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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9.12. 서른여섯번째주. 설교문
묵상 우리는 하나님 앞에 모두 장님입니다.
신앙고백
찬송 55 하나님의 크신 사랑
기도 염성섭 장로,이원준 장로,하경숙 권사,조용림 권사
성경말씀 요한복음 4:1~19
찬양 샤론 중창단
설교 물 좀 주소!
찬송 206 오랫동안 모든 죄 가운데 빠져
광고 코로나 19 예방을 위해 마스크 착용이 감염1,000배로 낮춰
서울에 교회 설립을 위해 기도(모범, 모델이 되는 교회)
종합건강검진은 10월 12일로 연기됨, 이도재 집사님 생신(9/15,화)
찬송 487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축도 아프니까 그만 하세요. 주님도 아프고, 나도 아프잖아요.
오늘 말씀의 배경이 사마리아 우물가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70km쯤 달려가면 작은 아랍 마을에 도착합니다.
바로 이곳이 사마리아입니다.
오므리왕의 아들 아합왕은 사마리아에 상아 궁전을 건축했습니다.
구약시대 상아는 사치와 영화를 상징했습니다.
그래서 왕의 의자를 상아로 장식했습니다.
이것뿐이겠습니까?
고고학자들이 사마리아 왕궁에서
상아로 장식된 정교한 장식품들을 무더기로 발굴했습니다.
그랬던 사마리아가
기원전722년 앗수르의 공격에 초토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앗수르의 모든 곳으로부터 사람을 모아서 사마리아에 정착시켰습니다.
그래서 이족간의 통혼으로 사마리아는 혼혈족이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이주 여성가족과 같은 경우일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사람 취급도 않했습니다.
그러니 과거 상아 궁전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40:6~8)
이렇듯 꽃다운 우리 청춘도 벌써 다 지나가 버렸습니다.
1절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2절,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
3절,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4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5절,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절,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7절,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8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9절,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10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1절,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12절,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1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절,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15절,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16절,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17절,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18절,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19절,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 우물가에서 첫 만남입니다.
옛날 우리도 우물가에 지나가던 나그네가
목 좀 축이고 갑시다.
그러면 우물가에 있던 아낙네가 바가지에 물을 떠서
버들나뭇잎을 동동 띄워 주었습니다.
이런 만남을 요즘 말로는 썸something탄다고 합니다.
6절입니다.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7절,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렇게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물 좀 주소!
이렇게 우리 일상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전도하는 것입니다.
16절입니다.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17절,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18절,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19절,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이 말씀으로 미루어 보건대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의 고독함과 목마름을 이미 다 알고 있었습니다.
참 무섭고 두렵습니다.
누군가가 우리 속마음을 다 들여다보고 있다면 두렵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예수께서 우리의 생각과 사정을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도 목이 바삭바삭 탓 던 것입니다.
한 남자도 아니고 다섯 남자와 살았고
지금 또 다른 남자와 살고 있다는 것까지 다 알고 계시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도 대단하시지만 사마리아 연인도 참 대단합니다.
남정네들을 한 명도 아니고
여섯 명과 살았으니 얼마나 고달팠겠습니까?
아마 양귀비처럼 아름다웠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남정네들이 이 사마리아 여인을 그냥 놔두지 않았습니다.
백제 의자왕이 3천 궁녀를 거느렸지만 끝은 죽음이었습니다.
박경리의 유고시집에 실린 詩가 생각납니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 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최고의 지성이었던 박경리 작가 곁에도
짐승들이 으르릉거렸습니다.
남정네들은 문지방만 넘을 힘만 있어도
껄떡거린다는 철없는 남정네들은 둘째치고라도
사마리아 여인도 문제지 않습니까?
이렇듯 육적인 갈증은 끝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은 이런 죄의식 속에서 허덕허덕거렸습니다.
고독,
공허,
절망,
낙심,
상실감과 우울함 등
육적인 갈증보다도 훨씬 더 깊은 곳에서의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영적인 목마름에 허덕거렸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여인은 삶에 지쳤습니다.
그래서 하루를 살더라도 마음의 안식이 절실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 물었습니다.
9절입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10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1절,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생화와 조화의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지금 제 책상 위에 짙은 노랑 국화가 한 아름 핀 화분이 놓여 있습니다.
이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 소쩍새가 얼마나 울었겠습니까?
그래서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살아 있음에 감사해야만 합니다.
저는 요즘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살아 있음에
하나님 은혜에
너무나 감사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제 친구들은 다 정년해서 아파트 경비를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목사인 저는 지금도 일이 많아서 죽겠습니다.
24시간 365일을 하루도 쉬지 못하고 10여년을 살았습니다.
요즘 젊은이들도 일자리가 없어서 아우성이잖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넘치는 축복을 감당하기에 지쳤습니다.
그래서 밤을 지새우며 축복에 감개무량합니다.
그래서 넘치는 축복에 대해서 생각해봤습니다.
그랬더니 축복은 벅찬 감격이었습니다.
너무나 고마워서 눈물이 철철 흘러나옵니다.
창밖 가을 햇살만 바라보아도 고마워서 눈물이 납니다.
나뭇잎이 바람에 흐느끼는 것처럼 눈물이 납니다.
