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영광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겠습니까? 그렇기에 우리는 100여년이 넘도록 3.1운동을 기념하며 기리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근간인 헌법의 전문에 대한민국이 계승하고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은 3.1운동으로 건립됐음을 새겨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영광의 자유를 이 땅에서 누리는 이들의 겉모습이 꼭 영광스러운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참혹하여 보기 힘든 모습쪽에 가까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겉으로 드러난 외양이 아닌, 안에 무엇이 자리잡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만약 제 아무리 이 땅에서의 성공과 영광을 누리고 있더라도 그 안에 기만과 거짓, 혐오와 선동, 증오와 배척, 억압과 폭력, 힘겨루기와 탐욕이 자리하고 있다면 스스로는 영광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여기더라도 여전히 죄와 사망의 종노릇하는 중입니다. 반대로 이 땅에서 고독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더라도 그 삶을 신의와 성실, 자비와 사랑, 관용과 용서, 수용과 화해, 겸손과 자족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그의 안에 계신 거룩하신 하나님과 영광의 그리스도로 인해 영광의 자유를 만끽하는 중입니다.
그리고 우리 중에 이 영광의 자유를 완전히 소유하고 차지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저 역시 설교를 준비하면서 아직도 많은 부분과 많은 순간에서 넘어가지 못했음을, 그리고 그것을 시급히 다루지 않으며 개선하지 않고 있음을 돌아봅니다.
그래서 바울이 25절에서 “보지 못하는 것을 소망하면, 인내로 기다려야 한다”고 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평생토록 부단히 한걸음씩 한걸음씩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말로는 쉬운데, 실천하기가 왜 이리 어려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고통스럽고 고난이라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평화목교회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유롭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그분을 통해 그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우리’는 우리 사람과 인류뿐만 아니라 피조 세계 전체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우리 가족, 우리 교회, 우리 민족, 우리나라를 뛰어넘어 피조 세계 전체와 함께 누리는 자유입니다. 또한 우리가 누릴 영광은 좁은 ‘우리’를 뛰어넘어 넓은 ‘우리’가 누릴 영광 곧 우리 피조 세계가 누릴 영광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계 모든 것을 지으시고 돌보시는 만유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넓은 의미에서의 우리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3.1운동의 정신을 기리며,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시고 생명과 평화로 인도하시는 자유를, 우리가 함께 누리는 자유를, 그리고 우리가 함께 누릴 영광을 소망하며 묵묵히 그 길을 걸어가는 우리가 되길 기원합니다. 진정 3.1운동의 정신을 따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과 평화와 의의 성령을 따르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2025년 3월 2일
김소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