하나님 은혜에 이렇게 매일 매일 눈물을 흘립니다.
그래서 축복은
감사가 흘러넘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수입니다.
이것이 영혼의 생수입니다.
이것이 목마름이 없는 영혼의 생수입니다.
생수는 살아 있는 물입니다.
살아 있는 물은 항상 흘러야 합니다.
생수의 반대말은 죽은 물입니다.
죽은 물은 종이로 만든 조화와 같습니다.
전혀 향기도 생기도 없습니다.
죽은 물은 괴어 있는 물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의 생각이 고집이 되어 공이가 박혀 버리면
고지식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만나면 답답합니다.
제 생각만 옳은 것입니다.
그래서 제 주장만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얼마나 이기적인지 모릅니다.
목사인 제가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조금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은혜로
제 극성스럽고 이기적인 성격들을 개조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라도 해 먹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상스러운 표현을 해서.
그래서 영원한 생수를 마시기 위해서는
지금 괴어 흐르지 않고 썩어버린 물처럼
썩어빠진 제 고집,
멈춰버린 고장난 제 생각,
제 못 된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언제 눈물을 흘려봤습니까?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은
오랫동안 눈물을 흘리지 않아서 눈물샘이 막혀버린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병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니 지금 울어야 합니다.
펑펑 눈물을 흘리며 통곡해야 합니다.
목사인 저도
텅 빈 교회 십자가 밑에서 펑펑 울었습니다.
하나님, 지 못 된 습관들을 고쳐 주시옵소서!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렇게 하나님 은혜가 넘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감사감사 무한 감사드립니다.
이것이 저의 기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도 다 아시다시피
우리 유태규 집사님은 10년전부터 요양보호사였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처럼
목사인 저를 만났습니다.
논산에서 저를 찾아올때에 집도 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요양원 뒤뜰에 컨테이너를 사서 방을 들였습니다.
그런데 매일 막걸리를 밥 먹듯 했습니다.
결국, 간경화 말기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목사인 저도
우리 유태규 집사가 많이 살아야 3개월일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태규 집사를 불렀습니다.
집사님, 만약에 오늘이라도 사망한다면 하루장으로 하겠습니다.
그랬더니 눈물 콧물 흘리며 목사님 살려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목사인 제가 어떻게 살려내겠습니까?
10년전부터 술 좀 그만 마시라고 유행가 노래를 부르듯 타일렀지만
죽을 때 죽더라도 막걸리라도 마시고 죽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이제 환갑이 갓 지난 나이에 죽을 지경에 이르렀으니
목사님 살려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청, 건강보험공단 뛰어다니며 기초수급, 요양 등급을 해서
우리 요양원으로 모셨습니다.
요양보호사 선생이 하루아침에 요양보호를 받는 환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루가 다르게 건강이 좋아지는 겁니다.
그러니 이제 언제 물에 빠져 허우적 거렸느냐고
다시 담배를 피우고
저도 모르게 다시 막걸리 한잔 마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아~ 옛날이여~
그리운 옛날로 다시 돌아가는 겁니다.
그것도 부족했던지 제가 존경하는
우리 하경숙 권사님, 이원준 장로님, 권선희 권사님을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알콜성 치매 환자의 극성이 심해졌습니다.
미워죽겠습니다.
그렇지만 같이 싸우겠습니까?
지는 게 우리 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죄의 관성이 이토록 깊습니다.
그래도 목사인 저는
항상 우리 유태규 집사님 편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많이 사랑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경숙 권사님, 우리 이원준 장로님께서도
불쌍한 우리 유태규 집사님을 위해서 항상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사랑입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먼저 용서하고
먼저 양보하고
서로 안아 주는 것입니다.
1절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2절,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
3절,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4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떠날 때를 알고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은 아름답습니다.
예수께서 세례 요한을 상대로 싸우기라도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이 그리스도겠습니까?
그래서 세례 요한을 위해서 미련도 없이 유대를 훌쩍 떠났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전도사님이 계십니다.
이분은 평생을 홀로 살았습니다.
하루에 기도만 4시간씩 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제가 기도하면서 하는 방언이 그분을 닮았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뒷집에서 이 분이 살고 있는 집이 자기 땅이라 주장했습니다.
그 집에서 태어나 70년이 넘도록 살고 있는데
밑도 끝도 없이 뒷집 사람이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 후에 기도만 하시며 사시는 전도사님이 짐을 싸서
그 집을 비워 주고 떠났습니다.
니집이니 내집이니 전혀 사댓질을 하며 싸울 필요도 없이
지금 예수님처럼 요한에게 집을 비워주고 떠나버렸습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이것이 우리 믿는 자의 아름다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려면
반드시 사마리아를 거쳐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우물가를 지나다가
고독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난 것입니다.
이 만남이
우연이겠습니까?
필연이겠습니까?
그리고 만남의 소제가 물이었습니다.
내가 피곤하고 목이 마르다.
사마리아 여인이여, 물 좀 주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 목이 타들어 갑니까?
지금 우리 가슴이 타들어 갑니까?
지금 우리의 영혼이 타들어 갑니까?
사마리아 여인처럼
지금 우물가로 달려가시면 됩니다.
그곳에서 주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감사합니다.